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드냐야급 잠수함
1. 제원
2. 개요
3. 설계 과정
4. 실전
5. 전후
6. 자매함 목록 및 전과
6.1. 제9 계열
6.2. 제9계열 개량형
6.2.1. S-4
6.2.2. S-5
6.2.3. S-6
6.2.4. S-7
6.2.5. S-8
6.2.6. S-9
6.2.7. S-10
6.2.8. S-11
6.2.9. S-12
6.2.10. S-13
6.2.11. S-31
6.2.12. S-32
6.2.13. S-33
6.2.14. S-34
6.2.15. S-35
6.2.16. S-51
6.2.17. S-52
6.2.18. S-53
6.2.19. S-54
6.2.20. S-55
6.2.21. S-56
6.2.22. S-101
6.2.23. S-102
6.3. 제9계열 개량 2형
6.3.1. S-14
6.3.2. S-15
6.3.3. S-16
6.3.4. S-17
6.3.5. S-18
6.3.6. S-19
6.3.7. S-20
6.3.8. S-21
6.3.9. S-22
6.3.10. S-23
6.3.11. S-24
6.3.12. S-25
6.3.13. S-26
6.3.14. S-103
6.3.15. S-104
6.4. 미취역 함선
7. 여담
8. 평가
9. 내관
10. 매체에서의 등장
11. 참고
1. 제원
2. 개요
'''소련해군 잠수함대의 첨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 해군에서 건조/운용한 재래식 잠수함. 정식 명칭은 '''제 9계열 잠수함 S급'''이며 '''소련 해군 잠수함대의 실질적 주력 잠수함'''으로서 총 56척이 건조되었으며 2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활약했다. 스레드냐야(Средняя) 라는 뜻은 러시아어로 중형(中形)이라는 뜻이며 본래의 함명보다는 "스탈리네츠"(Cталинец)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3. 설계 과정
1930년 소련은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영향을 받지 않아 타국이 해군 전력을 줄여나가는 와중에 역으로 해군 전력 증강 5개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 계획에 따라 드넓은 자국의 연안을 방어할 수 있는 연안작전 위주의 해군전력을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계획에 따라 소련 해군은 그녜브늬급 구축함 및 스토로제보이급 구축함을 건조해 나가며 수상함대 전력을 꾸리기 시작했고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이하 S급) 및 말류트카급 잠수함, 슈츄카급 등이 소련 잠수함대의 주력으로서 계획되었다.
하지만 자국의 낮은 기술력으로 건조된 잠수함들은 하나같이 결함이 심각하거나 성능이 뒤떨어져 소련 당국을 고민에 빠트렸고, 소련은 각국에 잠수함 설계 지원을 받게 된다. 이 때, 소련 당국은 독일의 잠수함 건조 기술에 주목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나치 독일은 비록 베르사유 조약의 영향으로 잠수함 보유의 일절 제한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그 기술력이 상당하여 소련 해군의 눈길을 끌었고 마침 베르사유 조약의 감시를 피해 해외의 조선소를 찾아보던 독일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933년 독일에서 설계하고 소련 본국에서 독일제 부품들을 받아 잠수함을 건조하게 되는데 이것이 S급 잠수함,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이다.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의 기초 설계는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U보트의 설계를 상당수 참고했으며 대부분의 전자장비 역시 독일제를 대거 사용했다. 소련제랑은 질부터 다른(...) 전자장비를 도입한것과 동시에 제법 쓸만한 강재를 사용해 약 100미터의 잠항심도를 가졌으며 안정된 밸러스트 탱크 설계를 바탕으로 잠항속도는 긴급잠항시 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데에 20초, 잠망경 심도까지 45초가 소요되어 데카브리스트급 잠수함이나 프라브다급 잠수함과는 궤를 달리하는 훌륭한 긴급잠항능력을 선보였으며 선회력 역시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아 이전 모델들인 똥덩어리급 잠수함들의 잠항성능에 비해 확실히 나은 성능을 가져 소련 당국을 만족케 했다.
초창기 S급 세 척의 경우 부품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수입해 건조했으나 부품 수급 자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 대부분의 부품을 국산화시키고 그에 맞게 개량한 제 9계열 잠수함 1개량형, 2개량형 잠수함이 설계, 건조되어 실질적인 숫적 주력은 이들 국산형이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소련 당국의 낮은 건조기술과 정밀부품 생산능력 때문에 여전히 건조에 차질이 많았으며 건조 기간이 늦춰지기도 했으며 본디 총 78척이 발주되었으나 전쟁, 예산 등의 문제로 총 56척을 건조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주요 어뢰 무장으로 533mm 어뢰발사관 전방4문, 후방 2문이 존재하며, 사용 어뢰는 53-38, 53-39, ET-80어뢰를 사용했으며 탑재량은 12발이다.
