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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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90년대 영국 록을 대표하는''' 잉글랜드 맨체스터 출신의 얼터너티브 록 또는 브릿팝 밴드이다.[1] '얼터너티브'라는 음악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이견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좁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오아시스는 얼터너티브가 아닌 모던 록, 특히 흔히 브릿팝이라고 부르는 '브리티시 모던 록'에 속한다.[2] 1집부터 3집까지는 오아시스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인기를 구사했다. 90년대 중후반을 그야말로 휘어잡던 밴드. 넵워스에서 열리는 그들의 공연을 직관하기 위해 '''영국 인구의 5%'''가 예매를 시도했던 적도 있다.[3]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노엘 갤러거'''와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인 '''리암 갤러거''' 형제가 주축이었다. 90년대에 비틀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앨범들로 역대급 성공을 거두었다. 섹스 피스톨즈, 더 스미스, 스톤 로지스 등의 음악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으며, 90년대 밴드 음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등과 함께 브릿팝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비틀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밴드이고 "제 2의 비틀즈"라 불릴 정도로 영국과 전세계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영국 대중들에게 얻은 인기는 90년대부터 해체하기 전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싱글 차트, 앨범 차트 성적이 매우 뛰어나다.[4] 노엘과 리암 갤러거를 비롯한 멤버들 모두가 자타공인 비틀즈 팬이다. 실제로 오아시스의 많은 곡의 진행이나 가사에서 비틀즈 곡들의 차용을 엿볼 수 있다.
2. 특징
보통 피치포크와 같은 평론가들이나 하드한 리스너들은 혁명적이고 실험적인 음악과 다양한 시도를 하는 아티스트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오아시스는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밴드이다. 오히려 그들의 음악은 상당히 보수적이며 언제나 기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존에 만들어져있던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음악을 내놓는 스타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커버'나 '카피'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연히 오아시스가 직접 '작곡 편곡 작사'한 노래들이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인지[5] 여러 장르의 음악을 성공적으로 실험한 블러의 후기 앨범이 침체기에 있던 오아시스의 앨범보다 높게 평가되고 오아시스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에게 진부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며 까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은 오아시스가 갖는 상징성, 인기와 브릿팝 무브먼트의 임팩트를 반증하는 것.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팝음악 DJ인 배철수씨도 오아시스에 대해 "음악적으로 새로운 건 없다. 그러나 멜로디와 사운드, 리프 모든 것이 한번 들으면 누구나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노래를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라고 직설적으로 평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oasis의 영어식 발음을 따르자면 ''오-에이-시스''(əʊ|eɪsɪs)에 가깝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 '오아시스(オアシス)'라고 적지만 현지에서 혹은 외국인에게 "오아시스"라고 말하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미 어워드에서 3번 후보에 오르고 상은 받은 적이 없지만 브릿 어워드에서는 17번 노미네이트, 6번 수상을 했고 이를 포함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시상식에서 92번 노미네이트, 37번 수상을 했다.
영국차트에서 8번의 앨범 1위, 8번의 싱글 1위를 했고 빌보드차트에선 3집이 앨범차트 2위, Wonderwall이 싱글차트 8위까지 올랐다.
현재까지 영국에서만 2000만 장 이상, 전세계적으로는 76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3. 역사
3.1. 데뷔 이전
1991년 리암 갤러거가 첫 밴드 프론트맨이 된 더 레인(The Rain)이라는 이름의 밴드로 보컬 인생을 시작했다. 더 레인에는 원래 본헤드와 귁시, 토니 맥캐롤, 그리고 크리스 휴턴(보컬리스트)이 있었다. 그러다가 본헤드가 보컬을 리암 갤러거로 교체하면서 리암의 제안으로 밴드의 이름을 오아시스로 바꾸게 되었다. [6] 리암이 말하기를 '''노엘이 밴드에 가입할 때 거의 리암에게 빌다시피 했다고 한다.'''[7] 기타리스트로 밴드에 가입하게 되면서 초기 오아시스 라인업이 완성 되었다.
밴드의 이름은 갤러거 형제의 침실에 붙어 있던 인디 록 밴드 인스파이럴 카페츠[8] 의 투어 포스터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갤러거 형제의 우상 비틀즈가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연주했던 클럽의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갤러거 형제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오아시스라는 이름은 가게 이름 같은 곳에 매우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디에서 따왔는지는 기억이 안난다고 한다.
1993년 어느 날,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2집 앨범 Loveless 발매 이후로 멸망 위기에 처해있던 인디 록 레이블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사장 앨런 맥기는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하던 이들을 발굴하게 된다. 애초에 오아시스는 공연이 없었으나 당시 그곳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던 시스터 러버스(Sister Lovers)가 ' 오아시스도 같이 공연했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해서 오아시스는 좋다고 따라갔던 것이었다. 문제는 공연관계자가 오아시스가 공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 문제로 오아시스와 시스터 러버스가 당황하고, 결국 시스터 러버스가 ''''오아시스가 공연 안하면 우리도 안해'''' 라고 배째자는 식으로 나온 덕분에 결국 공연을 하게 된다. 앨런 맥기는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여자친구를 놀래키러 왔다가(당시 여자친구가 시스터 러버스의 멤버) 오아시스 공연을 보게 되었고 그의 여동생은 첫 번째 곡을 듣고 앨런 맥기에게 오아시스랑 계약을 하라고 한다. 앨런 맥기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첫 번째 곡을 들었을 땐 한 곡 더 들어보고 생각하자는 심산이었으나, 두 번째 곡을 들었을땐 '계약 해야겠다.' 세 번째 곡[9] 을 듣고 나서는 ''''진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앨런 맥기의 크리에이션 레코드는 오아시스와 계약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오아시스가 그 공연장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린 끝에 공연을 따냈다던가, 사람들을 협박했다더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정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무근.[10] 아무튼, 이후 싱글과 정규 앨범 발매를 족족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레이블은 구원을 얻는다. 이후 밴드는 Big Brother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해 독립했고, 결국 크리에이션 레코드는 문을 닫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11]
3.2. Definitely Maybe의 성공
1994년 3월 18일, Live The Word라는 쇼에 출연해 곧 발매될 곡 Supersonic을 불렀다.[12] TV에서는 이게 오아시스 최초의 데뷔. 리암이 데뷔 극초반기에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4월 11일, 첫 싱글 Supersonic(오아시스)을 발매한다. 이 싱글은 일주일 후의 차트에서 처음보는 락밴드의 싱글치고는 높은 순위인 31위에 오른다. Supersonic은 아직도 많은 평론가나 팬들에게 오아시스의 명곡 중 하나로 뽑히며, 현재까지 40만 장 이상이 팔렸다.
6월 13일엔 그다음 싱글인 Shakermaker를 발매하고 싱글 차트에서 11위에 오르는데, 이 싱글은 코카콜라 광고곡을 표절한 곡이었고 이로 인해 오아시스는 호주달러 50만 달러, 한화 약 5억을 물게 된다. [13]
6월 26일, 1994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에 참가해 약 40분 동안 공연을 한다. 이 때 이미 발매한 두 싱글과 Live Forever 등 아직 발매하지 않은 1집에 수록될 곡들도 불렀다.
8월 8일, 싱글 앨범으로 발매된 Live Forever는 영국차트에서 드디어 2주 연속으로 차트 TOP 10에 올라 상당한 인기를 얻는다. 이 곡은 노엘 갤러거가 롤링 스톤즈의 Shine A Light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했으며, 오아시스의 곡들중에서도 '''최고의 명곡'''으로 뽑히는 곡이다. 대중성이나 킬러트랙이라면 대부분 2집 시절의 Wonderwall이나 Don't Look Back In Anger을 뽑지만, 이 곡의 아름답고 낙관적인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대부분의 잡지나 평론가들은 이 곡을 당연하다는 듯이 최고로 뽑는다. 4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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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 29일, 드디어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을 발매하게 된다. 이 앨범은 신드롬을 일으키며 단숨에 앨범 차트 1위를 찍었고, 일주일 만에 8만 6000장이나 팔려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14] 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초반엔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에서 랭크조차 되지 않았지만 1995년 낮은 순위에 랭크가 시작돼 58위까지 기록한 후 그 뒤에도 롱런해 미국에서만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Definitely Maybe은 대부분의 잡지들에게 극찬이란 극찬은 다 받고 명반으로 불리게 된다. Live Forever와 2집 곡들의 관계랑 비슷하게 Definitely Maybe과 이듬해에 나온 오아시스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관계도 인기는 대중성있는 2집이 더 많았지만 평론 면에서는 현재까지 1집이 훨씬 더 높게 평가받는다. Definitely Maybe 항목에 설명된 것처럼 이 앨범은 역사상 최고의 데뷔앨범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또, Definitely Maybe는 1994년 영국 앨범 차트 통산 판매량 순위에서 21위에 오르며 현재까지 영국에서 210만, 미국에선 100만, 전 세계적으로 15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10월 10일 발매한 네 번째 싱글 Cigarettes & Alcohol은 7위에 오른다. 술과 담배를 권유하는 곡인데도 7위다. 이 곡은 티렉스의 기타 리프를 표절한 곡. 그런데도 노엘은 "우리가 티렉스를 유명하게 해줬잖아?"라며 신경쓰지 않았다.
