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키 루치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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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뉴욕 시의 마피아 조직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자신의 이탈리아계 마피아를 중심으로 유대계•아일랜드계 등 거물 범죄조직들을 포섭해 전미범죄연합체(National Crime Syndicate)라는 '''혈통이나 인종을 초월한 기업형 범죄조직'''을 미국에서 최초로 창안한 인물이다.[1]
굉장히 악명 높은 마피아였지만 동시대에 활동한 시카고의 알 카포네보다 인지도는 밀리는 편이다. 하지만 미국 조직범죄계와 이탈리아 조직범죄계에 끼친 영향력으로 보면 러키 루치아노의 위세가 더 강했다고 평가받는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 내 마피아 활동의 중심지는 카포네의 시카고가 아닌 루치아노의 뉴욕이기도 하다.
그의 '''러키(운 좋은•Lucky)'''라는 별명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불분명하다. 그의 원래 이름인 살바토레 루카니아를 잘못 발음했다거나, 1929년에 납치되어 죽을 만큼 고문당했지만 끝내 살아남아서 생겼다거나, 단순히 도박 운이 좋아서라는 여러 추측들이 있다.
2. 생애
1897년 시칠리아 섬에서 유황 광산 노동자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1907년 일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여느 이탈리아 하층민 이주자들이 그렇듯, 러키 루치아노의 가족 또한 매우 가난했기에 루치아노는 어렸을 때부터 모자 배달 등의 일을 하며 살았다.
10대에 들어서자 그는 갱단을 차렸고 파이브 포인트 갱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2] 당시 러키 루치아노가 소속된 파이브 포인트 갱은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 많았고 돈이 더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주급 10센트를 받으며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갱 조직들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루치아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될 즈음이 되자 조직에서 성매매를 알선하는 범죄 사업분야를 담당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20년대에는 파이브 포인트 갱단이 몰락하는데, 그 빈자리를 1890년대부터 세를 키워온 이탈리아계 마피아 패밀리가 차지한다. 1920년 러키 루치아노는 1세대 미국 마피아 두목 주세페 마세리아의 조직에 총잡이로 입단하게 되는데 동시기 미국 역사의 오점 중 하나인 수정헌법 18조가 제정되어 금주법이 실시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밀주사업에 뛰어든다. 성매매 알선을 통해 술집에 수많은 커넥션을 만들어두었던 루치아노는 그렇게 만든 밀주나 헤로인을 술집의 비밀공간을 통해 높으신 분들에게 팔아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1923년 러키 루치아노는 헤로인을 팔다 적발되어 체포된다. 공백 기간으로 높으신 분들과 조직의 신뢰를 잃게 되지만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잭 뎀프시의 복싱 경기 좌석들을 마구 사들였고 그 티켓을 나눠주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루치아노는 늘 조직운영에 있어서 정치적 기회를 잡는 것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고 비상한 머리를 이용한 뛰어난 처세를 통해 조직과 정치권으로부터 꾸준히 신뢰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밀주나 마약 유통 사업을 계속해 1925년에는 연 수입 120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나중에는 자신의 사업을 필라델피아, 캐나다까지 확장하는데 특히 고급 위스키 밀수입 등 주로 밀매 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29년 러키 루치아노를 노린 납치 사건이 일어났고 3명의 남자에게 고문을 당했다. 칼에 찔리고 심한 구타를 당해 버려진 루치아노는 끝내 살아남는다. 납치의 배후로 마피아 두목 살바토레 마란자노라는 설과 경찰이라는 설이 있는데 루치아노는 훗날 잭 다이아몬드라는 아일랜드 혈통 조직폭력배의 뒤를 쫓던 경찰이었다고 밝혔다.
납치 사건 이후 흉터와 늘어진 눈을 얻게 된 러키 루치아노는 위세를 계속 확장해나갔다. 그는 5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카스텔람마레 항쟁이라는 미국 마피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면전에서 반대편인 살바토레 마란자노와 결탁해 자신의 두목 주세페 마세리아를 제거하고 항쟁을 끝낸다. 이때 루치아노는 마세리아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얘기한 후 자리를 피했다. 그 사이 암살자들이 들이닥쳐 마세리아를 살해한 것. 암살자가 죽음을 상징하는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를 희생자의 손가락에 꽂아두고 사라져서 범죄 현장 사진이 유명하다. 이 사건은 소설 대부 속 마이클 콜레오네의 화장실 암살 장면에 영감을 제공했고, 그 소설을 영상화한 영화 대부에서도 중요한 장면으로 연출되었다.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마세리아의 최후.
