김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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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7월 27일 ~ 2013년 6월 13일
金明燮
대한민국의 약사, 기업인, 정치인이다.
1938년, 경성부 영등포정(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서 태어났다. 서울공업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영등포에서 약국을 개업하여 약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구주제약을 인수하여 경영하기도 하였다.
1980년,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찬혁 후보와 민주한국당 이원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대한약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낙선자인 평화민주당 이용희 후보가 김명섭의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제기한 선거무효소송이 승소하여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장석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훗날, 이회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특별히 김명섭을 언급하기도 했다. 안 좋은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김명섭이 이회창을 찾아와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경영 문제로 여당의 힘이 필요하다며 어쩔 수 없이 탈당해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오열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당시 탈당하여 여권으로 옮긴 의원들이 충성경쟁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와중에도 김명섭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며 추켜세워주었다.[1]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1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후보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2003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13년 6월 13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부인 안정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아들만 셋을 두었다.
1938년 7월 27일 ~ 2013년 6월 13일
1. 개요
金明燮
대한민국의 약사, 기업인, 정치인이다.
2. 생애
1938년, 경성부 영등포정(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서 태어났다. 서울공업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영등포에서 약국을 개업하여 약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구주제약을 인수하여 경영하기도 하였다.
1980년,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찬혁 후보와 민주한국당 이원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대한약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낙선자인 평화민주당 이용희 후보가 김명섭의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제기한 선거무효소송이 승소하여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장석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훗날, 이회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특별히 김명섭을 언급하기도 했다. 안 좋은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김명섭이 이회창을 찾아와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경영 문제로 여당의 힘이 필요하다며 어쩔 수 없이 탈당해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오열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당시 탈당하여 여권으로 옮긴 의원들이 충성경쟁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와중에도 김명섭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며 추켜세워주었다.[1]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1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후보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2003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13년 6월 13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3. 가족관계
부인 안정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아들만 셋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