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하르방
1. 개요
제주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석상이자, 명실상부한 제주도의 상징물.
돌하르방은 제주도 방언으로, 표준어로 해석하면 "돌 할아버지"가 된다. 이 명칭은 근대에 성립된 것으로, 그 전에는 우석목(偶石木)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옹중석(翁仲石)이라는 단어로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1] 이후 어린이들이 돌하르방이라고 부르는 게 널리 퍼지고, 결국 문화재로 지정할 때 돌하르방이 정식 명칭이 된 것.[2]
그 외에 불교의 미륵 신앙의 영향을 받아 육지에서 큰 돌을 미륵이라 부르는 것처럼 미륵, 돌미륵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지 높으신 분들이 '''코리안 모아이'''로 번역을 해놨다가 까이기도 했다. 결국에는 흐지부지되고 만 듯.
2. 특징
제주도에서 장승을 대신하여 세워진 마을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아 있는 향토자료를 보면 주로 성문의 입구나 길의 입구에 세워놓은 것이다.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오래된 돌하르방이 쓰고 있는 모자는 보통 버섯머리 혹은 벙거지 모양으로 남근 모양과 흡사[3] 한데, 이를 토대로 본래 남근석을 세워둔 것이 조선시대로 오면서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람 모양의 돌하르방으로 고쳤던 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뒷모습도 그냥 제대로 모자 모양을 한 것도 있어서 남근석설을 완전히 신뢰하긴 힘들다.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구멍이 뽕뽕 뚫린 것이 특징이다. 그러한 현무암의 특징 때문에 투박하면서도 정감가는 모습이 인상적. 제일 큰 건 사람 키의 2배는 된다고 한다.
또한 돌하르방의 종류는 손의 위치에 따라 상징하는 인물이 달라지는데, 오른손이 왼손보다 위에 놓여진 돌하르방은 문인(文人)을 상징하고 왼손이 위에 놓여진 돌하르방은 무인(武人)을 상징한다. 양손이 평등한 돌하르방은 평민 또는 근래에 만들어진 것.
3. 유형
2016년 기준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4] 돌하르방은 총 47기로 제주목(현 제주시)에 23기, 대정현(현 서귀포시 서부)에 12기, 정의현(현 서귀포시 동부)에 12기이며 제주도에 현지에 있는 돌하르방은 45기이다. 제주목에 위치했던 돌하르방 2기가 한국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기 때문. 이 3곳의 읍성에 세워진 돌 하르방들은 모양새가 각각 다르다.
현재 돌하르방들의 위치는 제주시의 돌하르방은 제주대학교에 4기, 제주 KBS방송국에 2기, 제주시청에 2기, 삼성혈에 4기, 제주공항에 2기, 관덕정에 4기,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2기, 목석원에 1기가 있고, 대정의 돌하르방은 현재 추사적거지 앞에 2기, 동문터에 1기, 서문터에 1기, 서문쪽 담장 아래 1기, 남문터에 2기, 보성초등학교에 3기, 보성리사무소 앞에 2기가 있다. 정의의 돌하르방은 성읍민속마을 동·서·남문에 각각 4기씩 있다.
- 제주목 돌하르방 :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형태로, 다른 하르방들에 비해 가장 큰 키를 자랑하며,[5] 얼굴의 주름이 가장 많아 할아버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진은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돌하르방.
- 대정현 돌하르방 : 다른 돌하르방들에 비해 순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동그란 눈이 부각되어 있다.
- 정의현 돌하르방 : 가장 단순한 형태로 다른 하르방들은 기본 틀 외에도 신체나 표정 등에 선을 새겼지만, 정의현 돌하르방은 딱 필요한 부분만 조각한 느낌이 강하다.
4. 유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 돌하르방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보통 학계에서는 4가지 가설들이 논의되고 있다.
- 북방 기원설 : 몽골로부터 전파되었다는 학설. 몽골의 훈촐로오(人石)와 연관이 있다는 것에서 유래한 학설로 제주도가 고려 말에 몽고의 지배에 잠시 들어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개연성 있는 주장. 실제로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훈촐로는 돌하르방과 달리 의자에 앉아 있는 석상들도 많고, 손에 식기를 들고 있는 석상도 있는 등 세세하게 따져보면 다른 점도 많다.[6]
- 남방기원설 : 남태평양에 있는 발리 섬의 석상문화가 해류를 타고 제주도까지 전파되었다는 설로 대만에서부터 시작된 폴리네시아계 민족[7] 들의 대항해 과정에서 제주도가 영향을 받았을 거란 견해가 있다. 다만 뒷받침 근거가 다른 학설들에 비해 희박한 편이라 주류는 아니다.
- 한반도 본토 유래설 : 조선 중후기, 한반도 남부 지방의 석장승(벅수) 문화가 제주도를 통해 건너가면서 변형된 형태로 제작되었다는 가설로 북방 기원설과 함께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 자체생성설 : 말 그대로 제주도에 거주하던 고대인들이 어떤 문명의 영향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형태로 제작했다는 가설.