12월 18일에는 1집에 수록되지 않은 단독 싱글 Whatever를 발매하였다. 영국 싱글 차트에서 무려 3위로 진입하였으며 50주동안 차트에 머물게 된다. 일본과 한국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곡이며 한국에서는 삼성생명의 CF곡으로 쓰여 더 큰 유명세를 펼쳤다.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오아시스는 이듬 해인 1995년 2월에 열린 1995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신인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Live Forever)’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최고의 신인상'을 받는다.[15]
3.3. 블러와의 브릿팝 전쟁과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대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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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첫 선공개 싱글 Some Might Say는 1995년 4월 24일에 발매되어 처음으로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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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번째 싱글인 Roll With It을 통해 브릿팝 전쟁이 본격화 되었다. 블러가 자신들의 싱글 앨범 발매일을 오아시스 싱글 발매일에 맞춰 블러의 Country House와 오아시스의 Roll With It이 동시에, 1995년 8월 14일에 발매되는 일이 발생했다. 두 싱글이 1, 2위를 다툴 것을 예상한 영국 음악잡지 NME를 비롯한 여러 매체들은 본격 브릿팝 전쟁을 들먹이며 이러한 사건을 보도 하였는데 그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블러와 오아시스에게 쏠리게 되었고, 두 싱글 발매 일주일 후, 싱글차트에서는 Country House가 27만 4천장을 팔아 1위, Roll With It이 21만 6천장을 팔아 2위에 랭크 되어 결국 블러의 승리로 끝났다. Roll With It은 현재까지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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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싱글 싸움에서는 오아시스가 졌지만, 한 달 뒤 발매된 블러의 4집 The Great Escape는 영국에서 2주 동안 1위를 차지함에 그쳤으나 1995년 10월 2일 발매된 오아시스의 2집 정규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영국에서 무려 10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일주일 판매량이 The Great Escape의 한 달 판매량보다 높았으며, 2006년까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영국 내에서만 43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해 '''역대 영국 앨범 판매량 순위'''에서 3위에 오른다.[18] 미국에선 초반에는 80위에도 들지 못하다가 롱런해 1996년 결국 4위까지 랭크 되며 미국 내에서만 4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2018년까지 영국 470만 장 이상 등 전세계에서 2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상업적 성과 뿐만 아니라 평론도 현재까지 브릿팝 최고의 명반중 하나로 평가받는 앨범. 오아시스의 가장 유명한 곡들인 Wo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등이 모두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갤러거 형제는 당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19] 라는 별명을 얻으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거지도 오아시스 노래는 부를 줄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이 앨범의 세 번째 싱글인 Wonderwall은 10월 30일에 발매 돼 2위를 기록했는데도 2017년까지 싱글로만 무려 260만 장 이상이 팔리며 오아시스의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되고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제 2의 영국 국가라는 별명을 얻게된다.[20]
1996년 2월 19일 발매된 네 번째 싱글 Don't Look Back In Anger는 오아시스의 역사상 두 번째로 차트 1위를 기록하며 Wonderwall에 이어 오아시스의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이 된다. 국내에서도 Whatever과 같이 가장 인기 많은 곡. BPI 더블 플래티넘으로 13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중이다.
이후 1996년 5월 13일 발매된 Champagne Supernova는 미국에서 빌보드 모던 락 차트 1위, 메인 스트림 Top 40 차트 10위를 기록하며 미국에서도 50만 장 이상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 총 90만 장 이상의 세일즈를 기록하고 있다. 폴 웰러가 리드 기타와 백보컬로 참가했다. 평론가들로부터 리암의 보컬 능력이 가장 빛나는 곡으로 뽑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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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는 이듬 해 1996년 열린 1996 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21] ', '최고의 비디오[22] '에 후보 노미네이트되어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비디오상'을 받아 블러에게 밀려 1가지 상 밖에 받지 못한 1995 브릿 어워드와 달리 3관왕에 오른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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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상 소감은 큰 논란을 불러 오는데, 앨범상 수상 당시 먼저 올라가서 감사하다고 대충 말한 리암이 뒤따라 올라온 노엘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블러의 Parklife의 한 부분.
원래 가사는 Parklife인데, Shitlife 라고 바꿔서 불렀다 이 사건은 Shitlife 사건이라 불린다.All the people
So many people
And they all go hand in hand
Hand in hand through their '''Shit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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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넵웨스 공연의 포스터.
오아시스 신드롬은 96년 중반에 절정에 이르렀다. 메인 로드 등의 대형 콘서트장을 매진시킨 밴드는 96년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넵워스(Knebwort)에서 공연을 열고 양일간 12만 5천 명씩 약 25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참고로 260만 명이 공연 예매를 시도하였는데 이는 당시 영국 인구의 20분의 1 수준이며 어마 무시했던 오아시스의 인기를 체감하게 해 준다. 또한 이 공연은 영국 야외 단독 콘서트 사상 역대 2위[24] 를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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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관객 상황.[25]
3.4. Be Here Now와 브릿팝의 멸망
1997년 3집의 리드싱글로 선공개된 D'You Know What I Mean?는 영국 1위를 차지하며 일주일 사이에 무려 37만 장이 팔린다. 이전까지의 오아시스답지 않은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호불호가 갈렸지만 대중들은 3집에 대한 기대만 높아질 뿐이었다.
오아시스 신드롬은 같은 해인 1997년 3집 앨범 Be Here Now가 발매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3집 앨범은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린[26] 앨범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고 영국에서 2주째는 100만 장 돌파, 미국에선 첫 주에 2위를 기록하며 15만 장을 파는데 오아시스 자신들이 기대했던 40만 장은 기록하지 못했고 현재까지 미국에서 100만 장을 팔았다. 또, 영국에서 5주 1위를 차지하지만 평단과 대중의 차디찬 혹평을 듣게 되면서 , 오아시스 신드롬은 점차 하락세의 길을 걷는다.[27] 3집 앨범은 현재까지 영국에서 180만, 미국에서 100만, 전 세계적으로 900만 장이 팔렸다.
1998년 싱글들에 같이 팔리는 곡인 B 사이드들을 모은 The Masterplan이 발매됐다. 이 컴필레이션 앨범이 오히려 평론면에서 이전의 3집보다 훨씬 호평을 얻는다. 특히 2집 시절의 싱글 Wonderwall의 B 사이드곡이자 이 앨범의 타이틀곡 The Masterplan은 오아시스의 B 사이드 중에서만 명곡이라 뽑히는 것만아니라 오아시스의 모든 곡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 뽑힌다. 이 앨범은 원래 싱글을 비싸게 사야지만 B 사이드를 살 수 있는 다른 나라에서 판매될 예정이었으나 영국에서도 팔게된다. 영국에서 60만 장, 전세계에서 200만 장이 팔린다.
참고로 대중들과 음악평론가들이 Be Here Now의 실패 원인을 전 앨범Definitely Maybe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곡들에 비하여 긴 러닝타임과 형제간의 사이 불화 로 꼽고있다. 노엘은 한 인터뷰에서 Definitely Maybe와 Morning Glory가 지나치게 훌륭해서 그런 거라고 결국 본인들은 그들의 천재성에 의한 피해자라고 했다.
3.5. 밴드의 방황과 연달은 실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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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0년 발매한 4집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는 3집부터 이어져 온 싸이키델릭한 사운드를 보여줬고 역시 영국 1위를 차지했지만 빌보드에선 24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순식간에 차트에서 사라졌고, 현재까지 영국 60만, 전세계 300만 장이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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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Familiar to Millions라는, 영국의 웸블리 경기장에서의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고 영국 5위에 오른다. Familiar to Millions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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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발매한 5집 Heathen Chemistry도 영국 1위를 차지하고 빌보드 23위에 오른다. Stop Crying Your Heart Out등의 싱글은 호평을 받았지만 앨범은 계속 하향세를 보였다. 5집은 영국에서 100만 장, 전세계 700만 장이 팔렸다.
3.6. 제2의 전성기, 그러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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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발매한 6집 Don't Believe the Truth부터는 노엘의 슬럼프가 끝나고, 오랜 기간 끝에 밴드 멤버들의 음악이 마침내 조화를 이루게 되면서 1, 2집 같은 로큰롤 트랙들이 수록되며 전작들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12위에 오르고 영국에서는 90만 장을 기록하며 오아시스 후반 앨범 치고는 상당히 높은 800만 장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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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은 Stop The Clocks라는 베스트 앨범을 발매해 영국 150만, 전세계 300만 장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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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2008년 발매한 7집 Dig Out Your Soul에 이르러서는 전성기적 컨디션을 회복했다는 평과 함께 Be Here Now 이후로 오랜만에 미국 시장에서 5위라는 높은 순위를 기록하였고, 전세계적으로 25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4집이나 5집보다도 적지만 2000년대 후반 음반시장이 매우 작아졌기 때문에 상당한 판매량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소식도 잠시... '''2009년 8월 28일 노엘 갤러거가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이후 나머지 밴드 멤버는 비디 아이라는 이름의 새 밴드를 시작하고, 노엘은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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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이후 2010년 Time Flies... 1994-2009라는 또 따른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다.
2010년 브릿 어워드에서 오아시스는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지난 30년간 영국 최고의 앨범상을 받고 리암이 시상 소감을 했다.
본헤드는 2012년 Vinny Peculiar와 함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Parlour Flames를 시작하였다. 본헤드는 트위터 계정이나 사진 등을 통해 리암, 겜, 앤디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후 2014년 Phoneys And The Freaks 등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해체 선언 이후로 영국 도박사들이 이들이 5년 이내로 재결합한다는 쪽에 서로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014년 비디아이가 두 개의 앨범을 낸 끝에 미적지근한 대중들의 반응과 음악적 방향성 상실, 리암 본인의 의지 상실 등이 겹쳐 해체됐다. 2017년 6월부터 리암도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3.7. 정규 앨범 리마스터
2014년에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가 20주년 기념으로 리마스터링 재발매되었다. 다양한 사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말 오랜만에 '오아시스'의 이름으로 발매되는 앨범이다. 그들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었던 Dig Out Your Soul 이후 6년만에 리마스터링 앨범으로 돌아왔기에 팬들에겐 즐거운 소식이 될 것이다. 참고로 그 후 MG도 리마스터링으로 재발매되었다.
이후 BHN도 재발매되었다. 미공개곡 if we shadow, untitled 등이 포함되어 있다.
3.8. 오아시스 다큐멘터리 슈퍼소닉
영화 '에이미'를 만든 측에서 2016년 10월 2일 영국에서 오아시스 다큐멘터리를 개봉했다.# 제목은 오아시스의 첫 싱글 제목을 그대로 따온 Supersonic.[28] 한국에서는 2016년 11월 24일 개봉했다. 번역은 데드풀을 번역했던 황석희. 또한, 최근에 한 층 더 다듬어진 자막으로 한국에서 영화가 재개봉 되었는데, 2017년 11월 2일부터 4일까지 메가박스 코엑스에서'''만''' 청소년관람 불가 버전으로 상영되었다.
갤러거 형제의 어린 시절부터 오아시스의 최전성기었던 1996년 넵워스에 서기까지의 밴드 성장 과정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앨범으로 치면 싱글 1집 Supersonic에서 정규 2집 Morning Glory까지가 되겠다. 오아시스의 명곡들은 물론, 인터뷰와 주요 사건사고도 다룬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재결합을 외친다고.. 러닝 타임은 112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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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암의 트윗에 따르면 자신은 슈퍼소닉에 대한 수익을 일절 받지 못했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다. 리암 뿐만 아니라 같이 출연한 토니와 앤디도 돈 한 푼 받지 못 했다고. 하지만 어떤 한 명은 확실히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아 남은 사람은...
