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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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62년, 신라의 진흥왕이 장군 이사부, 사다함에 명해 가야를 공격, 백제와 왜의 지원군을 섬멸하고 가야를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전쟁.
이 전투로 인해 전신인 변한부터 수백년간 한국 고대사의 일원이었던 가야가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한반도에는 오직 고백신 3개 국가만이 남아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어지는 삼국시대 후반부 판도가 완성된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관산성 전투와 함께 전성기를 맞은 6세기 신라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한때 가야 연맹의 최강국이었고 거의 가장 마지막에 멸망한 반파국(대가야)의 멸망과정은 상당히 큰 전투가 일어났고 비교적 자세하지만 그 외 나머지 가야의 멸망 과정은 여러 사료를 찾아봐도 명확하지는 않다.[2]
562년에 모두 멸망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신라에게 멸망한 나라가 10개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신라는 555년 과거 비화가야가 있던 지금의 창녕군을 장악하고 행정구역을 설치했으며, 556년에는 거창 등 가야 서부로 가는 길목이자 백제 지원군까지 대비해 추풍령을 틀어막을 수 있는 감문(김천)에 하주의 주치를 옮기는 등 신라군 병력이 주둔하는 거점들을 설치했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 척경비에서 진흥왕을 보좌한 장수 명단을 보면 멀게는 한성까지 당시 신라 전국의 사방군주(四方軍主)가 본인의 관할지역을 뒤로 하고 창녕에 집결한 것이 나오는데 이를 인접한 고령에 있는 대가야로의 총공격 준비와 관련시키기도 한다.
2. 배경
가야는 삼국시대 전반부에는 이웃한 백제, 신라와 한때 경쟁하기도[3] 하며 존재감을 나타냈지만 6세기에 들어서 백제와 신라가 이미 수도를 중심으로 넓은 영역을 체계적으로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한 와중에도 여전히 하나의 통일된 정치 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6세기 초반부터는 나제동맹이라는 미묘한 견제구도 사이에 끼어있는 덕분에 독립하고 있을 뿐, 가야의 작은 나라들은 더 이상 백제와 신라의 국력에 단독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2.1. 후기 가야 연맹
400년, 금관가야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쇠퇴하자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고 살아 남은 가야들은 독자 노선을 걷게 된다. 이후 5세기 중반, 대가야가 섬진강과 영산강의 수계를 얻으며 영토를 소백산맥 서쪽 지역까지 확대하자 가야 연맹은 22국에 달하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2.2. 금관가야 멸망
512~513년 백제가 모루, 대사, 사타,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의 가라 소국 7국을 멸망시키자 대가야 9대 이뇌왕이 522년 신라 공주와 혼인하여 백제에 대항을 시도한다. 그러나 탁순국이 이에 반발하자 동맹은 529년에 깨지고 탁기탄이 멸망한다.
이후 안라국(아라가야)이 안라회의를 개최한다. 그러나 회의 이후 백제는 아라가야를 공격해 걸탁성을 빼앗는다. 이에 신라는 532년 금관가야를 538년 탁순국을 멸망시킨다.
이후 541년과 544년에 각각 사비회의가 열려 백제와 가야가 협상을 시도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3. 전쟁 발발
3.1. 소가야 멸망
513년 백제가 대사국(하동)을 멸망시키자 소가야(고성)와 바로 옆의 사물국(사천)은 위협을 느낀다. 또한 안라회의 이후 백제는 안라국의 영역인 남해를 빼앗고 가야진출을 가속화 했다.
이에 소가야는 2차 사비회의에 참석해 입지를 늘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독산성전투에서 안라가 참패를 당하고 관산성전투에서 대가야가 대패를 당하자 소가야는 거의 고립되었고 554년 관산성 전투가 일어난 그해 12월에 사물국과 함께 소가야는 신라에 멸망했다.
3.2. 아라가야 멸망
548년 독성산성 전투 이후 아라가야는 백제의 식민지 격으로 전락했다.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로 아라가야는 신라의 부용국으로 편입되었다.
신라는 이듬해 창녕 땅에 완산주를 설치하고 사이기국과 산반하국을 편입하여 아라가야의 바로 옆 도시인 밀양을 차지한다.
3~4년을 더 거치며 신라는 임례, 자타, 걸손, 졸마국의 4개국을 멸망시키며 의령, 진주, 산청, 함양을 차지하고 대가야가 아라가야를 도와주는 길목을 완전히 끊게 된다.
560년 거열국(거창)을 병합한 신라는 이제 백제와 가야의 국경을 끊어버렸다.
연이어 신라는 그 해 12월 아라가야를 공격한다. 아라가야는 금사에서 버티며 왜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1월 아라파사산에 성산산성을 쌓아 왜를 대비하며 아라가야의 함락을 시도하였다.
