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법/미국

 


禁酒法 / The Prohibition
1. 개요
2. 금주법 이전
3. 금주 운동
4. 입법 계기와 그에 대한 논란
4.1.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이라는 설
4.2. 독일계 이민자 견제의 일환이었다는 설
5. 시행 결과
6.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
6.1. 수요 측면
6.2. 공급 측면
6.3. 관리 측면
7. 금주법 폐지 과정
8. 여담
9.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10. 관련 문서


1. 개요



OverSimplified의 영상[1]

'''Section 1.''' After one year from the ratification of this article the manufacture, sale, or transportation of intoxicating liquors within, the importation thereof into, or the exportation thereof from the United States and all territory subject to the jurisdiction thereof for beverage purposes is hereby prohibited.

'''Section 2.''' The Congress and the several States shall have concurrent power to enforce this article by appropriate legislation.

'''Section 3.''' This article shall be inoperative unless it shall have been ratified as an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by the legislatures of the several States, as provided in the Constitution, within seven years from the date of the submission hereof to the States by the Congress.

'''제1절.''' 이 조항이 비준된 지 1년 후, '''미국과 모든 사법권이 미치는 영토[2]

에서 음료용 주류의 제조, 판매, 또는 운송, 수입, 수출은 금지된다'''.

'''제2절.''' 의회와 여러 주는 적절한 사법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 조항을 동시에 강제할 수 있는 억제력을 행사한다.

'''제3절.''' 이 조항은 여러 주의 입법 기관에 의해 헌법의 수정안으로써 상정된 지 7년 이내 비준받지 못한다면 무효화될 것이다.

미국 수정헌법 18조

의 제조, 판매, 운송, 수출입을 금지하던 수정헌법 18조를 뜻하는 표현이다. 줄여서 Prohibition이며, 이 수정헌법이 적용되던 1920~1933년은 Prohibition Era로 굳었다. 술을 마시는 행위 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고, 미국 영토 내에서 술을 구하거나 만들 수 없게 만든 법이다.

2. 금주법 이전


사실 미국은 술을 그야말로 퍼 마시는 국가였다.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러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들이 물자가 풍부한 미국땅에서 섞이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뭐든 크고 아름답게 만들던 기조가[3] 음주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700년까지 식민지 사람들은 발효된 복숭아 주스, 진한 사과 사이다[4], 주를 마셨다. 이들은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수입하거나 서인도 당밀을 증류해 만든 것이었다. 술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사람들은 바베큐, 장날, 선거 때마다 술 주전자나 술이 든 그릇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선거 후보자들은 공짜 술을 나눠줬고 이에 인색한 후보자는 이길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금욕적인 뉴잉글랜드 사람들도 술을 많이 마셨다. 청교도들은 알코올을 ‘신의 선한 창조물’이라고 불렀다. 자랑스럽지만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770년이 되자 미국인들은 매 끼니마다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눈뜨개'로 하루를 시작하였고,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갓난아기(!)를 포함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술을 마셨는데, 아기들은 부모들의 럼 토디 머그잔 바닥에 설탕이 많이 든 부분을 다 마셨다. 한 사람당 연간 3.5갤런 정도의 알코올을 소비했다. 참고로 여기서 3.5갤런 알코올은 일반적인 술 3.5갤런이 아니라 ​순수 에탄올 3.5갤런​을 뜻한다.[5] 미국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평균적인 사람이 ​80프루프짜리 술을 연간 8.75갤런 마신다는 것인데, 현재 소비 수준보다 45퍼센트 높은 수치.

그래도 당시는 고위층이 주로 술을 마시는 편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종종 술을 마셨는데 오크렌트의 책에 의하면, 워싱턴은 농장에 증류기를 가지고 있었고, 존 애덤스는 매일 진한 사이다[6]를 들이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토머스 제퍼슨은 와인 수집뿐만 아니라 자기가 직접 호밀을 길러 위스키도 만들 정도였다. 제임스 매디슨은 매일 위스키를 한 파인트씩 마셨고, 미합중국 육군 사병들은 1782년 이래로 매일 배급의 일환으로 4온스의 위스키를 받았고 조지 워싱턴 자신은 '강한 주류의 온건한 사용으로 인한 이점은 모든 군대에서 경험되었으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선거 유세하면서 사이다랑 맥주를 돌렸었다. 메사추세츠 지사였던 새뮤얼 애덤스는 주류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1800년대가 되자 영국이 노예제도와 관련됐다고 미국의 럼주 생산과 당밀 생산에 참여를 중단했고 미 연방 정부는 럼주에 세금을 물리기 시작한다. 럼주의 소비가 그렇게 해서 줄어드는 와중 중서부 지대에 이른바 '옥수수 벨트'가 생기게 됐는데 옥수수를 운반하다가 상하는 걸 막기 위해서 농부들이 아예 옥수수를 위스키로 만들어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옥수수로 만든 버번 위스키 덕에 1820년대에는 위스키가 25센트밖에 안 하게 되었다. 당시 커피, 와인, 맥주, 심지어 우유보다 더 싼 가격이었다. 거기에 영국 해군준사관 이하에게 희석한 럼주를 매일 지급하던 관행을 그대로 따르던 미합중국 해군미합중국 해안경비대 역시 비싸진 럼 대신 버번을 납품받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위스키 소비가 폭증하게 되고, 규모의 경제 덕에 단가가 계속 싸지면서 전국적으로 증류소가 5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당시 위스키 소비가 어느 정도였냐면 도시에선 노동자가 주말 동안 퍼 마신 술 때문에 숙취에 절어서 월요일에 직장에 못 나와도 이해해줬을 정도였다. 그리고 1830년에는 마을 종이 11시와 오후 4시마다 울렸는데 그 이유가 '그로그주 마실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국인 여행자였던 프레데릭 마얏은 저서인 'A Diary in America'에서 “미국인들은 술 한 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누군가를 만나면, 술을 마셔야 한다. 헤어지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친분을 맺으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거래를 끝내면, 마셔야 한다. 만약 싸우게 되면, 마셔야 한다. 화해하게 되면, 마셔야 한다. 날씨가 더우면, 마신다. 날씨가 추워도, 마신다. 선거에 성공하면,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시면서 욕을 한다. 그들은 아침 일찍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밤늦게 떠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시기 시작하고, 곧 무덤에 갈 때까지 마신다."라고 묘사했다. 1830년이 되면 1인당 80프루프짜리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 어쨌거나 이런 기조가 1900년대 초까지 계속돼서 수정헌법 18조가 나올 만했다. 단지 그게 지나쳐서 금주를 권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했다는게 문제였지만.

