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이라 카타모리
일본 에도 시대 말기의 다이묘. 아이즈 번 9대(실질적으로 마지막) 번주. 교토수호직을 역임했다. 다카스 4형제의 1인.[1] 신센구미의 스폰서였기도 했다.
1846년 아이즈 번 8대 당주인 마츠다이라 가타타카의 양자가 되어, 1852년 번주를 승계하였다. 1860년 에도 막부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막부는 나오스케의 살해범들이 주로 미토 번 출신[2] 의 무사들이라는 이유로 미토 번을 토벌하려 하였고, 카타모리는 이에 반대했다.[3]
1862년 가타모리는 쇼군의 후견인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이명으로 마츠다이라 슌카쿠로도 부른다.)의 추천으로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다. 본래 병약했던 카타모리는 가신들의 반대를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요시나가의 강권에 결국 교토수호직을 받아들였다.
가타모리가 처음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을 때 존황양이파와의 대화로 조정을 시도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의 불만을 샀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목상을 훼손하고 목을 강에 버린 아시카가 목상효수 사건이 일어나자 공무합체파와 존황양이파를 적대했다. 이후 신센구미의 전신인 미부로시와 쿄토 미마와리구미를 조직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경호와 교토의 치안유지를 맡겼다.
금문의 변 사건이 일어나자 조슈 번과 아이즈 번은 각각 도막(倒幕)과 좌막(佐幕)의 선봉에 서고, 신센구미와 사쓰마군[4] 은 병사 인원도 부족하고 훈련과 장비도 부실했던 조슈 군을 격퇴하나, 교토는 불바다가 되었다.
1866년 카타모리를 믿고 신뢰했던 고메이 덴노가 사망하자 교토수호직을 몇번이나 그만두고자 했지만, 막부와 조정의 반대로 계속 교토에 남았다. 이후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자 교토수호직도 폐지되었다. 약 5년간의 교토수호직을 맡아서 막대한 돈을 쓰게 되어 아이즈 번은 재정이 흔들린 상태였다.
도바 후시미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조정의 신정부군에 패하고, 아이즈 번으로 퇴각했다. 신정부군은 아이즈 번의 토벌을 계획했고,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오우(도호쿠)의 번주들[5] 은 아이즈 번의 구명을 탄원했으나, 오우진무총독부 부참모였던 조슈 번의 세라 슈조에 의해 기각당했다. 오우에츠 열번동맹을 결성하고 오슈, 우슈, 에치고의 대다수 번들을 끌여들여 신정부군을 상대로 무력으로 맞서 싸웠다. 하지만 시라카와구치 전투를 시작으로 니혼마츠 전투,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아이즈 와카마츠 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1868년 11월 6일 백기를 걸고 항복했다.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성이 함락됐다고 착각한 16세~ 17세의 소년들로 구성된 백호대 2번대 50명 중 20명이 이이모리산에서 집단 자살하였는데, 이를 가미카제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6] 사족으로, 자결을 시도한 20명 중 1명인 이이누마 사다키치는 숨이 붙은 채로 발견되어 구출되었고, 메이지 유신 후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도 공무원이 되어 일하다가 훗날 청일전쟁에 참전한다. 호는 고호(孤虎), "백호 20마리 중에 살아남은 1마리의 외로운 호랑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대위로 전역한다. 1931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77세. 집단자결 당시가 17세였다.
항복 이후 가타모리는 돗토리 번의 감시 아래 도쿄에서 칩거하지만, 장남 가타하루의 가독 승계를 인정받아 화족이 되었다. 이후에는 구 막부 측에 선 죄로 탄압받는 아이즈 번을 쓸쓸히 바라보며, 힘든 처지에 빠진 옛 가신들을 걱정하며 여생을 보냈다. 1880년 닛코 동조궁의 궁사[7] 가 되었으며 1893년 12월 5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향년 57세. 가타모리는 가신들을 잊지 않았고, 신센구미와 곤도 이사미 같은 인물들을 안쓰럽게 추억하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훗날 가타모리의 손녀 마츠다이라 세츠코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결혼했다. 또한 현 도쿠가와 종가의 당주인 18대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는 혈통상으로는 카타모리의 증손자로 어린 시절 종가에 양자입적하여 당주가 되었다.
은혼의 마츠다이라 가타쿠리코는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
야에의 벚꽃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와 천황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도 그랬다. 고메이 덴노를 접견했을 때는 친서(親書)와 빨간색 옷감을 선물로 받았다. 천황이 옷을 만들어 입으라고 옷감을 하사한 것은, 쇼군이나 다른 다이묘에게도 한 적이 없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메이지 덴노는 가타모리가 죽기 전에 우유를 하사했다.[8][9]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선 신념도 강하고 자상한 군주로 등장한다 주로 나쁘거나 흠결있는 부분은 전부 당시의 쇼군이었던 자신의 형에게로 쏠리고...
가타모리의 사망 이후인 몇년 뒤에 황실에서 정삼위 추증과 더불어 "忠誠霊神(충성영신)"이라는 신호(神号)가 결정되었다.
1846년 아이즈 번 8대 당주인 마츠다이라 가타타카의 양자가 되어, 1852년 번주를 승계하였다. 1860년 에도 막부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막부는 나오스케의 살해범들이 주로 미토 번 출신[2] 의 무사들이라는 이유로 미토 번을 토벌하려 하였고, 카타모리는 이에 반대했다.[3]
1862년 가타모리는 쇼군의 후견인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가(이명으로 마츠다이라 슌카쿠로도 부른다.)의 추천으로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다. 본래 병약했던 카타모리는 가신들의 반대를 이유로 거절하였으나, 요시나가의 강권에 결국 교토수호직을 받아들였다.
