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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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숙군 수사를 받고 살아서 나온 직후, 서울 용산구 관사에서 찍은 사진. 아랫줄 맨 오른쪽에 앉아 있는 남성이 박정희, 가운데 앉아 있는 여성이 작은누나 박재희이다. 이현란은 아랫줄 맨 왼쪽에 앉아 있다. 현재 공개적으로 알려진 유일한 이현란의 사진으로, 후술하겠지만 사실 이 때 이미 박정희와 이현란의 관계는 파탄이 나기 시작했다.
李現蘭.
생몰기간: 1925 ~ ?
1. 개요
2. 출신
3. 박정희와의 만남
4. 박정희의 사정
5. 파국
6. 이후 이현란의 생애


1. 개요


박정희의 전(前) 내연녀. 광복 이후 박정희가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만나,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함께 했던 약혼+사실혼 관계의 인물이다. 왜 두 사람이 정식 결혼을 하지 못하고 사실혼 관계로 지냈는지는 후술한다.

2. 출신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1] 출신이다. 그녀의 부친은 부유한 지역유지였다. (원산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부자였다고도 한다) 전답과 임야 뿐 아니라, 항구도시인 원산에 걸맞게 다수의 어선도 소유했던 재력가였다.
이현란은 원산시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개신교 미션스쿨인 루시고등여학교[2]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로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광복을 맞이했는데, 이후 역사의 흐름은 이현란의 인생을 극적으로 뒤집어놓게 된다.
지역의 유력자란 이유로, 이현란의 부친은 북한 정권에 의해 부르주아 반동으로 몰렸다. 결국 전답과 임야, 어선은 물론이고 집을 포함한 전재산을 북한 정권에 몰수당했다. 이현란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간신히 일가 친척의 행랑채에 신세라도 지면 다행이었다. 보통학교 교사였던 이현란은, 루시고녀[3] 스승의 부인인 기쿠에(菊惠) 여사와 함께 무작정 서울을 향해 떠났다. 그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혈혈단신으로 생활하게 된다.[4]
월남한 직후인 1947년 10월, 이현란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부 아동교육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이현란의 성적표에 따르면, 율동 과목의 점수가 높았다고 한다.
이현란은 이렇게 당시로서는 드물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5] 게다가 그녀는 큰 키에 늘씬하고 서구적이며 화려한 외모의 미인이었으며, 성격 또한 활달하고 발랄한데다 애교가 많았다고 한다.

3. 박정희와의 만남


1947년 가을 춘천, 이현란은 루시고등여학교 동문인 고금옥의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맡았다. 신랑은 박경원 대위였고, 신랑 들러리는 김점곤 대위였다. 또한 박경원 대위와 친하게 지내던 박정희 대위도 하객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이어진 피로연에서, 신혼부부와 하객들은 모두 함께 즐겁게 놀았다.
박정희는, 동료이자 이현란의 6촌 오빠 이효(李曉) 대위에게 부탁하여 이현란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결국 1948년 6월부터 두 사람은 교제를 시작했다.
약혼은 이효(李曉) 씨의 부인이 먼저 와서 박정희와 약혼하자고 했다고 한다. 양쪽에서 부추기고, 부모님도 없고 의지할 데가 없는 형편에 박정희가 2학년 1학기 학비 7,500원도 대신 납부해주고 '키는 작았지만 박력있고, 침착하고 나(이현란 자신)에게 잘하니까' 여자로서 끌렸고, 결국 약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혼식도 옷도 제대로 못입고, 화장도 안 하고 피아노책 구입하려고 독일에 간 친구랑 기숙사에 나오는데 박정희가 '이의없죠?'하길래 부끄러워 대답 못 하다가 그것이 수락한 것이 되었고, 독일 간 친구와 같이 박정희를 따라가 보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있었고 명동의 한식집에서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용산 관사에 방을 합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란은 어린 마음에 창피해서 '약혼식 소식은 친정에 안 전했다'고 한다. #
교제한 지 2달이 지난 1948년 8월, 박정희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서울 용산의 옛 일본군 장교 관사가 대한민국 육군에 불하되어, 박정희도 소령 진급과 함께 관사를 배정받았다.
이현란은 이북에서 홀로 월남하여 의지할 곳이 없었다.학기 중에는 학교 기숙사에 살았으나, 방학 때는 기숙사를 비워주어야 했다. 친구의 집에 신세를 질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 박정희를 알게 되었고 약혼하고 결혼을 전제로 용산 관사에서 동거하기 시작했다.
신랑 들러리였던 '김점곤' 대위는 몇 개월 후, 박정희 소령의 관사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과 함께 들러리를 했던 이현란이, 박정희 대위와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사실혼에 들어갔으므로, 금혼 규정[6]이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학칙에 따라 이현란은 중퇴로 처리되었다.[7]