3. 금주 운동


금주 운동의 시작은 사회적인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은 구미권에서 사회 개선 운동이나 도덕 재건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라 마침 금주 운동도 최고 고조의 시기였다. 이미 유럽 각국에서는 금주 운동 단체가 출범했으며 영국에서는 1835년에 전국 절대 금주 교회가 출범하여 금주 집회가 열었다. 또한 술의 대안으로 홍차를 밀면서 금주 운동은 전세계로 퍼졌으며, 19세기 후반에 스위스,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에서도 금주 단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4. 입법 계기와 그에 대한 논란


미국에서도 1890년대 들어서 금주동맹이 결성되면서 금주에 대한 연방법 제정이 본격화 되었다. 금주법 입법을 주도한 측은 농촌지역의 개신교 세력인 금주 십자군과 로비 단체인 안티살롱 동맹, 기독교 여성단체인 여성기독교금주연맹 등이었다. 특히 금주주의 페미니스트 운동가 캐리 네이션(Carrie Nation)은 '예수의 불독'을 자칭하며 술집을 폐쇄하기 위해 직접 도끼질을 하다가 30번이나 체포되기도 했다.[7]
그 결과 1917년에는 이미 미국의 주 중 2/3 이상이 금주법을 시행하고 있었고, 수정헌법 18조로 금주를 헌법에 못박았으며 그에 근거한 금주법안인 볼스티드 법(Volstead Act)안이 1917년 8월 1일에 제출되어 1919년에 상원을 통과했다. 이에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당시 의회는 공화당이 다수인 상황이라 재상정을 거쳐 그대로 통과시킨 후 미국 법률[8]에 따라 1920년부터 여성의 참정권 부여와 함께 전국에 걸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볼스티드 법(Volstead Act)이 알코올 농도가 '''0.5%''' 이상이면 불법으로 규정지었다[9]. 즉 대놓고 법률에 '술 금지'라고 적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술에는 알코올이 들어갈 수 밖에 없으니 실질적으로는 모든 술이 걸릴 수밖에 없는 기준이다. 결국은 헌법에서 술 거래를 빼도 박도 못하게 '''위법'''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1920년에 이 법은 미국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4.1.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이라는 설


미국도 초기 식민지 시대때 매사추세츠의 법원에서 럼,위스키, 와인, 브랜디 같은 주류를 불법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그러다 184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금주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감리교가 이를 주도하였다. 특히 목사 마크 A. 매튜스는 정치적 부패와 성매매를 술과 연관시켜 금주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 결과 메인 주에서 약간 성공을 거두어 1851년에 법률로 통과된 적이 있다.
몇몇 정치인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1910~20년대 들어서 미국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와 도시 이주민 유입, 대량의 범죄 발생 등을 구조적인 악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음주, 흡연, 성적인 문란 등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했고, 또 이민자들에게 일자리 소개하는 술집을 정치 부패의 온상으로 간주하여 금주법을 주도해 나갔다.

4.2. 독일계 이민자 견제의 일환이었다는 설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감정이 악화일로로 치달은 미국독일 양국 간의 외교 감정으로 말미암아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이민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1919년 1월에 수정헌법 18조를 제정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독일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당시 손쉽게 뛰어들 수 있었던 양조업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는 볼스티드 법의 기준인 0.5%가 맥주를 노리고 정해졌음을 근거로 든다. 당시 시판 중이었던 맥주의 알코올농도가 2.5% 내지는 3% 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반박이 되어 있다. 양조업 자체가 미국의 전체 산업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업종인데 금주법의 결과로서 모두가 예측할 있었듯이 거의 모든 남성이 마시는 술을 금지함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단 미국은 독일계 이민자의 비중이 굉장히 큰 나라인데 이들의 미국적응을 돕고 추가적인 인력을 끌어오기 위해 미국정부는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등 주류 게르만계 미국인들에게 차별받는 민족들의 적응에도 사력을 다하던 시기였는데 미국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독일인들의 적응을 견제하기 위해 그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모순이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의 주류산업의 중심은 위스키와 진이었고 그 다음이 포도주였다. 한국인들이 만주까지 가서 벼농사를 지었듯이 전통적으로 위스키는 영국, 포도주는 프랑스, 맥주는 독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실제로 이 나라 출신 사람들이 주류업을 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위스키와 진이 압도적인 주류상품이었고 가정용/종교제례용으로 포도주 수요가 있는 것이 그 다음이었다. 당연히 잉글랜드와 프랑스계가 양조업을 주도하고 있었고 금액 기준 미국 주류 소비량의 80%가 포도주와 위스키 진으로 거래되었고, 맥주는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전세계에서 비교적 맥주소비가 굉장히 적은 나라에 속했고 금주법 당시에 마피아들이 밀조/밀수했던 술도 90%가 위스키의 밀조주인 문샤인이었다. 스피크이지라고 불리던 밀주판매점에서도 대부분은 위스키와 그 칵테일만을 취급했다. 미국인들이 맥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나아졌다곤 해도, 지금도 미국은 맥주는 집이나 경기장에서나 마시는 음료고 바에서는 위스키나 와인을 마시는 것이 보편적이다.

5. 시행 결과


'''역사상 이보다 더 기만적인 법도, 이보다 더 위선적인 법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술을 마셨다.'''

- '''빌 브라이슨'''

'''내가 만든 술을 밀주라고 부르던 인간들이 그걸 은쟁반에 담아서 내놓으니까 '접대'라고 부르면서 기뻐한다. 내가 이 사업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정치인들처럼 비싼 옷을 입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한심한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알 카포네'''

'''미국의 '자유'의 기준은 특이합니다. 합법적으로 음료를 구매할 수는 없습니다. 허나 자동 화기를 구매하시려고요? 문제 없습니다!'''

- 유튜버 Ahoy. 톰슨 기관단총 소개영상에서.

