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영화
Film of Germany
1. 개요
독일의 영화 산업에 대한 문서.
2. 영화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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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AA(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독일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한국 영화,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 시장에 이어서 '''세계 8위'''로 나타났다. 위의 그래픽에서는 북미 영화 시장(114억 달러)이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MPAA가 미국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만 표로 따로 나온 것이다.
영화 시장 규모는 11억 달러(2016년)로 세계 8위의 규모이다. 영화관 스크린 개수는 2016년 기준 4,692개로 영국 영화시장이나 일본 영화 시장보다도 많다.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인 독일의 영화시장답지 않게 생각보다 작은 편이다. 인구와 전체 경제력이 독일보다 아래인 한국의 2/3 수준일 정도. 자국 영화 점유율도 인도처럼 미국 영화조차 거의 인기 끌지 못하는 나라보다는 물론이고 한국이나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터키와 비교해봐도 낮은 편이다. 자국 영화 점유율은 26.7%(2014)로, 네덜란드 영화(14.9%)의 그것에 비해 조금 나은 수준이다. 중남미는 논외로 하고, 유럽권 국가 기준으로 확실히 자국 영화 비중이 낮은 편이다.
독일 영화 시장이 경제 규모대비 작은 이유는 멀티플렉스화되지 않은 자국의 영화관 사정이 큰 영향을 끼치는 걸로 분석되고 있다. 밑에도 나오지만, 멀티플렉스화되어 있지 않다보니 아예 낮 시간대 상영이 없다.
터키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터키 대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독일 영화계는 터키 영화의 인기가 많다. 실제로 독일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터키 영화 흥행작이 한 편씩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파티 아킨은 터키 영화계와 독일 영화계 경계선상에서 활동한다.
같은 언어를 쓰는 오스트리아나 스위스 독일어권 지역도 포함된다.
3. 영화제
영화제 중에서 세계 Top 클래스인 '''베를린 영화제'''가 있다. 이 영화제의 존재만으로 독일 영화시장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는 시장인 것.
4. 역사
4.1. 나치 독일 집권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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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화 산업은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우파(UFA) 영화사는 그 규모와 조직력에서 유럽에서 유일하게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경쟁할 수 있었다.
독일 무성 영화계는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19년부터 1926년까지는 독일 무성영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표현주의 영화 시대였다. 이때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독일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극히 불안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던 시기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예술가들은 절망과 혼란의 시대에 직면하여 가치관과 표현 양식의 혁신을 추구했다.
표현주의 영화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주제와 인물이다. 모든 표현주의 예술이 그렇듯이 표현주의 영화 역시 인간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분노, 광기, 이중성 등이 표현주의 영화의 주된 주제였다. 독일의 영화감독들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해 영화가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세계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두 번째는 세트와 공간이다. 예를 들어 로베르토 비네 감독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표현주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 걸작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섬뜩할 정도의 엽기적 스토리와 기하학적 구조를 가진 이른바 표현주의적 세트에 있다. 표현주의 영화는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에 세트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 영화의 세트를 만든 사람 중 하나인 헤르만 비름은 "영화는 그림을 소생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림은 표현주의 회화를 말하며, 가장 큰 특색은 '현실성의 파괴'이다. 이 영화에서 세트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창을 연상시키는 가시 달린 나무들, 구부러진 거리의 미로 등 하나하나가 미술 작품과 같이 등장인물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반영했다.
세 번째는 카메라와 조명이다. 표현주의 영화에 있어서 세트와 공간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움직임도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 독일영화는 고정삼각대와 객관적 시선으로부터 카메라를 해방해 카메라의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이용했고, 이런 카메라의 움직임에 의해 인물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표현주의 영화 감독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작품 <마지막 웃음>에서 나오는 만취 장면은 이런 카메라 기법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 도어맨은 결혼파티가 끝난 후 거나하게 취해 자기 아파트에 혼자 앉아 있다 카메라가 그의 주위를 빙빙 돌자 그가 마치 방 안을 빙빙 도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조명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데.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며, 광기와 공포도 조명을 효과적으로 상용해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프리츠 랑,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로베르트 비네, 빌리 와일더 같은 거장 감독들부터 시작해 에밀 야닝스, 마를레네 디트리히, 페터 로흐 같은 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주목받았다. 파우스트, 니벨룽겐의 반지, 메트로폴리스, M(1931년 영화), 노스페라투(1922),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등 당시 무성영화의 걸작들은 지금도 회자된다.
