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넬스 해전
1. 개요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입안되는 계기.
2. 배경
세계를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겠다는 독일 제국의 야망은 비단 전쟁 발발 이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독일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진시켜 중동에 대한 경제적 침투인 3B 정책[1] 을 달성하기 위한 교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무려 12년 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스만 제국은 옛날부터 적국이었던 러시아가 영국과 가까워지자 독일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육군을 훈련시킬 독일군을 초청하게 된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 정부의 요청에 독일의 잔더스 (Otto Liman von Sanders) 장군이 1913년 12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오스만 제국 육군 감찰감에 취임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해군력의 강화를 위해 당대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이자 가장 조선술이 뛰어났던 영국 조선소에 2척의 함정을 발주한 상태였다. 그런데 전운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낀 영국은 필요한 모든 전력을 동원하기 위해 자국의 조선소에서 건조중인 외국 함정 중 자국 해군에서 운용이 가능한 모든 함정에 대한 징발을 계획했다. 그 중에는 오스만 제국 해군이 수주한 전함 2척이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 중 한 척은 이미 완성되어 인도만을 앞둔 상태였고 오스만 제국 해군의 인수요원들이 이미 영국에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전함을 인도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은 오스만 제국은 그 무례함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다.
독일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지중해에 파견해 놓았던 독일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 괴벤(SMS Goeben) 과 경순양함 브레슬라우(SMS Breslau) 함을 구매할 것을 오스만 제국에 제의하였다. 빌헬름 수숑(Wilhelm Souchon) 해군소장이 지휘하던 이 두 척의 독일 함정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지중해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오스만 제국에 파는 것이 독일에게는 이득인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영국이 징발한 함선 대신 지중해에 묶여 있던 독일의 순양전함과 경순양함을 구매했다. 오스만 제국이 구매 의사를 밝히자 수숑 제독은 영국과 프랑스의 감시망을 회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입항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함정을 인수하였음에도 이들 함정은 독일 해군 장병들이 그대로 승조하고 수숑 제독이 변함없이 지휘권을 행사했다. 이는 독일의 러시아에 대한 기습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실제로 10월 하순 수숑 제독은 자신의 두 함정과 오스만 제국 함정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흑해의 러시아 항구인 오데사와 노보로시스크로 접근하여 세바스토폴 외해에 기뢰를 부설하고 러시아 해군 포함을 격침시켰다. 이 도발적인 행위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된다.
1914년 말 서부전선의 대치상태는 참호전으로 전선이 교착되어 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동부전선에서는 거대한 러시아 병력에 대처하는 데 독일의 병력은 총 병력의 20% 미만만이 할당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의 열악한 무장 상태에서 기안한 것으로, 러시아군은 포가 부족할 뿐 아니라 많은 육군 보병들이 소총 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에 미국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부족한 무기를 공급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외부 세계와 교역할 수 있는 해상 통로가 2개 있는데, 하나는 독일이 통제하는 발트해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오스만 제국이 통제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하는 길이었던 까닭이다.
이 상황에서 영국이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타결하기 위해 제안한 방법에는 러시아를 무장시키고 그 거대한 인력 자원을 활용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봉쇄된 흑해의 러시아 항구에 선박이 출입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필요로 하는 러시아의 잉여분 밀을 반출하고자 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전쟁위원회에서는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들은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의 아시아 쪽을 공격하면 중립국 이탈리아를 연합국 측에 가담시킬 수 있으며, 어느 한 쪽 편을 드는 것을 망설이던 발칸 반도 국가들이 용기를 얻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쪽을 공격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영국에게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를 요청하고,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도 오스만 제국 침공을 주장하자 영국 전쟁위원회는 1915년 1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을 목표로 갈리폴리 반도를 포격하고 탈취하는 해군의 원정을 2월에 실시할 것.」이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3. 양측 작전계획 및 주요 참가 세력
3.1. 주요 참가 세력
'''연합국 주요 세력'''
'''오스만 제국 주요 세력'''
3.2. 연합국 작전계획
처칠 장관은 다르다넬스 봉쇄함대 사령관인 영국 해군의 카든(Sackvile H. Carden) 제독에게 작전계획의 보고를 지시하였으며, 1915년 1월 11을 보고한 카든 제독의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은 4단계 공격계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첫째,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의 모든 적 방어진지 파괴.
- 둘째, 네로우스까지의 소해와 소해정을 보호하기 위한 적 진지 파괴.
- 셋째, 네로우스의 적 방어진지 제압.
- 넷째, 네로우스에 대한 소해 이후 네로우스를 통과해 마르마라 해 진입.
