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환

 


'''박명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
'''2001'''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2'''

[image] '''1995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2004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2004 KBO 리그 탈삼진왕'''
-
'''OB 베어스 등번호 51번'''
황용승

'''박명환(1996~1997)'''

이경원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27번'''
박상현(1997)

'''박명환(1998~2006)'''

다니엘 리오스(2007)
'''LG 트윈스 등번호 27번'''
장준관(2004~2006)

'''박명환(2007~2012)'''

김기표(2013~2014)
'''NC 다이노스 등번호 41번'''
이형범(2013)

'''박명환(2014)'''

김성계(2015)
'''NC 다이노스 등번호 22번'''
임정호(2014)

'''박명환(2015)'''

이준평(2016~2018)


'''박명환
朴明桓 | myong-hwan Park'''
'''출생'''
1977년 6월 7일 (46세)
서울특별시 중구
'''신체'''
187cm, 92kg
'''학력'''
서울청구초[1] - 충암중 - 충암고 - 대불대
'''병역'''
병역면제[2]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고졸우선지명
'''소속팀'''
'''OB/두산 베어스 (1996~2006)'''
LG 트윈스 (2007~2012)
NC 다이노스 (2014~2015)
'''지도자 경력'''
NC 다이노스 2군 보조투수코치 (2016)
성남 블루팬더스 투수코치 (2017~2018)
'''링크'''
[3] [4]
1. 개요
2. 선수 경력
2.2.1. 2006년 ~ 2010년
2.2.2. 2011년
2.2.3. 2012년
2.3.1. 2014년
2.3.2. 2015년
2.4. 연도별 성적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1. 방송에서 밝힌 이야기들
5.2. 논란
6. 기타

[clearfix]

1. 개요


[image]
前 '''OB/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NC 다이노스의 투수.
'''2000년대 두산을 대표하는 우완에이스이자 리그 우완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차명주와 함께 두산 시절 김인식의 혹사 피해자이자 FA 이적 후 LG 에서는 먹튀 산맥의 한 축(홍현우, 진필중, 마해영, '''박명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선수생활 마무리는 NC에서 하게 되었다. 과거 약물복용 전과가 있는 선수.

2. 선수 경력



2.1. OB / 두산 베어스 시절


[image]
두산 베어스 시절.
서울청구초등학교, 충암고등학교 야구부를 졸업하고 OB 베어스의 고졸우선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5][6]#
박명환은 고교 시절부터 145km/h의 강속구를 던지며 고교 유망주 투수 랭킹 상위에 이름을 올려놓았고[7], 150km/h 대의 속구를 던질 수 있는 재목으로 일찍부터 기대받고 있었다. 3학년 때 봉황대기에서의 활약으로 충암고를 우승시키고 MVP에 오르면서 몸값을 한껏 올린 박명환은 OB에 계약금 3억 원을 받고 입단하는데[8], 이는 전년도 심재학김재걸이 기록했던 2억 3천만 원을 갈아치운 신기록이었으나 불과 한 달 후 삼성의 최창양이 5억을 받으며 깨지고 만다.
OB/두산 시절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완 파워 피처 중 한 명이었다. 140km/h 중후반대를 기록하는 묵직한 강속구와 슬라이더 조합이 위력적이었으며, 데뷔 시즌이었던 1996년 시즌에 10승은 실패했으나[9] 피안타율 .221, 185.1이닝 139삼진 평균자책점 3.84라는 인상적인 성적을 기록했다.[10] 그 뒤에도 부상으로 공친 1999년~2000년 시즌, 그리고 2003년 시즌을 제외하고 나름대로 안정적인 성적을 기록한 투수였다. 그런데 2000년에는 아예 공친 건 아니고, 한국시리즈에 등판하기도 했었다. 6차전을 마무리한게 그였으니...
2001년에는 팀 내 선발진에서 최다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2001년 두산의 선발진이 작살나서 박명환의 승수는 단 8승이었고, 정작 마무리 진필중이 9승으로 팀 내 최다승을 거두었었다. 즉, 01시즌 두산은 단 한 명의 10승 투수도 없이 우승을 했다는 소리다.
이 시절부터 부상이 잦은 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200이닝을 넘겨 본 적이 없으며, 특히 두산에서 보낸 마지막 두 시즌 역시 피안타율 2할대 초반, 이닝당 1개 이상의 탈삼진율 등 비율 성적은 매우 좋았지만, 부상으로 두 시즌 합쳐 234.2이닝 투구에 그쳤다. 사실 고졸 3년차까진 180이닝 거뜬히 소화한 투수였으니 처음부터 유리몸이었다곤 할 수 없다. 고졸 신인을 1년차부터 3년까지 마구다지로 굴려먹은 김인식 감독의 기용이 문제였다. 다만 그런 부분과는 별개로 박명환 본인은 김인식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존경하고 있다. 이는 방송이나 여러 모습에서 볼 수가 있는 부분이다.
[image]
2005년에는 갑상선 항진증으로 인해 양배추를 넣고 투구하다가 규정 위반으로 걸린 사건으로 인해 "박배추"라는 별명이 생겼다. 양배추잎을 모자에 넣으면 시원해지지만 이 일 이후 KBO양배추잎을 '이물질'로 규정, 위반으로 판명하고 그 이후에 양배추잎을 모자에 넣는 행위를 금지하게 된다. 참고로 이는 이승엽의 56호 홈런 이후 두 번째로 미국 현지에서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해프닝이었다. [11]
[image]
[image]
이는 스펀지에서 먼저 소개된 적이 있었으며, 아내가 스펀지를 보고 추천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스펀지 100회에 특별출연 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모자 안에 양배추잎을 넣으면 시원해진다는 생활 속 지혜의 대표적인 예로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흠좀무 여담으로 당시 스펀지에서 양배추 실험 대상자 중 한명이 덕수고 시절의 민병헌. 해당 문서 참조. 그리고 개그 콘서트에서 개그맨 윤성호가 패러디했을 정도로 임팩트가 컸던 사건이다.
후에 한 박명환야구TV 영상에서 그 때 썰을 풀었는데 당시 10연승 중이라 징크스 때문에 머리를 안잘라서 모자가 뜬 탓에 양배추가 떨어진거 같다고 밝혔다. 그리고 아이스박스에 이닝당 1개씩 양배추를 9개씩 넣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다른 동료들이 썼다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두산의 선발진을 쭉 지키며 매년 10승 정도는 거둬서 제 몫을 했다. 특히 2004년에는 12승을 거두면서 에이스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6년 3월 WBC대표팀 이던 당시 도핑테스트에서 약물이 적발되었다.

