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혁명당 사건

 


1. 개요
2. 상세
3. 사건 이후
4. 기타
5. 관련 자료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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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 국가정보원이 발표한 반체제 공안사건. 반체제 지하정당인 민주민족혁명당을 국가정보원이 적발하고 그 구성원인 하영옥, 김영환, 박준X, 이석기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여 법원이 유죄판결한 사건이다. 국정원은 당시 민혁당을 1980년대 학원가의 주사파 핵심세력들이 북한에 포섭돼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고 남한 내 혁명전위조직으로서 결성한 지하당으로 발표했다.

2. 상세


적발된 계기는 코미디 같은 황당함에서 시작되었다.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이 민혁당의 실체를 드러내게 한 중요한 시발점이다. 1997년 8월, 조선로동당 사회문화부 5과 소속인 부부간첩 최정남, 강연정은 공해상을 통해 우회하여 거제도에 상륙, 남한 사회에서 생활을 하며 재야인사 포섭, 유사시 서울 도시철도 철도망 파괴 및 경북대 김순권 교수가 개발한 슈퍼옥수수의 종자를 획득할 목적[1]으로 침투한다. 이들은 1997년 10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의 울산지부인 울산연합의 간부 정모씨[2] 에게 접근, "김영환 소개받고 왔다. 북에서 왔으니 통일사업을 위해 함께 하자"[3]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정 씨가 '''"아무래도 북한에서 온 게 아니라 안기부에서 나를 검거하려고 함정을 파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여 이 남파간첩을 안기부에 신고하게 된다(...).[4] 그야말로 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으로 간첩을 하나 검거하게 된것. 그런데 최정남을 취조하던 중 "90년대 초반 남조선의 대학생들 두 명이 공화국을 찾아와 김일성 주석님을 만나고 갔다"라는 진술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안기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남한에 북한과 연계가 있는 주체사상 지하조직이 있을거라는 추리를 하게 된다. 남한의 NL운동권 내부에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친북 성향을 보이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이들이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는 명백하지 않은 상태였다.[5][6]
그러던 중 1998년 12월 대한민국 해군이 여수시 앞바다에서 북한의 공작원 6~8명을 태운 반잠수정을 격침시키면서 민혁당에 대한 보다 명확한 사항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침몰한 반잠수정을 수색해서 북한 공작원 진운방 등의 시신과 각종 유류품을 발견하였는데, 해당 반잠수정에 탑승한 공작원이 민혁당 인사들과의 접촉사실과 민혁당의 내부조직을 기록한 문서가 나온 것이다.
민혁당 자체는 '주사파의 대부'이자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이 1989년 2월 출소 후 가입한 반제청년동맹(반청)의 후신이다. 반청은 준비위원 하영옥, 이석기, 박금0, 김0운, 김0희 5인으로 구성 되었으며, 이석기는 준비위원이 그대로 중앙위원이 되는 것이 모양새가 안 좋다며 스스로 하방 하고, 대신 준비위원 4명에 김영환이 포함된 중앙위원으로 구성 되었다. 여기서 이석기만 외국어대 용인캠퍼스고 나머지는 전부 서울대 출신이다. 특히 하영옥과 김영환은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 3학년 시절 '고전연구회'라는 지하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던 사이로 다른 3명은 후배였으니 결국 하영옥과 김영환이 반청의 리더였다.
김영환은 반청 시기인 1989년 7월, 북한의 남파간첩 윤택림에 의해 조선로동당에 현지 입당[7]해서 '관악산 1호'라는 암호명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북한에 선을 대고 있다는 사실은 하영옥에게 귀띔 해주어 반청내에 주도권을 쥐었다.이어 윤택림의 주선으로 1991년 북한에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만나고 조선로동당에 정식 입당한 후 공작금 20만불을 받아서 돌아왔다. 이때 연락책 1명을 선발해서 대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서울대 후배인 조유식을 대동하고 월북하였다.
반제청년동맹은 북에서 돌아온 김영환의 주도로 1992년 발전적 해산을 단행하고 곧바로 민족민주혁명당(약칭 민혁당)을 결성한다. 반청 중앙위원 5명 중 3명이 그대로 지도부가 되었는데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 하영옥(서울대 법대 82학번), 박준X(서울대 후배, 변호사) 3인이 중앙위원으로 지도부를 형성하고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위원장 이석기),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를 두었다. 1997년 당시에 민혁당원은 전국적으로 약 100명 정도였는데 철저한 점조직, 단선조직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원 상호간에도 서로 몰랐다고 한다. 중앙위원 3인은 각기 전북(김영환), 수도권(하영옥), 영남(박준0)으로 나누어서 하부조직을 관리하였다.(단, 김영환은 하영옥이 울산위원회, 경기동부-남부, 부산, 마산-창원지역을 관리 했다고 주장함)
