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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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의 아버지. 본관은 고령이고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7대 방계 후손이며 무관직 말단인 정9품 효력부위를 역임한 적이 있다.
2. 생애
어렸을 때는 약간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고도 한다. 그러나 자라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거기에 전답을 팔아 서울에 관직을 얻으러 자주 올라가면서 더 힘들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관직을 얻는데는 성공하면서 구한말 무관직 말단인 정9품 효력부위(効力副尉, 오늘날의 육군 소위)라는 벼슬을 받았다. 여기까지였으면 동네에서 나름대로 벼슬 가진 인물로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실무에 투입되지는 못하면서 한량으로 지냈는데 이때 당대의 부패상에 대해서 일찌감찌 환멸을 느꼈던 건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4]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면서 역적으로 취급받아 처형될 처지에까지 내몰렸다. 당시의 사정은 알 수가 없지만 이때 300명의 동학군 포로들은 처형되고 박성빈만 유일하게 천운으로 살아나왔다. 달변이었다는 말이 있는데, 재판관이 보기에 박성빈은 뭔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처형당했다면 박정희는 태어날 수 없었다. 재밌는 것은 훗날 박정희도 한때 군대에 몸담았던 적이 있고, 이후로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환멸로 남로당에 가담했다가 처형으로 인생이 끝장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운명이 흡사하다.
어쨌든 처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이때의 일로 집안에서 의절당하면서 처가집의 도움으로 겨우 먹고사는 신세가 되었던데다가 일제강점기까지 오면서 세상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고 처가인 수원 백씨 집안의 논마지기나 부쳐먹으면서 소일거리하는 무능한 한량으로 지내게 된다. 칠곡군 약목면에서 살면서 백남의와 결혼해 6남 2녀를 두었는데[5] 그 중 막내아들이 박정희이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박정희를 키우기 어려워, 백남의는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하려고 뒷산에서 뛰어 내리거나 간장을 퍼마시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이 영향으로 미숙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체구가 작았다.
여하튼 박정희에게는 그리 존경받는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박정희가 19살이던 1936년, 박성빈은 박정희를 16살의 김호남과 강제결혼시켰다. 죽기 전에 늦둥이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박성빈은 2년 후인 1938년 별세. 향년 67세, 지금으로 치면 한참 젊은 나이에 속하지만, 당시엔 60살만 살아도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현재로 치면 83살 정도에 속한다. 그러나 신여성과의 결혼을 원했던 박정희는 어른들의 강요로 억지로 결혼한 탓에 김호남에게 정을 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동거했다. 1950년, 박정희는 이현란과 헤어진 후에야 김호남과 이혼하였고, 곧이어 육영수와 재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탄압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6] 이낙선 소령이 쓴 박정희 신상비망록에는 '''"1894년 동학란이 경북에 침입하였을 때 박성빈은 용감히 의병을 일으켜 성공, 그 공이 지대하여 무과. 영월군수[7] "'''라고 적혀 있다. 1967년에 한국일보 정광모기자가 쓴 '청와대'에도 박성빈이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는 관군편에 섰던 것으로 되어 있다.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 있는 묘역에 1971년 세워진 박성빈의 묘비에는 '영변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시국의 어려움으로 부임하지 않고 동학란을 피해서 선산에 왔다'는 요지의 설명이 있다.[8]
3. 가계
- 장남 : 두 살 때 사망[9]
- 차남 : 박동희(1895~1967)
- 손자 : 박재홍(1941~)
- 삼남 : 박무희(1897~1960)
- 손자 : 박재석
- 손자 : 박재호
- 장녀 : 박귀희(1902~1974)
- 사위 : 은용표
- 외손자 : 은희만(1935~2018)
- 진외증손자 : 은지원
- 외손자 : 은희만(1935~2018)
- 사남 : 박상희(1905~1946)
- 오남 : 박한희(1910~?)[10]
- 차녀 : 박재희(1913~1996)
- 사위 : 한정봉
- 외손자 : 한희승(1950~)
- 외손자부 : 선우민숙
- 육남 : 박정희(1917~1979)
- 며느리 : 김호남(1920~1990)
- 며느리 : 육영수(1925~1974)
[1] 직강공파 28세손, 혁거세 64세손 ◯빈(彬)항렬.[2] 출처: 《고령박씨족보》 박성빈편.[3] 이배식(李培植)의 딸이다. 출처: 《고령박씨족보》 박영규편.(또한 여기서 박영규의 생몰년이 1840년(헌종 경자년)~1914년(박성빈 생후 첫 번째 갑인년)임을 알 수 있다.)[4] 여하튼 그 덕택에 박정희도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천도교에 건물도 기부하였다.[5] 그 중 넷째아들을 일찍 잃어서 최종적으로 5남 2녀가 남았다.[6] 링크.[7] 족보에 통훈대부 영월군수를 지냈다고 써져 있어서 족보가 이 기록을 뒷받침한다.[8] 링크.[9] 드라마 제3공화국 1회에서 나온다.[10] 19살에 죽었다는 설과 북한으로 건너가 박광선으로 개명하고 고위직으로 살았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