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트 크롤

 

'''뤼트 크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이집트'''}}}
{{{-2 34대
'''튀니지'''}}}
{{{-2 41대


'''클럽'''
'''아약스'''}}}
{{{-2 41대





'''뤼트 크롤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1977 · 1978
1976 · 1978 · 1979 · 1980 · 1981


<color=#373a3c> '''1979 Ballond'or'''
수상
케빈 키건
2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3위
'''뤼트 크롤'''

'''네덜란드의 축구감독'''
'''이름'''
'''뤼트 크롤
Ruud Krol'''
'''본명'''
뤼돌프 요제프 크롤
Rudolf Jozef Krol
'''출생'''
1949년 3월 24일 (75세) /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
'''국적'''
네덜란드 [image]
'''신체'''
184cm
'''직업'''
축구선수(레프트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AFC 아약스(1968~1980)'''
밴쿠버 화이트캡스 FC(1980)
SSC 나폴리(1980~1984)
AS 칸(1984~1986)
'''감독'''
KV 메헬렌(1989)
세르베트 FC(1990)
네덜란드 U-21 대표팀(1991~1993 / 수석코치)
이집트 U-23 대표팀(1994~1995)
이집트 대표팀(1995~1996)
자말레크 SC(1997~1998)
알 와흐다 FC(1999)
네덜란드 대표팀(2000~2002 / 수석코치)
AFC 아약스(2002~2006 / 수석코치)
AC 아작시오(2006~2007)
자말레크 SC(2007~2008)
올랜도 파이리츠 FC(2008~2011)
CS 스팍시엥(2012~2013)
튀니지 대표팀(2013)
에스페랑스 스포르티브 드 튀니스(2014)
알 아흘리 SC(2014~2015)
라자 카사블랑카(2015)
클뢰브 아프리캥(2016)
CS 스팍시엥(2018~2019)
'''국가대표'''
[image]83경기 4골 (네덜란드 / 1969~1983)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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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나 디스코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축구선수라면 목표는 축구에 있어야지.”

네덜란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2019년까지 CS 스팍시엥 감독을 맡았다.

선수시절 레프트백으로서 1970년대 토탈 풋볼이라는 전술적 혁명을 끌고 나온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돌풍을 이끌었던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뤼트 크롤은 1968년 AFC 아약스에서 데뷔하는데 성공한다. 처음에는 당연히 후보였지만 아약스의 주전 왼쪽 수비 반 두 벤보데가 당시 라이벌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하면서 크롤은 주전을 차지한다. 당시의 아약스는 이제 막 부임한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시기였다. 1960년대 당시는 전술의 혁명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을 시기였다. 아약스는 이 전까지 '전방 압박'이라는 신개념 전술로 에레디비시를 호령하고 있을 때였고 미헬스는 이를 캐치해내서 '압박'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다른 몇가지 요소를 자신의 전술에 도입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토탈 풋볼. 정해진 포지션을 벗어나 압박을 지속하면서도 공간을 찾아서 계속해서 유기적으로 스위칭하는 움직임, 또 이런 체력을 커버하기 위한 점유율 유지, 좁아진 공수간격에 넓어진 뒷공간을 보완하기 위한 오프사이드 트랩. 이는 이 전의 여러 전술들의 완전체였다. 그리고 이 전술을 이용하려면 가장 중요한, 이에 맞춰서 움직여주는 선수들이 필요했다. 그 때 마침 요한 크루이프가 자신의 팀에 들어왔고 그는 이 전술에 딱 들어맞았다. 또 수비의 크롤은 그 오프사이드 트랩과 커버 플레이의 핵심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1969-70에 첫 리그 우승과 컵우승을 해내며 더블을 따낸다. 또 아약스는 크루이프, 크롤, 바소비치, 네스켄스, 훌쇼프, 스바르트 등 강력한 멤버들이 여럿 모였다. 크롤은 레프트백 외에도 리베로도 뛸 수 있는 수비지역에서의 다재다능함으로 미헬스의 신임을 얻었다. 크롤-블랑켄부르크-훌쇼프-쉬르비르로 이어지는 1970년대 아약스 포백은 강력한 팀의 공격 가담을 하면서도 여러번 한시즌 20실점 이하를 찍는 괴물같은 수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0-71, 1971-72, 1972-73시즌 유로피언컵 3연패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다. 특히 1971-72시즌에는 리그와 컵까지 우승하며 트레블을 달성한다. 그러나 1974년도부터는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유로피언컵 트로피를 내주고 팀의 에이스 크루이프와 주장 피트 케이저르가 팀을 떠나며 크롤은 주장 완장을 받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1970년대 후반 팀의 약진을 이끌었다. 그리고 서른이 갓 넘은 나이 그는 아약스를 떠난다.
1980년 그는 잠시 NASL밴쿠버 화이트캡스 FC로 이적했다가, 이탈리아 세리에 ASSC 나폴리로 이적해 4시즌간 뛰었다. 이후 프랑스 리그앙AS 칸으로 이적해 1시즌간 뛴 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네덜란드의 감독이었던 리누스 미헬스토탈 풋볼을 국대에서도 잘 적용해 사용해 먹었다. 그것은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도 당연히 성공적이였다. 조별예선에서 2승 1무로 올라오며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압박 축구와 점유율 축구는 생소해서 어떻게 대처하기 힘들었다.[1] 크롤은 쉬르비르와 함께 강력한 오버랩을 선보이는 한편 이리에 한과 같이 지능적인 수비와 오프사이드 트랩을 선보이기도 한다.
2차 리그에서도 동독을 2-0,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크롤은 골을 넣으며 4-0 대승에 공헌했고,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크루이프의 1골을 앞세워 2-0으로 꺾으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서독이었다. 서독 역시 전술에 또 새로운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리베로 시스템'이었고 그 주인공은 프란츠 베켄바워였다. 그리고 그 전 시즌에 FC 바이에른 뮌헨AFC 아약스를 제치고 유러피언컵 우승을 하며 네덜란드와 서독의 대결은 전세계에 이목을 한데 집중시켰다. 경기 휘슬이 울리고 1분만에 크루이프는 서독의 수비를 다 뚫어내며 돌파해 페널티 킥을 얻었고 네스켄스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며 1-0으로 앞서간다. 그러나 이 후 네덜란드는 서독에게 다시 페널티 킥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하였고, 게르트 뮐러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다.[2] 크롤은 그래도 올스타팀에 선정되는 활약을 해낸다.
UEFA 유로 1976에서는 3위에 그쳤고, 크롤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참가한다. 네덜란드는 이란, 페루, 스코틀랜드와 한 조가 되었다. 크롤은 이번 대회에서는 레프트백이 아닌 리베로로 활약한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가족 납치 문제때문에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자리는 롭 렌센브링크가 메꾸었고 크루이프 없이도 결승까지는 승승장구한다. 조별예선은 테오필로 쿠비야스의 페루에게 밀려, 1승 1무 1패 조 2위로 올라가지만 2차 라운드에서 이탈리아, 서독, 오스트리아와 한 조가 되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5-1 대승을 거둔다. 다음 지난 대회 결승 상대였던 서독을 상대로 2-2로 비겼지만, 이탈리아를 2-1로 꺾으며 아르헨티나와 결승에서 만나게 된다. 개최국 아르헨티나는 홈 버프를 받아 승부조작과 운이 뒤섞이며 얍삽하게 올라왔고 그에 비해 네덜란드는 이 전 대회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에 버금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올라왔다. 경기가 시작하고도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는 사투를 펼쳤고 1-1로 결국 연장전으로 흐르지만 연장전에서만 마리오 켐페스에게 2골을 내주며 3-1로 패해 크롤은 이번에도 준우승 그치지만,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UEFA 유로 1980에도 출전하지만, 조별 리그 탈락을 맛보고, 이후 1983년까지 국가대표에서 뛰었다.