다만 이중에서 경기남부위원회의 경우 원래 성남시와 외대 용인캠퍼스를 연고지로 활동하던 조직이 그대로 들어 온 것으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조직이었다. 통진당 부정경선을 거치면서 경기동부연합의 실체가 폭로된 뒤에, 운동권 출신인사들이 인터뷰에서 '경기남부위원회'가 원래 명칭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정조직원외에도 민혁당은 지하당 준조직원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을 수십 명 단위의 조직으로 묶어 RO(Revolution Oraganization 혁명 조직)라고 부르며 관리하였는데, 김영환의 주장으론 17개의 RO조직원 300여명이 있으며, 다시 민혁당과 RO 산하에 RMO(혁명적 대중 조직)'라고 부른 외곽 서클 존재하며 활동가가 수천 명에 달한다는데 이는 확인된바는 없다. 하지만 RO는 대법원 판결 결과 실체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되었다.
정리 하자면 조선로동당 내 사회문화부(후에 대외연락부로 개칭) 5과장 윤택림이 김영환을 시켜 만든 조직이 민혁당이었다.
또한 민혁당 창설 전후인 1990~91년 사이 수도권 지역에서 '우리 조직원들을 다른 지하조직에서 자꾸 포섭하려 접근한다'는 보고가 김영환에게 들어 왔는데, 김영환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윤택림에게 물어보니, 이후 북한측에서 민혁당 활동지역을 서울, 경기, 전북, 영남등으로 한정 지어주었다. 그러다가 1992년에 터진 사건이 충청과 강원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지하당이 드러난게 일명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다. 북의 대남공작기관들끼리 서로 경쟁을 하다보니 같은 시기에 북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 두개가 만들어졌고, 서로 활동이 겹치게 되니까 북에서 활동구역을 정해준 것이다.
김영환은 90년대 이후 북한의 경직된 사회상 목격,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보며 1995년경부터 심경에 변화를 보이는데, 진보월간지 월간 말 1995년 4월호에 기고한 '반미, 북한, 90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칼럼에서 이런 모습이 보인다. 그러다가 1997년 중앙위원 투표를 거쳐서 결국 민혁당을 해체하였다. 투표 결과는 해체찬성2 (김영환,박준0) vs 해체반대1 하영옥이었다. 이후 하영옥을 중심으로 해체반대파들이 전국을 돌면서 조직을 재건한 것이다.
또한 북한로동당 사회문화부에서 화교를 가장한 진운방(가명)이라는 새로운 간첩을 보내어 김영환과 연결 되었는데, 김영환이 민혁당을 포기하자 진운방은 하영옥과 접촉하여 그를 조선로동당에 화선 입당 시키고 민혁당의 새로운 총책으로 추인한다. 그리고 하영옥과 새로운 연락책인 심재춘을 북한으로 데려 가기 위해 잠수정으로 왔다가 하영옥이 개인 일정으로 못 가게 되자, 그냥 승조원 5명과 함께 돌아 가다가 격침되어 전원 시체로 발견 되고, 진운방의 수첩 속에 김영환과 하영옥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때 김영환은 중국에 체류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월간조선의 조갑제의 주선으로 선처를 조건으로 1999년 국내로 들어와 자수한다. 민혁당 사건에서 김영환은 징역 10년, 하영옥 징역 8년, 심재춘 징역 5년, 김경환 징역 4년 6개월등 중형이 선고되었다.
1991년 간첩 윤택림에 의해 밀입북한 게 민혁당 총책 김영환과 연락책 조유식(서울대 후배, 당시 월간 <말>지 기자)이며, 1998년 간첩 진운방에 의해 밀입북할 뻔 한게 민혁당 총책 하영옥과 연락책 심재춘(대학강사)인 것이다. 김경환은 민혁당 영남위원회 산하 울산위원회 조직원으로 어쩌다 보니 간첩 진운방과 접촉하였고, 이를 중앙에 보고하여 김영환에게 연결 시켜 주며 본인도 소속을 민혁당 중앙으로 옮겼다. 또한 1989년 9월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김영환이 민혁당을 포기하자, 진운방의 부탁으로 하영옥과 연결을 주선하였고, 이에 하영옥이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영환은 이미 북한에 대해 환멸을 느낀 상태로 모든 것을 불었고, 국정원과 자수자에 한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는 거래를 한다. 이에 기소 후 구치소에서 1개월간 대기하며 준법서약서를 쓴 후 공소보류로 풀려났다. 그리고 중앙위원 박준0과 연락책 조유식 등 10여명이 자수하여 수사에 협조하였고 대부분 사법처리없이 풀려 났다.
다만 하영옥 계열만은 끝까지 자수하지 않았는데, 잠수정 사건이 일어나기 전해인 1997년 7월에 일명 '영남위원회'사건으로 민혁당 영남위원회 산하 '울산위원회(위원장 박경순)' 15명이 기소되었다.[8] 그러나 체포 후 일관된 부인으로 민혁당이 상부 조직이라는 것은 밝혀지지 않고 넘어 갔었다.