4. 멤버
4.1. 변천사
귁시와 본헤드는 3집 이후 탈퇴[35] 했다. 토니 맥캐롤은 1집에 드러머로 참여하였다가 Some Might Say 싱글을 마지막으로 실력 부족으로 해고되었다.[36] 이후 앨런 화이트가 정규 멤버로서 그 자리를 대신하다 2004년 탈퇴하면서 드럼 멤버는 공석이 되었다. 이후로는 링고 스타의 아들인 잭 스타키, 크리스 섀록 등이 객원 드럼 멤버로 참여한 바 있다.
1집부터 4집까지 라이브 공연에서 사운드를 맡은 사람은 마크 코일이었는데 이후 마크 코일의 귀 고막손상 심화로 인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참고로 1집을 제작할 당시 마크코일이 사운드를 뽑아냈지만 사운드합성에서 해매게 되자 다른 엔지니어(오웬 모리스)를 불렀다.
5. 음악
일반적으로 브릿팝은 어둡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것은 오해로서 사실 전혀 반대에 가깝다. 브릿팝의 전성기 시절, 그러니까 94-95년의 Blur, Pulp, Supergrass 등의 앨범을 들어보면 오히려 밝고 경쾌하다. 즉 브릿팝은 기타와 멜로디가 주가 된 90년대 영국의 모던 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아시스는 브릿팝의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브릿팝 밴드들에 비해 훨씬 볼륨이 크고 강렬한 디스토션을 먹인 거친 기타 소리를 특징으로 한다.
밴드의 음악적인 특징은 투기타에서 뿜어져 나오는 꽉 찬 사운드와 보컬 리암 갤러거의 시원시원한 발성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기본에 충실하고 기본에서 크게 벗어나는 음악은 하지는 않는다.[37] 오아시스 노래를 들어보면 정말 기본적인 코드로만 구성되어있는 경우가 많고 복잡한 코드는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다(기타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도 오아시스 노래는 쉽게 칠 수 있을 정도). 바레코드나 파워코드도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지, 대부분 오픈코드로 잡는다.[38] 또한 코드 변환도 최소화하고 단순한 '3코드'로 구성되어있는 노래가 많다. 이러한 면에서는 펑크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39]
하지만 단순한 코드 구성과는 달리 그 위에 얹혀진 멜로디는 굉장히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오아시스의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높게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 쉽지만 동시에 단순하지만은 않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노엘 갤러거도 오아시스의 음악이 대중적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굉장히 쉬운 코드 진행에 얹혀진 아름다운 멜로디를 꼽았다.
다른 요소를 꼽자면 리암의 목소리를 들 수 있다. 조지 해리슨이 "노엘도 노래를 할 줄 아는 친구인데 리암을 왜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발언한것 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리암의 존재를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렇게 보면 큰 오산이다.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음악의 방향이나 퀄리티가 크게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오아시스도 이에 속한다.[40] 노엘이 천재적인 송라이터이고 노래를 부를줄 아는 것도 맞으나 목소리의 참신함은 적은 편이다.[41] 노엘 버전과 리암 버전 둘 다 존재하는 노래(Live Forever, Slide Away, Lord Don't Slow Me Down 등등)를 들어보면 대부분 리암 버전이 훨씬 더 생기있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리암 특유의 락보컬이 아니었다면 오아시스가 추구하는 정통록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오아시스의 음악도 어느정도 익숙한 클리셰에 맞춰저 있는 경향이 있어서 음악에 참신함을 주기 위해 신선한 요소가 필요한데 리암의 개성있는 목소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해결해 준다. 노래 자체가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노엘이 불렀어도 성공을 할 수 있었겠지만 리암이 없었다면 국민밴드급의 아티스트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게 대부분의 평이다. 리암의 목소리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위해서는 리암 갤러거 항목 참조.
앨범의 트랙간 퀄리티 밸런스가 굉장히 잘 맞춰져있는 밴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밴드나 아티스트들도 싱글로 발매된 수록곡과 논싱글(non-single) 트랙간의 퀄리티 차이가 큰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 비하면 오아시스는 밸런스가 잘 맞춰져 있는 편이다.
4집 이후부터는 멤버의 대부분이 교체되고 음악적 방향이 변화하는 등 밴드의 색깔이 크게 변하게 된다. 그나마 노엘의 개인적인 회고록 같은[42] 4집을 제외하면 언제나 한결같이 로큰롤을 지향하려 노력하였다. 오아시스의 음악은 변화하지도 않고 진보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평론가들이 항상 라디오헤드와 비교하면서 단골로 하는 말이 바로 '진보'인데, 노엘 역시 라디오헤드와 본인들을 비교해가면서, "자신은 안전지대에 있는 것이 가장 좋은데 왜 다들 굳이 새로운 변화를 강요하느냐"는 식의 일장연설을 하는 인터뷰를 자주 해왔다. 다만 이렇게 혁신적이지 않은 음악관 때문에 일부 잡지나 평론가들(특히 미국 출신)이 밴드의 위상에 비해서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43]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반인 Definitely Maybe와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당연히 대부분의 잡지에서 역사에 남을만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앨범의 퀄리티가 비교적 평범해진 Be Here Now,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Heathen Chemistry가 과도하게 까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오아시스가 해체되고 나서 노엘과 비디 아이로 나뉜뒤에는 노엘이 상대적으로 훨씬 진보적인 사운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44] 오아시스의 음악적인 정체(停滯)가 노엘의 취향에서 말미암았다는 인식이 있다면 틀린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리암은 해체 이후에도 계속해서 로큰롤을 지향해 온걸로 보아, 오아시스의 음악적 성향은 리암의 입김이 의외로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영향을 받은 밴드로는 역시 비틀즈가 가장 유명하나, 그 외 음악적으로 티렉스, 섹스 피스톨즈, 롤링 스톤즈, 더 스미스 그리고 스톤 로지스 등의 영향 아래에 있다. 그리고 멤버가 교체된 4집 이후부터는 앤디 벨의 라이드와 겜 아처의 헤비 스테레오의 색깔도 찾아볼 수 있다. Q Special Edition 2002년 7월호 인터뷰에서 노엘은 '자신은 가장 유명한 비틀즈 팬이지만 오아시스의 음악은 비틀즈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음악을 신나는 면에서 스투지스, 섹스 피스톨즈, 비틀즈, 롤링 스톤즈나 스톤 로지스와 같은 뮤지션들과 비유한다.
멤버 모두가 엄청난 비틀즈빠이다. 특히 리암 갤러거는 존 레논 코스프레도 몇 년간 하고 다녔고, 자신의 아들 이름도 레논[45] 으로 지었다. 공연 중에는 비틀즈 9집 수록곡인 I am the Walrus를 부르기도 하고, Whatever 라이브를 연주할 때 종종 노래 끝부분에 비틀즈의 Octopus Garden을 넣는 등 짧게나마 비틀즈의 기타 리프를 빌려 넣기도 한다. 같은 예로 Don't Look Back In Anger의 인트로는 존 레논의 솔로곡 Imagine의 피아노 반주 일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리듬 기타의 기타 리프는 Let It Be에서 빌려 왔다. She's Electric은 본인들 스스로 '대놓고 비틀즈인 척한 음악'이라고 했다. 'The Turning' 마지막 부분의 기타 리프는 Dear Prudence를 대놓고 연주한 것이며, 가사 안에 Yellow Submarine이나 Magical Mystery, Tomorrow Never Knows 같은 구절을 쓰는 등 곳곳에서 비틀즈 오마주가 넘쳐난다. 리암은 존 레논은 찬양하지만 폴 매카트니에 대해서는 비교적 약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노엘은 매카트니를 좋아하며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 그 외에도 레드 제플린이나 롤링 스톤즈 등의 리프를 차용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오아시스의 사운드 그 자체는 참신함이 적은 편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밴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아시스만의 색깔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배철수의 평을 들자면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멜로디에 강한 스파이크로 되받아치는 듯한" 노엘의 작곡 능력에, 그 목소리만으로도 곡에 강력한 기운을 불어넣는 리암의 보컬이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5.1. 다른 밴드와의 관계
- 90년대에 리암이 어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록 스타들을 깐 적이 있었다. 이 무렵 TV에서 오아시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록 스타들이 오아시스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하는 내용이었는데 인터뷰에 출연한 이들이 모두 오아시스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늘어놨고, 이 다큐멘터리는 사전에 검열한 갤러거 형제에 의해서 방송이 취소되었다. 이후 리암이 라디오에 술취한 채 출연하여 믹 재거를 엄청나게 깠는데, 믹 재거, 꼽냐? 꼬우면 내일 아침 몇시까지 우리집 앞에 와라. 우리집 주소가 OOO의 XXX니까 꼭 찾아와라 라고 선전포고하였다.[46]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믹 재거의 팬들 수십명이 믹 재거 가면을 쓰고 리엄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결국 리암은 경찰을 불러 그들을 해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 데뷔 초기, 노엘이 폴 매카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폴 매카트니가 자네들 전성기때 우리랑 비슷하더군, 아주 잘 하고 있어.라고 칭찬을 하자, 그럴라고 돈 많이 썼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터뷰에서 욕설이 난무한다. 애초에 데뷔하면서 'Supersonic' 싱글을 낸뒤의 잡지 인터뷰부터 범상치 않았다.('''"퇴물들은 젊은 밴드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주로 아이러니하게 비아냥거리는 쪽은 노엘이며, 리암은... 숨쉬는 것과 비슷한 빈도로 Fxxk을 애용한다.[59]
정작 오아시스는, 정확하게는 리더인 노엘 갤러거가 많은 선후배 뮤지션들과 친분이 깊으며 무대에도 함께 선다. 대표적인 친구들을 꼽아보자면, 선배들 중엔 더 잼의 폴 웰러와 스톤 로지스의 이안 브라운과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절친. 더 후의 멤버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무대에 함께선 적도 있고, 피트 타운젠드와 노동자 파업에 대한 자선공연을 하기도 했다. 더 스미스의 조니 마와도 데뷔전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노엘은 그의 기타연주에 대해서는 절대 칭찬만 하는 편.[60] 모리세이와도 친하진 않은데 유머감각때문에 좋아한다고. 폴 웰러와 공연을 같이 했을정도로 친분이 있고[61] 아이리쉬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만큼 U2와도 친분이 깊다.[62] 노엘은 많은 선배 락스타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기도 하고, 노엘도 무척 존경한다.
