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지마 류조
1. 개요
일본의 '''전범''' 출신 군인, 기업인, 정치인. 1911년 12월 9일 ~ 2007년 9월 4일. 만 95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소설/드라마 <불모지대>의 모델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도야마현 오야베시(당시에는 마츠자와무라) 출신이다.
2.1. 군인 시절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44기 차석으로 졸업하고 대본영(일제강점기 일본군 참모본부)에 들어간다. 2차대전 기간인 1939년 부터 6년간 대미 전쟁의 작전문서를 작성하면서 보내다가 1945년 7월 만주로 전출되었다. 나중에 세지마가 자화자찬으로 참모본부 시절과 만주 전출을 떠벌렸지만, 실상은 직속상관인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가 세지마의 대미작전지도가 시원찮다는 점을 깨닫고는 자신이 과장임기 종료 후 관례대로 연대장으로 부임할 때 세지마를 만주로 쫓아버린 것이라고 한다.
대만 항공전에서 일본군이 미해군을 전멸 시켰다고 좋아할 때, '맥아더의 참모'라고까지 불린 정보참모 '호리 에이조'가 미군은 멀쩡하다는 전문을 대본영으로 보냈다. 이를 중간에 묵살하고 보고 하지 않은 자가 바로 세지마 류조이다. 이에 미해군이 전멸했다고 착각한 대본영에서는 필리핀에 배치된 일본군을 '루손 결전'에서 '레이테 결전'으로 작전을 바꾸어 전진 배치시킨다. 그러나 미해군은 건재했고, 루손으로 이동한 일본군은[2] 레이테에서 보급을 받지 못해 굶어 죽는다.
그는 1958년 호리 에이조에게 '실은 이 일 때문에 시베리아 억류 중에서도 괴로웠다. 온 일본이 이겼다며 들떠 있을 때 딱 한 명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내가 당신의 전보를 묵살했다. 이것이 첩1호 작전(필리핀 방어작전)을 근본적으로 그르쳤다.'라고 자백하였다. 세지마 류조 본인은 <세지마 류조:참모의 쇼와사>라는 책에서 호리에와 1958년 나눈 대화에 대해 '동료 사이의 일'이라며 말하기를 거부하였다. 다시 말해 세지마 류조는 정보를 경시하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보는 모두 '작전 주도'라는 이름 아래 묵살한 전형적인 대본영 참모였다.
일본이 패전한 뒤에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범으로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1945년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1956년까지 11년간 고생을 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나, 알고보면 정작 그렇게 고생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포로수용소의 사무를 돌보는 직위'''에 있었다고. 세지마는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서 소련 검사 측의 증인으로 나왔는데, 후에 밝혀진 바로는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대가로 이렇게 편히 지냈다고 한다. 일종의 사법거래이자 동료들 입장에선 한마디로 '''배신자'''. 이런데도 정작 소설 및 드라마에서는 낫과 삽을 들고 등골 빠지게 뺑이 친 것으로 사실과 다르게 묘사되고 있으므로 주의할 것.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점은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제네바 협약 (제3협약) 49조에는 '장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동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항목과 79조의 '포로가 책임을 지고 있는 수용소의 행정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포로의 노동수용소에는 동일국적의 장교포로를 배치하여야 한다'는 항목이 있어, 인과관계 파악에는 알기힘든 부분이있다. 장교는 전쟁포로 신분임에도 타의에 의한 노역을 하지 않는데다가, 영관이라는 계급대에 가능하지도 않아 사법거래를 했든, 협약에 따른 배려를 받든간에 정황상 일반 노역은 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일본위키의 세지마 류조에 따르면 본인이 강제노역으로 장교신분임에도 건축노역을 하였으나 폐렴으로 반장인 선배장교(아마도 노역감독직의 포로장교)에 의해 건축미장 노역을 배정을 받았다고 본인스스로 2003년에 방송과 책(일본의 증언)을 통하여 증언 했는데, 본 나무위키 항목에 적힌 내용은 없고[3] , 사실의 은폐, 조작을 하는 정황이 보인다. 즉, 본인의 미화를 위해 꾸며낸 거짓이거나 노망일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든 소설이든 <불모지대>는 결국 '팩션'이다. 심지어 드라마에서는 '''본 작품은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었으며 소설 원작자인 야마사키 도요코는 공식적으로는 세지마 류조의 증언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참고로 일본 의료계와 경제계, 언론계 및 실제의 사건사고 등의 소설을 낸 야마사키 도요코의 모든 소설은 전부 팩션이기에 소설 내용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면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소설, 드라마에 나오는 시베리아 전쟁포로/억류자들에 관한 모임과 후원회등도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가 없다.
