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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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최대 Vieshow 영화관 지점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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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금전협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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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영화 허우샤오셴비정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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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맹갑의 포스터.
1. 개요
3. 상세
4. 관련 문서


1. 개요


대만영화에 대한 문서이다.

2. 영화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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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AA(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대만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한국 영화,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 독일 영화, 멕시코 영화, 러시아 영화, 호주 영화, 이탈리아 영화, 스페인 영화, 브라질 영화 시장에 이어서 '''세계 15위'''로 나타났다. 위의 그래픽에서는 북미 영화 시장(114억 달러)이 따로 표시되어있지 않은데, MPAA가 미국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만 표로 따로 나온 것이다.
2015년 기준으로 대만영화 시장 규모는 3억 미국 달러로, 세계 18위이다. 링크. 대만의 인구 2,300만 명과 세계 20위권의 GDP를 생각해봤을 때 굉장히 높은 수치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 같은 말을 쓰는 중국 영화 시장이 있어서 죄다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는 것이 문제.''' 대만 영화는 대만에서만 개봉하지 않고 홍콩, 싱가포르, 마카오, 말레이시아에서도 개봉되어서 흥행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중국과 어느정도 문화적으로 가까운 태국에도 수출하곤 하지만 중국 영화시장이 미국과 맞짱 뜰 만큼 너무 거대하다 보니 그런 것이다. 어찌 보면 미국 영화 시장과 영국 영화 시장의 문제를 아시아에서 재현하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죄다 중국한테 빨려들어가다 보니 영화관 멀티플렉스 체인조차 2000년대 들어와서야 자리를 조금씩 잡기 시작했고, 그나마도 1위 영화관이라는 Vieshow의 지점 수가 전국에 몇 개 안 되는 등 사실 볼품없는 규모이다. 그래도 2016년에는 세계 17위로 한 계단 올라왔다. 링크
대만 영화 시장의 박스오피스를 집계하는 곳은 台灣偶像劇場이라는 곳이다. 타이베이시의 박스오피스 순위가 전 대만의 박스오피스 순위를 대표한다. 단, 주요 작품의 경우 주기적으로 전 대만의 박스오피스 자료를 업데이트해준다. 또한, 미국 달러화 환산 순위를 제공하여 외국인들도 편리하게 자료를 볼 수 있다.
2018년 중화민국 총통부에 따르면 대만 영화 시장에서 대만 자국 영화의 점유율은 '''고작 6.90%'''에 불과하다. 링크 미국 영화를 위시로 한 아메리카 대륙의 영화가 75.67%를 차지한다.