1931년 카스텔람마레 항쟁에서 승리해 미국 마피아의 총 두목이 된 살바토레 마란자노는 시칠리아 마피아를 본따 미 전역의 이탈리아계 마피아 패밀리에 라 코사 노스트라라는 이름을 붙여 체계화한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국 마피아의 각종 규칙과 기준들이 대부분 이때 제정된다. 러키 루치아노 역시 여기에 가담하여 자신의 조직을 거느리게 된다.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라 코사 노스트라 창설 장면.[3]
러키 루치아노는 얼마 안 있어 총 두목 살바토레 마란자노까지 제거해 최종 승자가 되었고 뉴욕 시의 마피아 권력을 사실상 차지하게 되었다.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마란자노의 최후.[4]
패권을 잡은 러키 루치아노는 시카고의 알 카포네를 비롯한 다른 지역 마피아 두목들과 회동을 가진 뒤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루치아노와 카포네의 회동.[5] '''보스 중의 보스라는 총 두목 직책을 폐지하고 위원회(The Commission)를 창설했다.''' 이는 미국 전역의 마피아 패밀리를 통할하고 수행하는 것을 결정하는 민주적인 통제 기구다. 또한 암흑가의 무분별한 폭력을 방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미국 마피아의 위원회는 시칠리아 마피아가 '큐폴라(Cupola)'라는 이름의 비슷한 기구를 만드는데 영향을 줬으며, 1970년대 뉴욕 시의 거물 흑인 조직폭력배 7명이 모인 평의회(The Council)의 탄생에도 영향을 줬다.
당시 마피아 위원회의 의장이었던 러키 루치아노가 이끈 뉴욕 조직은 그의 이름을 본따 루치아노 패밀리라 불렸고, 현재는 제노비스 패밀리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마피아 세계에서 루치아노의 상징성 때문에 제노비스 패밀리는 조직범죄계의 아이비리그(Ivy League of Organized Crime)라고 불리며 미국 마피아 조직 중 가장 강력한 파벌로 여겨진다.
러키 루치아노는 같은 혈통이나 같은 인종이 아니면 동업관계를 잘 맺지 않던 기존 미국 암흑가의 관행을 과감히 철폐하고 자신의 '''이탈리아계 마피아를 중심으로 유대계•아일랜드계 등 거물 범죄조직들을 포섭해 전미범죄연합체(National Crime Syndicate)를 창안했다.''' 여전히 마피아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은 이탈리아 혈통만 될 수 있었지만, 준 구성원은 혈통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허락되었다. 루치아노는 전미범죄연합체 산하에 살인 회사(Murder, Inc.)를 두어 사업에 방해되는 인물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위원회 창설 장면•전미범죄연합체 창안 장면•살인 회사의 암살 장면. 살인 회사는 400~1000명에 달하는 관련자를 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이후 루치아노는 약 5년간 미국 사회에서 전래 없는 월권을 행사하며 군림했다. 그는 뉴욕의 왕궁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 거주했고 불세출의 연예인 프랭크 시나트라와 친구가 되었다.[7]
무서운 위세를 떨치던 러키 루치아노도 1934년 명판관이자 청렴한 정치인 피오렐로 라과디아가 뉴욕시장이 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라과디아는 취임 첫날부터 뉴욕 마피아에게 선전포고를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인물이었는데, 루치아노는 그에게 뇌물을 찔러 회유하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가족을 볼모로 협박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라과디아는 시장으로써 마피아의 여러 불법 사업들을 행정명령을 통해 단속했다.
1916년부터 1936년까지 20년 동안 폭행, 불법 도박, 협박, 강도 등의 혐의로 25번 체포되었음에도 교도소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은 러키 루치아노는 1936년 토머스 듀이 지방검사에 의해 매춘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루치아노의 보석금은 35만 달러로 책정되었는데 이 기록은 당시 뉴욕 시 역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그는 법정 공방 끝에 62건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30~50년형의 부정기형을 선고받았다.