여담으로 이다가키 세이시로의 아들도 장교로서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공산주의 선전 활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는데, 귀국선에서 세지마에게 "네놈이 한 짓은 본토에서 반드시 심판당한다"고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본인이 동료 팔아먹은 행위는 기억도 못하는듯.
2.2. 기업인 시절
귀국해서 이토츄 상사[4] 에 거의 말단사원으로 들어가 회사를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다. 덕분에 나중엔 그 회사의 총수 자리에까지 올라선다. 그가 이토츄 상사를 성장시키는 이야기를 1970년대 소설화시킨게 야마사키 도요코의 불모지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실권을 쥐는 사장은 거치지 않고 부회장과 회장으로 지냈다. (일본기업의 구조상 회장직은 실권이 엄청 쎄진 않다.) 사장 불취임에 대해서 본인은 도중 입사라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이토츄 상사에 재임 후 가장 인맥을 잘 써먹은 사례가 F-104 스타파이터의 항공자위대 계약이 될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새로운 방공전투기로 F-104와 F-106을 놓고 고민중이었데, 안정성을 추구하는 쪽은 F-106을 지지하고 보다 빠른 스크램블 속도와 가격을 추구한 쪽은 F-104를 밀고 있었다. 이에 록히드의 일본 대리인을 담당하고 있던 이토츄 상사에서는 세지마 류조의 군 재직당시의 인맥을 활용 전방위 로비를 펼쳐 F-104 스타파이터의 납품을 성사해낸다. 그리고 이때 스타파이터를 팍팍 지지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진주만 공습을 이끌었던 구 일본군 에이스 겐다 미노루 되시겠다. 여기서는 인맥이라고 해서 언급하고 있기는 한데, 이건 록히드 사건의 일부분으로 꼽힐 정도로 흔했던 록히드 마틴의 뇌물 스캔들 가운데 하나이다. 독일과 네덜란드에 각각 1천만 달러 이상을 뿌렸는데, 일본에서는 이토츄 상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서 뇌물을 쓴 것이다. 참고로 록히드 스캔들을 다룬 영문 위키 문서에 따르면, 기존에 사용하던 스타세이버의 대체품으로 원래 예정된 기종은 F-104도 F-106도 아닌 그루먼사의 F-11F-1F 슈퍼타이거였다고 한다.
3. 성향
전후 일본에서 극우 세력들을 뒷받침하는 지주 중 하나였으며, 실제 우익 정치권과 경제계를 연결하는 흑막으로 활동했다. 본인은 기업가 행세를 하며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적었지만, 언제나 무대 뒤에서 새역모를 비롯한 각종 극우 단체나 미디어를 지원하는 식으로 활동하였다.
다른 일본 우익들도 으레 그렇듯, 일제의 침략 전쟁이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데 큰 거리낌이 없었으며, 일제의 산둥반도침략사건을 최초의 평화 유지군 활동이라고 떠들기도 했다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덤.