4. 박정희의 사정


1917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살이던 1936년에 16살의 김호남과 결혼, 이듬해인 1937년에 딸 박재옥을 낳았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당시 대개 그러하듯 부모와 집안 어른들의 의사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대구사범학교[8] 재학 중이었고, 출세에 대한 야망이 컸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박정희를 낳은 부모[9]는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것을 봐야겠다"며 박정희를 친구의 딸 김호남과 결혼시켰다. 김호남은 집안 살림을 잘 돌보고 시어른들과 시가 식구들을 잘 모시는,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정해 준 아내에게 박정희는 정을 주지 않았다.
박정희는 본처 김호남에게 철저하게 무심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경상북도 문경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방학 때 집에 와서도 김호남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예 집에 오지 않기까지 했다고 한다. 보다못한 셋째 형 박상희가 모처럼 집에 온 박정희를 억지로 김호남의 방에 밀어넣기도 했다. 만주군 장교로 복무해하던 시절에도 김호남에게 안부를 전한다든지 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서울에 머물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박정희는 고금옥의 결혼식에서 이현란을 처음 만났다. 박정희는 이현란이 머물고 있는 대학 기숙사에 찾아가기도 하다가, 동료 이효(李曉)[10] 대위에게 부탁하여 이현란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결국 1948년 6월부터 두 사람은 교제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현란과의 결혼을 염두에 뒀던 박정희는, 고향에 사람을 보내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당시에는 이혼하려면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출석하거나, 이혼의사를 확인하는 문서에 직접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러나 김호남은 서울에서 이혼서류를 든 사람이 찾아올 때마다 도망쳐버렸고, 결국 박정희는 서류상 이혼을 할 수 없었다.
교제한 지 2달이 지난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박정희가 근무하던 경비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와 함께 서울 용산의 옛 일본군 장교 관사가 대한민국 육군에 불하되어, 박정희도 소령 진급과 함께 관사를 배정받았다. 군국주의의 정점을 찍던 옛 일본제국의 장교 관사답게 시설은 좋았다고, 마침 방학이 시작되고 기숙사의 방을 비워야 했으며 돈은 떨어져가고 부모님은 모두 북한에 있어 의지할 곳없던 이현란에게 있어서 박정희는 의지가 되었던 것 같다.
박정희와 이현란은 간단한 약혼식 후,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시작했다. 이현란과 사실혼 관계로 지내는 중에도 박정희는 김호남과의 법적 이혼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역시 김호남이 도망쳐버려 실패했다.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김호남과 박재옥의 존재를 철저히 함구했다. 그에 비해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푹 빠져 그녀를 무척 사랑했었다.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이현란에게 꼬박꼬박 존대했고, 술을 싫어하는 이현란을 위해 술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인 구미에도 한번 데리고 가서 가족들에게 인사를 시킨 적이 있는데 구미에서는 서울에서 멋쟁이 아가씨가 온다고 떡을 준비하고 새 옷을 해 입는 등 나름 준비해서 반겼으나 이현란이 박정희의 낡디낡은 생가를 보고 기겁하여 하룻밤만 자고 도로 올라왔다고 한다. 나중에 이현란은 '기어 들어가서 기어서 나오는 집'이라고 박정희의 집을 묘사했다.

5. 파국


그러나 박정희는 이현란과 오래 가지 못했다. 동거를 시작한지 겨우 '''2달'''이 지난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져버렸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이던 박정희는 전라남도 광주시에 설치된 토벌사령부에 작전참모로 급하게 차출되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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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당시 전라남도 광주시의 토벌사령부에서 작전회의 중인 모습. 담배를 문 사람은 사령관 송호성 준장, 맨 왼쪽에서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젊은 장교가 작전참모 박정희 소령이다.[12]
여순사건의 진압은 마무리됐으나, 곧 군부에는 대규모 숙군이 시작되었다. 남로당 군사부에 포섭되어 활동하던 박정희도, 결국 김창룡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체포된다.
이현란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이효(李曉) 대위가 술에 취해 찾아와 돈을 얼마 쥐어주면서 '당분간 기다려라. (박정희는) 갑자기 출장갔다.'고 말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밤새 '메모나 전화'가 왔을텐데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강문봉 대령 부인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강문봉 대령에게 처음 접했다고 한다.