그런 만큼 솔직하게 독설을 날릴 수 있는 관계이다. 후배들 중엔 카사비안을 무척 편애하며,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은 그냥 노엘빠. 트래비스는 스코틀랜드 지역 밴드 시절부터 노엘의 열렬한 애정을 받아 왔다. 마룬5 역시 오아시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마룬5의 경우, NME 2008년 8월호나 Q 매거진 2008년 10월호의 노엘 인터뷰를 보면...[63]
Magnet 잡지에서 푸 파이터스(밴드)의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가 리암을 인터뷰했을 때, 리암은 퀸(밴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프레디 머큐리가 엄청난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알겠고, 밴드가 명곡들을 만들어낸 것도 알겠지만 뭔가 마음에 딱 들지는 않는다고...다만 노엘은 핑크 플로이드 사진전 입구에서 로저 테일러와 서로 웃으며 악수하는 사진도 있고, 보헤미안 랩소디(영화)를 잘 보았다는 말을 하여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5.2. 블러와의 관계
더욱 자세한 내용은 브릿팝 전쟁을 참고하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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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오아시스 TOTP에 Whatever가 나오면서 데이먼 알반이 소개하는 부분 블러의 다큐멘터리인 No Distance Left To Run에 삽입되었으며 해당부분을 캡처하여 자막을 입힌 것이다. 사진 전체.
오아시스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블러. 이 둘은 오랜 기간 동안 브릿팝계에서 대립 구도를 펼쳤다. 이른바 '브릿팝 전쟁'도 이 둘을 언론들이 이용한 결과다. 이때 언론들은 60년대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실 1995년 싱글 동시 발매로 충돌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64] 문제는 그 이후로 영국 언론 특유의 포장하기와 몰아가기로 인해 그 둘을 마치 영국 음악의 최강자를 놓고 싸우는 라이벌로 포장하였으며 이는 훗날 브릿팝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 이 싱글 발매 싸움은 블러 측이 먼저 도발한 측면이 있었고 (블러 측에서 먼저 일부러 발매 날짜를 2주 정도 늦췄다), 이에 오아시스 측에선 굉장히 어이없어하였다. 앨런 맥기가 노엘에게 "우리도 발매 날짜를 늦추자" 라고 했지만 노엘은 X까지 말라고 했다 리암은 이후로 사적인 자리에서 그들을 만나면 으르렁거렸으며 훗날 블러의 베이시스트인 알렉스 제임스는 이 때의 일화를 두고 "전부 다 재밌었잖아 안그래?"라며 자조적인 모습을 취한다.
노엘은 블러의 리더인 데이먼 알반에게 '''"에이즈나 걸려 뒈져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발언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비난 속에 (심지어 이 시기에 노엘은 어머니인 페기에게 '난 네가 그런 말 하라고 가르친적 없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한다.) 스스로도 괴로워하다 결국 사과했다.
블러 같은 경우엔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의 싱글로 파크라이프가 선정되자 데이먼 알반이 '''오아시스도 같이 탔으면 좋았을거에요'''라고 말했던 일을 자신들의 '''최악의 실수'''로 꼽았다. 그래서 그 다음해 브릿 어워드에서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베스트 앨범을 수상하자 갤러거 형제는 Parklife를 Shitlife라고 놀렸다.
하지만 근래 들어선 양 쪽 다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다. 리암의 경우 데이먼 알반과 싸운건 노엘이지 자신이 아니라며 블러의 멤버들과는 오가다 길에서 만나면 인사 정도는 한다고 한다. 2009년 인터뷰에서 노엘 역시 데이먼 알반에 대해 자신과는 다르지만 재능있는 사람이라 했고, 브릿팝 전쟁을 회상하면서 철없던 시절의 얘기라 하기도 했다. 사실 노엘은 블러의 기타리스트인 그레이엄 콕슨에 대해선 줄곧 높은 평가를 해왔다.
2011년 Shortlist에서의 노엘 인터뷰에 따르면 우연히 모 클럽에서 데이먼 알반과 마주치게 됐는데, 그 날 둘은 15년 전 브릿팝 전쟁 때의 일에 대해 회상하며 서로 맥주를 마시며 깔끔하게 사과 및 화해를 했다고 전해진다. 원 디렉션이란 보이 밴드를 같이 깠다고 한다
사실 두 쪽 모두가 언론의 꼭두각시이자 희생양이었을 뿐이었고, 먼 훗날 노엘 갤러거와 데이먼 알반은 서로 화해하였고, TCT 공연에서 노엘이 블러와 함께 그들의 노래인 'Tender'를 같이 연주하면서 브릿팝 전쟁의 앙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2017년에는 고릴라즈 신보 Humanz의 싱글컷 중 하나인 We Got the Power에 노엘이 백킹 보컬을 넣으면서 처음으로 알반과 노엘 갤러거가 같이 작업한 음악이 나왔다. 이 즈음 이후부터는 탑스타들이 대거 얼굴을 비춘 노엘의 50세 생일파티에 데이먼이 참석하고 공연을 몇 번 같이 서는 등 도리어 친해진 듯 한 상황.
6. 갤러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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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거즈이다.
왼쪽부터 '''동생''' 리암 갤러거, '''형''' 노엘 갤러거. 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각 항목을 참고.
6.1. 형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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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가 좋을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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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형제의 모습.[65]
형제끼리 사이가 좋지는 않다. 어느 정도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부른다.'''[66]
평소에도 그리 자주 교류하는 편은 아닌 듯 하며 밴드가 해체한 지금은 인터뷰로 소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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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까는 사이사이 형제애를 슬쩍슬쩍 드러내곤 해 그 사이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으며, 굳의 정의를 내리자면 애증 관계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상당히 과격하게 서로를 저격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종종 보이는 극단적인 형제애는 불행했던 형제의 어린 시절[67] 에 기인한다.
96년 3월 22일 더블린 공연 후 호텔로 돌아온 갤러거 형제는 더선, 데일리미러 등의 타블로이드 언론사에서 준 돈을 받고 호텔로 찾아온 토마스 갤러거와 마주치게 된다. 그 때 노엘 갤러거는 불안 증세를 보이며 방문을 잠구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리암 갤러거가 뛰쳐나와 "한번만 더 우리 애[68] 눈에 띄면 가만 안 둘 테니깐 빨리 꺼져!" 라고 외친 적이 있다. 영화 슈퍼소닉에서 나온 장면에 따르면 리암이 몹시 화를 내 노엘이 리암에게 거듭 "반응하지마" 라고 형으로써 동생을 진정시켰으며, 리암이 "죽여버릴 거야" 라며 계속 화를 내자 결국 노엘이 리암을 보호하려고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리암이 회상하길 형이 있었기에 진정할 수가 있었다고.
[image]"얼마나 우리가 다투냐고? 매일. 매시간. 하지만 그건 증오가 아니야. 사랑이지. 형을 미워하지 않아. 사랑이야." - 리암
(소리치며) "난 그 새끼를 사랑해! 누구라도 형의 발을 밟으면, 내가 그 발을 다 잘라버릴거야! 형을 위해 감옥도 갈 수 있어. 그를 사랑해." - 리암
" 난 노엘을 사랑해. 이 넓은 엿같은 세상 전체에서 누구보다도 더 그를 아껴. " - 리암
" 당연히 공식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사이가 돈독하지. 난 형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보여줄 필요가 없어. 난 형을 좋아하고 형도 날 좋아한단 걸 알아. 대체 사람들은 뭘 원하는거야? 씨발 내가 형을 임신시키거나 뭐 그러기라도 할까? (낄낄댐) 노엘이 앉아갖고 이러는거지. (부푼 배를 쓰다듬는 척하면서) 개새끼. 애를 갖게 하다니! 지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하려고! 쌍둥이란 말이야! " - 리암
"...하지만 오아시스는 독립적인 세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지. 우리애랑, 나랑, 그리고 노래들이야. 그런 노력이 있고, 우리애 없는 오아시스는 존재할 수 없지. 하지만 리암은 그걸 모르고 있어. 왜냐하면 그 애가 술을 마시면, 경쟁 컴플렉스랑, 심각한 열등감 컴플렉스가 생기거든. 하지만, 있잖아. 그 애는 내 동생이야.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해도, 사실은 리암을 하나하나 다 사랑하고 있다구." - 노엘
"난 너랑 존 레논 노래만 부를거야." - 리암
"나도 너랑 존 레논만 내 노래를 부르게 할거야." - 노엘
사실 둘은 키스도 한 사이일정도로 종 잡을 수 없는 관계다. 게다가 과거 리암이 공연에서 '노엘과 섹스를 했다' 고 말한 것과, 형제간에 주고받은 노래의 가사들도 어딘지 묘하다.[69]
덕분에 갤러거 형제들은 해외 팬들에게 Gallaghercest (갤러거의 근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데뷔 때부터 이들의 싸움은 그 특유의 캐릭터와 맞물려 언제나 언론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싸움에서 어느 정도 부풀리거나 부추겨진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흔히 형제자매 사이에서 보이곤 하는 경쟁심리와 서로를 견제하려는 태도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라고 보면 되겠다. 5집 활동 시기에는 답지않게 형제애가 두터웠으나, 6집부터 다시 조짐이 보이더니 7집을 낸 이후부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시 사이가 엄청나게 악화되었다. 월드투어 중에서도 하루에 한두마디하면 많이 할 정도. 심지어 비행기도 같은 비행기 타기 싫다고 다른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8월 28일, 노엘이 밴드의 탈퇴를 선언하고, 이후 리암이 해체를 선언하면서, 교류가 끊기고 만다...
