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함(신라)

 

'''골품'''
진골(眞骨)
'''직위'''
귀당(貴幢) 비장
'''성씨'''
김(金)
'''이름'''
사다함(斯多含)
'''아버지'''
김구리지(金仇梨知)
'''생몰연도'''
547년 ~ 563년(추정)[1]
1. 개요
2. 생애
2.1. 출신과 초기 일생
2.3. 포로를 풀어주다
2.4. 죽음
3. 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
4. 창작물
4.1. 선덕여왕(드라마)의 등장인물


1. 개요


신라 진흥왕 때의 화랑[2]으로 유명하여 관창이나 반굴 등과 함께 화랑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사다함의 행적이 실려 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나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대가야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사로잡은 대가야 백성 300여 명을 자유롭게 풀어준 대인배적인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친구무관랑이 세상을 떠나자 이를 슬퍼하다가 자결하여 세상을 떠난 일화로도 유명하다. 2012년 11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불교적인 색채가 짙게 담긴 이름을 갖고 있어 왕위 계승권에서 완전히 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사다함이라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위한 2번째 단계를 뜻하는 이름이고 아라한부처와 비슷하지만 결코 부처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은 주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하는 쪽도 있다.

2. 생애



2.1. 출신과 초기 일생


사다함의 가계는 신라의 진골 가문으로 내물 마립간의 7대손이다. 사다함의 아버지는 급찬 벼슬을 지내던 구리지였으며 성은 김(金)씨였다.
사다함은 근본이 좋은 귀족 가문의 자제로 풍모가 깨끗하고 외모가 준수해서 지기(志氣)가 드높았다 전해진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다함을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니 사다함은 청을 이기지 못해 화랑이 되었는데 인기가 엄청나서 그를 따르는 낭도가 무려 1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2.2. 반파국 정벌


562년 9월에 대가야가 신라에 반기를 들며 모반을 꾀하자 진흥왕은 백전노장이었던 이찬 이사부에게 이를 평정하도록 명한다. 이때 사다함은 불과 15~16세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진흥왕에게 자신도 종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 처음에 진흥왕이 사다함의 나이가 어리다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사다함은 굴하지 않고 몇차례 더 청했다. 결국 진흥왕은 사다함의 청을 받아들여 사다함을 이사부의 귀당비장으로 삼아 종군하도록 하니 사다함의 낭도들도 사다함을 따라 출전했다.
이사부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국경에 이르렀는데 이때 사다함은 이사부에게 청하여 5천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을 급습했다.[3] 갑자기 습격을 당한 가야인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는데 이때 사다함은 전단량 위에 백기를 세워 놓으니 가야군이 크게 당황하므로 이사부가 대군을 이끌고 들이닥치자 항복했다고 전한다.

2.3. 포로를 풀어주다


이렇게 반파국을 무너뜨린 이후 진흥왕이 공로를 따졌는데 사다함의 공이 특히 으뜸이었다. 삼국사기 사다함 열전에 따르면 진흥왕은 사다함의 공로를 책정하여 사로잡은 가야인 300여 명을 상으로 내렸으나 사다함은 이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에 진흥왕이 토지를 하사했으나 사다함은 이마저도 사양하고 대신 알천 땅의 불모지[4]를 청하여 얻었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진흥왕은 사다함에게 가야인 200명과 좋은 토지를 하사했으나 사다함이 이를 3번이나 굳게 사양하므로 왕은 억지로 상을 내렸다. 이에 사다함은 가야인 포로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고 하사받은 토지는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이든 간에 사다함은 하사받은 가야인 포로들을 풀어주는 등 실로 대인배스러운 면모[5]를 보여주었는데 이로 인하여 사다함의 명성은 드높아졌고 신라인들은 사다함의 덕행과 미덕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2.4. 죽음


사다함은 이보다 앞서서 무관랑이라는 이를 친구로 사귀어 죽어도 변치 않을 벗으로 지낼 것을 맹세했었다. 그러다가 무관랑이 병으로 세상을 뜨자 사다함은 몹시 슬퍼하며 통곡하다가 7일만에 뒤를 따라갔는데 자결인지 몸이 쇠약해져 숨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때 사다함의 나이는 겨우 17세였다.
일부 학자는 이 기록을 토대로 사다함과 무관랑이 실은 동성 연인 관계에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당시 미소년 집단이었던 화랑도 내에서 이런 일이 흔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때문이거니와 고대 시대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동성애가 흔하기도 했기 때문.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특히 고대는 기록도 적은데다가 전시대를 통틀어서 동성애가 성행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이는 추측일 뿐 사실로 단정지을 수 없다.