"너무 기가 막혀. 지금도 가슴 떨릴 정도로 쇼크 받았어요. 많은 사람이 관사에 왔다 갔다 했어요. 나이는 어리고 의지할 데가 없어 나(이현란)는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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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란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현란의 입장에서는 뇌진탕이 일어날 수준의 쇼크를 받아도 아무 이상함이 없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난리통 속에 박정희의 인적사항도 드러나버려, 박정희가 극구 함구하던 아내 김호남과 딸 박재옥의 존재를 이현란이 알게 된다.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약혼식까지 치렀는데, 알고 보니 호적상 유부남의 동거녀일 뿐이었던 것이 었다. 이현란은 시장에서 고향 아줌마를 만나 "지금 남자는 결혼경력이 있고 거기다가 빨갱이니"하고 푸념하자 그 아줌마는 ‘그냥 살지, 여자가 뭐…’라고 했다고 한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 주라. 7기생의 육사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도 하고 아침에 국방부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 주더라. 내(박정희)가 얼마든지 차타고 도피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건 나(박정희)한테 얼마나 불리한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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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김창룡(金昌龍)을 통해 이현란에게 전한 메모

또한, 박정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곧 죽었다는 설은 줄곧 있어왔다. 여기에 대해 이현란은 생전인 1988년, 자유기고가 강인옥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속은 게 분하기도 하고, 내가 애 낳을 새가 어디 있어? 차라리 애가 있으면 붙잡혀 못 나왔을 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독한 사람인데."라고 했다.[13]
그러나, 박정희의 일대기를 추적해 온 정운현 기자는 "박정희가 여순사건으로 특무대에 체포되었을 당시에 이현란이 아들을 출산했으나, 아이는 곧 사망했다"는 증언을 처음 보도했다. 제보자는 박정희와 함께 여순사건으로 체포되었던 김학림(金鶴林) 대위, 그의 아내 강씨[14]가 보내 1999년 1월 19일 편지를 바탕으로서 10년만에 보도했다. 부인 강씨는 당시 박정희와 이현란이 동거하던 이웃 관사에서 살고 있었으며, 남편 김학림과 박정희는 태릉 초가집 동네에서 살 때부터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비밀로 만나는 건 알았지만 (남로당일줄은) 몰랐다고. 남편 김학림이 관사에서 3일 동안 소식이 없이 집에 안 돌아왔었는데, 이현란이 집에 와서 우리 남편(박정희)도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걱정을 하였는데 나중에 체포된 사실을 알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1948년 11월 중순~12월 말 사이쯤 이현란은 광화문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약 6개월 뒤 아들은 병명도 모른채 사망했고, 이현란은 황장군 부인하고 같이 용산 관사의 뒷산에 저녁에 시신을 붉은 상자에 입관(入棺)하여 암매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연루되면서 감옥에 있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아들은 이름도 없었다고 한다. 강씨에 따르면, 이현란은 아들이 죽었을때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하면서 슬피울었다고 증언했다. #
박정희가 석방되어 나온 뒤로도 가출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온 동네를 뒤져 가며 찾는 박정희의 손에 잡혀 오기가 여러차례였다. 이현란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는 박정희를 미워했으나, 나중에 가서는 '무서워졌다고 한다.''' 일부러 오만정 다 떨어지라고 온갖 진상을 다 부리는데도 입을 꾹 닫고 꿈쩍하질 않고, 이렇게 진상을 부리거나 가출했다 잡혀 온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아침밥을 차려놓고 이현란에게 여전히 존댓말로 '''"식사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고. 나중에는 이현란이 "화장실 간다."고만 해도 쫓아가서 화장실 문 앞을 감시했다고 한다.
결국 1950년 2월 6일, 이현란은 술에 취해 잠든 박정희 몰래 나와 '‘그동안 고마웠고 맘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 말고, 날 찾으면 투신자살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 하나만 남겨놓은 채 잠적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그녀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1949년 8월 12일,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충격으로 사망했다. 옥중에 있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 실력을 인정받았던 군대에서도 쫓겨났으며, 약혼녀마저 가출한 박정희는 이 무렵을 어렵게 보냈다.[15]
이현란과 이별한 지 딱 4달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박정희는 다시 소령 계급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당시 박정희는 후퇴하는 정부를 따라 경상북도 대구시까지 내려갔는데, 여기서 마침 대구로 피난왔던 이현란과 우연히 마주친다. 이미 결혼하고 임신 2개월이던 이현란은 대구 시내에서 원피스 입고 모양내고 싹 빼고 가는데 지프차가 빵빵대는 소리가 돌려돌아보니, 지프차에서 군복을 입은 박정희가 내리려고 하자. 그 바람에 이현란은 박정희가 또 데리러 온 줄 알고 부리나케 도망쳐버렸고, 이후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마주친 적이 없었다. 북한 정권이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전국을 석권했던 시점에서, 이현란은 박정희가 당연히 북한에 가담했을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 육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이현란은 '사변통에 월북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돌아다보고 깜짝 놀랐어요. 박씨(박정희)가 내리려고 해서 나 살려라 하고 뛰었지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16][17]