그런데 2015년 1월 26일엔 밴드의 해체 직후 이래로 리암과 노엘이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후 2015년 3월 14일 리암이 노엘의 'Keep it dangerous' 투어의 백스테이지 패스를 목에 걸고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팬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그런데 이건 '''리암의 패스가 아닌 것이 밝혀지면서''' 팬들은 리암이 희망고문을 시전했다며 허탈해하고 있다. 2014년에도 OASIS를 30분 마다 한 글자 씩 올려서 전세계의 팬들이 엄청난 멘션을 쏟아내며 재결합의 희망을 품었다. OASIS까지 올라오고 s가 안 올라오자 S 자판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는 멘션이 있을 정도. OASIS LG가 완성되자 팬들이 얼마나 환호했는지 모른다.[70] 또다시 1년 만에 이런 식의 트위터를 올렸으니 팬들은 희망에 부풀었다가 할 말을 잃은 상태. 리암은 트위터 상에서 노엘의 인터뷰에 관련하여 일일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데 밴드 해체 후에 형을 더 신경쓰는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여담이지만 해체 후 노엘은 인터뷰와 영화 Supersonic 등에서 리암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리암과 형제가 아니었다면 같이 밴드를 하지 않았겠지만, 형제이기 때문에 나쁘게 끝난 것", "우리가 형제란 건 밴드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의 고충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언급했다. 남들이라면 함부로 못할 말들을 형제지간이란 이유로 서로에게 막 퍼부어댔다고.
6.2. 해체 관련 일화
밴드가 해체까지 이어진 결정적인 계기로 2009년 V 페스티벌 공연 취소사태 이후, 8월 파리 공연 바로 전에 있었던, 언론이 '놀라운 싸움(Wonderbrawl)'[71] 이라 조롱하며 이름붙인 싸움이 꼽히는데, 확신할 수 없는 영국 찌라시의 보도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리암이 노엘에게 '''자두'''를 던졌고 리암이 자기 기타를 노엘에게 휘둘렀다. 노엘이 리암의 기타를 발로 밟아 부수자 리암이 기타 진열대로 달려가 노엘의 기타들을 역시 부쉈고 노엘은 차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리암이 오아시스 해체 이후 이탈리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이야기가 맞다'''고 한다. 다른 내용의 이야기들은 모두 루머로 판명되었다. 리암이 말하길 "내 기타는 내 기타였어. 근데 형 기타는 오아시스 거였다고. 그 기타를 산 돈 일부는 내 돈이었던 거지. 그걸 부수면 안 되는 거였어!"
2011년 7월 6일 있었던 노엘 갤러거 솔로활동 발표 기자회견에서 노엘이 묘사한 그 날의 싸움을 요약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체 인터뷰 영상
"파리에서 있었던 그 날 밤 동안에는, 리암은 꽤나 난폭해져 있었어. 꼭 WWE 레슬링 경기 같은 분위기에, 본인은 마초맨 랜디 새비지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건, 이렇게 온통 야단법석을 떠는 동안에 앤디는 옆에서 자기 신발이 몇 개인지나 세고 있었다는 거야, 한 마디도 없이. 리암은, "좆까 씨발" 하면서 탈의실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그러다가, 자두를 하나 집어와서는 훅 하고 던졌는데 그게 탈의실을 가로질러서 벽으로 처박혔어. 내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길 바랬는데, 왜냐하면 그랬다간 'Plum Throws Plum[72] ' 하는 식으로 훌륭한 헤드라인 하나가 뽑혀 나왔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가 방에서 나간 다음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는데, 자기 탈의실 쪽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자기 기타를 하나 들고 돌아와서는, 도끼라도 되는 양 휘둘러 대는거야. 처음엔 별 일 아닌 줄 알았던게 내가 뭘 어쨌든 간에 그건 정말로 쓸데없이 폭력적인 행동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걸로 내 얼굴 가죽을 거의 벗길 뻔했어. (기타가) 마침내 바닥에 떨어진 다음에는 내가 그 비극을 끝내버렸지(기타를 발로 밟은 것을 말하는 듯함). 거기 있던 밴드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우리 모두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 어떤- 누구도 한 마디를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됐지, 나 나간다...' 그대로 차에 타서 거기 5분 동안 앉아 있다가, '씨발 안해' 그랬던 거지."
싸우다가 오아시스를 떠나겠다고 말한게 한두번이 아닌지라 비교적 낙관적인 팬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정되고 말았다. Liam Gallagher : the end of oasis
6.2.1. 형제 싸움 시즌 2
해체 이후 파리에서 있었던 싸움과 관련해 많은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마지막 공연의 진상과 그날의 싸움을 묘사하는 내용이 서로 미묘한 부분에서 어긋나는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언론을 통해 거짓말쟁이로 불러가며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노엘이 솔로활동 발표 기자회견 당시 밝혔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절대로 오아시스 활동이 질렸거나 솔로 욕심이 나서 탈퇴하게 된 것은 아니다.
- 리암이 오아시스 투어 프로그램에 프리티 그린 광고를 넣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고, 나는 반대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 악화의 시발점이 됐다.
- V 페스티벌 공연이 취소된 이유는 리암의 후두염 때문인데, 리암 본인은 후두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숙취일 수도 있을 것. (나는 별로 믿지를 못하겠다는 식으로 시니컬한 농담을 던지듯 말했다.).
- 노엘이 숙취라고 짐작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며, V 페스티벌에서 나는 분명히 의사에게 후두염을 진단 받았었고, 의사가 공연에 나가면 안된다고 말했다.
- 노엘과 나 사이에서는 프리티 그린과 관련된 어떤 논쟁이나 토론도 없었으며,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All that sh-t … there were three of us in that room, and I’m telling you it was nothing to do with Pretty Green. I’m not going to add more fuel to the fire."
위 인터뷰 본문에서 앤디는 노엘의 기자회견을 봤다고 밝혔지만, 위 인용된 구절 같이 파리에서의 싸움은 프리티 그린에 대한 것 때문이 아니라고, 노엘이 거짓말을 한 거라고 한 것을 보면 기자회견을 자세히 보지 않았거나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다. '''노엘은 리암과의 파리에서 싸움이 프리티 그린에 대한 것 때문이라고 한 적이 없다.'''
이후 2011년 8월 19일 BBC 뉴스 엔터테인먼트 부분에서 리암이 노엘을 명예훼손으로 소송[73] 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해당 기사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앞에서 서술한 리암의 주장 및 견해 차이와 같으며, 이미 변호사를 통해 공식 사과 요구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사실 BBC 뉴스 보도 이전에 이미 더 선이 발빠르게 단독 보도라며 기사를 올렸으나 기사 특유의 광역 어그로성 때문에 소설 취급을 받으며 가루가 되도록 까였었다. 당시 공개된 성명서에서 그는 "(노엘의 추측은) 이미 락앤롤 농담의 수준을 벗어났으며 내 프로 정신을 의심받게 만들었다"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그저 사과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이에 노엘은 8월 22일 있었던 팬들과의 라이브 웹챗 이벤트 중에서, 어떤 팬의 질문에 "분명히 말하자면 그가 후두염 진단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걸 증명할 진단서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며, '''"만약 그가 내 말 때문에 화가 나거나 했다면 사과하겠다"'''고 짧게 언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11년 11월 12일의 NME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로는 리암이 노엘이 짤막하게 사과한 사실(위의 라이브 웹챗 이벤트)을 알게 되어 '''소송을 취하한 상태로, 상황 자체는 일단락된 것으로 전해진다.'''
2011년 11월 21일, 데일리 미러 지를 통해 노엘이 리암이 제기했던 소송에 대해서 법원에 제출한 변론서가 공개되었다. 해당 기사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노엘은 09년도에 서로 싸울 당시의 갈등 상황과 94년부터 05년도까지 리암이 술을 마시고 공연을 망쳤던 일들, 그리고 09년에 파리에서 리암과 충돌했던 사건 등을 열거하며 자신의 발언이 정당하였으며, 따라서 해당 발언에 대해서 명예훼손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뉴스가 가디언 지 등 다른 언론에 인용 및 과장보도되면서 노엘이 리암에게 맞소송을 제기했다는 식의 기사가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관련 인터뷰 (해당 질문과 답변은 2:05부터)
6.2.2. 재결합 가능성?
2011년 8월 17일 노엘 갤러거는 앱솔루트 라디오에서 진행한 Christian O’Connell의 아침 방송 인터뷰에서, 만약 자기 자신이 밴드를 탈퇴하지 않았다면,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20주년이 되는 2015년에 오아시스는 MG 20주년 기념 투어를 돌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다소 와전되어, 2015년에는 오아시스가 재결합을 할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2011년 10월 20일, 롤링 스톤 지에서 리암이 재결합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해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해당 기사 그의 말에 따르면 "2015년에, 만약 우리가 서로 똥고집 부리는 걸 그만둘 수 있다면, 우린 20주년을 기념해서 투어도 다닐 거고 앨범 수록곡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참고로 이 인터뷰는 스톤 로지즈의 15년만의 극적인 재결합 소식이 전해진 이후 나온 인터뷰이기에 더 뜻깊을 뻔... 했으나 사실 별 관련은 없다. 아래의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강조하는 것이지만, 리암은 이번 일은 스톤 로지즈와는 별 관련이 없으며 여기서 재결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에게 달린 문제라고 말한다.인터뷰어: 해체한 지금 상황에 대해서 후회하는 건 없나요, 아니면 '이런, 우리가 이랬거나 저랬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거라도, 밴드가 그래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했을까요 아니면 어찌됐든 끝을 보았을 것 같나요?
NG: 뭐, 내가 그 때 그 차에 앉아서 성급한 결정을 내렸던 건 정말 후회스러워, 정말로,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 상황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돌아가서, 공연을 끝내고, 그 다음 걸 끝내고, 그 투어에는 공연 두 개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건 내가 했던 (것들 중에서 가장) 경솔한 결정이었어,''' 그리고 우린 아마 모든 걸 마무리 지은 다음에 '''몇 년간은 다른 일들을 좀 했겠지,''' 2015년에는 뭘 할 생각이었냐면, Morning Glory의 20주년이 다가오는 해니까 그때쯤 아마도 우린 다시 돌아왔을거야. 새 앨범을 만들었을거고 그 앨범 수록곡을 전부 연주했을 거고 그리고 가장 위대한 공연으로 남게 되었을 테고, 당신은 거기 갔을지도 모르는거지. 관련 전체 방송 스크립트
리암은 이 인터뷰에서, 노엘의 공식적인 발언('''위의 앱솔루트 라디오 인터뷰''')이 자신으로 하여금 MG 20주년 투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계속 그런 말을 꺼내고 있는건 그 인간 뿐이지." "난 그를 고통 속에서 꺼내주고 싶어.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는 먼저 솔로 활동을 좀 해본 다음에 이제 아 내 동생 없이는 나는 잘 안 되겠구나 하는걸 깨달아야 할 것 같아. 알아서 스스로 깨닫겠지. 난 고려하고 있는 편이야 - 근데 난 그렇게까지 간절하지는 않아. 만약 (재결합이) 안 돼도, 신경 안써. 난 지금 비디 아이로도 충분히 행복하거든."
