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야구부
1. 개요
'''백전 백패의 신화'''로 유명한 서울대학교의 대학 야구부."'''과거에 이긴 적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능이란 힘을 다해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과 맞서세요.'''
'''그것이 바로 패기입니다. "'''
1.1. 백전 백패의 팀
1977년에 동아리 야구부로 창단되었다. '''183전 183패'''를 기록하던 1997년, 대학야구연맹은 서울대 야구부의 기록자체를 공식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서울대 야구부를 아예 명단에서 제외시켜 버려서 국내 대학리그에 출전이 불가능했다. 사실 여기에는 안습한 사연이 있는데, 1997년에 개막된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 가입비 3백만 원이 없어서 출전을 못 했던 거다(...) 학교 지원이 매 학기 50만 원에 불과한 데다 무리하게 돈을 구해서까지 출전할 필요가 없다는 내부 의견에 따라 출전 포기했다고. 애초에 프로 지망생들이 모이는 타 대학 야구부와 달리 이쪽은 야구가 좋아 모인 단순 동아리라 대회 출전 여부에 일희일비하지는 않는다고. 이후 베이징대학과의 친선경기에서 1승을 처음으로 거둔다. 승리는 승리지만, 비공식경기라 전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걸 전적에 포함시키면 이 시점에서 '''190전 1승 189패'''였다.
이후 KBO 고문이자 야구광인 정운찬[3] 총장을 찾아가 간청한 끝에 대학야구연맹에 복귀하였다.
1.2. 감격의 첫 승
2004년 한일장신대전에서 처음으로 패가 아닌 무를 기록한 뒤 9월 1일 신생팀인 송원대와의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 B조 예선리그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며 공식 첫 승을 거둔다.## 이 시점에서 전적은 '''201전 1승 1무 199패'''. 2011년 3월까지 통산전적은 '''267전 1승 1무 265패'''.
1.3. 그 후
2년제 대학팀들과 신생팀들이 주로 속해있는 대학야구 2부리그에 속해 있으면서도 연전연패중. 일본인 용병(?) 을 쓰기도 했다. 요즘도 대학야구 기록을 순위로 낼 때는 서울대전은 빼고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누군가, 우리에게 이기지도 못하면서 그 힘든 야구를 왜하냐고 묻는 다면, 우리는 학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의미를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지지 않더라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울대학교 야구부니까요.'''
공식 유튜브 中
프로2군까지 참여하던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4] 에서는 주최측의 배려인지 항상 프로팀과의 대결은 피했다.
참고로 도쿄대 야구부와 항상 쌍으로 묶여서 비교를 당한다. 도쿄대 야구부도 서울대 야구부처럼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풍문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도쿄대의 경우는 와세다, 게이오 대학 등이 포함된 도쿄6대학리그에 속해있으며 가끔씩 승리를 거둔다. 2015년 기준으로 245승 55무 1천560패를 기록 중이며[5] 도쿄대 야구부 출신중에서 프로야구에 드래프트 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아(통산 6명)[6] 실력은 도쿄대 야구부가 약간 좋은 듯.[7]
비슷하게는 교토대 야구부가 있다. 이쪽은 2014년에 다나카 에이스케가 치바 롯데 마린즈에 지명되며 첫 프로지명자를 배출했다. 도쿄대가 프로선수를 통산 6명을 배출하긴 했지만 전부 한국프로야구가 생기기도 전(...) 시절 선수이고 프로야구 수준이 올라간 이후 근 30년간 한 명도 없으니만큼, 현재 실력으로서는 근소하게 교토대가 우위라고 볼 수 있겠다. 도긴개긴이지만(...) 그래도 2017년 드래프트에서 도쿄대도 35년 만에 새롭게 드래프티를 배출하며 교토대와 다시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양새. 뭐 정확한 건 친선전이라도 한번 붙어 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2.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
한마디로 말하자면 프로지망생들의 팀과 아마추어 동아리의 차이다. 한국 같이 엘리트체육이 극단적으로 분리된 곳에서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야구부 출신들과 취미로 야구하는 사람들이 상대가 될 리가 없다.오히려 야구하면서 성적이 떨어질까봐 더 걱정이죠. 그래서 전 팀 선수들 중에 학점이 3.5 이하로 떨어진 선수한테는 야구 안 시킵니다. '''서울대 야구부에선 첫째가 야구가 아닌 공부예요. 두 번째도 야구가 아닌 과외이고요. 세 번째가 야구입니다.''' 과외는 학생들의 생업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야구는 안 해도 되지만 생업을 포기하면 학교 다니기가 어렵기 때문에 과외를 위해서 야구를 잠시 접을 수도 있는 게 이곳 특징입니다.