애초에 폭력 금지법이 있다고 불법 폭력 조직이 안생기는 것도 아니고, 마약 금지법이 있다고 마약 복용자가 안생기는것도 아니며, 밀수 금지법이 있다고 불법 밀수업자가 안생기는것도 아닌데, 술을 법으로 금지만 시키면 모든 사람들이 순순히 금주법에 복종할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한 안일한 판단의 결과는 현실은 시궁창임을 보여주면서 완전히 정반대의 효과를 낳았다. 결과만 요약하자면 법으로 금지가 되니까 사람들은 그로 인해 생긴 술의 희소성에 집착해 오히려 전보다 더 마셔댔고, 그런 행위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다보니 마피아를 필두로 한 불법적인 세력들이 손을 뻗쳐서 마피아들에게 막대한 자금력과 힘을 실어주었다. 초창기에 금주법을 지지한 사람도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식으로 부조리를 깨닫고 대대적으로 금주법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한때는 지지자였던 사람들도 등을 돌릴 정도로 엉터리였다는 소리다.
우선 금주법이 시행된 직후부터 미국 정부는 100억 달러가 넘는 주세[10]를 거두지 못했다. 농부들도 금주법 때문에 날벼락을 맞았는데, 술은 없는 물질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보리, 옥수수, 포도, 사과 같은 농산물을 원료로 제작하기 때문이였다. 때문에 술이 불법이 되니 술을 만들 원료가 될 농산물을 구입해갈 양조업자들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고, 양조업자들이 농산물들을 안사주니 농부들도 수익을 내지 못했다. 때문에 팔지 못하고 쌓인 잉여 농산물들의 재고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도 소비율은 비슷했기 때문에 재고를 방치하게 되면 관리비가 더 들어가는 판국이며, 조금만 만들기에는 효율이 너무나도 나빴기에 농부들로서는 해결책이 없었다. 애초에 이 문서의 상위 문서인 금주법만 가도 알겠지만, 이러한 금주법 대부분이 농업이 낙후된 국가나 대흉년과 같이 국가적인 재난상태에서나 발표했던 정책이다. 즉 술을 만들어 먹기 전에 식량으로 쓸 곡물조차 없을 때 쓰는 방식이다. 결국 양조업자들은 니어 비어(Near Beer. 도수 0.5% 맥주) 등의 새로운 아이템을 선보였지만, 시장에서는 외면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도 공화당과 금주법 지지자들은 이 부작용을 일시적인 것으로만 보며 희생을 감수하고 금주법으로 사회를 건전한 쪽으로 바꿀 야망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술을 마시던 문화권에서 갑자기 술을 마시는 걸 금지하자 부작용이 속출해서, 사회가 더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들이 금주운동의 롤모델로 삼았던 이슬람 국가들은 사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서 술을 금지했던 것인데, 금주법은 그런 뒷배경을 알지 못한 채 만들어져서 문제였다. 이슬람 국가는 원래부터 식수와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술을 담가먹을 형편이 안되어서 술이 널리 퍼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 탓에 술이 사치품이 되었고 따라서 술을 먹을 능력이 되는 권력자나 부호가 술을 먹으려고 하면 어마어마한 사치를 부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낭비를 막고자 율법으로 술을 금지시킨 것이다. 줄여서 표현한다면, '''금지해서 못먹은 게 아니라, 못먹어서 금지한 것이다.'''[11] 즉 소수의 취향[12]이었던 술을 금지시킨 것이니 반항이 없었던 것이다. 금주법 지지자들은 이슬람 사람들이 술 대신 커피를 자주 마셔서 알코올에 대한 부작용이 없었다는 주장도 펼쳤지만, '''미국이라고 커피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나마 합법적인 루트인 기독교의 성찬용 등 종교의식을 위한 포도주, 의료용 브랜디[13]의 소비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또한 미국에서 술을 팔거나 만드는 길만 막았을 뿐,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그때도 불법이 아니었기에 금주법 시대 때 유람선들은 이러한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서 외국 선적으로 등록 후 미국 영해 밖에서 술잔치를 벌였다.[14] 게다가 금주법을 만든 하딩 대통령도 폭탄주를 즐겼고, 금주법을 지지한 후버 대통령은 꼼수를 써서 술을 마시는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알코올 중독을 고칠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늘어갔고 술을 합법적으로 사지 못하던 세상이라서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를 들킬까 의사에게 병을 숨기고 병원에 가는 것을 기피하다 보니 국민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물론 단속도 많았다. 100년 역사를 자랑했던 유명한 음식점 델 모나코(Del Monaco)는 대낮에 개최한 비밀 무도회에서, '''차보다 약간 더 자극적인 음료'''를 손님에게 제공했다가 손님으로 위장하여 잠입 수사를 벌이던 경찰들에게 발각되었다. 결국 이 가게는 전국적인 망신을 당하며 폐업 직전까지 갔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셔대며 문제를 키워나갔다. 때마침 이때는 알코올 소비량이 미국 역사상 최고 수준까지 간 광란의 시기여서 그야말로 Speakeasy[15]의 전성기였다.
이 때에는 밀주가 기승을 부렸는데, 이웃나라인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술을 밀수하는 사례가 늘어났으며, 미국 현지에서도 생산된 밀주가 넘쳐났다. 당연히 기생충 같은 조직폭력배들이 돈 냄새를 맡아서 밀주 사업에 개입하였고 때마침 20세기 초 이탈리아 이민자 가운데는, 대규모 경찰수사를 피해 도주한 시칠리아 마피아까지 섞여있었다. 동네 불량배로 지내던 마피아들은 밀주 사업으로 세력을 키우면서 전국구 폭력단으로 변모해갔으며, 갱스터들은 이권을 차지하려고 집단 싸움과 살인 청부 같은 강력범죄, 엽기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고, 평범한 시민들마저 손쉽게 범죄에 손을 뻗어 뒷세계의 밀주판은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여기에서 끝나도 문제가 많은데, 대공황까지 닥쳐와서 사회는 엉망이 되었다. 실제로 시카고 같은 곳에서는 조직원들이 검경이나 시장 같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뇌물을 먹였다. 엘리엇 네스도 카포네를 탈세 혐의[16]로 겨우 법정에 넘길 정도로 부정부패가 들끓었다.
더군다나 합법적인 제조 기준마저 없어졌기 때문에 불량주가 판을 쳤다. 재료의 질이 나쁘고 썩은 것을 제조해 팔거나, 술에 독을 섞은 부류까지 나왔다. 또한 분별증류법[17] 같은 기술이 부족하여 생산비를 줄이고자 메탄올이 섞인 술을 만들어 판매하고 심지어는 공업용 에탄올로 제작한 술까지 만들어졌다. 이마저도 공업용 에탄올을 아끼려고 메탄올을 섞어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18] 보다 못한 미국 정부는 공업용 에탄올에 메탄올을 섞어서 밀주 산업을 꺾으려 들었지만, 밀주 때문에 사망한 사람만 늘어났다. 그마저도 여러 법의학자가 밀주는 목숨에 위험하다고 꾸준히 말해주지 않았다면 사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알코올 농도가 100%에 육박하는 술도 제조되었는데 이것을 먹고 계단 등에서 굴러 떨어져 죽은 사람도 속출했다. 게다가 알코올 농도가 100%인 것은, 체내 알코올 농도가 1% 이상이면 중독사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이용해 '''살인'''무기로도 악용되었다.