저항하던 아라가야는 끝내 2월에 멸망했으며 신라 진흥왕은 즉시 그곳을 순행하여 창녕에 척경비를 두었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남은 세 가야 중 아라가야가 사라지고 다라국(합천)과 대가야국(고령)만이 남게 되었다.
3.3. 대가야 멸망
561년 아라가야 멸망 이후 이듬해 정월(1월) 신라는 다라국을 병합하고 임나관가를 쳐서 부흥을 꾀하던 아라가야를 완전히 멸했다.
2월 신라가 대가야를 치나 백제가 도와 간신히 구원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가 대가야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음을 알아채고 4월 추풍령(김천)에 군사를 두어 백제가 오는길을 끊고 성산산성(함안)과 종발성(김해)에 군사를 두어 왜구가 들이닥치는 것을 막아냈다.
562년 가을 7월 신라에서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5천을 주어 대가야를 공격하게 하였다. 사다함이 대가야로 쳐들어가 전단문에 들어서 흰 깃발을 꽃으니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쩔줄을 몰랐다고 한다. 대가야가 조금 저항하며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백제는 더 이상 도와줄 힘이 없었다.
9월 가야가 계속해서 버티자 신라 진흥왕은 대장군 이사부에게 2만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하였다. 이사부가 대가야에 다다르자 도설지왕을 포함하여 모두 일시에 항복함으로써 대가야는 멸망하였다.
4. 의문점
여러 문헌과 고고학을보면 5세기 후반 대가야 전성기때는 후기가야의 나라수는 22국에 달했다. 그리고 백제가 섬진강을 탈취하고 신라가 낙동강 동쪽으로 완전히 온 시점에서 가야는 12국이 남게된다. 다시말해 538년 탁순 멸망이후 554년 관산성전투까지는 12개의 가야국이 살아남은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산성전투 이후 562년까지 8년만에 모두 망한것이다. 아무리 관산성전투 이후 가야가 약해졌더라도 고령, 거창, 합천, 함안, 의령, 진주, 창녕, 산청, 함양, 고성, 사천, 밀양 이라는 광대한 규모의 땅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그것도 8년만에 무너졌는지가 의문이다.
5. 정세와 일본서기
한편 백제와 왜군도 가야를 지원하기 위해 즉시 지원군을 파병했는데, 10여년 전 관산성 전투의 구도가 재현된 것이었지만 백제군의 규모는 과거보다 훨씬 줄어있었다. 사실 백제는 위덕왕이 패전 책임을 지고 출가 쇼를 벌이고 대신들에게 관산성 패전의 책임으로 질책을 받을 정도였고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지만[4] ,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쓸만한 동맹인 가야를 살려두기 위해 상당히 무리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대장군(大將軍) 키노오미 오마로노스쿠네(紀臣 男麻呂宿禰), 부장군(副將軍)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가 군을 이끌고 가야에 군대를 보내 지원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왜군 장군이 백제 군영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므로, 합류해서 함께 신라군과 싸운 듯하다.
왜군은 가야인을 아내로 맞은 코모츠메베노오비토 토미(薦集部首 登弭)에게 명해 백제 쪽에 군사계책을 가지고 가게 했는데, 이 자가 처가집에 들리는 바람에 군사기밀을 봉인한 서신과 화살을 중간에 길바닥에 실수로 떨어뜨리는(...) 사고를 쳤고 그걸 신라가 손에 넣어 전략은 뻔히 들통나고 신라가 군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5]
일단 왜군은 신라군에게 몇 차례 전투에서는 승리했다고 한다. 특히 니에의 무용이 뛰어나 신라군을 많이 쳐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몇 차례 승리한 후 대장군인 오마로노스쿠네가 동맹인 백제군 군영에 들어가서 일장연설을 하는데, 써있는 연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승리한 장군이 하는 대사라기엔 살짝 부자연스럽다. 일본서기 특유의 허술한 윤색일 뿐 실제로는 패배했거나, 간신히 신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백제군과 합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개를 보면 초반에 작은 소전투는 몇 차례 승리했다고 봐도 전개에 크게 무리는 없다. 그러자 신라군은 왜군에게 거짓항복 계략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위에 가야군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 사용했던 백기를 여기서 다시 들고 무기를 버리고 왜군에 항복하는 척을 하자 부장군 니에는 군사병법에 밝지 못해 그것이 진짜 항복하려고 하는 것으로 속아넘어가 방심하고 무방비 상태로 자신도 응답의 의미로 백기를 들고 신라군에 접근, 이에 신라군이 크게 역습해 백제군+왜군 1천여 명을 죽였다. 이 패배로 지휘관급 인물 중에는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彥)만이 빠른 말을 타고 있어서 간신히 달아났고[6] 나머지는 모두 잡히거나 죽었다고 한다.