사실 서울대 야구부는 연습시간이 짧다. 하루에 많아봐야 2~3시간 정도 연습하기 때문에 애당초 다른 대학과 승부자체를 내기가 어렵다.[8] 더군다나 '''서울대학교에는 체육대학이 없다.''' 흔히 체대라고 불리는 곳은 사범대 체육교육과. 그나마 이쪽도 체육특기생은 없다. 즉 야구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전공 공부를 하면서 야구를 "취미"에 가깝게 연습하기 때문에 프로선수 전향을 목표로 하는 대학 야구부와 붙으면 깨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로를 지향하는' 대학 선수가 거의 없는 분야인 복싱, 미식축구 등에서 서울대가 심심찮게 우승을 차지한다는 점은 생각해 볼 거리가 된다. 근데 사실 그럴 수 있는 건 둘 다 국내에서 프로나 엘리트체육이 없거나 거의 망한 종목이라서 그렇다. 미식축구는 말할 것도 없고 복싱도 프로복서들도 알바 뛰며 훈련하는 판국이니.... 비슷하게 핀수영에서 카이스트가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9] .
특히 스테미너 문제가 심각한데, 공개된 경기 기록들을 뒤지면 3회에서 4회부터 슬슬 힘이 빠져 5~6회 때 대량실점하는 패턴이 주를 이룬다. 이것은 초중고 12년 동안 공부만 하게 되어 체력적으로 기초가 부실한 선수들이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고 있음이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원래 공부를 많이 하는 이들은 체력적인 문제가 심각하다.
다른 학교의 일반 학생들도 그러한데 서울대는 특히 이 체력 부실이 심하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체력은 전반적으로 다른 학교의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다. 국정감사에서도 수차례 지적받은 사항으로 서울대생의 체력이 '''50대 아저씨''' 수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서울대에 '''정석으로''' 입학해서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교 일반 야구 동아리보다는 확실히 잘하며 사회인 야구보다는 확실히 못한다.
2011년 대학야구 하계리그에서는 2번이나 승리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역전패했다. '''그것도 모두 1점차로.'''
2.1. 반전
2015년 9월 15일 고척돔에서 가진 개장 기념 특별경기에서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과 맞붙었는데, 8 : 4의 스코어로 '''승리'''했다...서울대 야구부는 1명 제외하고는 전원 남성이었다. 그 1명이 서울대 9번 타자이자 야구부 매니저인 전혁주가 나왔다.[10]
- 고척돔 최초의 적시타는 서울대학교 야구부 4번 타자이자 2루수인 강종호 선수가 기록한 우월 싹쓸이 3루타.
- 고척돔 최초의 득점은 전혁주가 기록했다.
2.2. 그 외
대학 야구팀들에게는 강호들과는 다른 의미로 무서운 상대라고 한다. 이유인즉슨 "'''쟤들한테 지면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냐'''(...)". 실제로 서울대 야구부에게 패한 송원대 야구팀은 한동안 타학교에게 망신당하고 조롱받았다고. 1994년 춘계리그에서 계명대 야구부가 서울대 야구부를 상대로 '''겨우''' 5대1으로 이겼다고 경기 후 감독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었다. 그래서인지 그해 추계리그에서 서울대 야구부와 다시 붙었을 때는 무려 '''35점을 내고 이겼다고 한다'''.[11] 연세대 야구부는 당시의 국가대표 선수 4명을 투입하고도 8회까지 끌려가다 9회에 간신히 역전, 6대5, 1점차로 신승하고는 경기후 줄빠따에 1개월 외출금지 크리를 먹었으며 다음날 경기에서 전원 삭발한 채로 경기에 나섰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대 출신인 박동희는 재학시절 서울대전까지 선발로 나와서 시속 150km의 광속구를 시전, 빈축을 샀다는 얘기가 있다.[12]
축구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이 똑같은 1:0이라도 브라질 같은 팀을 상대로 1:0으로 이기면 아주 잘 했다고 칭찬을 듣지만, 괌 같은 팀을 상대로 1:0으로 이기면 겨우 그 정도밖에 못 하냐고 온갖 욕을 들어먹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서울대 선수들은 경기에 나설 때 1차 목표가 무조건 9회까지 끌고 나간다는 거다. 콜드게임 기준인 7회까지 10점차만 아니면 상대팀의 1차 망신은 확정되는 거고 9회까지 끌고가면 2차 망신이 더해지니까. 그리고 '''만약 이긴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 서울대 야구부 출신 프로 선수는?
서울대 출신으로 아직까지 한국프로야구에 드래프트 된 사례는 없으며, 역대 졸업생 중 가장 프로에 가까왔던 선수는 체육교육과 출신 이기청[13] 으로 전해진다. 1986년에 주로 투수와 4번타자로 활약했던 이기청은 당시 연고구단인 롯데 자이언츠가 본인을 찾아와서 진지하게 입단을 타진했을 정도.[14] 당시 체육교육과 교수들도 서울대 출신도 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기 위해 프로에 진출했다가 여의치 않을 경우 대학원 진학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이기청에게 프로진출을 권유했으나 본인의 고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의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6:5로 아쉽게 패배했을 때, 서울대학교 선발투수가 바로 이기청이었다.