2.2. LG 트윈스 시절


[image]
LG 트윈스 시절.
첫 해를 제외하고 '''해마다 겨울을 뜨겁게 달군 투수.'''[12]

2.2.1. 2006년 ~ 2010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앞두고 국제야구연맹이 주관해 실시한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 중 하나인 노르안드로스텐디아올이 검출되어 대표팀에서 낙마했다.

어쨌건 당시 FA 선수 수집에 돈을 아끼지 않던 LG 트윈스가 4년 40억 원(계약금 18억, 연봉 5억, 옵션 +/- 2억) 이라는 거액에 그를 낚아챘다.[13] 이때 두산에서 같은 금액을 제시했는데 LG로 갔다는 오해를 많이 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두산은 금액 자체를 제시한 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즉, 제시했다는 언플만 했다는 것. 관련기사 LG에서의 첫 시즌인 2007년에는 10승 6패 평균자책점 3.19, 155.1이닝 동안 117삼진이라는 나름대로 괜찮은 기록(물론 연봉 10억짜리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을 내며 전년도 꼴찌[14]였던 LG를 5위로 끌어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나….
그 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부상에 시달렸다. '''3년 동안''' 던진 투구 이닝이 115이닝, 올린 승수가 단 '''4'''승이며, 이마저도 2010년 한 해 올린 승수이다. 1년 당 38⅓이닝, 선발 6이닝으로 6~7 경기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2010년 시즌엔 76이닝을 던지면서 94안타를 허용하고 삼진 개수가 46개에 불과하다. 이미 전성기의 구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인 듯. 그나마 인상적인 경기는 6월 10일, 6회 2사까지 퍼펙트게임을 시전한 경기였다. 물론 야갤러들이 설레발 치자마자 박살났지만...
LG에서 4년 동안 40억을 받으면서 던진 투구 이닝이 270⅓이닝, 쌓은 승패가 14승 16패, 전매특허였던 탈삼진 역시 185개에 불과하다. 참고로 류현진이 '''2010년 1년간''' 기록한 삼진 개수가 187개, 본인 최다 기록이 181개였다….

2.2.2. 2011년


결국 2011 시즌을 앞두고 연봉이 5억 원에서 5,000만 원으로 무려 '''90%가 삭감되는''' 위업을 달성했다.[15] 이 삭감률은 현재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래 최대 삭감률이다.[16]. 사실 연봉만을 따졌을 때 90%일 뿐이지, 실제 계약 액수를 감안해 본다면 1/20토막('''95% 삭감''')이 된 것. 하지만 LG 팬들은 연승을 끊는 남자와 더불어 왜 5,000만원씩이나 주냐고 분노했었다.
거기에 새로 취임한 백순길 LG 트윈스 단장에게 언론을 통해 직접적으로 디스까지 당했다. 그러게 진작에 잘했으면 이런 일을 당하나
들려 오는 소식으로는 대학 팀하고 연습경기에 등판했지만 신나게 두들겨 맞고 떡실신했다고 한다. 구위를 회복한다고 해도 LG 트윈스의 마운드 상황이 창단 이래 가장 널널한 편이었기 때문에 박명환이 껴들수 있을 여지도 없던 데다가, 구속 & 변화구 모두 무뎌진 상황이라 이대로 간다면 은퇴할 가능성이 짙다고 평가되었다.

