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옥
[clearfix]
1. 개요
박정희가 첫번째 부인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딸.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에게는 이복언니/이복누나가 되고, 육영수에게는 의붓딸이 된다.
2. 생애
박정희와 김호남이 결혼한 이듬해인 1937년 11월 24일(음력 10월 22일)에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둘 다 살아있었는데도[3] , 중학생 무렵에는 사촌오빠인 박재석에게 얹혀살았고, 고등학생 때에는 사촌언니 박영옥, 김종필 부부의 신혼집에 얹혀살면서 동덕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이 무렵 육영수가 김종필의 집을 찾아와 박재옥을 노량진의 집으로 데려갔는데, 박재옥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매를 맞더라도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며 선뜻 새어머니[4] 를 따라나섰다고 한다. 박정희도 육영수도 박재옥이 장녀라고 공공연히 밝히지는 않았고, 박재옥 본인도 조용히 살았다.[5] 그러나 육영수의 주선[6][7] 으로 박정희의 부관이었던 한병기와 1958년 결혼을 했고, 결혼 후에도 한병기, 박재옥 부부는 육영수의 친정을 방문하여 함께 가족사진[8] 을 찍는 등, 사생활에서는 가족 대우를 받았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이전에 딸 박재옥은 이미 결혼하여 유부녀가 된 상태여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청와대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청와대 내 박정희의 가족들에 대해 많은 취재를 하던 시절에도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당시 청와대 측에서도 영부인인 육영수가 낳지 않은 자식이 주목받는 일을 막기 위해 박재옥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선주자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회의원 후보마저도 이혼 경력이 있으면 사생활에 대한 보도로 대중 이미지에서 마이너스 되는 일이 많고, 혼외자 논란 같은 일들과 별개로 공식적인 이혼 경력이 있는 대통령마저 박정희를 제외하면 하나도 없는 곳이 한국 정계이다.[9][10]
물론 박재옥의 친모인 김호남은 이혼을 했더라도 엄연히 박정희와 정식 결혼한 아내였고, 박재옥도 사생아가 아니라 박정희의 적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당시는 21세기 현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보수적이어서 대통령이 이미 한참 전에 이혼했다는[11] 사실이 주목되는 것을 꺼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고 한다. 20대 중반에 결혼 안 하면 노총각/노처녀 소리 듣던 당시 기준으로, 부모 - 자식의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
어쨋든 박재옥은 이복동생들보다 훨씬 덜 알려졌기 때문에, 박근혜를 박정희의 장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실례로 탄핵 직후 박근혜의 인생을 재조명한 조선일보, 뉴데일리 등의 기사에서도 박정희의 첫딸이라고 했다. 당연히 이는 '''명백한 오보'''로, 박재옥은 절대로 혼외자식이 아니라 공식적인 결혼 관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즉, 법적으로든 실제로든 박재옥이 장녀이고 박근혜가 차녀이다.
박재옥은 이복동생들보다 넘사벽으로 많은 시간을 살아왔음에도[12] 불구하고 큰 말썽 없이 무난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년 시절부터 ''''남다른 대우''''를 받은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등 이복동생들과 달리, 박재옥은 남편 한병기와 결혼하기 전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김호남의 이혼으로 인해 가정해체를 겪고 유년 시절부터 여러 친척집들을 전전하며 불안정한 가정생활을 거쳐오며 성장했던 인물이라, 이복동생들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 박재옥이 언론사 기자에게 구술한 내용 및 주변 사람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기사
2020년 7월 8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 공교롭게도 다음날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을 하고 그 다음날에는 백선엽 장군이 사망하는 등 정계 유명 인사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3. 상세
일제강점기 기간 중이던 1937년 11월 24일에 태어났으며, 1952년생인 이복여동생 박근혜보다 15살 위, 1925년생인 계모 육영수보다 12살 아래다.
남편 한병기(1931 ~ 2017)는 대한민국 육군의 영어 통역장교로 제5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가, 당시 사단장이던 박정희 장군의 전속부관이 되었다. 군 전역 후에는 제8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과 캐나다, UN 대사로 근무했다. 이 외에도 박재옥의 사촌언니 박영옥의 남편인 김종필 곁에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한병기와 박재옥의 자녀들로는 아들 한태준(전 중앙대 교수)·한태현(설악케이블카 회장), 딸 한유진(대유몽베르CC 고문), 사위 박영우(대유위니아그룹 회장)씨가 있다.
박정희는 1936년에 김호남과 결혼했는데, 이게 스스로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으로 억지로 한 결혼이었던 탓에 아내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래서 1940년대 후반에는 이현란과 불륜관계로 동거하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가 김호남과 이혼하면서 박재옥은 한병기와 결혼하기 전까지 여러 친적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친/외가는 물론이고 사촌오빠 박재석,[13] 사촌언니 박영옥[14] 과 사촌형부 김종필 등. 계모인 육영수와도 같이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대중들에게는 후처인 육영수, 그리고 육영수 소생들인 박근혜&박근령&박지만 3남매만 알려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김호남과 박재옥 모녀는 남의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박재옥 본인은 어떤 감투나 일체의 공직에도 나서지도 않았다. 아버지 사후 정치계에 들어간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되었던 이복여동생 박근혜와 달리 정치와도 완전히 거리를 뒀다.
