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 해전
1. 개요
1588년에 벌어진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잉글랜드 왕국 함대의 해전.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1604)의 주요 전투다. 잉글랜드의 해적이자 제독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 함대는 와해되어 퇴각하다가 큰 손실을 보았고, 결과적으로 레판토 해전 이후 승승 장구하던 스페인 함대의 잉글랜드 침공은 좌절된다.
2. 전투 원인
해양 패권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부를 축적하던 스페인과 이를 뺏어먹으려던 잉글랜드는 1585년 충돌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잉글랜드인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략선이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며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약탈하였으며, 이 30만 파운드가량의 막대한 재화를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쳤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에게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였다. 스페인은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무시하였으며, 해군까지 가세해 해적질에 열을 올렸다.
- 헨리 8세부터 시작된 종교적 갈등. 특히 잉글랜드가 가톨릭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을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으로서는 방관하기 힘들었다. 스페인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의 반란(Second Desmond Rebellion)을 지원하기도 했었다.
-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싼 전쟁(War of the Portuguese Succession)에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경쟁자(António, Prior of Crato)를 잉글랜드가 지원하였다. 잉글랜드는 또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독립 세력도 지원하였다.
3. 스페인의 허술한 작전
당시 스페인군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적의 주력을 피해 네덜란드 쪽에 집결해둔 스페인 병사들을 단숨에 런던으로 폭탄드랍하여 잉글랜드를 조지자.'
이것은 상당히 강력한 전술이었는데, 일단 잉글랜드는 섬나라여서 육군은 대단히 약했던 데 반해 스페인 육군은 당시 유럽 최강으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 육군 지휘관은 16세기 유럽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였다. 게다가 해군 지휘관은, 최소한 스페인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산타크루즈 후작 돈 알바로 데 바잔이었다. 당시 찰스 하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의 방해를 물리치고, 칼레에서 지상군을 탑승시킨 뒤 런던 앞마당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스페인 무적함대의 전략적 목표는 잉글랜드 해군의 괴멸이 아니고 지상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자체가 자세히보면 너무 허술하고 위험했다.
- 첫째로 펠리페 2세는 너무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이 작전 계획서를 출판해서 팔았다… 물론, 심리전의 일종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잉글랜드는 스페인군의 작전과 물자, 장비, 병력 현황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작전 계획서는 최고의 기밀인데 그걸 출판해서 팔았다는 것이 최고의 삽질이 아닐 수 없다.
- 둘째로, 당시 칼레 항구는 수심이 낮아서 흘수가 깊은 대형 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다. 게다가 네덜란드 독립군, 일명 '바다의 거지단(Geuzen)'이 소형 선박으로 분탕질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대형 선박은 더더욱 얕은 수심에서의 게릴라 공격에 취약했다. 따라서 파르마 공작이 네덜란드에서 홀수가 얕은 소형 수송선박을 준비하도록 되었지만, 네덜란드 독립군이 활개치고 다니는 지역에서 다수의 선박을 징발하는 것은 계획보다 무척 어려웠다. 그리고 그나마 파르마가 몇 척 모은 평저선은 상태가 나빠서, 시험삼아 병사와 물자를 싣자 갑판이 물밑으로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설령 제대로 된 수송선을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고 해도, 칼레가 엄연히 중립국인 프랑스의 영토인 이상, 스페인 육군은 해군의 지원없이 수송선을 타고 바다로 내려가 해안을 따라 해군이 정박한 지역까지 항해해야 하는데, 바다의 거지단이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 셋째로, 작전은 지상군과 해군이 정확한 타이밍에 작전지역에 도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지상군은 여러 사보추어와 게릴라들의 방해 때문에 해군의 타이밍에 맞출 수가 없었고, 해군은 기동을 포기하고 지상군을 기다려야만 했다.