러키 루치아노를 기소한 토머스 듀이 지방검사를 부하들이 살해하려 했지만 루치아노가 오히려 만류하며 “사업에 안 좋다(Bad for business)”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8] 당시 듀이에게 탈세 혐의로 기소된 더치 슐츠는 루치아노의 말을 무시하고 듀이를 살해하겠다고 선언하는데, 그가 역으로 루치아노의 지시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수감된 러키 루치아노는 복역 중 다른 수용자들이 그와 대화하기를 영광으로 알았고 대화 한번 해보려고 줄을 섰다. 그들은 대화를 마치고 돌아갈 때 루치아노에게 등을 보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쳐 돌아갔다. 수용자 중에는 루치아노의 개인 요리사나 심부름꾼도 있었다.[9] 루치아노는 최고 보안 시설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대리인 프랭크 코스텔로를 통해 패밀리를 통제하며 주요 의사결정에 관여했다.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러키 루치아노는 교도소 규칙상 불가능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고 정부 기관 요원들이 자주 접촉해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마피아 조직과 미국 정부가 합동작전을 하는 데 마피아계 최고 수장인 루치아노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정부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부두 노동자들이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지하진 않을까 우려했다. 협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뉴욕 시에 위치한 교도소로 이감된 루치아노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루치아노의 부하들이 전쟁 기간 중에는 노조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미국 내 언더월드 작전과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작전에서 마피아가 유럽 암흑가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눈과 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루치아노와 마피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관여한 셈이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루치아노의 부하 비토 제노비스는 미 육군 통역 장교에 임명되었다. 또 다른 부하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는 미 공군 하사로 임명되어 전쟁터에 투입될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이 되었다.[10]
정부의 공식 보고서는 러키 루치아노가 해군 정보국에 많은 도움을 준 점을 인정했지만, 정작 언더 월드 작전을 책임진 해군 장교는 마피아의 도움을 평가절하했다. 훗날 루치아노 본인도 연합군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다. 특히 미국 정부에서 마피아와의 연합 작전을 검토하게 되는 계기인 뉴욕 항 SS 노르망디 호 침몰 사건 역시 마피아가 정부를 위협하기 위해 배후조종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노르망디 호가 침몰하자 미국 정부는 추축국 스파이가 미 동해안의 항구를 파괴하여 군수물자 보급에 차질을 빚을까 두려워했고 결국 항구와 뒷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마피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모든 계획을 암흑가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린 유대인 폭력배이자 루치아노의 최측근 마이어 랜스키가 구상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1946년 수감된 지 10년 차가 된 러키 루치아노는 당국의 전쟁 수행 노력과 관련하여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는 이유로 가석방되지만 국외로 추방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당시 전쟁에 협조한 마피아는 그 대가로 시칠리아에서의 여러 이권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이 합동작전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압에 위축세에 있던 시칠리아 마피아가 미국 마피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부활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사실상 추방당했다라기보다는 금의환향.
러키 루치아노의 가석방을 최종 승인한 건 그를 기소했던 토머스 듀이 뉴욕 주 주지사(전 지방검사)였는데, 승인한 이유는 불명이지만 듀이가 1938년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후 1942년 주지사 선거 때 마피아, 특히 루치아노의 대리인 프랭크 코스텔로로부터 9만 달러의 정치자금과 각종 원조를 지원받아 당선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다.[11]
러키 루치아노는 추방되던 날 앨버트 아나스타시아 등 다른 마피아 두목들의 전송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당시 뉴욕시장 윌리엄 오드와이어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그마한 소방선을 타고 여객선으로 건너가 루치아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러키 루치아노는 그렇게 고향인 이탈리아로 되돌아갔고 석방된 그 해, 자신이 미국에 입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쿠바 아바나에서 마피아 위원회 회합을 가졌다. 그 회합에서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를 불렀다. 루치아노가 쿠바에서 공개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미국 정부는 1947년 쿠바 정부를 향해 그를 추방하라는 압력을 가했고, 루치아노는 이틀 뒤에 출국했다.
러키 루치아노가 쿠바에서 돌아와 제노바에 도착했을 때, 이탈리아 경찰은 그를 체포하여 팔레르모에 있는 감옥으로 보냈다. 5월 11일 팔레르모의 한 지방 위원회는 루치아노에게 말썽에 휘말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그를 석방했다.
1949년 7월 초 로마 경찰은 뉴욕으로 마약을 수송한 혐의로 러키 루치아노를 체포했다. 7월 15일, 감옥에서 일주일을 보낸 루치아노를 경찰은 아무런 혐의도 제기하지 않고 석방했다. 당국은 그의 로마 방문을 영구적으로 금지했다.
1951년 6월 9일 러키 루치아노는 이탈리아로 57000달러의 현금과 새로운 미국 자동차를 불법적으로 들여온 혐의로 나폴리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20시간의 심문 끝에 경찰은 아무런 혐의 없이 루치아노를 풀어 주었다.
1952년 이탈리아 정부는 미국과 캐나다 사법당국의 항의로 러키 루치아노의 여권을 취소했다.