니에와 그 부하들의 가족을 잡은 신라 장군은 니에의 아내인 우마시히메(甘美媛)를 보고 니에에게 "네 목숨이 소중하냐? 아내가 소중하냐?"고 이야기 했고, 니에는 당연히(...) 목숨이 소중하다며 아내와 여자들을 바친다. 그러자 신라 장군은 니에는 풀어줬고 옥외에서 우마시히메를 능욕한다. 우마시히메는 나중에 풀려나서 니에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니에가 그녀와 말을 하려 하자 날 팔아치우고 살아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말을 거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또 이 신라 장군은 포로가 된 장군인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에게 칼을 대고 하카마를 벗긴 후 엉덩이를 왜국 방향으로 돌리게 한 다음 "왜국의 장군은 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 외치라고 시킨다(...). 하지만 이키나는 끝까지 "신라의 왕은 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화난 신라군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아들인 오지코(舅子)도 같이 죽었는데 아버지의 유해를 안은 채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7]
일본서기 자체가 져도 이겼다는 식으로 일본에 좋은 쪽으로 과장한 서술이 많은 와중에 유독 여기서는 왜군 장군들이 신라군에게 처참하게 모욕당하는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이런 내용들이 기재된 이유는, 아마도 그 충절(...)을 기려서 간접적으로 덴노를 높이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그만큼 백제-가야-일본 동맹에게 있어서 가야의 멸망이 뼈아프고 충격적이었기에 기록을 그대로 남긴 게 아닐까 싶다.
5.1. 가야의 부흥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대가야)가 여러 차례에 걸쳐 부흥했다고 되어있다.
571년 천황이 임나의 부흥을 유언으로 남겼다. 584년 백제와 일본이 임나의 재건을 계획하였다. 591년 8월 임나를 재건하고 사신을 뽑았으나 11월 신라가 임나를 다시 멸망시켰다. 594년 임나가 일본의 도움으로 2번째로 다시 세워졌다. 600년 신라와 임나가 크게 싸웠으며 이에 일본이 친히 도왔다. 임나가 승리하여 가라(고령),남가라(김해),안라(함안),다라(합천),비자발(창녕),탁순(창원),고자(고성)의 땅을 회복했다. 607년 임나와 수에 사신을 보냈다. 608년 가라사국(아라가야)[8] 이 수와 교류하였다.
623년 신라가 3번째로 임나를 멸망시켰다. 이에 천황이 노하여 군사를 보내니 신라가 항복하여 다시 임나를 재건하였다.[9] 643년 이 해에 고구려,백제,신라,임나가 함께 조공하였다.
646년 2월 신라에 의해 임나가 4번째로 멸망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천황의 힘이 부족해 더 이상 재건하지 못하고 그 해 9월 조서를 없애니 임나가 완전히 멸망하였다.
5.2. 결과
1차 재건:591년 8월부터 11월 (3개월)
2차 재건:594년부터 623년까지 (19년)
3차 재건:623년부터 646년까지 (23년)
첫멸망-562년 9월 둘째멸망-591년 11월 셋째멸망-623년 ?월 넷째멸망-646년 9월
6. 후일담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화랑 사다함은 진흥왕이 포상으로 가야인 3백명과 토지를 하사했는데 받지 않아, 왕이 강권해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불모지만 받았다고 한다. 사다함은 상당한 군사적 재능이 있었던 인재였던 듯 하지만, 17세가 되던 해 친구 무관랑이 죽자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따라 죽었다고 한다.
가야가 멸망한 고령 땅에는 대가야군(大加耶郡)을 행정구역으로 설치했으며, 마지막 왕 도설지왕은 학계의 연구상 월광태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데, 월광태자설이 맞다면 거덕사(擧德寺)에 가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월광사(月光寺)에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져오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대가야인의 일부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 지역으로 사민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0] 반파국이 멸망하던 때의 절절함은 반파국인이었던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가 신라인들이 5곡으로 줄이자(즉 대가야에서 우호 국가로 생각하던 가야 7국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화를 냈다가 어쩔 도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곡이 좋다'고 칭찬한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왜국에서는 571년 4월 15일 긴메이 덴노가 몸져누웠을 때 유언격으로 신라를 치고 이미 멸망한 임나(가야)를 복원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패배의 미련이 많이 남았던 듯 하다. 패배한 장군 오마로노스쿠네, 니에 등은 모두 파직당하고 품계가 깎이는 처벌을 받았고, 덴노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키나의 남은 가족들은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진흥왕은 합병한 가야지역을 신라 본토와 같이 율령제에 기반한 통치를 시작했고, 이는 가야 각국으로 나뉘어있던 시절보다 훨씬 체계적인 통치였다. 함안 성산산성에서 합병 직후 6세기 중반 시점에 공문서로 사용되었던 목간이 대량 출토되어 밝혀졌다. 대야성 전투의 죽죽과 같이 현지인들은 신라에 빠르게 동화되어, 삼국통일 후 9주 5소경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에도 옛 고구려 지역 3주와 옛 백제 지역 3주와 함께 신라+옛 가야지역을 합쳐 원신라지역 3주로 간주할 정도로 가야인은 신라에 빠르게 융화되었다. 이 가야 지역과 사람들은 훗날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고 무왕대의 아막성 전투부터 시작해 신라에 맹공을 펼칠 때 이를 막아내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로 남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만 완전히 동화되진 않았는지 후삼국시대가 되자 가야 지역 호족인 차윤웅이나 왕봉규 등은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7. 기록
7.1. 삼국사기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진흥왕(眞興王)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加羅)[11]
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사다함은 15, 6 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요청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元帥)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전단량(旃檀梁)[12] 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놀라 막지 못하므로, 대군이 이 틈을 타서 마침내 가야국을 멸망시켰다.