2.2.3. 2012년


LG에서는 그를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하지 않았고, 연봉도 동결했다. 이로써 그에게 2012년 한 해 더 기회가 주어졌다... 라고 쓰고 선수협 총알받이라고 읽는다[17] 그리고 기회만 주어졌고 여전히 소식은 없다.
7월 10일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선수들에게 배트·글러브 교환권을 제공했다고 한다.
결국 노쇠화로 부활에 실패하며 구단에서는 2012년 시즌 종료를 앞두고 경헌호, 김유선, 심광호, 이대환, 손인호와 함께 박명환을 방출하기로 했다.
2012년 11월 8일 기사에 의하면 자유계약 신분으로 풀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선수 자신은 LG 트윈스에서 재기를 노리고 싶다고 밝혔다.
2013년 1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선수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해외 진출을 도전할 것이라고... 이후 최원호가 운영하는 피칭 센터에서 꾸준히 준비했다.[18]

2.3. NC 다이노스 시절


[image]
NC 다이노스 시절.
공개 테스트를 자청하여 입단 테스트를 받은 후 2013년 10월 5일 연봉 5,000만원의 조건으로 NC 다이노스에 입단했다. 로케이션으로 승부해 왔던 손민한과는 달리 직구 & 슬라이더 일변도의 구종으로 승부했던 박명환이었던지라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 팬이 많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라는 팬들도 많다.

2.3.1. 2014년


2014년 2월 22일 대만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와 맞붙은 연습경기에서 첫 실전 등판, 1이닝 3실점으로 부진했다.
3월 11일 LG와의 시범경기에 등판. 1이닝 무실점으로 활약하였다. 이 경기를 계기로 계투조로 낙점받았다.#
이후 최고 구속 144km/h를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손민한에 이어 부활해 준다면 젊은 선수들 위주인 NC에 큰 플러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시범경기에서 그저 그런 성적을 보이며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6월 1일 1군에 등록되었다.# 원래는 올스타전 전후에 등록 예정이었지만, 김경문 감독이 일정을 앞당겼다.
6월 4일 넥센 히어로즈전 9회초에 등판, 1이닝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오랜만에 등판에 긴장했는지 몸이 덜 풀렸는지 몰라도 볼넷만 3개를 내줘 위기를 자초했지만, 1루수 플라이 아웃과 삼진 2개로 이닝을 마무리했다.[19] 이날 1,425일만에 올라온 1군 무대에서 박헌도를 삼진 아웃으로 잡으면서 역대 5번째 1400K 기록을 세웠다. 경기후 인터뷰
6월 13일 태드 웨버가 부상으로 한 이닝도 던지지 못하고 강판된 경기에서 9회말에 등판했지만, 1사 상황에서 민병헌에게 볼넷을 준 이후 폭투와 오재원 타석에서 삼진을 잡을때 슬라이더가 빠지며 끝내기 폭투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다음날 1군에서 말소되었다. 김경문 감독의 말에 의하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같다며 말소 이유를 밝혔다. 얼마 던지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슬라이더는 건재했으니, 다시 올라오면 괜찮은 모습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7월 22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 10회말 1사 1, 2루 상황에서 등판하였으나, 2연속 볼넷으로 결국 결승점을 헌납하였다.
김경문 감독이 남은 시즌은 선발로 기용한다고했다.
10월 17일 시즌 마지막 경기 두산 베어스전 연장 10회말 1:1 상황에 등판하였다. 선두 타자 김응민에게 몸에 맞는 볼을 허용하며 흔들리나 싶었지만 이후 11회말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지명타자 소멸로 12회초 타석에 올라와서 3구 삼진을 당하였다. 12회말 1사 1루에서 정수빈의 타구가 애매하게 빠져나가고 NC 내야수들의 개그수비로 1,3루가 되었고 결국 김진형에게 적시타를 맞아 패전 투수가 되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투구 내용은 나쁘지 않았던 편.
준 플레이오프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으며, 다음 시즌 선발로 활약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고한다. 나이가 많은데다가 2014년 성적이 좋다고만은 볼 수 없는지라 다음 시즌엔 어떨지 미지수.