다만, 어쨌거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자제라서 그런지 박재옥도 나름대로 경제적 혜택은 받고 살았다. 박정희가 1969년, 사위 한병기 전 의원에게 케이블카에 대한 국가 사업권을 준 뒤, 1971년 이후부터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계속 독점 운영하고 있다. 일명 '권금성 케이블카'가 이 것이다. 덕분에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편함 없이 살았다고... 설악케이블카는 박재옥 - 한병기 부부의 차남 한태현이 물려받아 현재까지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는 증인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사실 한병기 - 박재옥 부부도 굳이 파헤쳐보면 위에 언급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등에 대한 특혜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구설수는 특별히 없다. 언론에서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박재옥에 대해선 박근혜 친인척들의 행적을 파헤치면서 위의 케이블카 사업 특혜의 의혹 등에 대해 몇 차례 가볍게 다룬 것 외에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그 외에 박재옥의 사위인 박영우 회장의 대유그룹의 성장세가 굉장히 빨라서 김어준이 이명박의 다스 논란과 비교한 사례가 있었으나, 다스 논란과는 달리 이 역시 흐지부지 묻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에도 박재옥의 발언이나 행적이 언론에 포착된 적은 없었으며, 2017년 4월에 남편 한병기가 사망했을 때도 대부분의 언론에서 단신으로 '전직 관료 겸 사업가인 한병기 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한 게 전부였다. 박근혜와의 연관성도 언론에선 '한병기 씨는 박근혜의 이복형부이자 박정희의 맏사위이다'라고 간단한 이력만을 설명했을 뿐이다. 이복동생 박근혜가 구속 수감되고 재판을 받을 때도 박재옥은 이렇다 할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한편 박재옥은 다른 공식 행사는 물론이고 박정희 일가와 직접 관련된 대외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저 이복남동생인 박지만의 결혼식에 참석한 게 전부다. 다만, 박정희/육영수의 추모 행사에는 가끔 참석하던 모습을 감안하면 생전의 박재옥은 이복남매들과 교류는 활발히 하지는 않은 대신 조금씩이나마 인연의 끈 정도는 유지하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박재옥의 장례식에 대해서 정부에서 먼저 박근혜에게 조문 사유로 형 집행정지를 권유했으나 박근혜는 거절했다. 다만 박재옥의 장례식에 박지만은 참석을 하였다.
[1] 직강공파 30세손.[2] 왼쪽부터 한병기(1931년생), 박재옥(1937년생), 박근혜(1952년생), 박지만(1958년생), 서향희(1974년생), 박근령(1954년생)이다. 명목상 올케인 서향희(1974년)와는 어머니와 딸 수준 이상으로 나이가 차이 나고, 실제 박재옥의 친자식보다 서향희가 훨씬 어리다.[3] 아버지인 박정희는 육영수와 재혼하고, 어머니인 김호남도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박재옥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도 재혼을 해서 아들을 1명 두었으나 곧 다시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재옥은 친척집을 전전하게 된다.[4] 말이 새어머니지 두 사람은 겨우 12살 차다. 이 때문에 어머니라고 부르기 쉽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참조. 육영수 여사를 어머니보다는 주로 육 여사님으로 불렀다.[5] 손님이 찾아오면 조용히 2층 방으로 올라가곤 했고, 주변 사람들도 나이 차가 박근혜보다(15세 연하) 육영수와(12세 연상) 더 적은 박재옥을 육영수의 친척 동생인 줄 알았다고 한다.[6] 미혼 장교들이 집을 방문하면 육영수는 박재옥에 대해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괜찮은 아가씨"라고 소개하며 넌지시 반응을 살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여성은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진학률도 매우 낮았기 때문에 여성은 고졸만 되어도 대단히 고학력자였다.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국가 경제가 워낙 어려워서 집안에서 가장 똑똑한 아들 한 명만 땅, 소 팔아 대학 보내고 나머지는 집안일을 거들거나 일찍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존여비 풍토 때문에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분위기도 강해서, 그리 형편이 어렵지 않은 집에서도 딸에게는 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았다. 당장 박재옥의 계모 육영수부터가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육종관이 "여자가 대학 갈 필요 뭐 있겠느냐.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충분히 많이 배운 거다."라고 해서 배화고등여학교(현 배화여자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사람이다.[7] 앞서 주석에서 인용된 참조 기사에서는 동덕여대 가정학과를 다닌 상태에서 결혼했다고 소개되었다.[8] 아래 사진의 인물들은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아버지 박정희와 이복동생 박근령, 박재옥 본인, 외할머니 이경령, 외사촌동생 홍소자, 남편 한병기, 어머니 육영수, 이복동생 박근혜, 이모 육예수 등이 보인다. [image][9] 사실 이승만이 있어서 아주 하나도 없지는 않지만, 이승만의 경우에는 1949년에 "전처가 동의 없이 이승만 슬하로 입적시킨 호적상 아들과 이승만 사이에 친족관계가 부존재함을 확인한다."라는 기묘한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조선시대에 혼인하였던 처 박승선을 이혼소송 없이 "전처"로 규정, 일방적으로 소박맞힌 바 있다(다만, 박승선이 이승만과의 동의도 없이 양아들을 들인 것은 사실이다.). 이승만은 박승선과의 사이에 1남을 두었으나, 이 아이는 10살 되던 해에 아버지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 해 병으로 요절했고, 조선에 남은 박승선은 홀로 된 적적함에 양아들을 들여 장성할 때까지 키웠다고 한다.[10] 이들 외에도 두 번 결혼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윤보선과 김대중도 있지만, 이들의 경우는 이혼이나 불륜(간통)이 아니라 사별 이후에 재혼한 케이스이다.[11] 이혼 시점이 1950년 겨울. 즉, '''전쟁 중'''이었다.[12] 육영수의 장녀이자 바로 밑의 동생인 박근혜보다도 15세나 연상이다.[13]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14] 아버지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큰 딸. 이 여인 역시 박재옥과 더불어 박정희의 일가족들 중 비판을 덜 받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