이후 하루 뒤인 21일 BBC Radio 4의 Profile에서도 MG 20주년 투어에 대한 리암의 긍정적인 답변이 이어졌다. 해당 인터뷰 그러나 인터뷰어가 재차 재결합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며, 노엘이 원한다면 재결합할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엘과는 애초에 이 문제를 상의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 몇년간 서로 이야기조차 해본 적 없다고. 이 날 빌보드 지와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재결합에 관련된 질문에 "올해는 아님." 이라고 짧게 일축한 바 있다.
2011년 10월 25일 노엘은 BBC Radio 1 Newsbeat와의 인터뷰에서 MG 20주년 투어와 재결합 가능성을 다시 한번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 해당 기사 그의 말을 옮기자면, '''"나는 분명 이유가 있어서 밴드를 나온거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어."''' 라고.
2012년의 오아시스 재결합 관련 노엘 인터뷰를 보아 노엘은 아직도 리암의 소송 건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 링크 일단은 서로의 관계 개선이 더 중요해보인다.
2012년 9월 10일 노엘은 Nation radio의 Chris Blumer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 "설령 모든 세상의 굶주린 아이들이 이 일에 달려있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 ''' 라고 재결합 가능성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일부 팬들에게도 못을 박았다. 해당 기사 그리고 리암은 노엘의 굶주린 애들 운운한 구절을 그대로 트위터에 올렸다.
2013년 6월 26일 리암이 "뮤즈(음악의 신)가 원한다면 그렇게 되겠지"라고 글래스톤베리에서의 공연을 마친 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발언했다. 또한 리암은 자신을 제외한 비디아이(前 오아시스 멤버들)멤버들과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만 리암 본인과 노엘은 서로 연락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Definitely Maybe 앨범의 20주년이 되는 2014년에 폴 웰러와 해피 먼데이즈를 게스트로 맞이하여 오아시스 재결성 공연을 열겠다는 계획이 나왔지만 노엘은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340억원의 제의였지만 노엘 갤러거의 관계자에 따르면 오아시스 재결성은 완전히 가망이 없고, 노엘은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1월 25일, 노엘이 드디어 재결합 가능성을 예기하는 떡밥을 던졌다! 해당 기사
2015년 5월 12일(한국시간 기준), 리암 갤러거가 황색 언론 더 선이 보도한 "노엘 갤러거를 제외한, 원년 멤버인 본헤드, 귁시, 토니 맥캐롤과 재결합을 하겠다는 루머에 대해 부정하는 보도를 NME 매거진을 통해서 밝혔다. 오아시스 재결합이든 솔로 활동이든 리암을 무대에서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링크
2016년 7월초 리암 갤러거가 트위터링크에 짤막하게나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내용에 따르면 자신은 오아시스의 결합을 바라고 있으나 노엘 갤러거측이 반대하는 상황 이라고. 노엘 갤러거 자신도 새 앨범을 거의 완성했다고 하는것을 보아 오아시스 재결합은 물건너 간걸로 보인다.
2016년 8월 초 리암 갤러거의 인터뷰링크에 따르면 자신은 오아시스를 할 생각이 있지만, 노엘이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오아시스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재결합에 관한 노엘과 리암의 입장을 정리해보자면, 리암은 노엘이 재결합 하자고 하면 지금 당장이든, 먼 미래이든 시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같이 활동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 다만 노엘이 하기 싫다는데 무릎꿇고 사정하면서까지 재결합을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노엘이 오아시스 활동을 하고 싶다면 자신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노엘은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듯 하다. 그래도 오아시스로 다시 활동하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일 것이라고 하면서 재결합의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고 언젠가는 리암이랑 같이 활동할것 같다고 얘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고 만약 재결합을 한다고 하면 미래의 일일 것이고 현재는 아니라고 인터뷰마다 못 박고 있다.
12월 7일(우리 시간 12월 8일) 진행된 BBC Radio2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오아시스의 해체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 리암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오아시스를 떠나기로 결정한 그날은 정말 악몽 같았지. 그 결정이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은 예상했어.
우리의 재결합에 대한 기사가 아직도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
후회하진 않지만, 오아시스를 계속 했다면 지금보다 더 큰 규모의 투어를 진행하고 돈도 훨씬 더 많이 벌었겠지.
난 정말 솔로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구.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오아시스가 끝난 건 정말 아쉬워.
물론 우린 각자의 길을 가는데 동의했고, 언젠가 다시 뭉칠 거라는 걸 알았지만..... 너무 먼 길을 와 버린 것 같아.
다시 뭉치긴 힘들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크게 후회하진 않아."
한편, 노엘은 이번 크리스마스에 리암을 볼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결국 재결합하기엔 노엘도 리암도 너무 멀리 와 버렸기 때문에 노엘의 이 말로 오아시스의 재결합은 더 어려워진 셈이었다. 이로 인해 팬들과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가까운 사람과 20년 간 일하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 많진 않을 거라 생각해.
20년 동안 힘든 일이 많았지만.....결국 다 괜찮아 지겠지. 확신해."
참고로 2017년 6월 인터뷰에 의하면 리암은 노엘의 핸드폰 번호조차 없다고 한다. 그래도 리암이 트위터로 노엘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기도 하는 등 예전에 비해서는 서로 많이 누그러졌다.
2018년 6월 10일 트위터로
라고 답하며 잘 살고있던 팬들을 또 울렸다.If you want 59k people to get wet do acquiesce at Finsbury X
(59,000명이 지리는 걸 보고 싶으면 핀스버리에서 ‘auquiesce'[74]
불러줘요)라는 팬의 글에Can't do that song without rkid
(우리 애 [75]
없인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거야)
2018년 7월에 리암은 트위터로 '''또''' 재결합 의향을 보였고 노엘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제 이런 일도 연례행사 수준...몇 주 뒤면 다시 노엘과 사라를 까는 트윗이 올라올 것임은 자명하다.
2019년 6월 기준으로 근시일 내에 재결합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형제 관계가 호전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음악적 견해 차이도 무시하지 못한다. 노엘과 리암은 현재 서로 매우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있는데, 노엘은 솔로 3집을 기점으로 과거 오아시스부터 이어져온 음악 스타일과 감성을 떠나보내고 (노엘의 커리어를 기준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있는데 반해, 리암은 비디아이 시절이나 솔로 시절이나 기본적으로 로큰롤을 기반으로 한 음악을 고수하고 있다. 둘 모두 솔로 가수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각자의 음악적 견해를 포기할 이유가 없고, 냉정하게 얘기하면 오아시스 시절과는 달리 현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도 아니고 오히려 같은 팀이 되면 자신의 음악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노엘도 "현재 상황에 재결합을 하면 공연 몇 번 하고 돈도 많이 벌겠지만, 단 하나의 스튜디오 앨범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새 음악도 만들지 못할 텐데 굳이 재결합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라는 식의 인터뷰를 몇 차례 했다.
게다가 2019년 여름에는 둘 사이의 사이가 다시 극렬히 악화된 상태로, 쌍욕과 가족 욕 등을 주고 받는 중.[76]
한국 시간으로 2020년 3월 26일 오후 3시경, 리암이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업로드했다.
2021년 새해가 되자 왠일로 리암이 노엘에게 인사를 보냈다.Wanna clear a few things up Oasis gig for NHS charity as in all money raised goes to NHS not to me will happen with or without Noel Gallagher it may not be the same but trust me it'll still blow you knickers off
As you were
LG x
'''C'mon Noel Gallagher'''
오아시스의 건강보험공단 자선공연에 대해 몇 가지 확실히 할게. 수익금은 내가 먹는 게 아니라 전액 건강보험공단에 기부될 거고, 노엘 갤러거가 있든지 없든지 공연은 할 거야. 물론 옛날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지리는 공연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
쉬어(As you were)
리암 갤러거
'''노엘 갤러거씨, 해보자'''
HNY Noel love you long time 2021 is our year c’mon you know LG x 트위터 링크
6.3. 축구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
훌리건 출신 노엘과 리암은 모두 엄청난 축구광이며 어릴 때부터 맨체스터 시티의 열렬한 팬이다. 그렇기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고있다.[77] 이들이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 된 이유는 단순히 '''맨유 팬이 더 많았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고...아버지가 응원하던 것을 그대로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엘의 유별난 축구 사랑에 대해서는 이쪽으로.'''
갤러거 형제는 모두 뼛속까지 맨시티의 팬이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시즌 중에 자주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유일하게 갤러거 형제가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공간인데, 2012년 현재는 교묘하게 경기장에서 마주하는 걸 피하는 듯. 축구를 볼 때도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따로 축구를 관람한다. 맨체스터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도, 같은 호텔에 있다고 하면 늦게 들어온 쪽이 알아서 호텔을 옮긴다는 듯. 노엘 갤러거는 '텔레비전에서만 종종 리암을 봤을 뿐 해체 이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갤러거 형제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홍보 담당 보드진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진정으로 성공한 축덕. [78] 게다가 2005년 맨시티 홈구장인 이티하드 스타디움 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79]
내한공연 왔을때 어느 기자가 박지성에 대해서 아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은 맨시티 팬이라 그런 선수 모른다고 했다... 근데 그 말하고난 뒤에 사실은 장난이고 대단한 선수에요 이렇게 말하였다 [80]
참고로 박지성도 오아시스라는 밴드를 잘 몰랐던 듯하다. 그래서 박지성이 영국 모 토크쇼에서 비틀즈와 오아시스 중에 어느 쪽이 좋냐는 질문을 받자 오아시스가 어떤 밴드인지 되물어 사회자가 "'''오아시스는 맨체스터 출신 밴드고 비틀즈는 리버풀 출신 밴드"라는 말을 듣자 오아시스를 택'''한 적이 있었다. 질문자의 의도에 따라 박지성이 농락당한 듯[81]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리오넬 메시가 '''"오아시스의 재결합을 위해 월드컵을 우승하겠다"'''라는 말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리오넬 메시에게 오아시스의 음악을 추천한 사람은 다름아닌 카를로스 테베즈. 2010년 영국 총선 때 노엘은 "난 투표용지에 Tevez is God(테베즈는 신이다)라고 쓰고 투표함에 던질거야. 난 테베즈를 뽑을거야."라고 말하면서, 자기 아들 이름을 테베즈로 짓겠다고 하는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보다는 메시의 맨체스터 시티 이적이 오아시스 재결합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잉글랜드의 숙적 독일에게 4:0으로 쳐발리며 광탈했기 때문. 그리고 이 모든 해프닝의 원인이 된 메시의 발언이 실린 매체는 유명한 영국 찌라시 '''더 선'''. 진위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찌라시 인걸로 밝혀졌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오아시스의 열렬한 팬이다. 인터뷰에서 여러번 매우 좋아한다고 언급했지만 유나이티드의 선수라 갤러거즈는 별 반응이 없다...오아시스가 해체하기 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후 한 인터뷰에서는 맨체스터에서 살던 시절 길거리에서 몇번 오아시스 멤버들을 봤지만 말은 못걸었고 카카도 자기랑 취향이 비슷하니 카카와 함께 선수들을 설득해서 돈을 모으면 자기들만을 위한 오아시스 콘서트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7. 국내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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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그린 데이, 린킨 파크와 함께 록 입문자들이 많이 듣는다.