가타모리가 처음 교토수호직에 임명되었을 때 존황양이파와의 대화로 조정을 시도하여 도쿠가와 요시노부 등의 불만을 샀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목상을 훼손하고 목을 강에 버린 아시카가 목상효수 사건이 일어나자 공무합체파와 존황양이파를 적대했다. 이후 신센구미의 전신인 미부로시와 쿄토 미마와리구미를 조직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경호와 교토의 치안유지를 맡겼다.
금문의 변 사건이 일어나자 조슈 번과 아이즈 번은 각각 도막(倒幕)과 좌막(佐幕)의 선봉에 서고, 신센구미와 사쓰마군[4] 은 병사 인원도 부족하고 훈련과 장비도 부실했던 조슈 군을 격퇴하나, 교토는 불바다가 되었다.
1866년 카타모리를 믿고 신뢰했던 고메이 덴노가 사망하자 교토수호직을 몇번이나 그만두고자 했지만, 막부와 조정의 반대로 계속 교토에 남았다. 이후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자 교토수호직도 폐지되었다. 약 5년간의 교토수호직을 맡아서 막대한 돈을 쓰게 되어 아이즈 번은 재정이 흔들린 상태였다.
도바 후시미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조정의 신정부군에 패하고, 아이즈 번으로 퇴각했다. 신정부군은 아이즈 번의 토벌을 계획했고,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오우(도호쿠)의 번주들[5] 은 아이즈 번의 구명을 탄원했으나, 오우진무총독부 부참모였던 조슈 번의 세라 슈조에 의해 기각당했다. 오우에츠 열번동맹을 결성하고 오슈, 우슈, 에치고의 대다수 번들을 끌여들여 신정부군을 상대로 무력으로 맞서 싸웠다. 하지만 시라카와구치 전투를 시작으로 니혼마츠 전투,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아이즈 와카마츠 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1868년 11월 6일 백기를 걸고 항복했다.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성이 함락됐다고 착각한 16세~ 17세의 소년들로 구성된 백호대 2번대 50명 중 20명이 이이모리산에서 집단 자살하였는데, 이를 가미카제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6] 사족으로, 자결을 시도한 20명 중 1명인 이이누마 사다키치는 숨이 붙은 채로 발견되어 구출되었고, 메이지 유신 후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도 공무원이 되어 일하다가 훗날 청일전쟁에 참전한다. 호는 고호(孤虎), "백호 20마리 중에 살아남은 1마리의 외로운 호랑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대위로 전역한다. 1931년 세상을 떠나니 향년 77세. 집단자결 당시가 17세였다.
항복 이후 가타모리는 돗토리 번의 감시 아래 도쿄에서 칩거하지만, 장남 가타하루의 가독 승계를 인정받아 화족이 되었다. 이후에는 구 막부 측에 선 죄로 탄압받는 아이즈 번을 쓸쓸히 바라보며, 힘든 처지에 빠진 옛 가신들을 걱정하며 여생을 보냈다. 1880년 닛코 동조궁의 궁사[7] 가 되었으며 1893년 12월 5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향년 57세. 가타모리는 가신들을 잊지 않았고, 신센구미와 곤도 이사미 같은 인물들을 안쓰럽게 추억하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훗날 가타모리의 손녀 마츠다이라 세츠코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결혼했다. 또한 현 도쿠가와 종가의 당주인 18대 당주 도쿠가와 츠네나리는 혈통상으로는 카타모리의 증손자로 어린 시절 종가에 양자입적하여 당주가 되었다.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몽환무장으로 등장한다.
은혼의 마츠다이라 가타쿠리코는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다.
야에의 벚꽃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와 천황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도 그랬다. 고메이 덴노를 접견했을 때는 친서(親書)와 빨간색 옷감을 선물로 받았다. 천황이 옷을 만들어 입으라고 옷감을 하사한 것은, 쇼군이나 다른 다이묘에게도 한 적이 없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메이지 덴노는 가타모리가 죽기 전에 우유를 하사했다.[8][9]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선 신념도 강하고 자상한 군주로 등장한다 주로 나쁘거나 흠결있는 부분은 전부 당시의 쇼군이었던 자신의 형에게로 쏠리고...
가타모리의 사망 이후인 몇년 뒤에 황실에서 정삼위 추증과 더불어 "忠誠霊神(충성영신)"이라는 신호(神号)가 결정되었다.
[1] 다카스 번의 10대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타츠의 아들 중 차남 도쿠가와 요시카츠, 5남 도쿠가와 모치나가, 7남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8남 마츠다이라 사다아키의 4명을 말한다. 사실 요시타츠의 아들은 모두 10명이었지만 4형제 외에는 일찍 요절하거나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여기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2] 존황양이의 선두격 존재로, 존황사상에 기울어진 번사들이 많았다.[3] 사실 카타모리의 조부인 9대 다카스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나리는 원래 6대 미토 번주 도쿠가와 하루모리의 차남으로 다카스 번에 말기양자로 들어가 가독을 승계했기 때문에 혈통상으로 보면 카타모리도 미토 도쿠가와의 후손인 셈이다.[4] 원래 사쓰마 번은 조슈와 적대하는 입장이었다. 두 번을 극적으로 동맹시킨 사람이 사카모토 료마.[5] 센다이 번주 다테 요시쿠니와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나리노리 등[6] 안타깝고 어리석은 이야기이지만, 후쿠시마현에서는 '''미담'''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7] 신사(신토)의 신관[8] 당시의 우유는 대단히 비싼 식품이라 황족이나 고위 공무원, 부자가 아닌 이상 먹기 힘들었다.[9] 야사에 의하면, 메이지 덴노는 그가 살아있었다면 다이쇼 덴노의 섭정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