3. 사건 이후


주모자 김영환은 데일리NK와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북한민주화운동에 나서고 있다. 사실 김영환은 3년 전인 1996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기관지 <자주의 길> 2호에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라는 칼럼에서 NL노선과의 결별을 선언했고, 1998년 진보언론 월간 말 5월호에 <북한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사기극>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주체사상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였으며 이후 뉴라이트의 토대가 되는 시대정신을 창간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박준0는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향서를 제출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역시 풀려났고 지금도 신원은 비공개로 되어 있다.(성만 알려져 있었는데, 김영환이 2015년 자서전에서 가운데 이름인 '준'까지 공개하였다.)
함께 기소된 하영옥은 징역 8년형을 받았으며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였고, 출소후 대외활동 없이 학원강사를 하면서 살고 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이후 보수언론들이 자신을 경기동부연합배후라고 지목하자 이제 자신은 평범한 생활인이자, 통진당 평당원일뿐이라며 반박하였다.
경기남부위원장 이석기는 사건 이후 3년을 도주하다가 2002년 5월 체포, 1심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2년이 선고되었으며 2003년 3월 2심에서 감형되어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석기는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6일만에 이를 취하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3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특별사면을 단행할때 민혁당 관련자 전원이 포함되었으나 이석기는 형이 확정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면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석기는 4개월 뒤 2003년 8월 광복절 특사 때 가석방되었다.[9] 하영옥, 이석기 등 민혁당 관련자들은 2년 뒤 2005년 광복절 특사 때 특별복권되어 공무담임권 및 피선거권 제한이 풀리면서 공직에 출마할 자격을 되찾았다.
1991년 김영환과 함께 밀입북했던 연락책 조유식은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검찰에서 공소보류 처분되었다. 조유식은 이후 인터넷서점 알라딘을 창업해서 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이석기의 민혁당 판결에 대한 현재 태도는 사실상 판결 부정에 가깝다. 그는 “민혁당 사건 수사 때부터 재판 때까지 단 한 번도 혐의 사실을 인정한 적 없다”(<한겨레> 2012년 5월9일치 참조)거나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북한과의 아무런 연계가 없다”(5월17일 YTN 라디오)고 밝혔다. 이석기는 재판 당시 “김영환의 진술 중 피고인(이석기)의 행위에 대한 진술은 전문진술(전해들은 말)이고 하영옥이 김영환에게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 전달한 사실을 (훗날 재판에서) 인정하지 않은 이상 위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공안사건 관련자 가운데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수사기관이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고문수사·증거조작 등을 통해 사실을 부풀리는 일도 많았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주장이다.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핵심 지도부가 민혁당 사건 관련자로 알려져 있다. 이석기 외에도 서울연합 출신으로 항상 경기동부와 함께하던 이상규는 민혁당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맡고 있었으며 울산연합의 리더 김창현은 1999년 울산 동구청장 당선 23일만에 반국가단체인 민혁당 산하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돼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던 박경순은 통진당내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을 맡았다.
하영옥과 이석기는 모두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의 남편인 심재환 변호사가 변호했다. <한겨레21>이 “이석기 의원이 법정에서 주체사상이나 민혁당과 관련된 내용을 진술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심 변호사는 “(나도) 물어봤는데 당시 이석기씨는 일관되게 그런 조직(경기남부위원회)은 없었다고 답했다”고 답했다. 심 변호사는 자신도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모른다며 법원 판결에 대해 “신뢰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동안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이 사건은 이후 통합진보당 설립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으로 인해 해당 구성원들이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사실상 이 사건은, 진짜 주사파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이며, 이미 운동권이 1996년 연세대 사태등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결정타를 날렸고 이들이 각자 살길을 찾으면서 좌우로 갈라져 좌측은 통진당 NL계, 우측 전향자들은 뉴라이트가 되는 분열의 시작이기도 한 것.