96년 경향신문에 보도된 오아시스. 당시의 브릿팝 열풍은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주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 PC 통신의 락음악 동호회를 중심으로 오아시스는 큰 인기를 모으며 팬클럽이 결성되고 이들에 대한 활발한 정보가 오고 갔다. 록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음반 매장이 아닌, 서울의 웬만한 대형 레코드점에는 국내에 정규발매되지 않거나 정식 수입되지 않은 오아시스의 싱글은 물론, '''부틀렉까지 구비해 놓았을 만큼 판매량도 인기도 보장된 밴드'''였다. 2집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는 당시 유행하던 팝음악 모음집 MAX 첫 번째 시리즈[82] 에 수록되는 등 일반 팝음악 팬에게도 통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밴드였다.
당시 한국 팝 시장은 빌보드 미국 차트에 굉장히 의존적이라(음악 잡지나 프로그램들도 유럽 차트는 소개 안해도 빌보드 싱글 차트와 앨범 차트는 100위, 200위까지 전부 수록했다) 영국, 유럽 쪽 아티스트와 브리티시 락 밴드의 인기는 매니아 층에 비해 대중적인 폭을 가지지 못했는데 오아시스는 2집이 빌보드 4위, 3집이 빌보드 앨범 차트 2위(당시 1위가 I'll Be missing you로 신드롬을 만들던 퍼프 대디)에 랭킹되면서 범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인이 되엇다.
오아시스가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 선 3집부터는 한국 소니 뮤직에서 싱글이 정식 발매되어 5천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금방 물량이 떨어져서 매장마다 가격을 올려 받거나, 개별적으로 영국에서 수입해와서 비싼 가격으로 싱글을 구해야 했다. 인기에 비해서 내한 공연이 무척 늦게 성사된 편이지만, 이렇게 꾸준히 유지해온 팬덤의 에너지가 극대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내한 공연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국내 음악 시장에서 오아시스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해체 이후에도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 노엘 갤러거의 성공적인 솔로 활동과 내한 공연 덕분에 10대의 젊은 팬층이 유입되는 몇 안되는 90년대 락 밴드. 락음악 팬들도 노엘 갤러거가 어린 나이의 신규팬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점을 굉장히 중시 여기고 있다.
7.1. 내한 관련
2006년 내한공연으로 1994년 오아시스의 성공적 데뷔로부터 10여년 간 오아시스를 짝사랑 해오던 한국의 팬들은 드디어 올림픽홀로 이들을 맞아 들이기에 이른다. 예매 3주만에 5500여 석이 매진되고 기획사 측에서 특별히 100석을 추가시켰다. 관중의 호응이 대단했으며, 타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넥타이 부대(퇴근 직후 공연장을 찾은 중년 남성)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유명한 일화로 그 넥타이부대원 중 한 명이 대형 스피커 위에 올라가 괴이한 춤을 추며 열광했는데 리암이 공연 도중 관계자에게 '저 남자좀 내려가게 해! 웃겨서 노래를 못 하겠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며, 공연 도중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끝난 후 무대 뒤에서 노엘은 '내가 해왔던 공연 중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리암은 '관객들이 정말 무섭더라'고 떠들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후 싱가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리암은 '관객이 미친 듯이 광분한 최고의 공연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이웃나라 일본에 비해 적은 음반판매량을 비롯, 락음악이 기를 펴지 못하는 작은 음악시장으로 오아시스에겐 거의 인식 밖의 나라였을 한국은 이 공연을 통해 그 존재감을 밴드에 알렸으며, 이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의 전화 인터뷰, 2009년 두 차례의 내한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에게 보낸 한국의 오랜 짝사랑이 작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2009년 4월 1일, 오아시스는 'Dig Out Your Soul' 세계투어의 일환으로 이전보다 큰 올림픽 공원 체조공연장에서 두 번째 내한공연을 치렀다. 이 때는 10,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였다. 오아시스는 투어 초기에 짜여진 셋리스트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 투어에서는 오아시스와 그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 'Live Forever'가 빠져있어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 공연관계자가 팬들이 이 곡을 듣길 원한다는 간곡한 바람을 전했던 일, 공연에 앞서 호텔 앞에서 팬이 이 노랠 불러달라 직접 청했던 일을 기억한 노엘이 특별히 어쿠스틱 연주와 함께 Live Forever를 불러 세계의 오아시스 팬들을 놀라게 했다. 공연 중간중간 팬들이 합심하여 노래를 따라불렀던 영향 또한 크다.
이 때 오아시스는 대기실에 그들이 가져온 맨체스터 시티 깃발을 한쪽 벽면에 걸어줄 것을 요청했다. 기획사는 무대연출팀까지 동원해서 성공적으로 깃발을 걸었다고.
끝난 후 열렬한 반응에 신이 난 그들은 7집 투어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노엘이 포함된) 술파티를 벌였다. 시설 이용 시간이 끝나가는데도 일어설 생각을 않는 그들에게 쩔쩔매던 관계자들이 대기실을 치워야 하니 비켜달라고 말하자, 밴드는 '이 의자랑 테이블만 빼고 마음대로 치워도 돼'라며 주변에서 무슨 소란이 일어나건 아랑곳 않은 채 날이 바뀌도록 술을 마셔댔다고. 특히 노엘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취했는데, 09년 투어 중 노엘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술파티는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끝났다고.
2009년 내한 전후는 노엘과 리암이 각각 블로깅과 트윗을 하고 있던데다, 국내 오아시스 팬덤이 온라인상에서 극도로 활성화되어 있던 시기라 많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시간순으로 정렬하면 이렇다.
- 리암, 공연 전날 도착 직후 트위터에서 '한국, 우리가 왔다...'
- 호텔로 이동해 갈비를 평균 1인당 6인분씩 먹어치움.
- 리암, 트위터에서 '나 한국에서 설사터졌어!' 이후 NME에서 리암 최고의 트윗으로 뽑았다.
- 호텔에서 매너있게 팬들과 인사를 나누던 리암이 아주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곧바로 악수를 해보니 손에 물기가 전혀 없고 따뜻하더라는 이야기.
- 7집 활동 개시 직전 토론토 공연에서 노엘이 기타를 치던 중 괴한에 의해 밀쳐진 일 때문에 공연 보안이 강화된 후로 단 한 차례도 무대아래로 내려오지 않던 리암이, 모든 곡을 끝내고 밴드가 긴 후주를 연주할 때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와 탬버린을 팬에게 직접 건네고 퇴장. 이후 공연에서는 재미라도 들렸는지 시도때도 없이 뛰어내렸지만, 한참 옛 인터뷰에서 노엘은 '리암이 객석으로 뛰어내리는 건 누군갈 때릴 때 뿐이다'라 말한 바 있었다. 늘 그렇듯 과장과 농이 섞인 거지만.[83]
- 리암, 트위터에서 '어제 한국 서울 공연에서의 모두에게 그저 감사를 전하고 싶어. 90년대를 떠올리게 했어, 7월에 꼭 다시 만나자...(원문: I just wanna thank everybody that was at last nights gig in Seoul Korea. It reminded me of the 90's, we must do it all again in July... LG)' 리암에게서 이런 식의 공연후기는 확실히 이례적이다. 리암이 말하는 90년대란 오아시스 최고의 전성기를 가리킨다.
- 노엘, 블로그에서 '그(한국) 공연은 그저 놀라웠다. 근래의 공연 중 가장 뛰어난 공연이었다. 누가 이럴 줄 예상이나 했겠는가? 적어도 내겐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한국 애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한국 관객들을 '애들(kids)' 등으로 칭하는 점, 공연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얼굴로 객석을 보는 표정 등 한국 관객을 꽤 귀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관객 연령층이 비교적 낮기도 하고.
- 약 1개월 후, 기타리스트 겜 아처는 남미에서 가진 공연 전 TV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연이 뭐였냐는 질문에 '내 전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는 언급을 덧붙여 서울에서의 09년 공연을 꼽았다.
- 약 3개월 후 영국 리코 아레나에서 공연하던 오아시스는 한국의 한 소녀팬이 태극기와 내한당시 제작했던 수건(그들의 앨범 제목이자 투어 제목인 Dig Out Your Soul을 패러디한 Dig Out Your Seoul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엘은 '너 공연 보러 한국에서 이 먼 데까지 온 거야? 좋은 일이야' 하고 말을 건네는 등 반가움을 표시했다. 리암은 '우리 다음주에 한국 간당!' 하고 방정을 떨기도. 물론 모두 마이크에 대고. 실제로 그 당시에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을 앞두고 있었는데 1주일 뒤가 아니라 2주일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리암이 날짜를 착각해서 1주일 뒤라고 얘기한 듯 하다.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고 해당 링크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3분 38초부터 들어보자.