- 넷째로, 이 작전이 성공해서 지상군이 잉글랜드 상륙에 성공한다고 해도, 잉글랜드 정복이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위에 언급했듯이 스페인 육군의 질은 대단했던 반면에 잉글랜드의 지상군 병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상륙할 예정인 스페인 육군의 총 병력은 고작 16,000여 명. 물론, 작전 찬성파들은 스페인 육군이 일단 상륙만 하면, 잉글랜드 내 카톨릭 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해서 이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는 엘리자베스의 치세가 이미 30년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에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군사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기는 어려웠다. 즉 상륙 병력만으로 잉글랜드라는 한 나라를 정복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 설상가상으로, 함대 총지휘관 산타크루즈 후작이 1588년 초에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산타크루즈 후작은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전설적인 명성과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에 후임으로 선정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현명한 군인이자 훌륭한 인격자이기는 했지만, 해전에는 문외한이었다. 심지어 배멀미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시도니아 공작은 본인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부하 제독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대체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는 했다. 그러나 정작 부하들은 시도니아 공작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시도니아 공작을 이용하여 파벌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팀워크가 갖춰지기도 전에 출발해버린 것.
- 마지막으로, 병참이 시원치 않았다. 비록 스페인이 대항해 시대에 손꼽히는 해양강국이기는 했지만, 대규모 상비 함대를 갖출 정도의 재력을 보유하지는 못했고 이미 재정적자가 위험한 상태였다. 결국 원정 함대는 자국의 무역선은 물론, 심지어 타국의 선박까지 징발하여 채워넣어야 했다. 소모품인 보급물자의 경우는 더 심각한 상태여서, 심지어는 공식적으로는 환영식을 치루며 출항한 후, 다시 항구로 돌아와서 재보급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스페인 영토를 벗어난 이후에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져서, 결국 칼레에 도달할 무렵에는 포탄과 화약이 떨어져 전투를 못할 지경에 이른다. 메디나 시도니아는 출항 전부터 이 위험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지적을 했지만 펠리페 2세는 이마저도 무시했다.
4. 전투 경과
1588년 8월 8일, 어쨌든 우에상섬을 돌파한 무적함대와 실리섬에서 발진한 잉글랜드 초계함대의 조우를 시작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 곧이어 양측 주력 함대의 전투이 벌어지자 격렬한 함포전을 벌였지만, 서로 피해를 주는 데는 실패하고 이때 입은 유일한 무적함대의 손실은 갤리온 1척과 카락 1척, 그것도 신호 오인과 돌풍으로 인한 충돌에 의한 것뿐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해군의 함선 대포들이 긴 사정거리를 갖고 있어서 스페인 함대를 원거리에서 농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설은 외국 다큐멘터리 필름들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인양된 스페인 함선의 포들은 포 규격이 제각각이고 근접전투용 소형 포들도 다수 실려있어서 원거리 전투용 함포의 숫자에서 밀렸다는 것. 다만, 잉글랜드의 '신형포'가 스페인보다 사정거리가 길어서 전투에서 이겼다는 이야기는 이원복의 만화《먼나라 이웃나라》가 퍼뜨린 대표적 오해이다. 사실, 양측이 사용한 대포는 모두 독일이나 이탈리아산이었다. 대구경의 대포를 생산해도 사용하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작은 구경 대포를 쓰다 보니 그만큼 탄환의 크기가 줄어들어 같은 양의 화약을 넣었을 시에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길긴 하다. 또 아무래도 상선 출신이 많았던 스페인 해군보단 해적(...)출신이 많았던 잉글랜드 해군이 대포의 장전속도만큼은 더 빨랐다고 한다. 잉글랜드 해군이 원거리에서 알짱거리며 포격을 실시한 것은 잉글랜드 해군의 대포가 사정거리가 긴 하이테크 비밀무기라서 그런 게 아니고 당시 메디나 시도니아가 외곽에 강력한 갤리온 포격함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지상군 드랍이 목적이었지, 잉글랜드 해군을 조지는게 목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메디나 시도니아는 포격함을 외곽에 배치하여 수송 선단을 보호하는 진형으로 진군했고, 잉글랜드 해군은 그 사정거리 근방에서 알짱거리면서 포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메디나 시도니아도 무조건 전투를 회피한 것은 아니었다. 메디나 시도니아의 판단으로는 스페인 해군이 잉글랜드 해군을 이기는 방법은 잉글랜드 함선들에 근접하여 백병전을 펼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잉글랜드 해군을 최대한 최대한 유인하기 위해 노력했고, 잉글랜드 해군이 대담한 돌격을 해왔다면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겠지만, 시종일관 잉글랜드 해군은 추격 격파하기에는 성가신 거리에서 기동했다.