2.3.2. 2015년


2군에서 시작하며 어김없이 부활기사가 나오고 있다.
연습경기의 투구 내용도 나쁘진 않은 편이기에 이번 시즌에 손민한처럼 재기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팬들은 딱히 기대는 없지만 손민한처럼 부활하면 좋겠다는 미적지근한 반응만 보였다.
하지만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고, 시즌 개막 직후 2군에서 열심히 얻어맞았다.
그러다가 언제 1군에 등록되었는지 5월 6일 KIA전 선발로 예고되었다. 상대도 하필이면 양현종이라 팬들도 로또 긁는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봤으나 의외로 5이닝 2실점으로 나쁘지 않은 피칭을 보여 줬다. 그러나 팀의 깝깝한 타격으로 패전 투수가 될 뻔했다가 팀이 8회 3득점, 9회 끝내기 안타로 팀이 승리하면서 패전은 면했다.
5월 17일 삼성 라이온즈전에 선발 등판하여 6이닝 무실점 2피안타 무사사구 4삼진으로 호투하여 '''1,789일 만에''' 선발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로 1군에서 사라졌다. 2군 성적을 보면 은퇴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10월 28일 있었던 프야매 카드깡 이벤트 방송에서 정수근의 언급에 따르면 투수코치로 새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2군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고 하며, 2015년 11월 9일 NC 다이노스에서 공식 은퇴를 발표했다. 보직은 2군 투수 보조코치라고 하며, PO 종료 이후 지도자로 나서고 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통산 성적은 103승 93패 8세이브 9홀드.
먹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이 선수도 통산 100승 투수이며 OB-두산 베어스의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드임은 사실이다.
사실 잔부상만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승수를 올렸을 지 모른다. 그의 마지막 전성기인 2007년에는 130승까지 노려 본다는 분석도 있었으니...

2000년대에 그와 함께 우완 3대 트로이카라고 불리던 손민한이나 배영수가 110승을 돌파하면서 현역으로 뛴다는 점에서도 이래저래 아쉬울 따름이다.

2.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OB
28
185⅓
7
12
0
-
0.368
3.84
149
18
87
139
86
79
1.225
1997
26
154⅔
8
12
0
-
0.400
3.96
138
8
82
126
74
68
1.377
1998
31
'''187'''
(2위)
'''14'''
(5위)
11
0
-
0.560
3.22
159
8
120
'''181'''
(2위)
75
67
1.449
연도
두산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7
16⅓
1
1
1
-
0.500
4.96
13
0
13
20
9
9
1.531
2000
6
11⅔
1
0
0
1
1.000
3.09
6
3
7
19
4
4
1.114
2001
38
77⅔
8
5
7
3
0.615
4.29
76
6
34
77
41
37
1.378
2002
30
185⅔
'''14'''
(5위)
10
0
0
0.583
3.44
173
12
75
'''169'''
(2위)
78
71
1.298
2003
19
100⅔
5
10
0
0
0.333
5.19
113
13
49
76
65
58
1.579
2004
26
158⅔
12
3
0
0
'''0.800'''
(2위)
'''2.50'''
(1위)
130
4
59
'''162'''
(1위)
50
44
'''1.147'''
(2위)
2005
20
112⅓
11
3
0
0
'''0.786'''
(2위)
2.96
81
4
64
113
40
37
1.237
2006
28
122⅓
7
7
1
4
0.500
3.46
90
6
50
132
52
47
1.12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7
LG
27
155⅓
10
6
0
0
0.625
3.19
133
11
76
117
59
55
1.320
2008
5
23
0
3
0
0
0.000
8.61
32
1
21
16
22
22
2.217
2009
4
16
0
1
0
0
0.000
6.19
14
2
9
6
12
11
1.438
2010
15
76
4
6
0
0
0.400
6.63
94
17
34
46
62
56
1.645
2011
1군 기록 없음
201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4
NC
5
5
0
2
0
0
0.000
7.20
7
1
9
7
5
4
3.000
2015
11
26
1
1
0
0
0.500
4.85
36
6
5
15
14
14
1.58
<color=#373a3c> '''KBO 통산
(17시즌)'''
326
1613⅔
103
93
9
8
0.526
3.89
1408
114
799
'''1421'''
(9위)
734
669
1.344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6년
5완투
3완봉
1997년
2완투
0완봉
1998년
5완투
1완봉
2006년
1완투
0완봉
통산
13완투
4완봉