대구시에 머물던 시절, 박정희는 육영수를 소개받아 결혼을 약속했다. 이번에는 솔직하게 서류상 아내가 있음을 실토했다.[18] 박정희는 또 다시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더는 버티지 못한 김호남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로부터 1달 뒤인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하고 남쪽으로 밀리던 시기였다.

6. 이후 이현란의 생애


박정희와 헤어진 후로 이현란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모 여고에서 잠시 교직생활을 했다. 이때 새로 사귀게 된 남성도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지인들과 이현란의 평에 의하면 "착실하고 순진하며 진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이현란이 살고 있는 하숙집으로 찾아와 함께 피난을 가자고 제안했고, 둘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이 남자가 이현란에게 청혼했다. 이현란은 솔직하게 박정희와 동거했던 사실을 밝혔는데, 그럼에도 남자 쪽에서 개의치 않고 추진해 결국 대구시에서 결혼했다. 박정희 역시 대구에서 결혼한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호적상 부인 김호남이 있음을 밝혔는데도 육영수가 개의치 않고 결혼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우연이다.
전쟁이 끝난 뒤로도 이현란의 남편은 경상북도 의성군서울에서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하였다. 이후 이현란은 평범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낳고, 남편에게도 사랑받으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인터뷰에서, 이현란은 10.26 사건을 뉴스에서 전해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뉴스를 듣던 때가 식사 중이었는데, 체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이 그릇을 다 비웠다고 한다. 이현란의 오랜 친구는 그 얘길 들으며 "너 참 독하다"고 혀를 찼다고. 이후 강인옥과의 인터뷰에서도 "그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요."라는 깔끔한 한 마디로 인터뷰를 끝마쳤다. 이후의 거취는 불명. 1992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19]
MBC 공화국 시리즈 중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에 등장했으며, 둘 다 탤런트 김애경이 연기했다. 다만 《제2공화국》 때는 어른의 사정으로 실명을 밝히지 못해 '이 모 여인'으로만 나왔고, 《제3공화국》 때는 실명 그대로 나왔다.
소설가 이병주는 이현란과 박정희의 이야기를 소설화 하여 《그를 버린 여인》이라는 작품으로 내놓은 바 있다.
[1] 남북분단북한이 행정구역을 바꾸어, 지금은 함경남도가 아닌 강원도 소속이다.[2] 1903년 개교되어, 원산시함경남도 지역 여성교육에 많은 기여를 했다. 교명은 학교에 건축 기금을 기부한 미국인 선교사 Lucy Armfield Cuninggim의 이름에서 딴 것.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학교가 있었는데, 화강암으로 지어진 교사가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도 이 학교 출신이다. 광복 후 북녘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후로는 폐교된 것으로 추정된다.[3] 고등여학교(高等女學校)를 줄여서 고녀(高女)라고 했다. 여자고등보통학교(女子高等普通學校)는 줄여서 여고보(女高普)라고 했다. 고녀와 여고보는 대략 오늘날의 여자중학교여자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때 여학생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은, 처음에는 여자고등보통학교라고 칭했다가 나중에는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다.[4] 월남 과정은 소설가 황순원과 비슷하다. 황순원의 부친은 평양 출신으로, 숭덕학교 교사로 독립운동에도 가담한 바 있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재력가라는 이유로 황순원의 집안을 털어버렸고, 결국 황순원의 집안은 서울로 월남했다.[5] 당시에는 남녀 불문하고 이 정도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고등교육은 커녕 소학진학도 못해서 문맹인 사람이 대단히 많았던 시절이었다.게다가 여자는 남존여비가 심해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실제로 육영수의 경우 집안이 부자라서 대학을 갈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을 못 갔다.