이 4일 간의 전투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드레이크는 야간 기동에서 선두를 맡아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서 미등으로 함대를 유도하며 전진하던 중 금화가 많아 보이는 화려한 배를 발견, 이를 나포하고 싶은 욕심에 미등을 끄고 기함 혼자서 그 배를 추격. 결국 나포했고 드레이크의 금 냄새 맡는 능력은 틀리지 않아 많은 금을 노획한다. 그러나 결국 나머지 함대는 제독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드레이크 자신은 자기 함대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기간 동안 해당 전력은 전열에서 제외되게 되니 하워드 제독은 꽤나 속이 뒤집어 졌을 것이다.
칼레 화공 이후 일이지만, 하워드 제독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백병전을 감행하거나 좌초한 배들 약탈에 열중하는 드레이크를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해임시키게 된다. 그러나 그 덕에 다른 제독들보다 먼저 런던에 도착한 드레이크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시민들에게 말빨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 더욱 인기가 상승하게 된다. 당시 잉글랜드 왕실은 헨리 8세가 너무나 돈을 많이 쓴 돈지랄이 있었기에 해군에 대한 비용이나 징집 인원에 대한 보수는 고사하고 징발한 상선에 보상해줄 만한 재정도 부족했다. 그런데 드레이크가 앞서 말한 상당량의 금을 약탈해서 여왕에게 바친 덕에 여왕은 근심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은 돈인가?
결국 무적함대는 4일간 4번의 싸움을 모두 물리치고 사소한 흠집만 입은 상태로 도버 해협에 이르렀다. 지상군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2] 스페인 함대는 칼레 앞바다에 정박했다. 본래 이 시기는 남풍이 부는 시기라 스페인 측은 화공은 예상했지만 소형 선박들을 외곽에 분산 배치하는 정도로 화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갑자기 바람은 북풍으로 바뀌었던 것이다.(그래서 이 우연한 바람을 프로테스탄트의 바람이라고도 한다.) 하워드 제독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 상선값을 후하게 물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형 상선을 동원해 화공을 펼친다. 이 당시의 화공선은 단순히 불을 붙인 배를 상대 배에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에 화약을 비롯한 인화성 물질을 가득 실어서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폭발만 해도 치명적일 수 있었으며, 스페인군은 이를 매우 우려했다. 따라서 외곽의 소형 선박들은 화공선이 접할 경우, 갈고리를 걸어 함대 바깥쪽으로 예인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전 함대는 닻줄을 끊고 회피기동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5. 격파된 무적 함대. 그리고...