3. 플레이 스타일


압도적인 스터프와 슬라이더만으로 리그를 씹어먹었던 완성형 투피치 투수. 153km/h까지 나오는 빠른 공으로 승부를 하다 큰 폭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20]에 대부분의 타자들은 알면서도 헛스윙 삼진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먹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통산 100승 투수에 통산 탈삼진 5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의 위에 있는 4명은 송진우, 이강철, 선동열, 정민철 뿐이다...10걸안에 현역투수론 배영수와 임창용이 있긴 하지만 박명환을 넘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임창용은 감독인 김기태가 떠밀어서 반강제로 은퇴했고 배영수는 나이가 많은데다가 부상전력이 있어서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2019년 현재 양현종, 임창용, 배영수, 김광현이 통산 탈삼진 순위표에서 박명환의 위에 올랐다.
하지만 정점을 찍었던 2004년 이후, 스터프가 점점 하락하였고 2008년 부상과 수술 이후에는 구속, 구위 모두 수준 이하의 투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2010년 시즌엔 아직 쓸 만한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맞춰 잡는 피칭 스타일로 변신을 시도하였고 2010년 6월 10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6회까지 퍼펙트 피칭을 하는 등의 호조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슬라이더 하나에 의존하는 투구 패턴의 약점을 드러나고 이후 난타당하며 평균자책점 6점대를 기록하고 그나마도 부상으로 시즌을 접고 말았다. 17년간 선발투수로 활약하면서 투구한 이닝이 1600이닝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100승, 1400탈삼진이란 성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건강한 박명환'''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양상문이 굉장히 좋아하는 투수로, 투수코치를 맡은 팀마다 직구가 빠른 투수들에게 반드시 슬라이더를 장착시킨 박명환 스타일의 투수를 만들어 냈으나[21] 좋은 결과를 내진 못하였다.[22] 아이러니한 것은 박명환은 양상문을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다. 부상으로 신음하던 2008 시즌에 투수코치였던 양상문은 박명환이 시즌아웃을 하고 수술을 하고싶다고 하자, 계속 등판 스케줄을 잡아놓아서 여러모로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결국 5경기 나와서 시원하게 말아먹고 그대로 수술대에 오르고 말았으니 여러모로 악연이라면 악연인 셈.
올스타전때 슬라이더를 배영수에게 가르쳐 준 적이 있는데, 이후 2004년 MVP를 배영수가 타가는 것을 보고 괜히 가르쳐 줬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4. 지도자 경력


2016년에 NC 다이노스 육성군 투수코치를 맡아오긴 했지만, 한국시리즈 종료 이후 재계약 불가를 통보받았다. 그리하여 코치 선임 후 한 시즌만에 팀을 떠났다.
그 이후에는 스포츠한국 야구 칼럼니스트·해설위원이 되었는데, 최근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의 사실상의 경질 소식과 관련해서 김성근을 옹호하고 박종훈 한화 단장을 디스하는 칼럼을 썼다. 끝내 감독 내친 박종훈 한화 단장의 전횡, 이대로 괜찮은가[23][24]
스포츠투아이 야구학교가 운영하는 독립야구단 성남 블루팬더스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가 팀을 떠났다.

5. 인터넷 방송


2018년 월드컵부터 김병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꽁병지TV에서 활동하다가 먼저 떠난 송종국에 이어 꽁병지TV를 떠났다. 그리고 수원시 세류동에서 야구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야구를 기반으로 하는 2019년 4월 '박명환야구TV'라는 아프리카 채널유튜브 채널을 열며 본격적인 인터넷 방송인으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양배추를 머리에 올리는 개그를 하기도 한다.
주로 사회인 야구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나 류현진 선발경기 중계를 주 콘텐트로 삼고 있으며, 예전 팀 동료였던 정수근이 2번이나 출연하여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푼 적도 있다. 정수근과는 1년 선후배 사이고[25] 의외로 둘의 케미가 잘 맞아 반응이 좋았다. 특히 김혁 PD의 영상편집과 둘의 입담 그리고 시청자들의 수준 높은 질문이 잘 어우러져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한 편만 보면 나머지를 다 볼 수밖에 없는 마술같은 영상. 박명환야구TV의 아이덴티티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정도.

5.1. 방송에서 밝힌 이야기들


  • 1996~1999년 사이에 교육리그에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마이너리그에서 '투수가 원하는대로 던져라.'라고 배워왔고 그래서 포수의 사인을 거부하며 경기에서 이를 적용해 보았는데, 당시 주전포수이자 주장이었던 김태형에게 불려가서 "어딜 선배가 내는 싸인을 무시해?"라는 말과 함께 싸대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명환이 이후에도 계속 자기 공을 던지자 김태형이 자포자기 하고서 "네가 던지고 싶은대로 던져라."라고 했다고 한다.
  • 2011년쯤에 LG 트윈스에서 투수 조장을 하고 있었다. 외국인 투수 레다메스 리즈가 못 던지자 불러서 혼낸 적이 있었는데, 리즈가 "형, 괜찮아요. 열심히 던질게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투수조장을 하던 시절에 폭력을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 2010년과 2011년 LG 트윈스 감독이던 박종훈이 스프링캠프 도중 휴식일에 쇼핑하는 것을 선수들에게 금지시키고서는 정작 자기는 쇼핑을 즐기다가 마찬가지로 감독 몰래 쇼핑하러 온 선수들에게 들통난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 그리고 LG 시절 같이 뛰었던 선배 오상민과의 합방에서는 박종훈 감독이 부산 원정 경기를 마치고 버스로 장시간 이동 후 홈 구장에 도착한 직후 당시 투수조 조장이었던 박명환을 불러 피로에 지쳐있는 선수에게 야간 훈련을 통보했다는 후일담을 공개했다.