《삼국사기》사다함 열전
8년(서기 561) 가을 7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기》위덕왕 본기
고령군(高靈郡)은 원래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써 그 나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13]
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 간 유지되었는데, 진흥대왕이 이를 침공하여 없애고 그 지역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만들었으며...
《삼국사기》지리지 강주
7.2. 일본서기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미마나(任那) 미야케(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미마나(任那)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미마나(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카라국(加羅國), 아라국(安羅國), 니시키국(斯二岐國), 타라국(多羅國), 소츠마국(卒麻國), 코사국(古嵯國), 코타국(子他國), 산한게국(散半下國), 코츠산국(乞湌國), 니무레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562년 1월
이달 대장군(大將軍) 키노 오마로노스쿠네(紀 男麻呂宿禰)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타리(哆唎)에서 출동하고, 부장군(副將軍)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코소무레(居曾山)로부터 출발하도록 하여 신라가 미마나(任那)를 공격한 상황에 대하여 문책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미마나(任那)에 도착하여 코모츠메베노오비토 토미(薦集部首登弭)를 백제에 보내어 군사계책을 약속케 했다. 토미(登弭)는 처가에 묵었는데, 봉인한 서신과 활과 화살을 길에 떨어뜨렸다. 신라가 군사계획을 모두 알고 갑자기 군사를 크게 일으켰으나 얼마 후에 패하였으므로 항복하여 귀부(歸附)하기를 빌었다. 키노 오마로노스쿠네(紀 男麻呂宿禰)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군사를 돌려 백제의 군영에 돌아갔다. 군중(軍中)에 명을 내려 “무릇 이겨도 패하는 것을 잊지 말고 편안할 때도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지금 처해 있는 땅은 들개와 이리와 같이 사나운 무리들과 이웃해 있으니 가볍고 소홀히 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으랴. 하물며 또 태평한 시대에도 칼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법이니, 무릇 군자가 무기를 갖추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깊이 경계하고 이 명령을 받드는 데 힘쓰라”라고 하였다. 병졸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홀로 나아가 이곳 저곳에서 싸워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신라가 문득 흰 깃발을 들고 무기를 던져버리고 항복했는데,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는 원래 군사(軍事)에 밝지 못하여 마주 대하여 흰 기를 들고 헛되이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신라 장군이 “장군 카와베노오미(河邊臣)가 지금 항복하려고 한다.”고 하고는 진군하여 역습하여 싸웠다. 매우 날쌔고 빠르게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맨 앞선 부대는 패한 바가 매우 많았다. 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彦)가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해자까지 뒤쫒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테히코(手彦)는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쿠스니지리(久須尼自利)!”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카와베노오미(河邊臣)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와 들에 급히 군영을 만들었다. 이 때 병졸들은 모두 서로 속이고 업신여기며 우러러 따르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카와베노오미 니에(河邊臣 瓊缶)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카와베노오미(河邊臣)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라고 묻자 “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그 여자를 간음하였다. 여자가 후에 돌아가니, 카와베노오미(河邊臣)가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사카모토노오미(坂本臣)의 딸인데 이름을 우마시히메(甘美媛)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츠키노키시 이키나(調吉士 伊企儺)는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하카마(褌)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야마토(日本)로 향하게 하고 “야마토(日本) 이쿠사노키미(將)는 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叫)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 코니키시(王)는 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오지코(舅子)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이키나(伊企儺)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빼앗기 어려운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특히 여러 장수들이 가슴 아파하는 바가 되었다. 그의 아내 오바코(大葉子)도 역시 잡혔는데 비통하게 노래하기를 “카라쿠니(韓國)의 키(城) 위에 서서 오바코(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며 야마토(日本)로 향하네.”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화답(和答)하기를 “카라쿠니(韓國)의 키(城) 위에 서서 오바코(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어 보이며 나니와(難波)로 향하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19 긴메이 덴노 562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