잉글랜드군이 화공을 펼치자 스페인 함대는 계획대로 소형함선으로 이를 예인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몇 척은 이에 성공했으나, 예인 도중 일부 화공선이 폭발해버렸으며, 이로 인해 예인선들이 겁을 먹고 주저하는 사이 나머지 화공선들이 스페인 해군의 외부 저지선을 통과했다. 예인작전이 실패하자 무적함대는 급히 닻을 끊고 진형을 풀어서 넓은 북해로 분산 회피한다. 시도니아 제독의 이 대응으로 함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전장에서의 회피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진형이 무너지고 화약이 고갈된 스페인 함선들은 이제 대담하게 근접해서 포격을 펼치는 잉글랜드 함선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게다가 몇몇 함선들은, 화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시도니아 제독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몰라도, 시도니아의 명령을 무시하고 도주하다 좌초되거나 나포되기도 했다.[3]
어쨌든 시도니아 제독은 다시 함대를 모아 진형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바람이 제정신을 차려 남풍으로 바뀌었고 바로 곧이어 태풍이 덮쳤다. 닻이 없는 함선들은 속절없이 난파 크리를 먹었다. 태풍은 잉글랜드 함선의 공격 역시 중단시켰기 때문에, 태풍이 스페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편이다. 다만 잉글랜드 함선들도 이 무렵에는 포탄과 화약이 떨어져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지속했더라도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근접한 대륙의 네덜란드 지역의 항구는 안전하지가 않고 하룻밤도 편히 정박할 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무적함대에는 네덜란드의 스페인 육군으로부터 무기, 화약, 군수품을 지원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기약없는 일이 된 상태에서 맨몸으로 대양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된 상태라는 것이다. 중립국이었던 프랑스[4] 는 물과 식량의 거래는 허용했으나 포탄이나 화약은 거래물품이 아니었고, 네덜란드에 주둔하던 스페인 원정군은 네덜란드 해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그 후 잉글랜드 해군은 화약 고갈[5] 때문에 회항하지만, 이미 계절풍이 바뀌고 전력이 약화된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연해를 빙 돌아서 본국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앞에서 썼듯이 바람이 강한 남풍으로 바뀐데다 영불해협에선 잉글랜드 해적놈들이 날뛰고 있으니 차라리 북해를 거쳐 항해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이건 북해를 잘 몰랐던 무적함대의 심대한 판단착오였다. '''무적함대는 북해에 진입하자마자, 지중해나 대서양 연해와는 상대도 안되는, 차갑고 거친 북해 바다 특유의 본좌급 태풍을 두번이나 만나서 완전히 박살났다.''' 실제로 영불해협에서 인양된 무적함대 선박은 대포가 단단히 묶여진 상태였다. 전투 중에 침몰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스페인 해군은 이 전투로 81척의 함대를 잃었으나 '''그중 전투 중에 침몰한 배는 단 3척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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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무적함대의 위엄찬 귀국루트와 좌초/침몰지. 아일랜드 연해 에서 대거 말아먹은 게 특징적이다.
이 도중에 많은 스페인 군함들이 좌초, 난파, 또는 선원들의 탈진으로 아일랜드 해안에 표착하였고, 잉글랜드 사람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과 결탁하거나 스페인 사람을 숨겨주지 않나 의심하였기 때문에[6] 스페인 병사의 목을 가져오면 상금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농민들은 아침마다 해머를 들고 바다로 나가서 표류한 스페인 사람들의 머리를 박살내고는 상금을 타러가는 일이 일상사였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탈진상태였기 때문에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대항도 못하고 죽어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잉글랜드 사람들의 의심증은 가시지 않았다. 즉 아일랜드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도피시키려고 시도하고, 갈 곳 없는 스페인 사람들을 아일랜드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서 숨어서 살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아일랜드 봉쇄가 치밀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일랜드 해안에서 인양된 무적함대 소속의 갤리스 지로나호[7] 의 경우에서 보듯 잉글랜드는 제 앞가림도 힘들었던 때였던 고로 원하는 만큼 치밀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지로나호는 아일랜드 지도자의 지원으로 킬리베그스항에서 수리를 마치고, 1300명이 승선한 채 출항하였지만, 포일석호 인근에서 강풍에 휩쓸려 결국 안트림 던루스 해안에 좌초 후 침몰하여 6인을 제외한 탑승원 전원이 사망했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에서 도움을 받아 귀환한 스페인 함선이나 상금에 눈이 먼 아일랜드 농민, 어부들에게 살해된 스페인 수병은 많았지만, 아일랜드에 고립돼서 뿌리박고 살게 된 스페인 사람들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심증 때문에 이후 잉글랜드 사람들에게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스페인의 종자가 많아서 게으르고 열등하다"라는 속설이 진실인양 퍼져서 오랜 기간 널리 믿어지게 된다. 이는 이후 영국-아일랜드 관계에서 영국이 아일랜드인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원인 중 하나로 이어진다.
6. 칼레 해전 그 후
무적함대 괴멸을 계기로 잉글랜드가 대서양의 제해권을 쥐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과 차이가 있다. 칼레 해전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잉글랜드는 무적함대를 격파한 다음 해인 1589년에 훗날 '잉글리쉬 아르마다(English Armada)'라 불리우는 대규모 원정군을 스페인 갈리시아의 라 코루냐 항에 보내 남은 스페인 함대를 파멸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성공적인 방어로 1만 2천의 병력을 까먹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스페인이 무적함대를 잃은 것보다 배가 되는 피해다. 이후로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전면적인 해상 교전을 벌일 능력을 상실했다.