[6] 금혼 학칙은 구한말 이화학당을 세운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신체적ㆍ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 소녀들을 강제 조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어린 소녀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시집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선교사들은 부모들을 간절히 설득했고, 심지어 방학 중에 억지로 결혼하여 이화학당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 소녀들도 있어, 방학을 없애기까지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금혼 학칙으로 인해 중퇴해야 했던 여성 중 유명한 사람들이 바로 전두환의 아내인 이순자,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작가 강신재, 배우 김혜자 등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금혼 학칙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고, 2003년 이화여자대학교는 금혼 학칙을 폐지했다.[7] 요즘도 '''취집'''이란 말이 공공연히 돌 지경인데,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금혼 학칙이 없어도 결혼을 이유로 자퇴하는 여대생들이 매우 많았다.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결혼한 뒤로도 학교를 다니면 이상한 눈초리로 볼 지경이었다. 그 실례로 소설가 박완서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지자 잠정적으로 무기한 휴학했다가, 결혼하면서 대학을 중퇴했다. 이런 인식은 국민들이 점점 열린 사고를 가지게 되면서 1990년대부터 잦아들어, 2000년대에 와서는 재학 중에 결혼해도 학교를 계속 다녀 졸업하는 경우가 많다. [8]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9] 아버지 박성빈은 1871년생, 어머니 백남의는 1872년생. 박정희를 낳을 때 각각 46세, 45세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말년에 병을 얻은 상태였다. 어머니 백남의가 시집간 장녀 박귀희(가수 은지원의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태어나자마자 외삼촌이 되었다.[10] 이현란의 6촌 오빠로, 함경남도 함흥시 출신이다.[11] 박정희소위로 임관한 뒤 한국군 최초로 연대급 전술훈련을 입안하여 중위를 건너뛰고 대위로 특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됐다.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줄도 모르고, 교관을 급하게 야전부대 작전참모로 발탁해 데려갔던 것.[12] 내막을 알면 좀 코믹한 사진이기도 하다. 송호성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군의 수치로 여겨질 정도로 무능의 극치를 달렸던 것이 송호성이었다. 박정희는 열심히 지도를 가리키며 사령관 송호성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송호성도 짐짓 진지하게 지도를 보고 있는데… '''정작 송호성은 독도법을 몰랐다.''' 즉 문맹인 사람이 책을 보며 다 알아보는 척 하는 것과 마찬가지(…) 옆에 외국 군인인 미군 장교가 있으니 진지한 척 연기를 했을 뿐, 미군이 나가고 카메라를 치우자마자 지도도 함께 치워버렸다. 그리고 기록적인 졸전을 벌이다 사령관 자리에서 짤렸다.[13] 다만 그때 가정을 꾸려 남편과 자녀들이 있었던 이현란으로서는, 설령 박정희의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 해도 솔직히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14] 1999년 당시 일본 거주[15] 이후 박정희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만주군 선배 백선엽이 비정규 문관(군무원)으로 박정희를 육군본부에 보내, 한국전쟁 직전까지 박정희는 현역 장교가 아닌 육군본부 문관 신분이었다.[16]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육군본부경기도 수원으로 퇴각했을 때, 박정희가 뒤쳐져 수원에 나타나자 "아니, 형님도 오셨어요?" 하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박정희에게는 남로당의 낙인이 찍혀 있던 것. 그 말을 들은 박정희는 아무 대답없이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고 한다.[17] 당시 일이 와전되어, 이현란이 대구시의 술집에서 일하다 마침 회식하러 온 박정희와 마주쳐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당시 이현란에게는 교제하던 남성도 있었고, 곧 대구에서 결혼했기 때문. 그 소문이 이현란에 귀에 들려 가출 당시 박정희에게 전화해 非신사적으로 행동하지말도록 엄포 놓았다고 한다.[18] 어찌 됐든 이혼남에게 처녀가 시집가는 모습이었고,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된 것은, 폭압적인 육종관에 대한 이경령&육영수 모녀의 반발심 탓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경령은 사주단자를 교환하며 딸의 사주를 점쟁이들에게 보였는데, 이구동성으로 "이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를 만나면, 사주팔자가 중화되어 남편 복이 매우 좋아진다."고 풀이했다고 한다.[19] 이 설 대로라면 그녀는 향년 67세로 사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