2012년 12월 덕수고등학교의 외야수 이정호가 서울대 체육교육과 수시전형에 최종합격해 화제가 되었다. 이정호 선수는 확실히 프로를 지향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에[15] 현재로서는 최초의 서울대 출신 프로 야구선수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외야와 1루를 보지만[16] 팀 사정상 투수로 뛰는 날도 많다. 팀 동료와는 달리 고등학교까지 선수로 뛰었고, 게다가 좌투좌타라는 이점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야구는 혼자 하는 종목이 아닌지라 2013년, 2014년에도 서울대 야구부의 연패는 계속되고 있다. 2015년에 있었던 고척돔 개장기념 여자 야구 대표팀과의 경기 이후의 인터뷰를 보면2015년 10월에 군입대를 한다고 한다. 전역 예정이 2017년 7월이며, 복학하게 되면 2019년 KBO 신인 드래프트 지명 대상자가 된다. 투수로의 성적은 팀 수비가 절망적인 수준 때문인지 좋지 않으며, 타자로의 성적은 단타 위주의 타격 을 보이고 있으며 타율 .254를 기록하고 있다.[17] 장타 위주의 선발을 하는 추세 상 아마 프로 지명은 힘들 듯. 결국 2019년도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했고 졸업 유예로 1년 더 대학에 남게 됐다. 그러나 2020년도 드래프트에서도 미지명. 졸업 유예를 1년 더 연장했지만 프로에 가긴 어려워 보인다.
2016년 12월에는 서울고등학교 출신의 외야수 홍승우가 3년 동안 재수를 한 끝에 위의 이정호와 마찬가지로 서울대 체육교육과 수시전형에 최종합격 했다. 참고로 홍승우는 2015년도에 타율 4할대를 기록했음에도 감독에게 찍혀 특기자로 합격했으나 야구부 감독이 야구부 입단을 거부하여 재수를 해야했던 비운의 선수였다.[18]
프로선수가 아니라, 프로야구팀 프런트에도 서울대학교 야구부 출신들이 몇몇 있다. 송원대와의 1승 당시 뛰었던 박현우 선수는 현재 롯데 자이언츠의 부단장으로 성민규 단장을 보좌하게 되었다. 신동걸 선수는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운영팀 직원으로 있으며[19] 최우석 선수도 현재 kt wiz의 운영팀 과장으로 있다.
고교 야구계에서도, 탁정근 전 서울대학교 야구부 감독이 현재 세현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다.
4. 비판/문제점
서울대 교내의 야구단체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부분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서 서술한다.
서울대학교 야구부는 교내의 가장 큰 체육대회인 총장배 구기대회(1학기)와 종합체육대회(2학기)의 야구 종목을 주관한다. 야구부는 이들 대회의 운영을 막장처럼 운영하여 야구부를 제외한 서울대 교내 야구단체들에게 악명이 높다. 서울대 야구부의 악평은 대부분 대회 운영에서 비롯된 것이며 주요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해당 문제점들은 교내 야구단체의 꾸준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개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서울대 야구부가 주관하는 대회에 야구부 OB들의 참가에 대한 규정이 사실상 전무함: 야구부를 그만둔 학부생과 야구부였던 대학원생 및 졸업생은 모두 야구부의 OB이지만, 이들은 서울대 야구부가 주관하는 대회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제한이 없다. 따라서 야구부 OB들만으로 팀을 꾸려 해당 대회에 출전할 수 있으며, OB들의 상당수는 얼마전까지 야구부원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대회의 심판을 담당하는 현역 야구부원들과 각별한 사이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대부분이 야구부 OB로 구성된 팀이 대회에 지속적으로 출전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규정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 심판의 규정 미숙지 및 자질 부족: 정말 매번 발생한다. 학부생으로 구성된 야구부의 특성상, 실력이 뛰어난 심판만으로 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심각하다. 상위라운드로 가면 야구부 주장급들로만 심판이 꾸려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조별리그에서는 가관이 따로 없다. 심판이 참가팀의 대표자보다 규정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는 허다하며, 아예 잘못된 규정을 전파하여 조별리그 통과팀이 바뀌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 시합구: 엄연히 참가비를 받고 운영하는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시합구로 헌 공을 사용한다. 구장 대여료가 전혀 필요없는 교내 대회임을 감안하면 참가비가 싼 것도 아닌데, 본인들이 연습에 사용하고 남은 공을 시합구로 던져주는 것으로 보인다.
