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7세
1. 불행한 생애
1.1. 허수아비 국왕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차남으로 본명은 루이 샤를. 본래 노르망디 공작이었다가 형인 왕세자 루이 조제프(1781년 ~ 1789년)가 죽고 난 후 왕세자가 되었다. 아버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처형된 다음 날, 왕당파에 의해 프랑스의 군주로 선포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데다 탕플 탑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왕권을 전혀 행사할 수가 없어, 명목상의 군주였을 뿐이었다.
1.2. 근친상간 논란
프랑스 혁명 정부에 의해 가족들과 떨어져 탕플 탑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혁명정부가 지정한 감시원에게 학대를 받으며 홀로 지내게 되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재판 중에 어머니가 자신을 겁탈했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왜 루이 17세가 그런 증언을 했는지에 관해서 몇 가지 가설이 대두된 바 있는데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는 바로 루이 17세의 성격과 당시 정황.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의 성격에 대해 '주변의 부추김이나 자신의 상상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지녔다'고 기록한 바 있는데, 이는 원래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성격이다. 하지만 혁명기라는 특수한 시대에 이러한 성격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재판 과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이 없자 혁명가들은 가장 어린 루이 17세를 꼬드겨 근친상간을 했다고 말하게끔 했다. 전에 루이 17세가 빗자루를 타고 놀다가 고환에 상처를 입어서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 고모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가 이 상처를 돌봐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루이 17세가 자신의 생식기를 자꾸 만지고 건드리는 장난[1] 을 치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를 저지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기억을 토대로 혁명가들은 루이 17세를 부추겨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말하도록 했는데, 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7살의 남자아이였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증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루이 17세는 본래 건강이 좋지 않았고, 가족과 떨어져 독방에 갇혀 있으며 감시원들에게 심하게 학대를 당해서 정신 상태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의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아들을 용서했지만,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이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아 평생 남동생을 증오했고 남동생을 사칭하는 자들도 절대로 만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른들이 어린애의 감정을 건드려 애를 꼬셨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나 근친상간 증언을 한 데에는 루이 17세의 망상과 성격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원래 어린아이의 기억은 굉장히 조작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2] 어른들이 아이의 다른 기억과 연관시켜 "그 때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어? 이런 행동을 했지?" 정도로 구슬리면 대부분은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고 믿어버린다. 혁명 정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를 처형할만한 증언을 만들어야만 했고, 루이 17세가 아니라 어떤 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들의 운명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 시민들조차도 의구심이 많이 생겼다고 할 정도로 혁명 정부의 증거조작은 어설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착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들과의 근친상간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목인데,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어머니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당연히 억울하고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그동안의 재판에서 조용히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마저 이 터무니없는 주장에 처음으로 재판장에서 반박할 정도였고, 그 반박에 뒤에 있던 배심원으로 나온 시민들조차도 동조했다.[3]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형은 그대로 선고되어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로 가게 된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는 루이 17세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공주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2. 죽음과 음모론
2.1. 안타까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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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하고 난 후에도 계속 탕플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루이는 열악한 식사와 지저분한 감옥 속의 환경으로 인해 늘 병에 시달렸다가 나중에는 고열에 의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사망 당시 정황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감옥에서 탈출해 도피했다는 설이 돌았다. 죽기 전에 주정꾼 구두 수선쟁이 앙투안 시몽에 손에 맡겨져 시몽과 그의 아내에 의해 온갖 학대를 당했다고 전해오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어 입증되진 않았다. [4] 루이는 시몬이 떠나고 6개월 동안 구석진 독방에 갇혀 있다가 1795년 6월 8일, 캄캄한 감옥에서 폐병에 걸려 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전에 얼마나 심한 학대를 당했는지 사후 루이의 시신을 검사한 검시관 필립-장 플르탕(Philippe-Jean Pelletan)은 루이가 영양실조로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앙상하게 여위였다고 기록했다. 특히 검시관 필립은 루이의 몸에 채찍으로 맞은 상처자국이 많이 있어서 놀랐다고 말하며, 가슴, 등, 팔, 다리가 상처투성이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루이에 대해 동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루이를 해부하면서 왕족의 심장은 따로 보관한다는 관례를 생각하고 심장을 떼어내어 작은 항아리에 넣어 몰래 가지고 나왔다. 루이의 시신은 상트 마르게리트(Ste Marguerite) 섬에 있는 공동묘지에 아무런 표지도 없이 매장되었다.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자 프랑스의 1순위 왕위 계승권자였던 루이 17세의 쓸쓸한 최후였다.
2.2. 사칭자들의 등장
하지만 루이 17세가 죽자, 프랑스에는 해괴한 소문이 퍼졌다. 감옥 안에서 죽은 소년의 시신이 루이 17세가 아닌 다른 평민 소년이고, 루이 17세는 혁명 때 도망친 왕실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몰래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프랑스 혁명이 안정기를 찾은 후 루이 18세가 돌아오자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자기가 루이 17세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즉, 온갖 사칭자들이 다 나타나 자기 권리를 주장했는데 '''그 수만 30명이 넘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전술한 것처럼 루이 17세가 몰래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진 상황이었기에 이런 사칭자들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었다.