6.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



6.1. 수요 측면


수요 측면에 대해 알려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 자체를 거슬러 올라가봐야 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시민 대다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보다는 유럽 출신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동유럽/북유럽은 당연하지만 '''춥다'''. 그렇기 때문에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체온을 올려야 했고 이 또한 가장 간단한 방식이 '''음주'''였다. 거기에 추운 지방이라 채소가 잘 크지도 않다보니 육류 위주의 식단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게 주류 소비를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한마디로 북/동 유럽 사람들에게 음주란 단지 사치품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식량'''의 일부나 다름없던 것이다.[19] 주류인 서유럽(영국, 독일, 프랑스) 출신 뿐만 아니라 동유럽과 러시아의 이주민들까지 몰려가 형성한 게 미국이라는 나라이니, 기후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시작부터 주류와 나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거기에 서방에서 널리 퍼진 기독교와 관련해서도 주류(정확히는 포도주)와 관련이 깊다. 당장 기독교의 유명인사인 예수 관련 일화중에서도 빈객들에게 대접할 술이 떨어지자 예수가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가나의 혼인잔치 일화와 "빵은 나의 몸이고 술은 나의 피이니라"라고 말하며 제자들과 최후로 식사를 했던 최후의 만찬이야기에서도 평범한 식수가 아닌 포도주가 강조되고 있다. 즉 종교적인 의미에서 봐도 술은 관련이 깊은 것이며 아예 수도원에선 대대로 술을 직접 담가 마시는 곳도 있을 정도였고 종교적으로 적당량의 음주는 '''의무'''로 여겨질 정도였다.[20] 종교 자체가 그 시대와 사람들의 생활과 이래저래 엮여서 형성된 것이다 보니 사회상의 영향을 받은 것도 컸다. 쉽게 말하면 '''나한테 필요한거기도 한데 신까지 허락했으니 우리가 이걸 마시는 건 옳은 일이다.'''라는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아주 오래 전부터 술을 안 마시던 문화였거나, 이슬람 등 음주를 금지하는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이 아닌 이상, 금주법에 갑자기 영향을 받으면 대재앙이 생긴다. 조상 대대로 술을 마시다가 하루 아침에 납득가지 않는 이유로 금지 처분을 받으니까, 사람들은 술을 마시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캐나다나 영국에선 3달러 정도에 구할 수 있는 술을, 웃돈까지 줘가면서 손에 넣는 사람이 나왔다.
상황이 이러니 원래 술에 관심도 없던 사람마저, 술이 새로운 돈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갈수록 태산이 되었다. 제일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이전에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사람도, 금주법이 시행된 뒤부터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주를 정부에서 차단하니까 그 반작용이 튀어나온 사례다. 안 하던 짓도 하지 말라고 하면 괜히 하는 일이 사회 단위로 벌어진 셈이다.

6.2. 공급 측면


위에서 말했듯이 나라에서 금지하니 오히려 웃돈까지 주고서 술을 마시려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시장경제상 당연하지만 '''수요가 생기면 공급도 생긴다.''' 거기에 마약같이 기술도 재료도 여러가지로 구하기 어려운 것과 달리 술은 재료를 구하는 것도 만드는 법도 크게 어렵지 않다. 당장 품질을 신경쓰지만 않으면 포도만 왕창 모아놔도 와인을 만들 수 있고, 과즙이나 꿀물을 입구가 넓은 병에 넣은 뒤 천으로 덮어 적당한 온도에 방치하기만 해도 알코올이 나오며, 이를 증류기로 증류하면 그대로 증류주가 나온다. 그나마 어려운 증류주도 증류기만 빼면 만드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상술한 와인을 포함해 막걸리, 맥주같은 건 말할 가치도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도 문샤인같이 가족단위로 밀주를 만들어 직접 먹거나 마시는 사례도 흔했고 그렇다보니 밀주자들이 경찰들에게 적발되는 경우도 있냐하면 그냥 물통인지 알고 들어갔다가 주류가 들어간 통인지라 아이가 그대로 통 안에서 '''익사'''해버리는 참사도 나왔을 정도였다.
거기에 자국내에서만 해결했던 것도 아니고 미국 위아래로 있는 캐나다/멕시코 둘 다 미국처럼 유럽계 일족들이 크게 자리잡은 나라인지라 술 시장이 컸던 나라였으니 두 나라를 통해서 술을 사고파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캐나다 쪽은 오대호라는 들어가기는 쉽고 단속은 힘든 완벽한 밀수무역로까지 있었는데, 게다가 이 지역은 디트로이트, 시카고, 뉴욕 등 주 소비자층과도 매우 가까운 곳으로 럼 러닝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양이 밀수입되었다. 거기에 이 3국 술만 마시다가 질리면(...) 캐나다 동부,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프랑스생피에르 미클롱을 통해 유럽산 주류 등도 쉽게 밀매할 수 있었던지라, 사실상 아시아쪽으로 열린 미국 서부를 뺀 사방에서 밀주가 성행한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온갖 사건사고가 생겼는데, 제일 대표적인 것이 '''금주령 당시 밀주를 팔기 시작한 마피아/갱스터들의 팽창.''' 그 유명한 알 카포네도 금주령 당시 캐나다 위스키를 밀수해 파는 것으로 위세가 정점을 찍었고 그가 벌였던 밸런타인 데이 학살도 금주령과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마피아들은 이렇게 수입한 술을 이용하여 술을 뻥튀기[21]할 수 있는 불법 양조장을 건설, 관리하였고, 대중에게 이런 술을 팔아먹으면서 많은 돈을 거머쥐었다. 미국 정부는 이 뻥튀기 술을 막으려고 공업용 알코올에 메탄올을 첨가했다. 뻥튀기 술은 공업용 에탄올로 농도를 맞추니까, '유독성 물질인 메탄올을 섞으면 최소한 뻥튀기해서 양을 늘리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예상과 달리 이들은 주류 제작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은 수입해온 술 원액을 마시면 되며 애초에 이 정도 범죄를 저지르는 시점에서 구매자의 건강따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술들은 주점이나 음식점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불법 주점을 Speakeasy라고 불렀다.[22] 당시 이러한 주류점(酒類店)으로 시작하던 뉴욕의 21 Club은 지금까지도 레스토랑으로 업종을 바꿔서 살아남았다. 이런 곳에서 서민은 밀조주나 뻥튀기 술을, 상류층은 밀수입한 외국산 술을 소비했다. 당연히 손님이 낸 돈은 모조리 갱스터들에게 넘어갔다. 이게 얼마나 돈이 됐냐면, 캐나다에서 중상급의 위스키를 제조하는 브랜드 Canadian Club 의 기본 보틀 한병값이 그 당시 가격으로 '''16달러''' 였다. 참고로 당시는 브레튼우즈 체제로 35달러 = 금 1온스가 통용되던 시절이며 금값 기준으로 이것의 현 시세를 계산하면 '''60만원''' 이다. 참고로 거의 1세기가 지난 현재도 Canadian Club 위스키는 대충 16달러에 팔린다(...).
또한 이것을 배경으로 성장한 미국 마피아는 뒤늦게 FBI에서 1980년대에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세력을 축소시켰음에도 미국 최대 범죄조직으로 남아있다.

