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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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군인,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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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육영수의 아들. 그리고 박재옥[2] , 박근혜, 박근령의 남동생, 그리고 (주)EG[3] 의 회장이다.
논란도 많고 사고도 많이 쳤던 인물이지만, 최순실과 국정농단을 저지르다 아예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큰누나인 박근혜나 한 각종 여러 문제적인 발언들로 논란이 되었던 작은누나 박근령보다는 그나마 개념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4] 현재는 고인이 된 포스코 초대 회장이었던 박태준이 박지만의 후견인을 맡아 기업경영을 맡을 수 있게 도와준것을 보아 지금처럼 갱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약 중독을 비롯해 아래 하술된 정윤회 게이트나 박근혜 5촌 살인사건과 같은 논란과 의혹들도 적지 않은데다 과거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사과조차 없었기 때문에 역시나 논란과 비난이 있다. 그리고 마약을 끊고 현재 부인인 서향희와 결혼하여 안정을 찾은 이후에도 이 사람이 보인 여러가지 안 좋은 행보들을 볼 때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참고로 박지만은 1958년 생, 서향희는 1974년 생으로 나이차가 상당하다.
박지만은 슬하에 4남이 있다.
- 장남 박세현: 2005년 생
- 차남 박정현: 2014년 생
- 3남/4남 박지현/박수현[5] : 2015년 생
2. 생애
1958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8] 에서 당시 육군 제1군 참모장 박정희 소장과 후처 육영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재옥[9] , 박근혜, 박근령 3명의 누나를 두었다. 1974년(고등학교 1학년)에는 어머니 육영수, 1979년(육사 3학년)에는 아버지 박정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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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도 육사 입교식에 참석한 뒤 육사 생도 정장복장을 한 [지만군을 만나는 누나 근혜(왼쪽), 근령씨. 1977.3.2 [연합뉴스] 출처
1977년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교했다. 1981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11] , 방공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소대장을 빌딩 GOP에서 복무하는 등 아버지의 후광에 대한 영향인지 매우 편하게 보냈다. 군복무보다는 직장생활에 훨씬 가까웠다. 육사 생도 시절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제법 [12] 미남이었으나 현재는 얼굴이 다소 뭉그러져 있는데, 그 이유는 전역하기 1년 전에 음주운전으로 인해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탓이었다.## 이 교통사고[13] 때문에 의무 복무기한인 5년만 버티고, 1986년에 대위로 전역한다. 전역 후 죽은 어머니가 세운 육영재단에 들어가 이사를 지냈으며, 1991년에는 삼양산업을 인수하였다. 마약 중독 및 의존 증상으로 1989년부터 2002년까지 마약 투약혐의로 여러 차례 구속수감되었다.[14]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이던 김대중을 지지하였다.[15] 2000년, 삼양산업을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상호를 EG로 변경하였다. 2004년 12월 14일에 16세 연하인 서향희 변호사와 결혼했고, 2005년 장남 박세현이 태어난다. 2014년에는 차남 박정현, 2015년 초에는 쌍둥이 아들인 박지현과 박수현을 얻었다.[16] 그러니까 아들만 넷이다. 게다가 2015년 초반 시점에서 박지만은 58세. 상당한 늦둥이다. 두 누나는 모두 자식이 없기 때문에, 박정희와 육영수의 직계 후손은 박지만의 아들 넷뿐이다.[17]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고 구속영장심사를 받는 지경까지 가자 박지만은 근혜 누나가 최순실 그 식모 나부랭이 따위에게 속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누나를 '''최순실에게서 분리시키지 못한 죄'''에 대해 큰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이제 최순실이랑 떨어져야 되는데 '''과연 그럴까 걱정된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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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파면당하고 검찰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할 때 부인 서향희와 함께 찾아갔다. "누나를 만나고 나온 박 회장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큰누나 얼굴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청와대 경호실 측에 '누나 뒷바라지는 내가 할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달라'는 뜻을 전했다"고 했다.
박근혜가 구속된 이후 구치소를 방문하며 변호인단 구성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내인 서향희 씨가 직접 변호인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남동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도로 추정한다. 정작 박근혜 본인은 박지만과의 면회를 거부하는 등 이러한 지원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유영하만을 문고리 삼아 현실도피하고 있다. 참고로 그동안 도와주지 않은 이유는 '또 거부당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면 누나가 언론에 남동생을 무시하는 매정한 사람으로 비쳐질까봐'라고...
박근혜가 2018년 4월 6일 재판 1심에서 징역 24년형을 선고받은 후로는 언론과의 인터뷰나 언행을 자제하고 있지만, 친척인 김종필 전 총리의 장례식과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이따금씩 모습을 보였다. ## 이복누나인 박재옥의 빈소를 지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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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란
3.1. 생도 시절 비행
이미 김재규는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외에도 박지만의 비행을 항소의 이유로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품행의 단정이 요구되는 사관생도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문란한 엽색행각을 서울 시내 호텔에서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육사2기수 선배였던 노병천 예비역 대령[18] 에게 먼지나게 쳐맞을 정도였다고....