이런 예는 프랑스의 루이 17세만 있던 것이 아니었는데, 훨씬 전 시대에는 러시아의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 황태자를 사칭한 여러 사칭자들이 있었으며, 이후 20세기에는 제정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공주 사칭자들도 있는 것을 보면, 한 왕손들이 실종되거나 죽음이 불분명할 때 사칭자들이 꼭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사칭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로이센 출신의 시계공 카를 빌헬름 나운도르프였다.[5] 그는 사람들을 휘어잡는 말솜씨와 유쾌한 언변, 그리고 사교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그가 다른 사칭자들과 다른 점은 왕실의 예법들을 알고 있었고 왕가와 궁전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리 테레즈 샬로트가 만남을 거부하여 그녀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자신과 마리 테레즈 샬로트만이 알고 있는 증표를 갖고 있다며 만나기를 요구했고, 파리에서 과거의 시녀들을 비롯해 샤를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루이 샤를임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는 "내 남동생은 죽었으니 헛소리 말라"며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프랑스 왕실의 재산을 받기 위하여 법정 소송까지 벌였지만 패소했고, 영국과 네덜란드 등 체류한 나라에서 추방당하기에 이른다. 그는 1845년 네덜란드에서 병사했는데, 죽어서도 비문에 자신을 루이 17세라고 남겼다.
2.3. 밝혀진 진실
그리고 마침내, 진위는 현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루이 17세의 시신을 부검했던 의사 필립-장 플르탕이 그 심장을 따로 훔쳐다 보관한 뒤로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수정으로 된 병에 담겨 왕실묘지로 사용된 생 드니 대성당 지하묘실에 안장되었는데, 이 심장의 진위 여부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에 보관되어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과 루이 17세의 것이라고 알려진 심장에서 DNA를 추출해 검사를 해본 결과 모자지간임이 확인되었다. 작게 쪼그라들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루이 17세의 심장은 사후 200년 만에 부모와 만나 합장되었다. 비록 시신은 전술한 이유 때문에 찾을 길이 없지만, 심장이나마 부모가 잠든 생 드니 대성당에서 안식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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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이 루이 17세의 심장.
한편 이 대조 실험을 할 때 가장 유력한 루이17세로 알려졌던 나운도르프의 뼛조각 역시 유전자 대조를 위해 관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앙투아네트 일가와는 유전자가 아예 불일치하는 것으로 나왔다. 나운도르프의 자손들은 1851년과 1874년에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냈었지만…. 루이 17세의 심장이 발견되고 과학적 검사로 드러난 사실로 그저 사기꾼의 후손임이 드러났을 뿐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이 검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루이 17세 생존설을 외치고 있다.
3. 기타
엄청난 혼란기에 명목상의 군주로만 있었을 뿐인데다가 요절해서 존재감이 거의 없다. 이러한 사연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인데, 그러면 루이 17세는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경우도 많다.
만화 라 세느의 별에서는 주인공 커플이 누나와 함께 프로이센으로 탈출시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워낙 유명했는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도 루이 17세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나온다.[6] 스스로를 황제로 자칭하지만 흑인 노예이던 짐이 비아냥거리듯이 프랑스어가 듣고 싶다고 하자 미국에 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다고 한다. 더 웃긴 건 허클베리 핀이 가짜 왕보다 프랑스어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7] 결국 역시 공작임을 자처하는 사기꾼과 붙어다니면서 갖은 사기를 치다가 들켜서 조리돌림을 당한다. 이 사기꾼들 때문에 허클베리 핀도 곤욕을 치뤘고 짐도 잡혀서 죽을 뻔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루이 17세의 심장을 찾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Fate/Requiem에서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서번트로 등장. 클래스는 어벤저. 직접 출연한건 아니고 과거에 에리세에게 순수하고 순진한 모습으로 접근해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고 언급된다. 이 사건이 에리세에게 큰 영향을 줘서 Fate/Grand Order에서 남아있던 죄책감으로 인해 사건이 벌어졌다.
성녀전기에서는 얼굴은 안나오나 종장에 나오는 전령 소년이 루이 17세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1] 다만 루이 17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청소년이나 성인들이 하는 자위행위와는 좀 궤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2차 성징도 오지 않은 아이들이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해서가 아닌 다양한 심리적 요인으로 자신의 성기를 자극하는 행동은 의외로 드물지 않기 때문.[2] 현대 법정에서 어린이의 증언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 길을 잃어버린 사실을 기억 못하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자꾸 길을 잃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로 자신이 길을 잃은 기억을 떠올리는(사실은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기억) 것과 같은 이치다. 유년시절의 성폭행 기억은 억압된다 항목 참조.[3]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이 가장 반발했지만 그 중에는 남성들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4] 시몽의 부인은 어린 루이를 씻겨주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혀주는등 나름의 신경을 써줬다는 얘기도 있다[5] Karl Wilhelm Naundorff. SBS의 취재 프로그램인 백만불 미스테리에서는 논도로프로 발음했다.[6] 원래 이렇게 사칭하고 다닌 것은 아니고 같이 있던 젊은이가 자신이 사실은 공작이라고 사칭하자, '어쩌라고? 나는 왕이다!' 하는 식으로 욱해서 떠벌리게 된 것이다.[7] Parlez-vous Français(프랑스어 할 줄 아세요)?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