6.3. 관리 측면


금주령 당시 연방 정부가 배정한 금주단속요원은 '수천 명'이었다. '''그 넓은 미국을 심지어 도시 지역만이 아니라 시골/해안선/국경선등등을 겨우 수천명으로 전부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금주령을 내린 시점에서 주세를 걷을 의무도 사라졌으니 벌어들이는 세수가 상상이상으로 줄어들었는데, 그렇게 줄어든 예산에서도 그나마 할애해서 만든게 저정도 인원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전부 단속될 리는 만무했고 오히려 금주령 말기엔 단속은 개나주고 뒷돈이나 받아먹는 비리가 만연했을 정도였고 특히 알 카포네같은 대규모 세력은 단지 단속요원들을 넘어서 공공기관의 높으신 분들에게도 뿌렸다. 이는 평범한 뇌물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는데, 뇌물을 이미 한 번 받은 시점에서 공범자가 되는 꼴이므로 '''내가 뒤지면 내가 이거 까발려서 너희도 데려간다며''' 경고하는 거나 다름없었고 '''실제로 알 카포네가 이런 식으로 사법 당국을 위협했다.'''
거기에 주류 관련만 망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맥주라면 보리가 와인이라면 포도가 들어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걸 밀주가들에게 팔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꾼 맥주나 포도로 직접 밀주를 만들어 버리니 농업이 당연스레 도태되었고 개나소나 술을 쫓아다니다 보니까 경제 또한 상당히 파탄났다. 크게만 봐도 금주령 하나로 술 산업 도태 - 밀주 성행 - 밀주를 위한 곡식/과실이 대규모로 들어가느라 다른 데서 식량문제가 발발 - 개나소나 거액의 술을 사들이는데, 그 돈이 전부 마피아 손에 들어가니 정부엔 1원도 들어가지 않는 식의 붕괴가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7. 금주법 폐지 과정


금주법에서 파생된 범죄가 급증하자 미국 전역에서는 금주법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AAPA(Association Against the Prohibition Amendment, 반금주법협회)가 있었고, GE, 듀폰처럼 1차대전으로 성장한 거대기업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듀퐁 소속인 피에르 듀퐁은 댈러웨어 주 지역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상임위원회를 압박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이들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술을 금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극렬히 침탈하는 행위이며, 이는 수정헌법이 잘못된 것이다.' 하는 논리를 내세워서, 금주법이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법이라 주장했다
AAPA는 금주법의 악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꾸준히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때 나온 보고서에서는, 1920년과 1921년 사이에 범죄 증가율이 총 24%에 이른다고 보고했을 정도였고, 술이 금지된 탓에 약물에 중독된 것이 보고된 사례만 '''40%가 넘었다'''고 미 정부에 경고할 지경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깊은 뜻이 들어간 상태다. 마피아에 의한 '암시장의 폭력'을 암시하였으므로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여기에 여성정치인 폴린 세이빈은 금주법 초기에는 ''''내 아들들이 살아갈 때 술 없는 세상은 매우 좋을 것\''''이라며 금주법 초기에 금주법을 열렬히 찬성했지만, 금주법이 얼마나 잘못된 법인지 깨달은 뒤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실제로 1926년에는 ''''법으로 술을 막으면 만사 OK일 줄 알았는데, 막으니까 오히려 건전한 시민들이 술에 빠져서 타락하였으며, 이는 여성과 청소년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상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어 버렸다.\''''면서 비판했고, 결국 1929년에는 AAPA와 성격이 비슷한 WONPR(Women's Organization for National Prohibition Reform, 금주법 개정을 원하는 여성들의 모임)까지 결성하였다. 이 때문에 '그래도 여성들은 금주법을 찬성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조각조각 부서졌고, 금주법은 공공의 적(Public enermy)이 되었다.
1922년 Literary Digest에서 미국인 72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여론조사에서, 60%가 금주법에 회의적이라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결국 법률전문가들도 '금주법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법'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1928년 콜럼비아 대학의 니콜라스 버틀러 총장은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사설에서, '미국의 자유주의에 철저히 반(反)하는, 미국의 헌법정신에 맞지 않는 법'이라고 맹비난했다. 이후 1932년에는 연설에서 더욱 공격 수위를 높였다.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맥주를 허용해주면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의회에서 나왔지만, AAPA는 '''맥주를 허용해 준다고 금주법에 찬성할 줄 안다면 오산'''이라고 말했고, 금주법을 완전히 없애라고 미 행정부를 압박했다.
1929년에는 금주법에서 비롯되는 범죄를 줄이려고, 미 준법집행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Law Observance and Enforcement: 법의 준수와 집행에 관한 국가적 차원의 위원회) 혹은 '위커샴 위원회'로 유명한 기구까지 결성되었다. 하나 이놈의 위원회는 밥값을 못했고, 내부에서는 하버드 학장 프라우드와 같은 하버드 교수 프랭크 퍼터가 파벌 싸움을 일으켰다. 시민들에게 분노를 산 위원회는 소멸되었으며, 프라우드 학장은 하버드에서 된통 까였다.
1929년 10월에 대공황이 미국을 덮치면서 금주법은 동력을 잃었다. 대공황 때문에 소비가 줄어들어서 세수가 줄어들자, 금주법을 폐지하면 주세를 징수할 수 있게 되고, 음지로 빠져든 양조업계를 다시 양지로 끌어올려 고용을 늘리면 경제에 활력이 들어간다는 관념이 정계, 재계,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금주법은 수정'''헌법''' 18조로 규정된 조항이었고,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은 자기들이 의기양양하게 만든 법이라서 수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 민주당 소속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나를 밀어주면 금주법은 폐지하겠다'''면서 금주법 폐지를 제1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때문에 AAPA에서도 ''''솔직히 우리는 댁이랑 상극인데[23] 금주법만 없애준다면 댁에게 힘을 보태주겠다.''''고 선언했다. 금주법 폐지는 뉴욕타임즈 1932년 8월 10일자 사설에서 언급되었듯이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이슈'''였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공약의 차이는 여기에서 갈렸다. AAPA 지도층은 듀퐁을 비롯한 대기업 고위층으로 구성된 상태였다. 성향이 상극인 루스벨트와 AAPA가 술 문제 때문에 의기투합하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1932년에 민주당 소속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당선되었다. 1933년 2월에 수정헌법 21조가 의회를 통과했고, 같은 해 12월 5일 인준이 완료되어 수정헌법 18조는 폐지되었다. 주 단위의 금주법은 그 후로도 남부지방 위주로 상당 기간 존재했는데 1966년 미시시피주에서 금주법이 폐지되며 사라졌다. 현재도 카운티(군) 단위나 도시 단위로 술을 팔지 않는 행정구역은 존재한다.
결국 구체적으로 어떠한 효과와 역효과가 발생할 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정책을 안이하게 법으로 만들었다가 사회를 개판으로 만든 법으로, 의도는 좋은데 구상이 너무 허술한 사례다. 중독은 단순한 금지나 규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증명하였다.[24][25] 그리고 거대 갱인 마피아는 이미 미국에 깊이 자리를 잡고 말았다. 전국구 폭력단으로 변모한 마피아는 사업 분야를 점차 확대했다. 게다가 모하비 사막 한복판에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 쿠바에 대규모 투자까지 하는 조직이 되었다. 마피아는 금주법이 시행된 뒤부터 수십 년 간 강한 힘을 발휘했고 세력이 약화된 현재에도 미국의 뒷세계를 주름잡는 범죄조직으로 남아있다.