우익 성향을 띈다고 알려진 아지아대학 이사장도 지냈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개혁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4. 한국과의 관련성
보통 한일 양국의 언론에서는 세지마 류조를 지한파로 분류하는데, 이 지한파의 의미를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일본의 '지한파'는 보수우익 세력 중에서 아시아주의를 내걸고 한국과의 관계협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자주 거론된다.[5] 하지만 이들의 실상을 파고보면 일본제국 시절에 대륙 침략을 위해선 후방병참기지로 조선과 만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부류들로, 2차대전 시기에는 한반도와 만주국에서 수탈과 침략에 앞장섰으며 패전 이후에는 반소반공을 내걸고 공산주의를 막는 방파제로서 한반도가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한일 외교관계 복원과 일본기업의 한국 진출에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일제가 식민지 시절 양성해놨던 구 관료그룹 그리고 자신들과 뿌리가 비슷하고 이념적 색채가 유사한 한국의 군부독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6]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대륙침략을 부르짖다가 패전 이후에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한반도 진출을 부르짖는 것이다.
괴뢰국가 만주국의 만주군 장교를 했던 박정희가 존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가 졸업한 2년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4년제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떨어진 일본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졸업 후 일본육사 편입이 가능하였고, 일부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들도 만주군관학교 줄업후 일본 육사 편입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 군관 학교 출신들은 일종의 열등의식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들을 경외하는 모습도 보여줬는데 대표적으로 박정희가 국군내에서도 일본 육사 출신에 대해 제법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세지마도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한국에 자주 와서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났다고 한다. 1965년 한일협정은 이런 분위기를 이해해야 하며 특히 양국의 소위 만주국 인맥들이 물밑에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전두환, 노태우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국가발전과 체제안정을 위해선 올림픽이나 만국박람회 같은 국가적 거대행사를 유치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잠깐 나온적도 있다.[7]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결국 성공하게 된다.[8]
전두환과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되는데도 막후 공헌했다. 이 공헌으로 나카소네는 1983년에 현직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나카소네는 방한 기간 동안 노신영 외무부장관과의 밀담을 통해 40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집권 초기 전두환 정권에게 활력을 열어줬다.[9][10]
1987년 동해상에 표류하다가 일본 해상보안청에 나포된 탈북자 김만철 일가의 행선지를 둘러싸고 일본-한국-북한간의 외교전이 벌어졌으로 때도 한일 정부 사이에서 막후협상에 관여했다. 연합뉴스 기사.
1990년 3당 합당[11] 에서도 1955년 보수대연합으로 출발해서 30년 넘게 장기집권 중이던 일본 자유민주당의 경우를 들어 막후 조언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이유는 지금 와서 그의 성향을 감안해보면 아이러니 하지만 당시 일본 우파들은 한국이 일본 대신해서 공산권의 최우선 방파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세지마 역시 한국에 강력한 반공 (친일) 정권이 세워지길 바라는 뜻에서 이런 조언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가 이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후원자로 극우 행보를 보인게 크게 모순되진 않을지도. 사실 따지고보면 독재정권을 도와주는 식의 조언뿐만 아니라, 진짜로 한국에 도움이 될만한 조언이 많았기에 넷 우익이나 혐한세력들이 통탄해하겠지만 세지마 류조가 한창 현역이었을때는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된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한국보다 훨씬 잘먹고 잘살았던 시절이었던지라 일본에서 한국을 몇수 뒤쳐진 후진국 정도로 봤기 때문에[12] 한국에 도움을 주는 조언을 적지 않게 한것이다.
세지마는 군부 출신 대통령 외에도 포항제철(포스코)의 박태준과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도 친분이 있어서인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특별고문으로 위촉된 적도 있었다. 1987년에 이병철이 사망하자 조문단을 이끌고 방한했다.