노엘 - "You come all the way from Korea! Good For you.(한국에서 먼길 왔구나?!! 좋은 일이야)"
리암 - "We're going there next week.....We're going there next week.(우리는 한국에 다음 주에 가..x2)"
2009년 서울 올림픽공원 공연 : Live Forever
2009년 서울 올림픽공원 공연 : Don't Look Back in Anger
2008~9년 투어를 함께 뛰는 드러머 크리스 섀록[84] 의 드럼 테크닉도 끝내줬다는 후문1, 스탠딩 관람석의 점핑을 견뎌내지 못하고 여러명이 실려 나갔다는 후문2
http://www.youtube.com/watch?v=eg_dKNTLmOg
'7월에 또 보자'는 리암의 약속은 2009년 7월 옐로우나인이 준비하는 20,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이는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 오아시스가 헤드라이너로 발탁되는 것으로 지켜졌다. 이들은 페스티벌 3일째에 출연[85] 했고, 열성적인 팬들 대부분은 페스티벌 1일째부터 이미 지산에서 3박 4일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기에 불행히도 공연 전후의 뒷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 리암, 트위터에서 '일본이랑 한국아, 이번주에 너흴 만날 일을 목을 빼고 기대하고 있어!!'
- 리암, 도착 직후 트위터에서 '한국아, 우리가 왔다...'
- 노엘, 공연 직전 인터뷰 중 한국 관객이 어떻냐는 말에 매우 짜증을 내며 '일본이랑 너네 나란 자꾸 왜 그런거 물어봄? 어느 나라건 오아시스 팬들은 똑같아 그딴거 자꾸 물어보지 마' 인터뷰어와 들떠 있는 한국팬들을 쫄아들게 만든 살떨리는 반응이었다.
- 지산 측은 오아시스 공연에 앞서 무대 앞에 아티스트에게 보이게끔 'Thank you = Kam Sa Ham Ni Da'라고 써붙여 두었다. 리암은 등장하자마자 그것을 서툰 발음으로 따라했으며 후에도 몇 차례고 '캄싸함니다'를 연발했다. 이 또한 이례적인 일. 프랑스 토크쇼에선 프랑스어 하나 해보란 거듭된 부탁에 '난 영어도 겨우 하는데'라며 거절했던 사람이다.
- 페스티벌 시즌 정규 리스트에 포함된 'Live Forever'(이번엔 노엘 솔로가 아닌 리암이 보컬을 하는 풀밴드 버전)를 부르며, 리암은 스스로 부르지 않고 관객들의 선창을 유도하기도 했다. 4월의 떼창이 마음에 든 듯. 다소 뜬금없어서 원활하게 성사되진 못했다.
- 직전 일본 공연에서 노엘은 'Whatever'를 불렀고, 한국 팬들은 이를 불러줄 것을 엄청나게 어필했으나 가볍게 씹혔다. 왓에버는 일본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며, 더불어 노엘과 오아시스 멤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곡이다.
-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은 09년에 1회째 열린 것으로 사고를 우려해 무대와 객석간에 이동이 불가능하도록 해 두었었다. 리암은 공연 막판에 그에 불만을 표하며 가까스로 객석에 내려와 자신의 브랜드 '프리티 그린'의 모자, 탬버린을 팬에게 전했다.
- 리암, 무대에서 내려간 지 7분 만에 트위터에서 '대한민국, 그냥 너네가 존나 끝내준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대한민국 정말 사랑하고, 내 취향의 사람들인거 같아...영원히 살기를, 리암 갤러거'(원문: 'Korea, just wanna say you were absolutely fuckin amazing, I love your country, my kinda people... Live forever LG'. 리암은 한국의 팬들을 진짜 사랑하는 게 맞다. 끝의 Live forever는 이 당시 리암이 곧잘 붙이던 인사말.)
- 노엘, 블로그에 '공연(한국 공연)은 굉장했다. 걔넨 박자에 딱딱 맞춰 박수 따윌 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장관이더군.'
7.2. Butterfly 표절 시비?
흔히 2009년 8월경 빅뱅의 멤버 G-DRAGON과의 표절시비가 붙었다고 알려져 있다. G-Dragon이 공개한 30초짜리 티저곡 3곡중 'Butterfly'라는 곡이 'She's Eletric'과 흡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자신들이(노엘이) 좋아하는 밴드들의 스타일[86] 과 음악을 많이 따라한 밴드라 별로 의미가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표절시비에 휘말린 적 있을 때[87] '그래 우리 베꼈다 어쩔래' 신공으로 상황을 타파한 전력이 있으며, 옛 곡의 오마주를 긍정하는 밴드이다. 또한 노엘은 오히려 '누군가 우리 곡을 베껴도 아무 상관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7.3. 짤방
국내에서는 하단의 짤방으로도 유명하다. 인터뷰 DVD Lock The Box의 캡쳐이다.
[image]
사실 이 짤방의 정체는 인터뷰 장면 두 개를 짜깁기해 놓은 것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대로 퍼졌다.
[image]
전체 내용은 이렇다. 인터뷰 끝자락인 35분 18초경에 나온다.
마지막 짤방의 원문은 "You bunch of cunts. So buy fucking T-shirt and poster on the way out you fucker." 영국 영어를 좀 아는 사람이면 알겠지만 저 짤방의 욕설 번역은 매우 적절한 편. 웃길려고 욕 집어넣은 게 아니다!
이외 자세한 정보는 오아시스(밴드)/짤방을 참조.
이후 '엿같은 티셔츠'는 '동그란 시디'와 함께 노엘 갤러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노엘의 솔로 밴드인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의 2015년 내한공연 때, 매점의 티셔츠 이름이 '뭣-같은 티-셔쓰'에 음반은 '정말 동그란 CD'였다. #
8. 디스코그래피
8.1. 정규
- Definitely Maybe - 빌보드 58위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 빌보드 4위
- Be Here Now[88][89] - 빌보드 2위
-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90] - 빌보드 24위
- Heathen Chemistry - 빌보드 23위
- Don't Believe the Truth - 빌보드 12위
- Dig Out Your Soul - 빌보드 5위
8.2. 비정규
- The Masterplan (B-Side Compilation)
- Familiar to Millions (Live Album: Wembley Stadium 2000/07/21)
- Stop The Clocks (Best Album)[91]
- Time Flies...1994-2009 (Compilation)
8.2.1. 라이브 DVD
8.3. 싱글
8.3.1. UK 차트 순위
8.3.2. 그 외
- Morning Glory(1995)(호주와 뉴질랜드에서만 발매된 싱글) - 호주 25위
- Champagne Supernova(1996)(미국 등 몇몇 국가에서만 발매된 싱글) - 빌보드 얼터너티브락 차트 1위
- Don't Go Away(1998)(일본에서만 발매된 싱글) - 일본 오리콘차트 49위
- Where Did All Go Wrong?(2000)(라디오 프로모션용 싱글)
9. 여담
- 오아시스의 최고의 히트곡은 보통 Live Forever, Don't Look Back In Anger, Wonderwall이라고들 하는데, 두 형제가 솔로로 전향한 지금 Live Forever은 리암 공연의 하이라이트. Don't Look Back In Anger은 노엘 공연의 하이라이트, Wonderwall은 둘 다 부른다 노엘은 Live Forever을 안부르고, 리암 역시 Don't Look Back In Anger을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로 딱 한번 리암이 맨체스터 테러 사태 때 Don't Look Back In Anger을 부르긴 했다. 노엘은 Live Forever를 과거 오아시스 초창기에 종종 어쿠스틱으로 부르곤 했었다. 현재 노엘은 Live Forever를 부르지 않는데, 그 노래가 더이상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되어서라고 한다.
- 형제 둘의 보컬 성향이 아주 달라서 리암이 부른 곡의 노엘 버전이나 노엘이 부른 곡의 리암 버전을 찾아보는 맛이 쏠쏠하다. 하지만 노엘이 부른 곡을 리암이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 노엘이야 자기가 쓴 곡이니 자기가 불러도 이상할 게 없지만, 리암은 자신이 쓴 곡이 아니기에 굳이 부를 필요성을 못느끼는 모양.
- 두 형제가 서로 갈라져 솔로 활동을 하던 중 2020년 4월에 노엘 갤러거가 오아시스 시절 사운드 체크 용으로 작곡한 데모 곡 "Don't Stop.."을 공개하였다.[98] 정말 오랜만에 오아시스 이름으로 공개하는 곡인지라 많은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Don't Stop..
- 오아시스의 메인보컬은 리암, 서브보컬은 노엘이었다. 노엘이 백보컬을 한 적은 많지만 이들이 듀엣으로 부른곡은 손에 꼽는데, 그게 The Masterplan의 Acquiesce와 Don't Believe the Truth의 Let There Be Love 이다.
- 조지 해리슨은 노엘의 능력은 훌륭하지만 노엘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 왜 리암이 있는지 모르겠고, 리암은 그냥 싸움만 하는 놈팽이며 오아시스 자체도 형편 없는 밴드라 30년 뒤면 잊힐거라는 막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리암 갤러거가 빡쳐서 방송에 출연해 조지를 향해 젖꼭지같은 놈이라고 마구 디스했다. 나중에 이 점에 대해 조지와 리암이 서로에게 사과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는 후문.
- 런던의 지역 일간지인 이브닝 스탠더드가 2019년 매긴 최고의 영국 20대 록밴드 순위에서 무려 7위에 올랐다. 이는 블랙 사바스, 퀸, 더 클래시 등 유명 록 밴드들보다도 높은 순위이며 특히 활동 기간을 90년대로만 한정할 시 라디오헤드에 이은 2위다. 스탠더드지는 오아시스를 "가장 부르기 쉬운 노래들을 만들었으며, 90년대의 상징적인 록밴드"라고 칭찬했다. 이브닝 스탠더드가 오아시스의 성향[99] 과 정 반대인 보수, 중산층, 런던 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꽤나 의미심장한 일이다.
10. 관련항목
- 노엘 갤러거
- 리암 갤러거
- 겜 아처
- 앤디 벨
- 토니 맥캐롤
- 브릿팝
- 브릿팝 전쟁
- 비디 아이
-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 공식 사이트 및 트위터
- 국내 팬 카페 Who Feels Oasis(후필즈)[100] 해외 포럼 Live4ever
- 디시인사이드 오아시스 마이너 갤러리
- Definitely Maybe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 Be Here Now
- The Masterplan
-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 Heathen Chemistry
- Don't Believe the Truth
- Dig Out Your 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