3.3. 오스만 제국의 방어 계획
오스만 제국 육군은 자신들의 다르다넬스 해협 방어를 에게해에 가까운 12마일 지점에 집중했다. 다르다넬스 입구 측 육지 끝단에 있는 4개의 요새에 27문의 포를 배치하였고, 네로우스로 향하는 상류쪽으로 12마일 거리에 있는 11개의 요새에 88문의 포를 배치했다. 또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두 지점 사이에는 해안을 따라 소구경 해안포들이 빼곡하게 배치되었다. 또한 독일의 원조와 도움으로 오스만 제국은 네로우스 근해와 케페즈 포인트로부터 하류로 3마일 지점까지 새로운 기뢰원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기뢰원을 보호하기 위해 기뢰원 부근에 포대를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야간 소해에 대비해 탐조등을 설치하였다. 추가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와 케페즈 포인트 사이의 고지대에 바닥에 깔린 레일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 이동용 곡사포 또한 배치하였다. 이렇게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했음에도 취약점은 존재했다. 다르다넬스 해협 방어의 취약점은 요새에 있는 대구경포의 포탄이 부족했다는 것으로, 이는 오스만 제국과 독일 사이에 러시아와 가까운 중립국가들이 있기 때문에 비밀리에 수송하는 것 외에는 포탄을 독일로부터 운반해 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만과 독일의 연결은후에 불가리아가 동맹국으로 참전하고 루마니아는 연합군 쪽으로 참전했다가 동맹군의 공격으로 붕괴된 이후에야 가능해진다.
4. 작전 경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공격은 1915년 2월 19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카든 제독의 1단계 작전계획은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의 모든 적 방어진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갈리폴리 반도 끝단에 있는 케이프 헬레스와 세드 엘 바 바을에 인접해 있는 2개의 요새와 해협 건너편 아시아 쪽 해안의 쿤 칼레 마을 부근에 있는 2개의 요새가 주요 표적이었다.
순양전함 인플렉시블(HMS Inflexible) 함을 기함으로 삼은 카든 제독은 5척의 구식 전함을 이끌고 육상포 최대 사정권 밖에서 요새에 대한 사격을 개시하였다. 요새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 육군은 육상포 사정권에 함정이 접근하면 응사하며 함정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카든 제독은 기상이 나빠 시정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거나, 함포 사격의 효율이 떨어지는 날은 피항하였다가 기상이 호전되면 함정들이 일부 손상되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가까이 접근하여 주간 내내 포격을 퍼부어 요새를 폐허로 만들었다.
또한 기상이 허용하는 날 마다 각 함별로 해병대와 해군 육전대를 편성, 양쪽 해안의 끝단 오스만 제국군의 감시가 어려운 위치에 상륙하여 함대가 파괴하지 못한 오스만 제국군의 해안포대를 공격하였다. 3월 4일, 4개의 요새에 대한 파괴작전이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카든 제독은 제1단계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 소식은 영국 전쟁위원회를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소식을 접한 그리스 정부는 육군 3개 사단을 갈리폴리에 상륙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리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 제안은 백지화 되었다.
이어서 제2단계 작전이 진행되었다. 다르다넬스 해협에 부설되어 있는 기뢰를 소해하고 양편 해안에 배치되어 있는 포대를 진압하는 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기상이 좋은 날마다 전함들이 해협에 진입하여 해안에 있는 포대에 사격을 가하였으나 그 성과는 미미하였다. 이동용 곡사포는 잡목림에 숨어있거나 주기적으로 위치를 변동시키기 때문에 함포로 조준사격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무전기를 장비한 수상기가 오스만 제국 육군 포대를 관측해 함포 사격을 가해야 할 위치를 알려주었지만 기상 관계로 수상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은 극히 제한되었다.
이렇게 과감한 전술을 펼치는 연합군의 공격을 오스만 제국 육군이 방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케페즈 포인트에 있는 기뢰원으로, 이는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 내측 7마일에서 시작되어 해협을 가로지르는 기뢰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연합군의 전체 공격 작전 중 가장 비효율적인 작전이 소해 작전이었다. 이 소해 작전은 해군의 정규 소해정이 아닌 징발된 어부들이 모는 비무장 목재 트롤 어선에 임시로 설치한 소해구를 이용해 수행되었다. 해협 내부의 조류가 4kts 정도였기 때문에 항해 속도가 느렸으며, 수시로 소해구가 절단되어 연속적인 작전 수행이 어려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민간인 선원들은 전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주위에 포탄이 떨어져 물기둥이 솟아오르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도망가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고심하던 카든 제독은 2월 26일 이후로는 야간에만 소해 작전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되자 방어측에서는 탐조등을 동원하여 사격을 가해 왔으며, 겁먹은 트롤어선들은 당연하게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잇달은 소해 작전에 성과를 거두지 못한 카든 제독은 결국 소해정 지휘관을 함대에서 차출한 해군 장교로, 선원들을 해군 부사관 승조원들로 교체하였다. 그 효과는 극적이었는데, 현역 군인들이 모는 어선들은 케페즈 포인트에 있는 기뢰원들까지 무난하게 소해하며 들어가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치열한 포화 속에 어선들은 몇 차례 피탄되고 상당한 소해구가 손실되었으나 인명피해는 9명에 불과했다. 전함들은 소해되지 않는 기뢰원에는 접근하지 않고 네로우스 요새에 대한 원거리 함포 사격을 실시했으나 유효한 효과를 얻기에는 사정거리가 너무 멀었다.