한편 스페인은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였고, 스페인과 싸우던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다.(1596년)
그리고 스페인 함대는 재건되어 다시 1596년과 1597년 잉글랜드를 공격했지만 폭풍 등으로 인해 패배하고 만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에 사망하였으며, 두 나라 모두 전쟁으로 재정 문제는 가중되는데 전개는 영 신통치 않았기에 1604년 평화 협정을 맺는다. (1604년 런던 조약) 잉글랜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며 가톨릭 신앙을 계속 박해할 수 있었다. 스페인도 잉글랜드 해협과 항구들의 개방, 잉글랜드의 사략질 및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지원의 전면 중단이라는 결과를 얻는다. 이것이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1604)의 끝.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1625년까지 평화를 유지했다. (이후는 30년 전쟁 참고할 것.)
대체적으로 양측 다 만족할만한 협정이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스페인과 전쟁 중인 동맹 네덜란드를 버린 굴욕적인 협정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였고, 1609년 휴전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후 30년 전쟁을 거치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통념과 달리 이 전쟁으로 크게 몰락한 것은 아니며, 한동안은 군사 강국으로써 남았지만, 30년 전쟁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를 잃어버리고 국력이 추락하는 등 내리막길로 가게 된다. 반면 잉글랜드는 전쟁 중 자금 조달을 위해 동인도 회사 등 주식회사란 것을 개발하여 상업에 대한 힘을 키웠으며, 해양 개척에 힘을 쏟아 1607년에 동인도 회사가 북아메리카에 제임스타운을 세우는 등 해양 강국의 기틀을 쌓아가게 된다. 그래서 대영제국의 시발점을 이 시기(1607년)로 꼽는다. 다만 세간의 인식과 달리 1588년에 무적함대를 격파한 직후의 잉글랜드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도, 녹녹치도 않았던 것.
이후 한동안 해양 강국으로써 위세를 떨친 것은 독립한 네덜란드였으며, 영국이 바다의 패권을 공고히 가지게 된 것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영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18세기부터였다.
7. 창작물
"엘리자베스 1세가 암살되어 무적함대의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면 개신교는 박멸되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키스 로버츠의 대체역사소설 파반(Pavane)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골든 에이지(케이트 블란쳇 주연)에서 이 해전을 짤막하게 묘사한다. 폭풍으로 인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스페인 함대에 화공을 가해서 그 자리에서 괴멸했다는 묘사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전쟁 영화는 아닌 관계로 비중은 크지 않다.
[1]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해전 자체보다는 이때 발생한 손실이 압도적으로 크다.[2] 사실 이 지상군은 네덜란드 독립군의 함대에 봉쇄당하는 바람에 늦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합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3] 지금도 그렇지만 전투 중의 항명과 적전도주는 즉결처형감의 범죄이다. 때문에 시도니아 제독은 이후 귀환 과정에서 명령에 불응한 함선의 선장을 교수형에 처하고 시체를 돛대에 매달아 본보기로 삼는, 그답지 않게 엄격한 처벌을 내리게 된다.[4]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개신교 국가인 나바르와 전쟁 중이었으며, 당시 실권자였던 기즈 공작은 펠리페로부터 뒷돈(...)을 받는 상태였다. 하지만 국왕인 앙리 3세는 이 시점에 기즈가 스페인을 뒤에 업고 프랑스 왕위를 노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개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스페인에게 협력하는 상태도 아니었다. 결국 앙리 3세는 기즈를 암살하고 나바르 왕 앙리와 화친하여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5] 이게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냐하면, 함포전 한 번 간단하게 벌이고 나서 화약과 탄환이 바닥이 날 정도였다.[6]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일랜드는 스페인과 같은 가톨릭이었다.[7] 1968년 인양 결과 엄청난 보물이 나온 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