8. 여담


  • 금주법을 만든 공화당[26]워런 G. 하딩 대통령취미가 백악관에서 술 먹고 포커 하는 것이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파티 때 영부인이 직접 폭탄주를 말아줬다고 한다. 금주법 이전에 제조된 술을 폐기하거나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이를 이용해 법 제정 이전에 사 둔 술을 마시는 것이라 둘러댔을 가능성이 크다.
  • 그 다음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는 금주법을 신성한 의무라 평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엔 미국 법이 적용되지 않는 벨기에 대사관에 자주 찾아가 술을 퍼마셨다고 한다. 일단 주조와 매매만 불법이지 그걸 마시는 건 불법이 아닌데다, 법적으로 미국 사법권이 미치는 영토 및 영해 등에서만 단속할 수 있게 되어 있었으므로 외국 영토로 간주되는 대사관에서 술 마시는 게 불법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당이나 시민들은 욕할 수밖에 없었다. 후버의 정적들은 이를 두고 후버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신성했던 짐이라고 깠다.
  • 금주법과 마피아 덕분에 재즈, 그 중에서도 특히 빅밴드 편성의 스윙 재즈가 유행했다고 한다.
비밀 술집이 성황을 이루면서 더 많은 고객을 유도하기 위해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해야 했던 것이다.
'비밀' 술집이라는데 이렇게 대놓고 홍보를 했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그 원인은 그런 술집들은 대개 높으신 분들이 단골이었기 때문에 단속원들이 잘 안 건드렸다.
  • 심슨 가족》에서도 이 금주법을 깐 에피소드가 있다. 시즌 8 18번째 에피소드로 이름은 'Homer vs. the Eighteenth Amendment'(호머 대 수정 헌법 18조). 밀주 제작, 마피아의 개입, 암암리에서 벌어지는 주류 유통 등 금주령이 내렸을 때 생기는 일을 한 에피소드로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스프링필드에서 성 패트릭의 날 기념 축제 때, 바트가 호스로 발사하는 맥주를 마시고 취한 게 문제가 되어 과거 발령된 금주법이 다시 발령되자, 수많은 맥주가 땅 속으로 매장되고 더프 맥주 회사가 '더프 제로'라는 무알콜 맥주를 팔다가 망하는 등[27] 진전이 보이는 둥 하더니… 하루도 못 가서 팻 토니 휘하 마피아들이 경찰들에게 뇌물을 먹여 셸비빌에서 술을 밀수하질 않나, 경찰서장 위검이 술 먹고 취한 모습을 보여줘 빡친 여성들이 시청에 가서 항의한다. 결국 위검은 무기한 정직을 당하고, 렉스 배너가 새로운 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술 밀수를 철저히 막아버리고, 길거리에서 술과 범죄를 찾을 수 없게 된다. 허나 스프링필드 시민들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는데, 이 때 더프 맥주 측에서 맥주 매립을 TV에서 본 호머는 바트와 함께 맥주 매장지를 찾아가 묻혀있던 맥주들을 꺼내 물장사를 시작해[28] 맥주 남작이라 불리게 되고,[29] 꺼낸 맥주가 다 떨어지자 밀주까지 만들게 된다. 허나 그것도 증류기가 터져 오래 가지 못하고, 호머는 위검에게 자수하지만 형벌은 다름 아닌 투석기에 실려 날아가는 것. 허나 렉스 베너의 뻘짓으로 그가 투석기로 사출당하고, 알고 봤더니 과거 발령되었던 금주법은 1년 후 사라진지라 스프링필드에 다시 맥주가 돌아온다.[30]
  • 대체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원 역사대로 제정되지만, 이를 미래지식으로 알고 있던 주인공이 캘리포니아 한인사회를 통해 1차대전 중에 제사와 장례 문화를 미국 사회에 보여주고, 전통이라는 이유로 제삿상에 술을 올린 뒤 돌려마시거나, 화투 대신 포커를 치는 등의 장례 문화를 선전하며 공화당과의 연줄을 이용해[31] 금주법에서 예외로 인정받고, 이후 우보크(음복)이라고 불리게 된 3년상 장례식장은 미국 전역으로 진출해 일종의 합법 술집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줄이 되었다. 그에 더해 주인공 유진 킴 휘하에 있었던 유색인종 제대 군인들을 고용하는 등 사실상 원 역사 마피아의 자리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32] 연방정부에서 단속하자니 각 지역의 주지사와 상원의원, 군 장성들, 심지어 대통령인 워렌 하딩까지 우보크 워싱턴 D.C 지점에서 술 마시며 주인공과 포커를 치는 판국인 데다 금주법에서도 분명히 예외로 공인받은 지역이다.
  •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마피아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여서 자동차 경주를 열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 나스카의 기원이 되었다. 또, 이 때 자동차의 껍데기, 뼈대만 놔두고 엔진을 바꾸는 등의 개조를 통해 성능을 올리는 방식의 자동차 튜닝이 발전해서, 오늘날 스톡카 레이스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 이 금주법을 지지하여 1869년 창당한 미국 원외 정당인 금주당(Prohibition Party)은 2016년 현재도 미국에서 3번째로 오래된 정당으로 남아 있다. 다만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당세가 완전히 쇠락해서 2012년 대선에서는 미 전역에서 불과 518표(…)를 획득하는 데 그치기도 했다. 2019년 9월 1일 창당 150주년을 맞았다.
  • 국가 전반에 금주법을 퍼뜨리기 이전에도, 미국은 이미 남북전쟁미군, 특히 육군의 주류 배급을 중단한 바 있다.
뭔 소린가 싶을 텐데, 원래 군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부터 사기 진작 목적으로 술을 공급하곤 했다. 대체재로 나온 게 커피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커피산업이 시작되었고, 이때 나온 대표적인 커피회사가 폴저스와 맥스웰 하우스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커피에 맛들인 장병들이 귀국하면서 미국 커피시장이 폭발하게 된다. 이게 나중엔 필로폰으로 발전했지만 필로폰의 부작용이 검출된 후 필로폰은 마약으로 분류되어 지급이 금지되었다.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스팀팩은 이런 식으로 지급되던 위로성 기호식품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으로, 자꾸 쓰면 몸이 망가진다는 것도 이런 역사에서 비롯한 것. 해군해병대, 해안경비대도 그간 배급되던 주류가 끊기니 별의 별 밀주 만들기가 성행했다. 그나마 아이스크림이나 탄산음료 등을 풍족히 공급해 술의 수요를 일부나마 줄일 수 있었다.
  • 금주법이 폐지된 현재도 미국에서는 알코올의 소비 및 판매, 소유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이를 Dry County(드라이 카운티) 또는 Dry Communities(드라이 커뮤니티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켄터키 주의 사례로 보듯 드라이 커뮤니티 내에서 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성행하고[33], 술 파는 옆동네에서 음주하고 오다가 음주운전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커뮤니티는 알코올 반입, 소비금지의 반작용으로 인한 폐해가 더 심각해서, 밀수된 술로 인한 가정폭력, 살인 등의 사건사고가 매달 보도될 지경.
  • 1920~30년대 만화 베티 붑 중 베티 붑을 대통령으로 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 맥주 그림이 나온다. 당시 금주법에 저항하는 의미라고.https://youtu.be/V4Nu2RKIPlo