3. 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



'''신라의 풍월주(風月主)'''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기록
4대 이화랑

'''5대 사다함'''

6대 세종
위서 논란이 있는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국선이었으며 제5대 풍월주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비량공과 벽화후(소지 마립간의 부인이자 법흥왕후궁이자 제1대 풍월주 위화랑의 누나)[6] 사이의 아들인 구리지의 아들. 어머니는 제1대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자 제4대 풍월주 이화랑의 남매인 금진. 형제로 친형 토함(제4대 풍월주 이화랑의 부제)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 설원이 있다.
우산국 정벌로 유명한 이사부와 함께 가야를 정벌해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받은 토지는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포로로 받은 가야인 300여 명을 풀어줘 양민으로 만드는 등 대인배 기질을 보여준다.
화랑세기의 최고의 엄친아 포스를 보여준다. 외모면 외모, 인품이면 인품, 무술 실력까지 있지만 가문이 유일한 오점이다. 풍월주 3대 미남(위화랑, 이화랑, 보종랑) 중 하나인 이화랑은 사다함을 가리켜 자신을 뛰어넘는 아름다움과 무예 실력을 가졌다고 평했으며 문노는 완벽하지만 사다함의 유일한 오점은 미생과 친하게 지낸 것이라고 평했다. 또한 미실은 자신이 사랑한 남자 중 최고의 남자는 사다함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다함을 까는 사람들이 문제삼는 것이 고작 성문 관리직인가 싶은 사람도 있을텐데 당시 사다함의 나이와 가문을 생각하면 정말 파격적인 인사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사다함의 어머니 색골마녀 금진이 무관랑을 유혹했지만 사다함이 너그럽게 용서하자 무관랑은 도망치기 위해 월성을 넘다가 추락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이 당시가 연인 미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무렵이었다. 이에 사다함이 슬퍼하여 병들자 금진이 자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며 안타까워했지만 오히려 어머니의 탓이 아니라고 어머니를 위로하고 숨을 거두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실과 친척 관계다.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의 여동생이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이므로 미실에게는 당숙이 된다. 부계로 따지면 미실의 아버지 미진부의 처남(미실의 삼촌은 아님)의 처남의 사촌(겸 매부)의 아들이 사다함이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미실이 지소태후에 의해 쫓겨났을 시기에 미실과 정분이 있었다. 사다함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미실은 다시 불러들여지는데 사다함은 크게 슬퍼해 '청조가'라는 노래를 지었다. 나중에 김세종과의 사이에서 생긴 하종이 태어날 때 사다함이 미실의 배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다함과 닮아 하종은 사다함의 아들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서는 사다함에게 자식이 있었는지 언급이 없다. 김씨 족보에는 선덕왕의 할아버지인 김원훈이 사다함의 아들이라는 언급이 있으나 신빙성은 낮다.
풍월주 부제로 있었던 동생 설원이 아직 어리다는 걸 염두에 둔건지, 미실을 생각한건지, 능력을 보고 생각한건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사다함은 죽을 때 설원이 어린데 이 뒤를 어찌 하겠냐는 이화랑의 말에 차기 풍월주로 김세종을 추천했다고 한다.
미실의 어린 남동생 미생도 화랑으로 만든 뒤에 문노가 말도 못 탄다며 탐탁지 않아 하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라며 설득했다.

4. 창작물


  • 화랑전사 마루에서는 '서다함'이 사다함의 정령이 깃든 초등학생으로 나온다.

4.1. 선덕여왕(드라마)의 등장인물



[1]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62년에 대가야를 정벌할 당시 사다함의 나이가 15, 6세의 나이라고 하였는데 사다함이 1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에 563년이나 혹은 564년에 사망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2] 진흥왕이 화랑 제도를 만든 건 삼국사기에 따르면 576년인데 사다함은 이전에 사망한 인물이므로 576년 이전에도 어떤 형태로든 화랑이라는 것이 제도적으로는 아니라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삼국유사 기록대로 진흥왕 재위 초반에 화랑 제도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3] 삼국사기 사다함열전에는 전단문(門)을 전단량(梁)으로 표기하였는데 량이란 가야말로 문을 이르는 것이라 했다.[4] 강가의 땅이 왜 불모지인가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당시 좋은 토지란 산이나 구릉 지역의 토지를 뜻했다. 수리 시설이 미비해서 홍수가 잦다보니 강가의 토지는 안정적인 소출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5]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굳이 좋은 구릉 지대 대신에 강가의 황무지를 받아내 포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데 사다함이 살고 있던 6세기 초는 바로 그 수리 시설이 정비되면서 강가의 황무지가 옥토로 탈바꿈되는 시기였기 때문. 노비가 되는 대신 양민이 되어 좋은 땅까지 선사받았으니 300여 명이 전부 사다함의 사람이 될 것이란 것 또한 간단히 유추할 수 있다.[6]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따르면 소지 마립간이 말년에 날이군이라는 지방에 갔다가 새로 맞아들인 부인으로 아들까지 낳았지만 소지 마립간이 얼마 안가 숨졌으며 이후에는 등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