카든 제독의 결단에 한 방 얻어맞은 오스만 육군은 연합군에 타격을 줄 다른 방법을 고안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오스만 제국 측 기뢰 전문가들은 연합국 전함들이 해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해협 내에서 아시아 쪽으로 치우쳐서 항해하는 것을 관측하고는 3월 8일 밤중에 조그만 선박으로 아시아 쪽 해안과 평행하게 20발의 기뢰를 부설하였다. 이 기뢰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연합군은 그 중 3발 만을 우연히 소해하였고, 이는 이후 전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비록, 카든 제독의 작전이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는 했지만 처칠 장관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카든 제독이 더 과감한 전술을 채택해서 단숨에 목표를 달성해 대영제국의 위상을 높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손실을 최소화한 작전을 수행하고자 하는 카든 제독의 답답한 작전수행 태도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표시했고 카든 제독은 이를 자신의 지휘 능력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 사령관직을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부사령관 데 로벡 제독이 임명되었다. 데 로벡 제독은 예하의 모든 전함을 전부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4척씩 전방으로 내보내 네로우스 요새를 진압하고 구식전함들은 측면 해안의 이동용 곡사포와 기뢰보호용 포와 교전하며 동시에 소해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3월 18일 데 로벡 제독은 강력한 전함 4척을 횡열진으로 전개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데 로벡 제독의 함대는 전방의 네로우스 요새에 있는 포대의 사정권에서는 벗어난 위치이나 측면의 해안선에 있는 포대로부터는 간간히 포탄을 맞았다. 그러나 대구경포 포탄의 부제로 위력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 수행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4척의 영국 함정이 한 시간 반 정도 요새에 포격을 실시한 후 4척의 프랑스 전함으로 구성된 제2열을 전방으로 이동시켜 포격을 실시했을 때, 오스만 제국 요새의 응사는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데 로벡 제독은 계획대로 프랑스 함정을 뒤로 후퇴시키고 영국 전함을 전방으로 진출시켰다.
제독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하고 연합군 함대의 제2열인 프랑스 함정들에게 오른편으로 변침하고 종열진을 형성해 아시아 쪽 해안을 따라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 침로는 오스만 제국이 3월 8일 부설한 기뢰열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프랑스 해군의 전함 부베(Bouvet) 함이 기뢰에 접촉해 600여 명의 승조원과 함께 침몰하였다. 한편 이 이상 소해 작전을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데 로벡 제독은 제1열의 영국 전함들도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철수하던 영국 함정 중 순양전함 인플렉시블(HMS Inflexible) 함이 얼마 전 부베 함이 침몰한 위치 바로 부근에서 기뢰에 접촉해 함수가 침수되었지만, 간신히 해협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구형전함 이레지스터블(HMS Irresistible) 함도 기뢰에 접촉되었으며, 통제를 벗어나 아시아 쪽 해안으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또한 손상된 이레지스터블을 예인하도록 지시받은 전함 오션(HMS Ocean) 함도 기뢰에 접촉하고 말았으며, 두 함정은 그날 밤 침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부설한 기뢰에 의해 연합군의 전함 3척이 침몰하고 1척은 대파되는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퇴각하여 전진기지인 에게해의 렘노스 (Lemnos) 섬으로 향했다. 데 로벡 제독은 육군의 지상작전과 연계되지 않고서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뚫을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이를 처칠에게 보고했다. 처칠은 데 로벡 제독이 제시한 의견을 받아들여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입안하기에 이른다.
5. 결과
'''연합군의 피해''' [2]
다르다넬스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기뢰에 의해 처절하게 패배한 연합군은 이후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통해 그 실패를 만회하려 한다.
한편 이 작전의 실패로 처칠 해군장관은 해군참모총장 피셔 제독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비난했다. 이후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둘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피셔 제독은 사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