4. 기타


통진당 사건 이후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인천연합, 전남광주연합등의 이름이 거론되어, '혹시 경기 동서남북연합에 전국 8도 연합 다 있는거 아냐?'라는 의심이 있었는데, 이것은 지하조직과 공개적인 대중조직간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지역 이름이 붙은 XX연합들은 원래 1991년 12월에 결성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의 각 지역 지부들이었다. 전국연합은 노태우 정권 당시 진보적 노동운동, 농민운동, 인권운동, 도시빈민운동 등 각 분야별 운동단체들을 모두 모아서 만든 공동투쟁조직이었다. 재야와 운동권 세력이 전부 결집했다고 보면 된다.[10] 그래서 상당히 다양한 성향의 단체와 인물들이 참여했으나 문민정부의 출범 이후 내부의 의견차이로 여러 세력들이 계속 이탈하면서 점점 NL주사파들만 남게 된다. 그리고 1998년이 되면 중앙조직도 공중분해되고, 이미 각 지역의 자생적인 주사파지하조직들이 장악한 지역연합들만 남게 된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지역적으로는 서울, 경기, 전북, 영남만 민혁당의 활동구역이었고, 이들이 해당 지역의 XX연합을 장악해서 자신들의 간판으로 활용한 것이다. 대표적인게 바로 경기남부위원회가 장악한 경기동부연합과 영남위원회 계열이 장악한 울산연합이다. 실제 서울연합, 부산연합 등 지역별로 연합은 다있다. 하지만 이들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춘 경기동부, 울산연합, 인천연합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어, 세곳의 지역연합이 사실상 NL내의 분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게 된다.
원래 이석기가 이끌며 자생적으로 존재하던 성남시와 외대 용인캠쪽 조직이 민혁당에 '경기남부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편입되고 이들이 전국연합에도 침투해서 경기동부연합을 장악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지만, 공개적으론 경기동부연합의 간판으로 활동한 것이고 이들이 세력을 불리면서 서울연합도 집어삼키게 되고[11] 나중에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까지 계속 경기동부라고 불리면서 활개를 친 것이다.
민혁당 영남위원회 계열은 이미 1990년대 초중반에 울산연합을 완벽하게 장악해서 자신들의 위장막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1999년 리더인 김창현영남위원회 사건으로 잡혀간 뒤에도 계속 조직을 유지하면서, 울산연합이란 간판으로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에 계속 참여하였고, 현재도 활동중이다. 물론 이들은 종북, 주사파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대중정치와 지역활동을 하면서 NL색이 자동으로 희석되어 온건한 방향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간혹 인혁당 사건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12], 인혁당 사건은 그야말로 무고한 시민이정권의 고문과 조작 그리고 사법부의 오판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지만 이 민혁당 사건은 남한의 자생적인 주체사상파 활동가들이 북한의 대남공작기관과 접촉한 명백한 실체가 있는 사건이다. 두 사건의 연결 고리는 '''그냥 이름이 비슷한 것밖에 없다.'''