3. 플레이 스타일



그는 레프트백으로써는 강력한 체력을 바탕으로 공수를 오가며 양면에 걸쳐 빼어난 활약을 했다. 184cm라는 훌륭한 키에 피지컬까지 받쳐주었고 스피드까지 뛰어났다. 이런 신체적 유리함을 통해서 탁월한 돌파 능력으로 오버래핑도 했다. 킥능력도 아주 좋아서 정확한 크로스와 이따금씩은 중장거리 패스로 빌드업을 하거나 중거리슛으로 골도 넣었다. 직접 골을 노리는 프리킥도 차기도 했으니 말이다. 또 전술 이해도가 굉장히 좋아서 미헬스가 원하는 유기적인 스위칭을 통한 공격가담 그리고 수비 커버, 수비라인 조절에도 능해 아리에 한과 함께 오프사이드 트랩의 핵심이기도 했다. 원래는 리베로가 주 포지션이었는데 이는 크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인마킹, 태클, 커팅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으로 수비능력이 뛰어남과 함께 레프트백이 아니더라도 센터백,리베로,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다 소화하는 만능맨이었다. 또 주장답게 팀을 휘어잡는 리더쉽이나 수비 조율능력이 뛰어났다.

4. 지도자 경력


은퇴한 뒤 1989년 벨기에 프로리그KV 메헬렌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북아프리카의 클럽이나 국가들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명성에 비하면 크게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5. 여담


  • 현재는 아니지만 1979년 푸크 판헤일[3]의 64회 출장을 넘어서면서 잠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통산 최다 출장자가 된 바 있다.
[1] 물론 점유율과 압박축구,또 스위칭을 시도한 감독이 아예 없었던것은 아니었다. 또 당시에는 계속해서 전술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모아 완전히 정립시켰다는것은 미헬스이다.[2] 팀의 에이스였던 크루이프는 경기 내내 그를 대인마크하는 포크츠에게 막히며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크루이프가 죽어버리니 네덜란드 전체가 흔들렸고 결국 그의 부진이 가장 큰 패배의 요인이 되었다.[3] 1930년대 네덜란드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주축 미드필더로, 패스가 강점인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