이런 자기의 한국내 인맥을 이용해서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일본 경쟁사들을 물먹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포항종합제철 1기 건설에서 미츠비시 상사에게 발주가 예정되어 있던 장비를 박정희와의 안면을 이용해서 이토츄 상사로 바꿔버린 것. 여담으로 이런 일화를 보면 애초에 한일협정으로 일본이 낸 금액이 결코 아쉬울게 없는게, 이렇게 국교가 성사되자 실제 전범 기업을 포함한 많은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이런저런 통로로 진출했고, 그 덕에 지금와서 보면 불공정 소리까지 나오는 유리한 사업 계약 등으로[13] 한국 시장에 뿌리내렸다. 거기에다가 21세기 이후로 한국 전자업체들이나 자동차 회사들이 일본 전자업체나 자동차 업체들을 따라잡으며 갑을관계가 뒤집혀졌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기업들에게 하청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현재까지도 한국이 일본에게 경상수지 적자를 보게하는 요인이 된것을 보면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5. 이야기거리
허풍이 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자신과 쇼와 덴노와의 막역한 관계를 자랑했다는데, 정작 쇼와는 세지마를 만난 일도 없었다고 한다(...). 실제 당시 일본에서 덴노는 살아있는 신이었고 세지마는 차고 넘치는 일개 육군 장교에 불과했다는걸 고려하면 막역한 관계 운운하는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나회 군인들이 그의 일대기를 다뤘다고 알려진 불모지대를 탐독했다고 한다. 한국 기업 총수들 중에서도 불모지대를 읽고 감명받은 인물들이 제법 됐다고 하던데, 강덕수 STX 전 회장이 대표적. 참치로 유명한 동원그룹에서도 교육시 심심하면 불모지대 드라마 틀어주고 하앜거렸다고 한다.
다만 한가지 확실히 해둘 것은, 물론 모델로 세지마 류조를 참고한건 맞지만 '''세지마 류조와 이키 타다시는 엄연히 별개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해도 픽션은 픽션일 뿐. 전체적인 큰 줄기만 비슷할 뿐이며 세세한 행보는 차이가 상당히 많다. 실제 이토츄상사의 회장직까지 역임하고 편한 노후를 보낸 세지마와는 달리 이키는 석유발굴을 성공시킨 후에 긴키상사를 퇴직하고 시베리아 억류자 친목회의 회장이 되어 일본군 패잔병의 유골을 찾는 데에 여생을 보낸다.
한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드라마 제5공화국, 그리고 그에 앞서 2005년 4월 16일,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 '세지마 류조로 본 한일 극우 커넥션과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를 다루면서 그 실체가 대중적으로 제법 유명해졌다. 실제 파고 보니 끝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평가가 더해져서, 오늘날 세지마 류조는 참모로서의 능력은 의구심을 사고 있으며[14] , 포로 시절 동료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서 편하게 지냈다는 점, 인맥을 대놓고 활용하여 불공정하게 기업을 키우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칭 개혁가/경세가로서 이름을 날렸다는 점에서 사후 평가가 그리 좋진 않다.
6. 같이보기
[1] せじま りゅうぞう[2] 만주에서 와 루손에서 대기하다 레이테로 이동한 1사단, 원래 레이테에 있던 16사단. 사단 넘버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 내에서도 아끼고 아끼던 최정예 사단들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서 단대번호가 1부터 20까지인 사단 16개와 근위사단은 이른바 갑종사단이라고 하여 정예부대이었고 이들 사단을 동원하고 남은 예비군과 사각편제를 삼각으로 개편하며 남은 병력을 이른바 을종사단이라고 하는 특설사단 약 31개로 편제했으며 나머지 백수십개 사단들은 다 신병을 모집하여 동원해서 만든 임시사단이다.[3] 나무위키에는 사법거래로 사무직을 했다는 어떤 증거를 토대로 위 내용이 작성되었을것으로 추정되나, 그런 내용은 적어도 일본사이트에서 찾지 못했다.[4] 오미국(시가현) 출신 상인인 이토 츄베에(伊藤忠兵衛)가 1858년 오사카에 설립한 종합상사.[5] 과거엔 보통 세지마 류조를 비롯해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훗날 일본 수상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 야쿠자 코다마 요시오 등을 지한파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지한파 중엔 좌익 성향을 가진 인물도 있지만 우익 세력 중에선 이렇단 소리. [6] 실제 한국현대사 학자인 서중석 명예교수도 '일본 극우세력과 한국의 군부독재, 친일 세력들은 서로가 매우 밀접하게 친했다'고 평가했다. 