3.2. 마약 투약
박지만은 1989년부터 2002년까지 마약을 투약한 것이 6차례 적발되었고, 이 중 무려 5번 구속된 전적이 있는 상습 마약사범이다. 특히 여관, 호텔이나 사창가에서 매춘부들과 수백 차례 마약을 투약하고 성관계를 가져 충격을 줬다.
- 1989년 필로폰 상용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 1991년 필로폰 상습 복용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구속 이유는 1990년 7월, 11월, 12월 그리고 1991년 1월 4차례에 걸쳐 필로폰을 코로 흡입하거나 정맥주사를 통하여 복용한 혐의이다.
- 1993년 12월 25일 박지만은 1992년 10월 부터 서울 영등포동, 청량리동의 사창가에서 윤락녀들과 함께 50여회에 걸쳐 필로폰을 상습 투약한 혐의로 검거되었다.
- 1996년 11월 19일 서울지검 강력부는 박지만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구속 이유는 서울 청량리동의 사창가에서 윤락녀와 함께 필로폰을 투약하는 등 자신의 집, 사창가, 호텔 등에서 50여 차례에 걸쳐 상습 투약을 한 혐의이다.
- 1998년 2월 2일 서울지검 강력부는 필로폰 투약 혐의로 긴급 체포한 박지만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위반으로 구속하였다. 구속 이유는 1997년 12월 자신의 집에서 주사기를 이용하여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이다.
- 2002년 7월 25일 서울지검 마약수사부는 박지만에게 필로폰 투약 혐의 등으로 징역 2년 6월 및 치료감호 그리고 추징금 260만원을 구형하였다. 기소 이유는 2001년 8월 부터 2002년 4월까지 서울시내의 사창가와 여관 등에서 12차례에 걸쳐 필로폰을 투약하고 윤락녀와 성관계를 가진 혐의이며, 2002년 5월 구속기소되었다.
3.3. 군 인사 영향력 논란
그와 동기인 육사 37기가 육사 한 기수당 평균 6~7명 정도 배출하던 중장을 8명이나 배출하는 바람에 그가 군 인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었으나, 대장 3명 배출한 32기, 34기도 있는 마당에 중장을 다른 기수보다 1명 더 배출한 것을 두고 인사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오히려 그와 절친한 이재수 중장이 기무사령관 취임한 지 1년만에 밀려나 전역 대기직인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된 것을 볼 때, 영향을 끼친 건 맞는데 그게 '''악'''영향이었던 걸로 보인다.
또한 2015년 9월 대장 진급 발표심사에서 '''박지만 라인은 전원 광탈'''했다. 박지만과 동기였지만, 그와 접점이 적었던 김영식 항공작전사령관, 엄기학 합참 작전본부장, 박찬주 육군참모차장을 비롯한 셋이 대장으로 진급했다. 더구나 김영식 중장은 한직을 받고 박찬주 중장은 병과가 기갑인데도 보병이 독식하고 가뭄에 콩 나듯 포병이 나온다는 대장에 진급했다. 더군다나 박찬주의 경우 '''건군 이래 최초의 기갑 대장'''이다.
3.3.1. 군 인사 영향력 논란에 대한 반박
32기, 34기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2000년 이후 육사 24기, 26기, 28기, 29기, 30기에서 대장을 3명 배출했다. 보통 대장은 기수당 2-3명 정도 배출인데 그게 무슨 특이사항인가. 그리고 육사 37기에서 중장 8명이 나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 맞다.
애초에 이재수 중장은 인사참모부 인사기획과장, 2작사 인사참모처장,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인사사령관까지 오른, 전형적인 인사 직능의 장군이다. 때문에 군단장 보직조차 거치지 않았고 대신 인사 직능으로선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인사사령관을 거쳐 기무사령관에 오른 거다. 작전 직능이 아니고 군단장 보직도 거치지 않은 사람이 대장으로 진급할 가능성은 없었으니 전형적인 옷 벗기 자리인 제3야전군 부사령관으로 갔다. 악영향이랄 것도 없이 당연한 거다. 사실 대장에 진급하려면...