4.2. 나치 집권 ~ 제2차 세계대전
하지만 하필이면 무성영화의 몰락과 나치의 도래와 인사들의 망명, 레니 리펜슈탈로 대표되는 파시즘 영화들 때문에 초기 발성 영화 시기엔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흑역사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당시 망명한 독일 영화계 인사들은 영국과 미국으로 넘어갔으며, 이들은 초기 필름 느와르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치에 야합했다가 커리어 자체가 작살나 흑역사로 파묻힌 케이스가 많다. 에밀 야닝스는 나치 도래 이전에도 당대 유럽과 할리우드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지만, 나치 열성 지지자가 되었다가 전후엔 그게 족쇄가 되어 그대로 은퇴하고 말았다.
4.3. 분단
4.3.1. 서독 : 뉴 저먼 시네마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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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저먼 시네마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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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의 『시간이 흐르면』
전후 독일 영화는 빔 벤더스와 베르너 헤어조크,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페터 한트케, 한스 위버겐 지버베르그, 폴커 슐렌도로프, 스트로브-위예로 대표되는 뉴 저먼 시네마가 들어서야 겨우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다. [1]
이처럼 어려운 시기였던 1960년대 초 '놀라운 아이들'이라 불린 26명의 젊은 영화인들은 기성세대의 영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1962년의 '오버하우젠 선언'이다. 오버하우젠 선언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새로운 독일 영화의 산실이 될 영화학교의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런 젊은 감독들의 노력, 그리고 연방 내무부와 '청년 독일영화 후원회'의 지원에 힘입어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독일 영화는 1920년대의 표현주의 영화시대에 이어 부흥기를 맞게 된다. 한편, 전반적으로 추축국이었던 나라의 전후 영화들은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전투적인 모양새를 띄었는데, 독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뉴 저먼 시네마는 나치 독일 시절 영화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고 했고, 동시대 프랑스나 영국 영화보다도 급진적인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극단엔 누벨바그와 뉴 저먼 시네마의 경계선에서 활동했던 스트로브-위예가 있다.1. 영화의 뿌리는 단편영화라는 것. 기성 감독들이 사용한 제작비의 절반만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
2. 영화는 삶의 경험에 기초해야 하며 시대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
3.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기억하자는 것.
미국의 입김이 강했던 서독이었기에, 뉴 저먼 시네마 역시 프랑스만큼이나 미국 문화 추종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파스빈더는 더글러스 서크의 팬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제일 열성적인 미국 문화 추종자는 빔 벤더스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미국인 친구』를 시작으로 파리, 텍사스를 통해 아예 미국에 가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1980년대에 빔 벤더스가 미국으로 가고 파스빈더가 사망하면서, 뉴 저먼 시네마는 그 활기를 잃어버리고 소강 상태에 들어가 각자도생하게 된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 최대의 위기도 뉴 저먼 시네마의 소강 상태와 함께 한다. 서독 영화 점유율도 내리막길을 걸어서 1980년대 초엽에는 20%대였던 것이 1980년대 후반에는 한 자리수대로 떨어졌다. 영화계 상황도 많이 쪼그라들어 오스트리아 출신 독어권 감독인 미카엘 하네케나 예시카 하우스너도 주목받자마자 프랑스로 넘어가버릴 정도.
4.3.2. 동독
4.4. 통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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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안 헨켈 본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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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
동독 통일 이후인 1990년대부터는 다시 규모를 키우고 있다. 먼저 롤랜드 에머리히나 볼프강 페터슨, 톰 티크베어, 타인의 삶으로 유명한 플로리안 헨켈 본 도너스마르크 같은 할리우드로 진출한 감독들도 있으며, 미치고 싶을때로 유명해진 터키계 독일인 감독 파티 아킨, 토니 에드만을 감독한 마렌 아데, 파니 핑크로 유명한 도리스 되리처럼 독일 영화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감독들도 늘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영화계의 기술력 때문에 할리우드에서도 꾸준히 로케이션 및 협엽 수요가 있다.
1990년대부터 베를린 학파라는 새로운 영화 기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주로 중산층 독일인들의 심리와 역사적 고찰, 대화 중심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일컫는다.
5. 작품
5.1. 외국 영화
독일어 더빙이 기본이다. 영화관 상영시간표에 아무런 표시가 없으면 무조건 독일어 더빙, 무자막이다.
외국 영화를 표기하는 방법은 네 가지이다. 독일 정부에서 지정한 방법으로, 모든 영화관 예매 시에 동일한 표현을 쓴다.
- 없음: 독일어 더빙, 무자막
- OmengIU: 독일어 원어로 나오고 영어 자막이 달림.
- OmU: 원어로 나오고, 독일영화건 비독일영화건 독일어 자막이 달림.
- OV: 아무런 자막 없이 원어(독일어건 비독일어건)로 상영.