5. 관련 자료



[1]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간첩 리철진(1999년작)이다. 이 영화에서 옥수수가 돼지로 바뀌었을 뿐 리철진이 남한으로 잠입한 이유는 실제 사건과 거의 같으며,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이들 간첩은 생각보다 좀 얼뜬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2] 북한은 오랜기간 남한 내 지하 조직망 구축을 위해 운동권 및 정치인들의 명단을 확보, 포섭대상을 분석 후 접근하곤 하였다. 후술되는 주사파 대부 김영환도 이런 과정 속에서 북에 포섭된 인물이다. 참고로 정 씨는 총학생회장 출신인 인물로,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3] 이 멘트는 북한 당국의 지시였을뿐, 실제 김영환이 소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이 시점에 김영환은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감으로 거의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4] 15대 대선 불과 두달전 이었던 시기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레임덕과 경제위기로 이미 식물정권인 상태였고, 집권당 이회창 후보는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으로 만신창이였던데다, 이인제는 독자출마를 선언한 상태였다. 때문에 재야와 운동권에서는 궁지에 몰린 정권이 대형간첩단 사건을 터트려서 북풍으로 반전을 노릴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했다. 실제 매번 선거를 앞두고 그래왔으니까. 마침 그런때에 난데없이 북에서 왔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당연히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의심한 것이다.[5] 남한의 주사파는 1980년대 초중반 자생적으로 형성되었고, 1990년대 후반까지는 범NL계도 주체사상의 수용에 있어서도 다양한 온도차이가 있었다. 주체사상을 말 그대로 교조적으로 수용하고 북의 지도를 수용하는 그룹(자주단결)이 있는가 하면, 주체사상은 믿지만 북과의 연계는 거부하는 그룹(사람사랑), 수령론을 빼고 주체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한 그룹(새벽), 아예 주체사상 자체를 거부하는 비주사NL 등 다양한 분파가 모여있는 복잡한 상황이었다.[6] 하지만 이미 1992년에 북의 거물 공작원 리선실이 재야와 학생운동권 간부들을 포섭해서 반체제 지하당을 조직했다는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있었다. 다만 이 사건의 경우 조작 혹은 과대포장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7] 정식으로 입당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는 현지 입당을 화선 입당이라고 부르는데 빨치산 소설을 보면 자주 등장한다. 소설 남부군의 주인공 이태가 이런 식으로 빨치산 활동 중 화선 입당 하였고,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빨치산) 같은 사람도 화선입당 하였다.[8] 이때 최초의 진보단체장이라는 프로필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울산동구청장 김창현이 당선 한달만에 구속돼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김창현은 이듬해인 1999년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확정 판결로 구청장 직위를 상실하였다.[9] 국회의 동의도 거쳐야 하는 일반사면과 달리 특별사면은 국회 동의 절차 없이 대통령의 직권으로 단행할 수 있다. 현행 헌법과 사면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고유권한으로 특정인들에 대한 형 집행을 면제해주거나 유죄 선고효력을 정지시키는 등의 특별사면을 실시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이 특별사면 대상자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하면 법무부에서 명단을 추린 다음에 사면심사위원회 심사, 법무부 장관 상신, 대통령 재가의 절차를 거친다. 민혁당 관련자 특별사면 당시 민정수석은 문재인, 법무부 장관은 강금실, 대통령은 노무현이었다.[10] 지금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운동에 전국연합 출신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들을 모두 주사파 출신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실제 1997년까지는 주사파와 무관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던게 사실이기 때문이다.[11] 이때 서울연합의 대표로 경기동부계열에 편입된게 현 민중당 대표인 이상규(정치인).[12] 박근혜 전 대통령도 후보 시절 연설 도중에 인혁당 사건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민혁당이라고 이야기하는 실수를 범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