- 전포대장
- 포대장
- 대대장
- 단장
- 여단장
- 군단장
전인범 중장의 경우는 정말 승승장구하던 군인이었다. 하지만 특전사령관 시절 제13공수특전여단 훈련사망사고로 하사 2명이 사망했다. 구타 가혹행위나 비무장 단순 군무이탈 행위도 지휘관에게는 진급에 치명적인 과사실이 된다. 그런데 이 사고는 그런것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큰 과사실인 사망사고, 그것도 2명이나 사망한 사고이다. 그것도 훈련 중에 일어난 인명사고다. 빼도 박도 못할 사고인 것이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김영식 대장은 5군단장과 항공작전사령관 자리를 거쳤다. 5군단장은 김현집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조정환 육군참모총장, 이성출 연합사 부사령관이 거쳐간 자리다. 항공작전사령관도 1대 사령관 김판규(육군) 중장은 1군사령관을 거쳐 참모총장에 올랐고, 9대 사령관 이희원 중장도 연합사 부사령관에 올랐으며 가장 최근엔 이순진 중장이 제2작전사령관을 거쳐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 올랐다. 그게 한직이면 대한민국에 장교 보직은 죄다 별의 무덤이다. 대장이라는 계급의 특수성 때문에, 대장은 계급 자체만으로도 국군 최고의 영광이다. 대장 7명[20] 은 하나같이 요직이다. 한직에서 맴돌 사람이었으면, 아예 대장이 되지 못한다.
3.4. 정윤회 게이트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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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동향’ 문건을 둘러싼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과 정윤회씨의 진실공방 이면에는 조 전 비서관과 가까운 박지만 EG 회장의 인맥과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문고리 권력’의 파워 게임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지배적 시각이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막후의 양대 파워 그룹이 그간 곳곳에서 충돌을 빚으며 치열한 암투를 벌인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3.5. 5촌 살인사건
박근혜 5촌 살인사건 문서 참고.
2017년 1월 1일 박지만의 비서실 직원인 주 모씨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2016년 12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1057회 'VIP 5촌 살인사건의 진실'이 방영되어 여론의 관심이 높아진 시기에 갑자기 사망한 것이어서, 일각에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숨겨진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입막음용으로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시신의 외상은 없다고 경찰이 밝혔다. 유가족은 부검을 요청.
3.6. 친일인명사전 배포금지 가처분 소송
박지만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에 대한 배포금지 가처분 소송을 진행하였다.
2009년 11월 6일 서울북부지법 민사 13부(서창원 부장판사)는 " 채무자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에 대한 서술이 출생에서부터 사망에까지 시간순서에 따른 구체적인 서술이며 , 참고문헌이 확실하고 2009년 11월 5일 언론매체에 공개되어 배포금지에 대한 실익이 크지 않다,채무자의 서술은 학문적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사자와 그 유족의 인격권을 훼손한다고 보기 어렵다. " 등의 이유로 신청을 기각하였다.
4. 기타
- 육군사관학교에 1학년으로 갓 입교했을 당시 4학년 기파생도(육사 34기)가 "귀관들 중 본인은 입교하기 싫은데 강제로 입교한 인원이 있나? 있으면 조용히 손만 들어봐라."라고 물어봤을 때 유일하게 손을 든 인원이 박지만 생도였다.
- 원래는 꽤 훈남이었으나 대위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이 뭉그러졌다.
- 박지만이 소위로 임관하던 해에 다름아닌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으며 전두환은 그런 박지만을 최대한 배려하기 위해 박지만의 입장에서 최고의 땡보로 부대 배치를 해 줬다.
- 40대 중후반에 결혼하고도 슬하에 4남을 뒀다. 특히 3남 박지현, 4남 박수현은 아버지인 박지만과 57년 차이가 난다. 이쯤되면 할아버지와 손자의 나이만큼 차이가 나는 셈이다.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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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아들로서 영상물에서는 제4공화국 및 제5공화국에 등장했다. 제4공화국에서는 장나라의 오빠인 장성원이 연기했으며, 제5공화국에서는 김남길이 연기했다.[21] 특히 김남길은 진짜 젊은 시절 박지만과 굉장히 흡사한 외모로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효자동 이발사에서도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나온다. 주인공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다가 어른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주인공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얄미운 모습을 보인다.