- 시합 시간: 시합 개시 시간조차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다. 20시 시합이라고 공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시까지 야구부 연습을 진행한 후 20시30분 쯤에서야 시합을 시작하는 식이다. 이에 대한 여러차례의 항의는 묵살되었다.
- 이 밖에도 전반적인 소통이 부족하며, 소통의 창구 자체를 운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참가팀의 입장에서는 행여나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문제제기를 하기도 어렵지만, 소통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절망한다.
5. 기타
6. 관련 항목
- 서울대학교
- 서울대학교 야구장
- 서울대 축구부
- 허민 - 전 고양 원더스 구단주. 서울대 재학시절 서울대 야구부에서 투수로 뛰었다. 하지만 실제 활동경력은 대략 한 달에 불과하다고 하니, 한 달 가지고 무슨 부원을 내세우느냐고 보는 거랑 한 달이라도 엄연히 등록되어 있었으면 부원이라는 관점에 따라 평가는 다를 듯. 일단 선출로 분류되어 각종 트라이아웃 등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다.
[1] 서울대 야구부 감독 이광환 인터뷰. 2010년 5월에 서울대학교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원장을 맡게 되면서 서울대 야구부의 고문 겸 감독을 10년 동안 맡았다. 참고로 이광환의 모교는 고려대. 한편 2020년 2월, 고령으로 인한 폐 건강 악화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 사실 1940년대에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1번 우승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야구부와 지금 야구부는 같은 야구부가 아니기 때문에 0회로 쓴 것 같다.[3] 서울대학교 학부 출신이며, 현재 KBO 총재로 재직 중이다.[4] 본래 명칭은 백호기. 성인 아마야구 최고 권위의 대회로 과거에는 실업팀들이 우승을 독차지했으나 프로야구 출범 후 실업야구가 약화되면서 대학 팀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2008년을 마지막으로 대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대신 KBO 총재기가 신설되었다.[5] 기사[6] 2017년에 열린 KBO 드래프트에서는 서울대에서 아무도 지명되지 않았으나, 도쿄대에서는 법학부 4학년 미야다이 코헤이 선수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7라운드 지명을 받았다.[7] 사실 동경대 야구부와 격년제로 교류전을 펼치나, 전적은 동경대 야구부의 확실한 우세인 듯.[8] 운동부로 야구부를 보유하고 있는 중고등학교의 경우 기본 연습시간만 5시간을 훌쩍 넘기며 시즌 때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하루종일 훈련에만 몰두한다.[9] 카이스트 출신이 아시아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과학'이 아닌 '체육'으로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10] LG 트윈스에서 뛰고 있는 전민수의 여동생. kt 전민수 여동생 전혁주 “역사적 경기 신나요”.[11] 계명대학교 35:3 서울대학교.[12] 박동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부산고 시절부터 당대 최고로 빠른 공을 던지는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대 재학시절에는 1988년 춘계대회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적도 있으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다승 1위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대회 준우승까지 끌고 올라간 당시 최고의 유망주였다. 이런 투수가 서울대 야구부 상대로 전력투구를 했다고 하니 욕을 먹을 수밖에.[13] 서울대학교 1984학번. 현 춘천교육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 제1회 한국야구학회 학술발표때 참석하기도 했다.##[14] 은퇴 후에도 롯데그룹 사원 자격을 주겠다고 했다. 엄연히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프로 운동 선수 특성상 은퇴후 보장 따위는 없는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파격적. [15]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이 프로에 갈 수 있을지 등의 고민으로 방황하다가 결국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전역 직전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프로를 노리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16] 주 포지션은 중견, 1루지만 유격수, 3루수, '''포수'''를 본 적도 있다.[17] 다른 해는 2할 후반에서 3할대의 괜찮은 타율을 보였는데 2학년 때 1할 타율로 말아 먹은 게 크다.[18] 여기에는 이견도 있다. 선수 본인이 육성선수로라도 프로로 가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불발로 돌아갔고 뒤늦게 발을 돌렸을 때는 이미 각 대학들의 스카웃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는 것.[19] 청주 세광고에서 활동했으며 졸업 후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그 다음해에 서강대학교 경제학과에 합격했으나 입학하지 않았다. 1년 더 준비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동생인 신동천은 세광고에서 뛰다가 중앙고로 전학하여 1년 유급 후 김재호(두산 베어스)와 함께 봉황대기 준우승을 이끌고 고려대에 진학했으나 프로에 지명되진 못했다.[20] SBS 라디오 PD이자 작가. 영화 원더풀 라디오의 원작자이며, 이재익의 시사특공대를 진행중이다. 초창기 두시탈출 컬투쇼의 PD를 맡기도 했다.[21] 우리 히어로즈 시절부터 강정호를 전문 유격수로 전환한 후, 밀어준 감독이 바로 이광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