5.2. 논란


오지환을 비난하면서 후폭풍이 있었다. 박명환 TV 5만기념 영상의 47분30초경 한 명의 오지환 안티 팬이 채팅으로 "오지환 실력도 X도 없고 선수로써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질문이 올라왔는데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박명환 : 개똥 멋들은거죠. 건방을 떠는거죠. 저는 선수 까지 않는데요, 일단 야구를 잘하기전에 사람이 되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야구 잘하는건 두번째 문제고 팬들이 볼때 저정도 문제면 선수가 문제가 있는거죠. 솔직히 여기서 썰풀면 이것도 내가 자중하겠습니다.

49분 경 LG 팬이 안준모도 아니고 오지환을 너무 까신다고 채팅하니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26]

박명환: 내가 여기서 오지환 썰을 풀면 팬들도 공감할걸.

궁금하면 2019년 7월 26일 오후 10시의 라이브 방송에서 썰 푼다고 하였으나... 사건이 커지자 오지환 인간이 덜 됐다 라고 발언한 것에는 해명은 하지 않고 간단하게 사과만 하고 방송을 종료하더니, 오지환을 욕한 편이 들어있는 동영상과 사과 영상이 있는 동영상을 삭제하였다. 지금은 동영상이 비공개로 되어 있어 볼 수가 없다.
여기서 킬링파트는 게스트 정수근이 채팅창이 빨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묻자 오지환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지환이 착한데 왜?" 라는 말과 그 말을 들은 박명환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는 것. 오히려 정수근은 오지환과 같은 동네에 살았던 적도 있었다는데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하고 자기 부탁도 다 들어줬다면서 오지환을 옹호했다. 다만 박명환이 이 정도까지 디스하고 썰까지 있다 하면 오지환 쪽에서도 문제가 있었다는 팬들의 의견도 있다. 물론 당사자들만의 문제이니 확신을 하지는 말 것.[27]

6. 기타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앞두고 국제야구연맹이 주관해 실시한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 중 하나인 노르안드로스텐디아올이 검출되었다.#[28] 이미 두산 베어스 시절에 어깨 통증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이게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만다. 그래서 박명환은 엔트리에서 제외된 것은 물론, 2년 간 국제 경기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LG로 이적한 후 반짝하다 FA로이드라고 불리는 양대 로이드 위업을 달성했다.
  • 이혜천과 더불어 OB 베어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 중 최후의 2인이었다. OB 출신 타자는 진갑용이 은퇴하면서 전멸.[29] 그리고 박명환이 은퇴한 후 이혜천도 호주리그로 떠나면서 OB 출신 선수들은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자신이 지난 LG 트윈스에서 뛰던 시절동안 2007 시즌을 제외하고는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LG 구단과 팬들에게 지금도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30]
  • 선수 시절때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인터넷 방송을 보면 약간 사시가 있다.
  • LG에 있을때 FA로 40억[31]을 쓴게 있어서, 부상을 당해 경기에 나오지 못했을 때 구단에서 몇년간 재활을 지원해 줬지만 그동안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어깨 수술은 못받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사비 6천만원을 들여서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 LG 구단과 팬들에 대한 개인적인 미안함을 드러낸 것과 달리 그가 LG에 있을 때 감독으로 왔었던 박종훈과는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쁜지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 선수시절 동안에 30억 이상을 벌었음에도 이후 사업 실패 등으로 인해서 전재산을 날리다시피 했다. FA 계약을 했음에도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던 그를 아는 팬들은 충격에 빠졌을 정도.[32] 개인회생 절차를 밟으면서 야구교실+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억대의 채무를 상환하고 있다.[33]
  • 이혜천에게 지금의 아내를 소개시켜준 사람이다.
  • 가족관계로는 아내와 두 딸이 있다.
  • 학생 시절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웠다고 한다. 아버님이 경영하시던 양복점은 두 차례나 망했고 어머님은 가사도우미와 장례식장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어머님은 본인이 벌어온 돈 중 5,000원을 박명환에게 주면 박명환은 라면 4~5개와 고향만두를 사서 배를 채우고 운동했다. 박명환의 누나는 볼링장 사환으로 일하면서 대학 진학을 단념했고, 박명환이 받은 계약금 3억원 덕분에 집안에 다소 숨통이 트였다고 한다.
  • 어렸을 때부터 옥수동에 가족들과 살았고 선수 생활을 하면서 번 돈으로 옥수동에 33평 아파트를 사드렸고 본인은 아내, 딸과 함께 18평자리 오피스텔에 살기도 했다.
  • 프로 첫 해부터 용돈을 받았으며 생활했다. 결혼 뒤에는 집에서 생활비로 300만원을, 첫 애를 낳은 뒤에는 500만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 LG 트윈스 팬으로 유명한 만화가 최훈이 그린 프로야구 카툰의 박명환 캐릭터를 싫어한다고 한다. 자신을 무슨 이상한 뚱보로 그려놨다고(...)[34]
  • 2020년 11월 20일 김어준다스뵈이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영상 역대 최고의 투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류현진과 김광현을, 최동원과 선동열 중 누가 더 낫냐는 질문에는 최동원을 선택했다.
  • 2021년 1월 25일 인터넷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올라왔다. 이유는 한 전직 야구선수가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단 뉴스의 당사자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사로 알려진 조건에 따르면 투수, 서울과 지방 구단에서 선수 생활, 지방 구단에서 1년간 코치 생활, 유부남이란 것이었다.[35] 이에 박명환 본인은 자신의 유튜브에 자신은 사건과 무관하다 밝히며 라이브 방송까지 하였다. 또한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댓글로 욕설을 한 사람들에 대한 법적 대응도 예고하였다. 후속기사에서 박명환보다 젊고 나중에 은퇴했다며 박명환이 아님을 밝혔다.