5.2. 실사영화
프랑스와 더불어 2차 세계 대전 이전 유럽 영화계를 이끌었던 존재다. 영어 영화는 미국/영국으로 모여들었고, 프랑스는 남유럽을 비롯해 영화의 본산지로써 전 유럽을 대상으로 했다면 독일은 동유럽과 북유럽 시장을 책임지고 있었다.[2] 2차 세계 대전 이후 엉망이 되긴 했지만 뉴 저먼 시네마라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면서 이전만큼은 못해도 유럽 영화계에서 파이를 늘려가고 있다.
특전 U보트와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고전작품부터[3] 괴테스쿨의 사고뭉치들 3와 같은 코미디 작품까지 여러가지를 만들어낸다.
5.3. 애니메이션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미국 영화나 일본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프랑스 영화와 더불어서 한 끗발 날리는 국가이다. 주로 어린이 교육용 애니메이션을 많이 만드는데, 독일 내에서도 꽤 인기고 주로 유럽연합 국가에 수출하여 박스오피스 랭킹에 올라가기도 한다.
대한민국에는 일곱난쟁이, 몬스터 패밀리와 같은 작품이 실제로 개봉하여 걸린 바 있다.
6. 유명 영화 감독
같은 독어권인 오스트리아 출신 감독도 포함.
6.1. 무성 영화 & 고전기
D는 타국으로 망명한 케이스
- 프리츠 랑 D
-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 로베르트 비네 D
- 빌리 와일더 D
- 더글러스 서크 D
- 막스 오퓔스 D
- 에른스트 루비치 D
- 로버트 시오드막 D
- 에드가 G. 울머 D
- 게오르그 빌헬름 파브스트
6.2. 뉴 저먼 시네마
6.3. 베를린 학파
통독 이후 합쳐진 베를린를 기반으로 1990년대부터 활동한 젊은 감독들을 일컫는 말.
- 마렌 아데 - 토니 에드만
- 울리히 콜러 - 마렌 아데의 남편, 수면병으로 유명하다.
- 토마스 아슬란 - 브라이트 나이트
- 크리스티안 펫졸드 - 운디네, 트랜짓, 피닉스, 바바라, 옐라
- 앙겔라 샤넬렉
-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 벤야민 하이젠베르크
6.4. 기타
7. 유명 영화사
8. 유명 배우
- 나스타샤 킨스키
- 니나 호스
- 다니엘 브륄
- 다이앤 크루거
- 로미 슈나이더
- 마를레네 디트리히
- 산드라 블록
- 산드라 휠러
-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
- 우도 키에르
- 율리아 옌치
- 에밀 야닝스
- 주자네 로터
- 클라우스 킨스키
- 폴라 비어
- 프란츠 로고스키
- 한나 쉬굴라
9. 영화관
독일에는 영국 영화 시장이나 프랑스 영화 시장처럼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이 아니라 소형 단관 영화관, 많아봤자 2~3개관으로 운영한다. 전국단위 멀티플렉스로는 Cinestar가 있고, 나머지는 보통 지역의 단관극장들이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조조시간과 저녁시간 외에, 심야 상영/'''낮 상영'''이 '''아예 없다!'''[4] 그러니까 독일 영화관들은 '''거의 대부분 07:00 ~ 11:00, 18:00 ~ 23:00까지만 영업한다'''. 영화 많이 보기로 유명한 한국인들이 독일 가서 영화 볼라고 하면 컬쳐쇼크때문에 충격과 공포를 겪는 경우가 많다.
낮 시간대 상영을 하는 영화관이 있는데, 이런 영화관은 독일 정부에서 지정한 영화관으로, '''낮 시간대에 애니메이션 영화만 튼다'''. 독일 정부의 애니메이션 진흥책 때문에 이렇게 된 것.
[1] 베를린 영화제 자체도 뉴 저먼 시네마 때문에 영향력을 확대한 케이스다.[2] 인적 교류도 활발했다. 앨프리드 히치콕는 커리어 초기 독일 우파 스튜디오에서 활동했고, 덴마크 영화계의 거장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도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자국으로 돌아갔다.[3] 다만 독일산 2차 세계 대전 영화는 그리 자주 나오는 편은 아니다. 그나마도 우회적으로 다루거나 내수용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뉴 저먼 시네마 기수인 빔 벤더스나 베르너 헤어조크 영화에서 2차 세계 대전 소재 영화는 찾기 힘들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정도가 경력 말기 BRD 삼부작으로 다루고 지나간 정도. 워낙 껄끄러운 역사여서 영화 제작자들이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에 대해 독일은 영화보다 철학으로 2차 세계 대전을 사유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링크[4] 같은 독일어권인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영화관도 심야 상영과 낮 상영이 존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