9.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10. 관련 문서


[1] 이스터 에그로 31분 37초에 월리가 있다.[2] 필리핀쿠바 등 당시에 존재하던 미국식민지, 그리고 미국의 외국 대사관외교공관, 그리고 국제법상 소속국 영토로 간주되는 기항지 무관 미국 정부 소유의 선박 내부 등이 이에 해당된다.[3] 일례로 피자는 본토인 이탈리아에서는 한사람이 다 먹기에 충분한 사이즈였지만, 미국으로 건너와서 한두쪽만 먹어도 배가 부른 사이즈로 진화했다. 그리고 술과 곁들여먹을 피자가 커지니 당연히 한두잔만 가지고 홀짝대면 아쉬우므로 술을 더 많이 먹게 되고... 하는 식.[4] 사실 사이다는 원래 사과주를 말하므로 이는 겹말이다. [5] 에탄올 3.5갤런은 리터 기준 13.24리터로 16.9도짜리 소주 220병 정도를 의미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연평균 소주 소비량이 87병이라고 하니, 한국인 평균의 3배에 달하는 음주를 미국인 모두가 즐겼던 것. [6] 우리가 아는 그 청량음료 사이다가 아니라 사과주를 의미한다.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이상하게도 '사이다'라는 이름이 청량음료 이름이 되어버린 것. 한국에서의 사이다는 lemon-lime soft drink라고 한다.[7] 페미니스트들의 술에 대한 적대를 관념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페미니스트들'''만'''이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보수성향 여성단체 뿐 아니라 노동자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한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자유주의 정당들도 이 시대에는 대개 당론이 금주법이었다(예컨대 핀란드 사회민주당). 여성들이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금주를 요구한 이유는 단순하다. '''남편새끼들이 술처먹고 처자식을 두들겨 패니까.''' 이런 실천적인 필요에 더하여 과학과 제도의 발전으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는 진보혁신주의적 사회기풍이 더해지면서 진보적 정치의제로서 금주법이 제기되었던 것이다.[8] 대통령이 법률에 거부권을 행사 했다고 하더라도 국회에서 재상정해서 통과되면 무조건 통과시켜야 한다.[9] 이 알코올 농도 0.5% 기준은 포도주포도주스를 구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포도주스는 자연발효가 약간 되는데, 이 때 생기는 알코올 농도가 약 0.5% 정도이기 때문. 이 또한 금주법 제정 과정의 공청회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다.[10] 주세는 어느 지역에서나 중요한 예산 공급원이다. 실제 술값은 만들어보면 알겠지만 미칠듯이 저렴하다. 그럼에도 술값이 비싼건 순전히 세금값 때문이다. 면세점 술이 그렇게 저렴한 이유 마찬가지이다.[11] 이슬람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을 듣는 이유 중 하나가 이렇게 율법의 진짜 취지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술의 경우를 예로 들면 원래는 부유층이 사치를 부리는 것을 막고자 넣었던 율법의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율법 그 자체만 덩그러니 남아서, 일반인들에게도 금주를 강요하게 되는 식이다.[12] 다만 이런 이유로 인해서 소수의 취향이 아닌 대중적으로 먹던 술은 금지하진 않았다. 대표적으로 대추야자 열매로 만든 술인데, 이쪽은 부족한 식수를 대신해서 마실 수 있는 생존 필수품이였기 때문에 금지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도 대추야자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당당하게 꾸란에 나와있는 마당에 꾸란에서 술을 금지하라고 했다고 대추야자 술도 금지하려 들었다가는 선지자 무함마드도 이단으로 몰려서 결과적으로 이슬람 자체를 자아비판하는 것밖에 안되니 대추야자 술만큼은 이슬람에선 사실상 유일하게 허용되는 술이다. 사실, 이 외에도 레바논이나 터키 등 세속주의가 강한 국가는 이슬람 국가임에도 술을 직접 만들거나 팔기도 한다. 물론 이 술이나 저 술이나 취해서 꽐라짓 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허용되는거고 꽐라짓 가면 짤없이 이단행이다.[13]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개츠비가 이걸로 떼돈을 벌었다. 자기는 약국 몇 개로 부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술로 떼돈 벌었다고 확신한다.[14] 전쟁이 일어나 자본이 필요하고 규제가 불가능한 나라에, 유람선 같은 배가 많이 등록되는 식이었다.[15] 무허가 주점.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무허가 주점을 저렇게 불렀다. 현대로 치자면 단골에게 소개받는 형식으로 들어가는 술집, 아는 사람만 아는 술집 정도다.[16] 미국은 범죄자들조차 탈세 혐의가 무서워 가짜 소득을 만들어내 세금을 내는 실정이다. 이는 미국 국세청이 탈세에 대해 가차없기 때문이다.