6. 관련 문서
[1] 직강공파 30세손으로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이복 누나 박재옥이나 사촌형 박재홍 등은 항렬자를 썼다.[2] 박정희가 소박맞힌 전처 김호남의 딸. 저 위에는 어머니 김호남과 함께 올라있지 않다[3] 산화철 전문제조업체, 복합재료, 염산화수, 설비 엔지니어링, 대기수처리방지시설, 무역 등을 취급하는 회사라고 한다. 본사 서울특별시 강남구 소재. 금산군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금산은 명목상의 본사일 뿐 회장 집무실을 포함한 오피스 빌딩은 강남에 'EG빌딩'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포스코의 명목상의 본사는 포항제철소지만 대치동 포스코센터가 실질적 본사인 거랑 같은 이치. 참고로, EG the1으로 유명했던 EG건설(현 동양건설산업)과는 관련 없는 별개의 회사이다. 실제로 탄핵정국 당시 엉뚱한 동양건설산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4] 헌데 주진우 기자를 비롯한 소수의 언론인, 국내 정치 학자들은 논란이 있음에도 박정희와 육영수의 자식 삼남매들 중에서 박근령이 가장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예 사이비종교와 부정부패, 현실부정, 정신승리로 일관하며 딴 세상에 가있는 박근혜나 마약 전과에 박근혜 5촌 살인 사건 개입 의혹 등 지저분한 범죄 논란에 연루되어 있는 박지만과는 다르게 사고방식이 일반인에 가깝다는 뜻으로 해석된다.[5] 쌍둥이이다.[6] 남매지간임에도 나이 차가 정말 거대하게 나는데, 어머니와 아들이라고 해도 믿은 만큼 나이차가 매우 심하다. 21년 차이로 이렇게 된 건 박정희는 집안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김호남과 1936년 결혼해서 그 이듬해에 박재옥을 낳았기 때문이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그 무지막지하게 혼란한 틈을 타서 김호남과 잽싸게 이혼한 후 결혼한 여자이다. 그 동안 박정희와 김호남의 이혼을 결사반대했던 친척들은 이 전쟁으로 인해 죄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친 이후라 박정희는 너무나도 쉽고 간단하게 이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한창 발발하던 1952년에 태어난 박근혜조차 박재옥보다 15살이나 연하이다.[7] 당시 박근령은 현 남편 신동욱과 재혼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혼자 식장에 등장했다.[8] 1975년 10월 1일 중구로 편입되었다.[9]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하기 전, 첫 번째 부인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10] 물론 박근령과 시가의 갈등도 있었다.[11] 매부 신동욱의 주장에 따르면 졸업 직후인 당시 누나 박근혜, 박근령과 함께 성북동에 살면서 잠시 우애있게 지냈다고 한다. 박근령이 신동욱에게 말하기로, 박근혜가 국을 잘 끓였다고 하는데, 박지만을 위해 북어국을 자주 끓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신동욱은 당시 박지만이 술을 많이 마셨던 것으로 추측한다. 남매끼리 멀어지기 시작한 건 1982년 박근령의 결혼 이후에 박근령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던 박근혜의 집에 찾아갈 때마다, 역시 당시 그 집에 자주 오던 최태민을 만나면서 이혼의 부추김을 받던 시점[10] 부터라고 한다. 박근령은 실제로 1년도 못 가 이혼했고, 당시 사회분위기상 한국에서 손가락질 받는 게 두려워 미국에 갔다고 하는데, 출국한 부분 역시 최태민의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박근혜와의 교류가 잠깐 멈추었다.[12] 김남길은 이 드라마에서 이 배역으로 뜨기 이전 신인 시절에 제5공화국에서 박지만 역을 맡은 적 있다. 대사도 거의 없는 단역이였다.[13] 1985년 3월 23일 0시 5분에 피아트 승용차를 운전하다가 제3한강교 교각을 들이받아 전치3주의 부상을 입어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14] 1989년 처음 마약을 사용하여 구속되었다.[15] 이로 인해 동교동계의 대표적인 인사인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새누리당에 입당하게 된다. 박지만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이유는 자신이 마약과 술로 찌들던때 아버지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포스코의 설립자이기도 한 박태준이 후견인역할을 하였는데 그가 DJ를 지지한 연유가 클 것이다.[16] 사실 박지만은 둘째까지만 낳고 그만 낳으려고 했지만, 부인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출처.[17] 박정희 쪽으로만 따지면 장녀 박재옥의 자녀들이 있다. 이 쪽은 박정희에게는 외손자, 외손녀들이 된다.[18] 인터뷰에서 입을 털은 거다. 여담으로 동기가 박선우, 신현돈, 황인무, 박남수, 류제승 등이 있다.[19] 참고로 박정희가 만일 쿠데타가 실패하면 (당연히 자신은 총살될 테니까) 자기 가족을 맡기려고 했던 인물이 박태준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측근임에도 쿠데타 계획에서 박태준을 일부러 빼놨을 정도이고 포철을 건립하고 국영기업으로 두었는데도 그에게 경영을 전적으로 위임할 정도로 신임하였다. 박태준이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청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리고 박정희 사망 이후 박태준은 박지만에게 (주)EG를 만들어 경영을 맡긴다.[20]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지상작전사령관, 제2작전사령관[21] 알다시피 김남길이 현시점에서는 인기가 많지만, 2005년에는 새내기였다. 김남길이 스타덤에 오른 작품이 다름아닌 2009년에 방송된 바 있는 선덕여왕이다. 김남길은 2008년까지 무명이었다가, <선덕여왕> 덕분에 인기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