1954년 11월 1일 나폴리의 이탈리아 사법 위원회는 러키 루치아노에게 2년간 엄격한 제한을 적용했다.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경찰에 신고하고, 매일 밤 집에 있어야 하며, 경찰의 허가 없이 나폴리를 떠나지 말아야 했다. 사법 위원회는 루치아노가 마약 거래에 관여한 것을 이러한 제약의 이유로 들었다.
미국에서 추방된 러키 루치아노의 공백기는 카를로 감비노 같은 인물들이 채웠고, 그들은 루치아노의 여러 측근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렇게 루치아노의 미국 내 영향력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그는 이탈리아에서 지속적으로 양 대륙 간 마피아 사업에 관여했고 중요 인물로 여겨졌다.
실제로 러키 루치아노는 1957년 팔레르모의 한 호텔에서 시칠리아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간 회동을 주선하는 등 양 대륙 간 마피아 사업을 총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후계자 프랭크 코스텔로에게 반기를 든 미국 마피아 두목 비토 제노비스를 마약사범으로 몰아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알려져 있다.[12]
러키 루치아노는 1962년 1월 26일 나폴리 국제공항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연사했다. 향년 64세. 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마틴 고쉬를 만나려 했다. 그의 장례식은 3일 후 나폴리에서 거행됐다. 유튜브에 성대한 장례식 영상이 있다. 시신은 미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뉴욕 시에 묻혔다. 미국에서 두 번째 장례식이 열렸는데 2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모였고, 당대 최고의 미국 마피아 두목인 감비노 패밀리 수괴 카를로 감비노가 추도사를 읽었다. '''1998년 12월 7일 타임지는 루치아노를 '범죄의 주모자(Criminal Mastermind)'로 지목하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하나로 선정했다.''' 그의 거대한 무덤은 뉴욕 시 퀸즈에 있다.
3. 여담
- 러키 루치아노와 그의 파트너인 유대인 폭력배 마이어 랜스키의 첫 만남은 이렇다. 어린 랜스키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량배였던 루치아노가 그의 돈을 갈취하려고 했다. 이에 랜스키는 격렬하게 반항했는데,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덩치도 작았지만 그 배짱을 높이산 루치아노는 그를 존중했고 그 뒤 평생 동안 지속되는 우정을 쌓는다. 호사가들은 이 만남을 미국 조직범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부른다. 훗날 랜스키의 딸은 자신의 저서에서, "아버지는 찰리 삼촌(루치아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찰리 삼촌은 거친 폭력배에 당당하게 맞서던 터프하고 작은 유대인(랜스키)에 대해 자주 말하곤 했다."라는 증언을 남겼다. 랜스키는 혈통의 한계로 마피아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동업자로써 루치아노 못지않은 영향력을 미국 조직범죄계에 끼친 거인이다.
- 러키 루치아노는 이탈리아로 추방된 시기인 1948년에 20살 연하의 밀라노 무용수 이게아 리소니를 만났다. 루치아노는 리소니를 인생의 사랑으로 묘사했다. 둘이 법적으로 결혼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양측은 그저 반지만 교환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실혼 관계였던 두 사람은 나폴리에 위치한 루치아노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나 루치아노가 계속해서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 탓에 둘은 잦은 다툼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루치아노가 종종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리소니는 1959년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 걸 중시하는 다른 이탈리아계 마피아 인사들과 달리, 러키 루치아노는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깡패 루치아노의 아들로 살아가는 걸 원치 않았다. 그게 내가 여전히 토머스 듀이를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세상에서 날 깡패로 만들어 버리다니."[13]
-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를 보면, 폴리라는 마피아가 다른 조직원을 향해 "하늘에서 살바토레 루카니아가 우릴 보고 부끄러워하겠다."라는 대사를 하는데, 여기서 살바토레 루카니아란 러키 루치아노를 의미한다. 루치아노가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 본명이 살바토레 루카니아기 때문. 미국 마피아 세계에서 루치아노의 위상을 잘 드러내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 러키 루치아노를 연기한 배우는 20명이 넘는다. 그중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루치아노를 연기한 빈센트 피아자가 유명하다.
4. 어록
'''좋은 돈이나 나쁜 돈 같은 건 없다. 그저 돈이다.'''
There's no such thing as good money or bad money. There's just money.
'''나는 미국 시민이다, 그것도 1등급 시민. 나는 당신들처럼 공적이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생계를 위해 정직하게 일한다.'''
I am an American citizen, first class. I don't have a bade that makes me an official good guy like you, but I'm work just as honest for a living.
'''나는 항상 *애넌버그를 나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I always thought of Annenberg as my sort of guy.
*미국의 언론재벌이자 자선사업가 월터 애넌버그.