성급한 일반화일수도 있지만, 1930년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게 일본 군국주의 우익 세력이고, 당연히 이 시기의 친일 세력들은 그에 기생했을테고, 이때 일본사관학교에서 길러진 장교 중 상당수가 훗날 한국의 군부독재 세력으로 큰거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닐 듯하다.[7] 일본도 1960년대엔 전공투처럼 체체변혁을 내세운 진보좌파 성향의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활발했었다. 그러나 1964 도쿄 올림픽,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성공과 자민당 정권의 복지 확대, 토목 공사 정책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고, 한편으로는 좌파가 급진적인 성격을 띄게 되면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모두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세지마 류조가 신군부에 올림픽 유치를 제안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도 이후 3저호황에 따른 경제활황 등으로 중산층이 형성되자 체제를 뒤엎자는 급진적인 학생운동은 퇴조하고 체제내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8]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유치경쟁상대로 맞붙은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 나고야'''였다. 하지만 당시 나고야는 일본사회당의 지지세가 강력하던 곳으로 혁신계 인사가 시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골수우익 성향인 세지마 류조 입장에선 나고야 유치가 마음에 안들었을 것이다.[9]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내세웠던 논리는 소위 안보경협론이었다. 한국은 소련-북한의 공산권을 막고 있는 방파제 역할을 떠맡으면서 국가예산의 1/3을 국방비로 지출하는 등 허덕이고 있는데, 정작 안보혜택을 보고 있는 경제대국 일본은 아무런 기여도 없이 무임승차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 조건 없이 안보부담금 100억 달러를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경제가 엉망이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일본이 한국의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면서 이 주장에 공감했지만, 온건파였던 일본의 스즈키 젠코 총리는 안보경협론은 평화헌법, 전수방위 원칙 위반이라면서 단호하게 거절한다. 전두환 정권은 100억 -> 60억 -> 40억 달러 순으로 계속 액수를 내리면서 어떻게든 차관을 얻을려고 매달렸지만, 재정건전화를 목표로 하고 있던 스즈키 정권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1982년말 스즈키가 물러나고 강경우익 성향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바로 이때 양국의 우익 세력을 막후에서 연결하는 세지마 류조가 물밑 협상을 진행해서 결국 5년간 차관 40억달러 지원이 결정된다. 하지만 자민당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안보부담금이라는 논리는 거부하고, 단지 우호국을 위한 ODA 지원이라고 포장한다. 그리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들어온 일본 차관 40억 달러는 대부분 SOC 투자에 쓰이면서 한국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10]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노신영과 류조의 밀땅을 다루면서 노신영의 뻔뻔한 정도의 협상 요구에 세지마가 놀라 "겉은 잘 길들여진 말인데 속은 사자. 한번 붙잡은 먹이는 놓치지 않겠다"라면서 전두환에게 극찬하는 장면도 나온다.[11] 민주정의당(노태우) + 통일민주당(김영삼) + 신민주공화당(김종필).[12] 반대로 2010년대 이후로 일본 와이드쇼에서 혐한적인 내용을 많이 방송하게 된 것이나 혐한서적 코너가 마련될 정도로 혐한서적들이 우후죽순저첨 출판된것도 일종의 열폭심리때문이기도 하다. 생활수준이나 국민소득의 차이가 별로 나지 않게된데다가 일본 전자산업과 연예산업이 한국에게 밀리면서 그 만큼 한국을 폄하하는 내용의 방송을 많이 하게 된 것. 이런류의 내용들이 장사가 잘되기도 하고.[13] 서울 지하철 사업도 이런 사례 중 하나였다. '원조' 둔갑 8억달러 추적해보니…그 뒤엔 '전범기업'.[14] 육군대학교 차석 졸업을 가지고 능력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이, 츠지 마사노부도 육군대학교는 최상위권으로 졸업했었다(...). 실제 상기되어있듯 세지마 본인도 삽질해서 일본군에 피해를 꽤나 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