[1] 옥정초에서 전학[2] 갑상선 질환(갑상샘 기능 항진증)으로 인한 면제.[3] 채널 - 박명환야구TV[4] 아프리카TV - 박명환야구TV[5] 그 당시 같이 고졸우선 지명을 받았던 선수 중 한 명이 휘문고등학교김선우다.[6] 부모님이 충청도 출신이라 예전부터 OB의 팬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7] 당시 그의 동기로 김선우, 서재응이 있었다. 다만 박명환은 이들보다는 아래로 평가되었다.[8] 원래는 고려대학교에 진학 예정이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 라이벌 김선우의 고려대 스카우트 등의 이유로 프로로 선회했다.[9] 당시 OB는 전년도 우승팀이었는데, 급격한 후유증을 겪으며 꼴찌로 내려앉았다. 사실 막판에는 이듬해 드래프트에서 대학 최고 포수였던 진갑용을 2차 1순위로 잡기 위한 탱킹 성격이 강하긴 했지만....[10] 특히 그 해 3완봉승을 기록하여 1992년 빙그레 정민철이 기록한 단일시즌 순수 고졸신인 최다 완봉승과 타이 기록을 이뤘지만 박명환 이후 순수신인 2완봉 이상 투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11] 모자 속에 양배추를 넣은 것은 베이브 루스가 원조다.[12] 엘지의 중후반 암흑기를 함께한 투수답게 매년 겨울 '박명환의 구속이 늘고 있다', '슬라이더를 던지고 있다'(!?), '불펜 피칭을 시작했다' 등의 설레발 기사를 양산하는 투수였다. LG 팬들은 박명환의 기사를 보면서 드디어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느낀다고 한다.[13] LG에서는 예전부터 FA 시장의 큰 손으로 불려오며 여러 명의 거액 FA를 영입했으나, 줄곧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 2001년 홍현우를 4년 18억으로 영입했으나 해태 시절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의 여파로 인해 그 후유증으로 부상과 부진이 연달아 찾아오며 퇴물로 전락, 2004년 진필중을 4년 총 30억으로 영입했으나, 두산 시절부터 김인식의 혹사로 망가진 그는 FA 직전해인 2003년 이미 하락세를 보였고, 결국 진필패로 전락해서 2007년 방출, 마해영은 사실 계약은 2004년 KIA와 4년 총 28억에 했으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LG로 트레이드되면서 LG가 잔여연봉을 대신 내줘야했었다. 그렇게해서 LG가 마해영에게 쓴 돈이 8억남짓. LG의 FA 잔혹사는 이진영정성훈을 영입한 후인 2009년에야 끝난다.[14] 뿐만 아니라, 666'''8''' 암흑기였다.[15] 참고로 이 신연봉제의 여파로 인해서 심수창은 3000만원으로, 경헌호는 3300만원으로 삭감되었다. 그리고 작은 이병규와 오지환이 억대연봉을 받게되었다.[16] 최고 삭감금액의 기록은 이후 한화 이글스의 외야수인 이용규가 17시즌 부상으로 부진하게 되자 스스로 FA와 연봉 인상을 포기하며 4억원에 계약해 이 기록은 깨졌으나 2달뒤 2018년 1월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장원삼이 7억 5000만원에서 2억으로 이용규보다 더 많은 5억5천만원 삭감되면서 그 기록을 깼다.그리고 윤석민(투수)이 18시즌 부진하게 되자 12억 5000만원에서 10억 5000이 깎인 2억이 되었다! 윤석민의 18시즌기록이 0승 8패 11세이브에 방어율이 무려 6.75...[17] 이 시기 박재홍 회장이 선수협 사무총장으로 박충식을 선임하려고 하던 걸, 두산의 이혜천, KIA의 김상현, 삼성의 현재윤과 같이 반대해서 욕을 먹었다.[18] 2012 시즌을 끝으로 최원호는 코치일을 그만두고 피칭 연구소를 개업했다.[19] 볼넷이 많아지면서 투구수가 32개로 1이닝을 던진것 치고는 많은 편이었다.[20] 다만 일부 국내야구 게임에서는 이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대부분 스플리터, 혹은 포크볼로 대체하여 구질을 설정하고 있다.[21] LG 이범준, 정찬헌, 롯데 진명호.