5. 관련 문서
[1] 사실 체계를 가진 조직으로서의 연합체(신디케이트)의 실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연합체(신디케이트)란 그저 이탈리아계 미국 마피아 라 코사 노스트라와 같은 의미이고, 미국에서 이탈리아계 마피아가 다른 인종 폭력배들과 편견 없이 동업관계를 맺는 현상을 매클러런 상원위원회나 언론에서 ‘전미범죄연합체(National Crime Syndicate)’라는 명칭을 붙여 관념화 한 것이라는 게 그 주장의 요지. 그 근거로는 전 뉴욕 마피아 두목 조셉 보난노의 자서전에 라 코사 노스트라와 마피아 위원회의 탄생 과정은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반면, 연합체(신디케이트)의 탄생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든다. 다만 러키 루치아노는 비 이탈리아인들과 일체의 동업관계를 맺지 않던 초창기 폐쇄적인 미국 마피아 조직을 다른 인종에 개방시킨 인물인 건 분명하다. 고로 연합체(신디케이트)의 조직적 실체와는 상관없이 루치아노가 추구한 미국 암흑가에서의 반인종주의는 의미 있다.[2] 뉴욕 맨해튼의 파이브 포인트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아일랜드계와 이탈리아계 이민자들로 구성된 갱 조직이다. 당시 이 지역은 아일랜드-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던 빈민가였는데,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폴 켈리가 파이브 포인트 갱을 결성한 후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다. 이 조직은 엄청난 폭력성을 자랑하며 주변 갱 조직원들을 마구 받아들였는데, 당시 제임스 스트리트 갱 조직의 일원이었던 알 카포네도 초기에는 파이브 포인트 갱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했다. 알 카포네가 뉴욕을 떠나 시카고로 간 것도 당시 파이브 포인트 갱의 2인자였던 자니 토리오가 시카고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함께했기 때문이다.[3] 상석에 앉은 이가 마란자노, 칼을 들고 의식을 치르는 이가 루치아노.[4]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실제로 마란자노는 여러 차례 칼에 찔린 후 총에 맞아 사망했다.[5] 실제로 루치아노는 카포네를 만나기 위해 시카고에 갔다.[6] 이렇게나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일반인, 그중에서도 마피아 사업과 일절 관계없는 사람을 단순 분풀이로 죽인 죄로 한 마피아 두목이 처형되기도 했다.[7] 영화 대부 속 쟈니 폰테인의 실존 모델이 시나트라다.[8] 어찌 보면 선견지명이었던 게, 이로부터 58년 뒤인 1992년. 정말로 본고장 시칠리아의 마피아들이 마피아 검거의 최선봉에 섰던 조반니 팔코네와 파올로 보르셀리노 판사를 암살하는 사건을 벌인다. 시칠리아 마피아는 2명의 판사뿐만 아니라 반 마피아 운동을 전개하던 수많은 고위 관료들과 시민단체 인사들을 암살했다. 그리고 그 결과, 민심은 민심대로 등을 돌리고 정부는 정부대로 군대까지 동원해서 마피아를 때려잡는 바람에 시칠리아 마피아들은 세력이 위축됐다.[9] 고위 마피아가 교도소에서 동료 수용자들을 하수인으로 부리는 건 흔한 일이다. 마피아/기타 문서의 '세스 페란티' 참고.[10] 군대 경험이 없는 아나스타시아가 어떻게 훈련교관이 되었나 의아할 수도 있지만 그는 위에서 설명한 살인 회사의 주역이자 미국 마피아 역사상 첫손에 꼽히는 암살자로서 일명 최고 사형집행인(Lord High Executioner), 1인 군대(One Man Army)라고 불린 공포의 대상이었다. 즉, 단순히 사람 죽이는 일에는 최고 전문가였다. 실제로 아나스타시아는 "총이나 칼 같은 무기를 사용해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다. 맨손으로 죽이는 게 좋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1] 훗날 듀이는 1944년,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각각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해리 S. 트루먼에게 패해 낙선한다.[12] 이 시기 제노비스가 코스텔로를 무력으로 은퇴시키면서 기존의 루치아노 패밀리가 제노비스 패밀리란 이름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제노비스는 마약사범으로 몰려 교도소에 수감된다. 한편, 제노비스의 지시를 받고 코스텔로를 저격한 행동대원 빈센트 지간테는 이 사건으로 암흑가의 전설이 되었고 훗날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된다.[13] 사견을 덧붙이자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기의 마피아이자 조직폭력배로 꼽히는 루치아노의 말이다 보니 직업범죄인을 지망하는 청소년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말이라고 생각된다. 혹은 루치아노가 단순히 불임이었고, 그런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했던 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