- 그 외에 다른 주장으로 2014년 10월 29일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한국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최근 중국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 젠핑(建坪)현 젠핑박물관의 전시물 가운데 제주 돌하르방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은 요대 석인상을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 우 교수는 "그동안 여러 주장에서 근거로 제시된 석인상들이 제주 돌하르방과 비슷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번 요대 석인상처럼 '똑같다'는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면서 "제주 돌하르방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닮은 요대 석인상이 발견된 이상 최소한 그 외형은 몽골 이전의 요나라 시대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마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기사 및 비교 사진
굳이 집어넣자면 위 북방 기원설의 이설(異說)이라 할 수는 있겠다. 다만 우실하 교수는 홍산문화를 한국사와 결부시키는 데 있어 선봉장격인 인물인 점은 참고하자.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제주도에 위치한 카카오 본사에는 돌하르방이 노트북을 들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애리조나주에 각각 한미우호증진의 표시로 기증되기도 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세도나에 건립될 한국민속문화촌에 세워진 돌하르방, 그 옆에 있는 것은 세도나의 상징 코코펠리.
한때 KBO에서 뛰었던 투수 오봉옥의 출신지가 제주도인데다가 특유의 묵직한 직구로 인해 그의 별명으로 쓰이기도 했다.
박기웅이 맷돌춤을 출 때 손 위치가 돌하르방의 손 위치와 비슷해서 맷돌춤을 돌하르방춤/돌하르방 댄스라고도 한다.
로렐라이 언덕 근처에도 돌하르방이 있다. 2009년 제주시와 로렐라이시의 친선우호를 기념하기위해 제주시가 제작, 기증해서 세운 것. 답례로 로렐라이시는 2010년에 로렐라이 요정상을 제작하여 기증했고 현재 제주시 용담 해안도로에 위치한 어영공원에 설치되어있다.
6. 창작물에서
- 아일랜드 - 요괴를 막거나 퇴치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 건강 전라계 수영부 우미쇼 - 남근석 설을 차용한 듯하다. 온갖 민속성인용품과 남근석 관련 아이템이 모인 한 컷에 돌하르방도 끼어 있다.
- 천하제일상 거상 - 한라산의 몬스터로 등장한다. 피격시 뒤로 물러나는 넉백 공격에다가 타격저항력도 좋아서 다소 성가신 상대. 그래봤자 약한 몹 중 하나. 대리석을 모으는 홍글동 퀘스트 때문에 잡는 유저들이 있다. 조선 조련소에서 고용가능한 몬스터이기도 하다. 물론 고용하려면 봉인의돌이 필요하다.
- 모바일 게임으로도 나왔다. 제주도 사투리를 풀면서 무려 돌하르방이 우리나라를 통일한다는 스토리다. 정복왕 돌하르방
- 양영순의 만화 중에 제목이 돌하르방이라는 만화가 있다.
[image]
- 네오플 개발, 넥슨 퍼블리싱 게임 던전 앤 파이터의 90레벨 에픽 토템 탐라선인석이 돌하르방 모양을 하고 있다. 여담으로 네오플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 제주도다.
7. 여담
-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아기를 낳을 때 남자 아기를 낳는 말이 있다. 미신인 줄은 알지만 재미삼아, 또는 정말 진지하게 아들을 바라며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돌하르방의 코를 가루내어 물에 타마시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 친숙한 이미지지만 공포물에도 낮은 빈도로 등장하곤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90년대 중후반 인기리에 방영된 테마게임의 한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 김진수는 마을 노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성시되는 돌하르방을 건드렸다가 귀를 부러트린다. 그후 연인이 무언가에 씌인듯 김진수의 귀를 자르려는 행동을 하거나 누군가의 호통을 듣는 등 제대로 동티가 난다. 결국 자신의 죄를 뉘우친 김진수는 귀를 다시 돌하르방에 갔다놓아 용서를 빌면서 해당 화는 마무리된다.
- 제주도에는 돌하르방과 비슷하지만 그 크기가 매우 작고 귀여우며, 무덤 근처에 산담과 같이 놓는 동자석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많이 절도당해, 현재 제주도에서는 이를 엄격히 단속하고 있다. 제주도 출입시 석물을 함부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런 이유.
- 동자석의 모습.(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06/2010010602881.html+사진출처) 가장 오래된 것은 1670년대의 것으로, 육지의 무덤의 문무인 석상처럼 망자를 수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손에 든 물건은 동자석마다 다양하다.
이 동자석을 모티브로 한 국산 캐릭터 쿰자도 있다.
- 외신에서는 모양 덕에 남근상/딜도로 오인받았다
[1] 1754년(영조 30)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 ㅡ 1918년 탐라기년 (耽羅紀年). 여기서 옹중석은 사람을 형상화한 돌조각을 의미한다.[2] 출처 - 1993년 제주일보.[3] 뒷모습이 이 설을 지지한다고 한다. [image] [4] 현대에 장식 목적으로 추가로 흉내내 만든 것은 물론 훨씬 많다.[5] 다른 현들에 비해 30~50cm 가량 더 크다고 한다.[6] 야외에서 풍화에 노출되어온 석조미술의 특성상 대체로 가까이서 자세히 봐야 잘 드러난다.[7] 이스터 섬 문명과 모아이를 만든 민족. 사실 폴리네시아인들이 원래는 중국 남부나 타이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아주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대만 원주민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