3. 상세


1950년대와 60년대 전반기에는 홍콩 영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고, 자연히 홍콩과 합작해서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홍콩과의 합작이 마이너스 효과를 낸것만은 아니라서 19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는 무협물 중심으로 홍콩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배우진도 매우 탄탄해서 홍콩영화 전성기 시절에도 대만 출신 배우들이 많은 활약을 하며 이름을 날렸다.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임청하, 왕조현을 필두로 오천련, 임지영, 진덕용, 초은준, 가정문 등등 무시 못할 인지도의 배우들이 많다. 현재는 허우샤오셴, 고 양덕창, 차이밍량 같은 유명한 예술 영화 감독이나 주걸륜, 계륜미, 임지령, 진연희 등의 배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 이안 감독은 헐리우드로 건너가 많은 히트작을 배출하여 헐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도 비록 홍콩 영화의 명성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대만 무협 영화가 자주 소개되곤 했다.7,80년대에 국내 개봉했던 무협영화들은 대만영화가 상당히 많았다. 60년대부터 너무나 유명했던 호금전감독의 영화들 뿐 아니라 70년대의 히트작 소림사18동인(1976) 이나 무림천하(원제: 풍운인물) (1977) 같은 유명 영화들도 대만 홍콩 배우들이 뒤섞여 있긴했지만 엄연히 대만에서 제작된 영화였다. 어린이를 타겟으로 한 영화들도 많아서 강시붐에 일조한 유환도사등이 있으며, 80년대 들어 추억의 영화가 되어버린 <호소자> 시리즈가 꾸준히 한국에 개봉되면서 여기 나온 아역배우들이 나온 다른 영화까지 호소자 시리즈로 속여 한국에 개봉됐던 적도 있다. 그 밖에 90년대 위성방송 VJ로서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오대유(吳大維)[1]가 나온 영화 <우리도 할 말은 있다>가 개봉된 바 있으며 쿵푸 덩크나 말할 수 없는 비밀같은 영화들이 꾸준히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1980년대 초에 이전보다 검열이 다소 완화되면서 광음적고사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양덕창이라던가 허우샤오셴 같은 새로운 감독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유럽 현대 영화와 일본 영화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국의 역사와 사회의 어둠과 쓸쓸함을 담아내면서 국제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대만 뉴웨이브는 한국 뉴웨이브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이창동이 있다.
그러나 1986년 스크린쿼터제 폐지로 대만 영화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국 영화 경쟁력이 이미 검열때문에 기본적인 경쟁력이 저하된 상황이었던 것은 한국과 유사했지만 최후의 방패막인 스크린 쿼터제가 폐지되었으니 영화업자들이 자국 영화에 투자하기보다는 수입영화를 틀어재끼는데 급급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면서 대만 영화계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비록 1987년 계엄령 해체와 1988년 언론통제 폐기 등의 민주화 조치로 영화검열은 해금되었고 이 상왕에서 대만 뉴웨이브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막상 대만내에서는 일부 작품을 빼면 고전을 거듭했다. 또한 동시기에 대만영화와 연관성이 깊은 홍콩 영화가 쇠락하고[2] 따오판과 케이블TV 방송의 시대가 열렸고 영화관은 미국영화 차지가 되었다.
결국 1990년대 중후반 들어서 대만의 영화산업은 괴멸상태나 다름이 없게 되었고 이는 2000년대 들어와서도 변함이 없었다. 이 당시 대만영화의 상태가 어느정도였냐면 자국영화 점유율이 1~2%에 불과했을 지경이었다.
즉, 1990년대 초반까지는 홍콩과의 합작으로 그나마 비벼볼 여지라도 있었지만 홍콩영화의 점유율도 급속히 떨어지면서 헐리우드 영화가 영화판을 거의 독차지하여 무려 90%에 달하게 되었고, 대만영화는 완전히 설자리를 잃었다. 거기에다가 스크린쿼터제도 폐지된 상황이라서 영화관들이 굳이 수익성 떨어지는 대만영화를 걸 이유는 없었고, 관객들도 미국영화를 볼려고 영화관에 갔다.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주목받던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도 덩달아 피해를 봤다. [3] 아무리 영화를 훌륭하게 찍어도 영화관에서는 거의 미국영화만 틀어주었기 때문에 영화관에 영화 1편 걸기 힘들었던 대만의 영화감독들과 제작진들 입장에서는 정말로 비참한 시절이었다. 푸대접이 심했던 에드워드 양은 거의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이민가버렸으며 [4], 차이밍량허우샤오셴은 해외 자본 투자를 받으며 겨우 버텼을 정도. 이러니 영화 감독들이 일거리를 구할려면 TV드라마나 CF쪽으로 진출할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부터 1990년대의 한국영화가 침체였던 시기였다지만 거장들이 만들어낸 영화들조차도 영화관에서 찬밥신세를 받지는 않았던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대만 영화계에서는 자국 영화 점유율이 헐리우드 영화를 웃도는 수준으로 올라선 한국 영화계를 부러워했으며, 대만 영화의 점유율이 어느 정도 상승한 2010년대에도 어느 정도 그렇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10년씩이나 지속되었지만 2006년과 2007년에 <연습곡>,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개봉되면서 10년 가까이 히트작을 내지 못하고 한국영화, 태국영화와 비교되며 움츠러들었던 대만 영화계가 오랫만에 자존심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 개봉된 대만어 영화 <하이자오 7번지(海角七號)>가 초유의 대박을 치기도 했으며, 우서 사건을 다룬 영화 <워리어스 레인보우>, <워리어스 레인보우 2>가 대만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5]로 만들어져 2011년 9월 개봉해 상당한 흥행을 기록했다.
하지만, 대만영화계에서 히트작을 내본다고해봐야 대만 영화의 점유율은 높아도 20% 정도인 수준이고[6] 당연히 영화판도 별로 크지 않아서 영화시장이 대만과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중국으로 영화 제작진들이 건너가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아예 중국 시장을 대놓고 노린 영화들도 많아졌다. 중국에서 수입 영화는 쿼터제가 적용되어서 외국 영화는 1년에 34편 이상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는데 대만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는 중국에서 대만 영화는 홍콩 영화와 더불어 '''스크린 쿼터제 면제대상이기 때문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스크린쿼터 쪼개기가 성행하며 반쯤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점도 있는 만큼 부작용도 심해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그만큼 커진 데다가 엄격한 심의나 검열이 일상적인 중국에서 제대로 제작을 하기 어려워서 되돌아왔다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대만에서조차도 영화 관련 일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인력들이 있어서 대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대만 내의 사정과는 별개로 최근 한국에서 대만 영화는 청춘, 로맨틱 코미디, 멜로를 중심으로 은근히 인기를 끌고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시작으로 청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대상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대만 영화 특유의 영상미가 어우러진 점이 인기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점도 인기의 이유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도 이어져 2018년에는 청춘로드가 개봉했으며, 안녕, 나의 소녀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17년에는 한국 영화 시장에 대만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개봉하였다.
대만에서 열리는 유명 영화제로 금마장 영화제가 있다.
홍콩 영화와의 합작 및 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홍콩영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는 하였지만 특이점으로 일본 영화의 영향력도 강한편이다. 한국 영화 역시 일본 영화의 영향을 암암리에 많이 받긴 했으나[7], 문화개방 이전까지는 다소 분리되어 있었다면 대만 영화는 대만 뉴웨이브 시절부터 일본 고전 영화 감독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걸로 유명하다. 허우샤오셴은 아예 일본에서 영화를 찍었을 정도다.

4. 관련 문서



[1] 이상하게도 당시에는 오대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호소자 4에서 발명가로 나왔다.[2] 특히 1992년에 영화관들이 홍콩영화 관람료를 인상한것이 점유율 하락의 큰 요인이었다.[3] 허우샤오셴 역시 2005년 내한시 마스터클래스에서 대만 뉴웨이브 영화가 나왔을 무렵, 주류 영화가 침체했고 뉴웨이브를 비롯해 대만 영화 전체가 나빠졌다고 말한 바 있다. http://cine21.com/news/view/?mag_id=33455[4] 심지어 하나 그리고 둘은 제작 후 10년 동안 자국 개봉을 하지 않았다.[5] 오우삼을 비롯한 홍콩 제작자들이 투자했다.[6] 이것도 그나마 오른 수준이고 2011년과 2012년에는 한자릿수대에도 못 미쳤다. 한국 영화가 점유율상으로 최악의 침체기였던 노태우-김영삼때에도 점유율 15%는 유지했으며, 1999년 이후로는 자국영화 점유율이 30%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대만 영화가 부활했다고 하기에는 초라한 수준이다.[7] 이시하라 유지로신성일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