[17] 술을 증류하면 에탄올과 메탄올이 같이 나오는데, 이 둘을 분리하는 과정이다.[18] 이것과 비슷한 사례가 영국이 산업혁명을 맞이했을 때 일어났다. 영국은 홍차 원가를 아끼려고 고양이 대변이나 스트리크닌(Strychnine; 맹독성 알칼로이드) 등을 섞어서 팔아먹었고, 사람들이 자극적인 맛에 중독되는 바람에, 스트리크닌이 포함되지 않은 홍차는 덜 팔렸다.[19] 러시아의 술로 유명하면서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드카의 어원은 '생명의 물'이다. 기계 연료 주입구에 부어넣으면 기계가 생기를 얻고(= 연료가 어는것을 방지해주며, 뭣하면 연료 대용으로도 사용 가능하다) 사람의 입에 부어넣으면 사람이 생기를 얻으니 이런 이름이 붙은 것.[20] 실제로 수도원에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행하기 위해 방문객들에게 먹을것과 마실것, 그리고 잘곳을 제공하곤 했는데 먹을것이나 잘곳은 그렇다고 쳐도 마실것은 산중에 위치한 수도원에 신선한 물이 있을리 만무하니 결국은 미리 담가두었던 술을 지급하곤 했다. 이 베품을 꾸준히 지켜서 성인으로 추대된 사례도 굉장히 많다. 좀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풀이하자면 방문객들에게 술을 꼬박꼬박 제공한 댓가로 성인으로 추대된 것이다.[21] 위스키 등에 물과 공업용 알콜을 부어 양을 늘리는 방법. 미드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나오는 말로는, 5배까지 뻥튀기 할 수 있었다 한다.[22] 다른 은어로는 Blind Pig 혹은 Blind Tiger. 여기서 유래된 용어가 암거래 시세를 의미하는 speak-easy prices다.[23] 당시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앞세운 계획경제 모델을 제시했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중심이었던 AAPA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였다.[24] 실제로 알코올중독 말고도 마약중독과 같은 중독증상을 치료할 경우 새로운 취미나 사회생활 등을 유도하여 중독물질에서 멀어지게(정확히는 그러한 중독물질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하는 것이다.[25] 행정학에서도 비슷한 현상으로 '규제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는데, 규제가 너무 가혹하면 사람들은 규제를 지키기보다는 그냥 무시해버려서 오히려 느슨한 규제보다 규제의 효력이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26] 위에서 언급했듯이 입법 당시 민주당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금주법에 반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했다.[27] 이 부분은 실제 유명한 맥주 브랜드인 버드와이저가 금주법 시행 당시 자사의 맥주를 무알콜 맥주로 전환해서 버텼던 일화를 패러디 한 것이지만 현실에서의 버드와이저는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술을 못마시는 어린아이들도 버드와이저에 친숙해져서 미래의 고객으로 바뀌면서 살아남은 반면 더프 맥주는 출시하자마자 깔끔하게 망했다. 이유가 매우 가관인게, 더프 맥주 사장은 사람들이 맥주를 맛 때문에 산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저 알코올 때문에 산 거였다… 이 뭐… [28] 볼링공에 숨겨 모 시즐랙에게 공급하는 식이었다.[29] 이 때 이걸 리사와 마지에게 들키는데, 당시 스프링필드의 상황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그 마지가 그걸 보고도 불법행위라며 기겁하기는커녕 감탄하면서 호머를 칭찬한다! 물론 리사는 악법도 법이라고 금주법에 실드 치려다 쓴소리만 먹었다.[30] 여기서 호머 심슨의 명대사 중 하나인 "술을 위하여! 인생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이죠!"가 나온다.[31] 주인공 유진 킴의 장인이 후일 부통령이 되는 찰스 커티스 상원의원이다.[32] 다만 마피아와 영역 충돌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마피아가 밀주를 서민들에게 공급한다면 우보크는 합법적으로 술을 제조해 부고장(사실상 회원증)을 제시하고 부의금(회비)를 낸 뒤에야 들어올 수 있으며 도박도 수백 달러가 기본으로 내걸리는, 고급화 전략을 사용 중이며 그에 걸맞게 손님들도 지역 유지, 군 영관 및 장성, 주지사, 대기업 트러스트의 회장 이하 임원들, 사교계 유명인들, 상원 및 하원의원, 장관, 대통령과 부통령, 대선후보까지 대부분이 거물급 인사들이고, 우보크에서 정치적 거래나 결정이 오가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은 수준인 만큼 마피아와는 궤를 달리한다. 무엇보다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이쪽은 우선 합법인 데다 군납품 기관단총, 자동소총 등을 실전에 참가한 제대군인들에게 들려주었고, 군부와 연방정부, 각 주 정부, 거물급 트러스트라는 든든한 뒷배를 가진 탓에 마피아 쪽에서 사린다.[33] 출처 : 루이빌 대학교연구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