[22] 항목을 참조하면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감독으로서의 양상문은 입담으로 호불호가 갈릴지는 몰라도 리빌딩과 성적 모두를 잡는 편이었으나 투수코치로서는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23] 다만 훗날 개인방송에서 푼 썰을 종합했을 때 박명환은 김성근을 좋아한다기보다는 박종훈을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 더 가깝다. LG 감독 시절에 박종훈이 스프링캠프 도중 휴식일에 쇼핑 금지를 외쳐놓고 막상 자기가 쇼핑을 하다가 걸렸던 내로남불스러운 면모를 비롯해서 여러 선수들과의 불화, 30승 선착 후 가을야구 진출 실패등 부정적인 면을 봐서 썩 좋게 보지 않는 듯 하다. 당장 해당 칼럼도 내려달라는 외압을 받았다고 했다.[24] 물론 한화 입장에선 누가 되었든 투수 혹사를 했음에도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뒤 구단에 전권을 빼앗긴 후 구단과의 갈등이 깊어지던 김성근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고, 트레이드나 외국인 선수 선발, 노장과의 FA 등에서 호구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장'으로서의 박종훈은 높게 평가하는 편. 자세한 것은 김성근/2017년, 박종훈 문서 참조.[25] 정수근은 빠른 77년생, 박명환은 77년생[26] LG 팬인 안준모는 오지환을 까도 되고, 정작 LG 선수였던 박명환은 선수를 까면 안된다는 식의 채팅도 어폐가 있긴 하다.[27] 오지환은 2009년 1차지명으로 입단해 박명환과 3년가량 있었는데,이때 박명환은 부진 탓에 거의 2군에만 있었고 오지환은 2010년부터 1군에 있는 비율이 높아져 둘이 실질적으로 함께한 시간은 길면 1~2년 정도인데, 1~2년이면 사람 사이 틀어지는 일이 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긴 하다. 예를 들어 군복무 기간이 그 쯤 되는데 군대에서 같았던 사람 한두명쯤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정수근이야 같은 동네에 살았다지만 그냥 동네 형님이랑 같은 직장에서 부대끼는 선후임은 관계가 다르니 보이는 면도 다를 수밖에 없고.[28] 프로 선수들 간에 금지약물 복용 소문이 흉흉하게 퍼지게 되었다.[29] 이재우정재훈 등이 있긴 하지만 이쪽은 OB에 지명된 마지막 선수들이고 실제 선수생활은 두산에서 시작했다. 또한 이재우는 17시즌 중 한화에서 웨이버 공시되며 은퇴, 정재훈 역시 17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30] 그런데 인터넷 방송에서 선수들끼리 노가리 깔 때 본인이 원하던 팀이 아니라 태업했다는 뉘앙스로 얘기한 적도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31] 부상으로 인한 부진 때문에 옵션 조건을 채우지 못하며 연봉 일부를 반납하는 마이너스 옵션이 발동되었고, 고액 연봉자가 2군에 내려갈 시 1군에서 빠진 일수만큼 계산해 연봉을 삭감하는 규정이 있었기에 이것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30억 남짓밖에 받지 못했다. 여기서 세금을 제하면 실수령액은 20억대로 더 떨어진다.[32] 2005년 연봉이 3억 7천만원으로 팀 내 고연봉자였는데 그때까지도 11년 된 쏘나타 2를 자가용으로 몰았다고 한다. 2006년에 차를 바꿨다고 한다.[33] 다만 2019년 1월에 야구장 2개를 인수하고 독립구단 창단을 준비한다는 기사가 나온 점을 보면, 이쪽 분야에서 일이 꼬였거나,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서 회생신청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4] 최훈 특유의 파오후 체형의 그림체에 배추잎 하나 올린게 박명환 캐릭터였다.[35] 실제로 박명환은 서울 구단인 두산과 LG, 지방 구단인 NC에서 뛰었으며 지방 구단인 NC에서 지도자 생활을 1년 하긴 했다. 두 딸이 있는 유부남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