[image]
덱건은 100mm B-24PL 덱건 1문을 채택했고 탄약은 총 200발을 탑재했다.
[image]
대공화기는 45mm 21-K 반자동 대공포를 탑재했으며 총 500발을 탑재했다.
4. 실전
[image]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약 82,770톤의 격침톤수를 기록했으며, 약 7척의 추축군 군함을 격침시켰고 대부분의 전과는 1941~1942년, 1944~1945년경에 세운 것이다. 비록 격침톤수 자체는 적은 편이나 격침 척수만 따질 경우 소련 해군 잠수함이 세운 전과들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단연 소련 해군 잠수함의 전과 중 최대의 기록이며, 동시에 소련 해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배수톤수 격침 기록을 보유하기도 해 소련 잠수함들 중 최고의 성과를 거두어 냈다.
또한 건조척수로 볼때 말류트카급 잠수함과 슈츄카급 잠수함의 다음가는 건조수량을 가졌으며 전체 배수톤수에서는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이 제일 높아 실질적인 주력 잠수함으로 꼽힌다. 반대급부로 말하자면, 주력이라는 위치상 소련 해군의 첨병으로서 자주 투입되었고 그에 따른 희생이 제법 있었다는 의미도 되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총 16척이 손실되었다.
대부분의 손실은 기뢰 접촉, 사고 및 난파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는 소련 해군의 낮은 훈련도와 상당히 철저했던 독일-핀란드군의 기뢰원과 대잠그물망의 영향이 매우 컸다. 소련 해군의 낮은 훈련도는 어뢰 발사 후 긴급잠항을 하는 동시에 정확한 어뢰 명중여부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심할경우 명중만 시키면 격침 판정을 내려버리고 상부에 보고해 버리는 등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조함실수로 인해 피해야 할 기뢰도 접촉해버리는 등 그야말로 안습의 절정을 달렸다.
이는 허위전과 보고로 이어지게 되는데, 실제로 이들 소련 잠수함이 격침시켰다고 보고했는데 알고보면 어뢰는 빗나갔거나 명중해도 어떻게 어떻게 침몰만은 면하는 사례가 많아 실제 전과는 2배 이상, 심하면 5배 이상까지 뻥튀기가 되곤 했다...(...)
4.1. 발트 함대
'''파시스트의 봉쇄망을 뚫어라!'''
'''죽음의 바다로, 기뢰원과 대잠그물망을 돌파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
발트 함대 소속의 스레드냐야급 잠수함들은 소련 해군의 4개 함대에 배치된 스레드냐야급 잠수함 중 가장 많은 희생을 기록하며 독일군 및 핀란드군과의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기본적인 전투 양상은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과 핀란드 해군이 기뢰 부설 및 대잠 그물망을 설치해 소련 해군 잠수함들의 발트 해 진출을 막고, 이에 맞서 소련 해군은 이 기뢰원들과 대잠 방어망을 돌파해나가 추축군의 수송선을 공격하거나 주요 항로에 기뢰를 부설하는, 통상파괴 작전으로 이루어진다. 스레드냐야급이 세운 대부분의 전과는 발트 함대에서 세운 전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1941년 6월 21일경, 독일 해군은 발트해 일대에 소련 발트 함대를 견제하기 위한 기뢰 부설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의 "독일 해군을 자극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으며 발트 함대의 고난이 시작되는 6월 22일 밤, 탈린 항에 있던 중순양함 막심 고리키와 구축함 3척이 출격했으나 독일 기뢰원으로 돌입하는 바람에 구축함 1척이 침몰, 기함인 막심 고리키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눈 깜짝할 새에 침공해 온 독일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던 소련 해군은 전진기지인 리바우에 있던 스레드냐야급 네임쉽이자 1번함인 S-1을 항구 안에서 자침시키고 만다.[1]
[image]
또한 다른 함정인 S-3는 7월 24일, 리바우 항 앞바다에서 부상 상태로 작전 중 크릭스마리네의 슈넬보트인 S-35, S-60의 공격으로 가라앉았으며 7월경, 다급해지는 상황과 더불어 소련 발트 함대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대규모의 퇴각 작전을 벌이게 되며 스레드냐야급 잠수함 역시 이 퇴각작전을 지원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작전을 지원하는 와중에도 S-5는 기뢰에 접촉해 침몰하기도 했으며 독일 해군과 핀란드 해군이 꾸준히 부설한 기뢰에 의해 지속적으로 피해는 늘어났다. 전반적으로 1941년기에는 이렇다 할 활약은 없다 하겠으며 당시 열악하기 짝이 없던 소련 해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42년기에 접어들며 레닌그라드와 군항인 크론슈타트 섬에 대한 봉쇄를 목적으로 부설한 기뢰와 대잠그물망이 본격적으로 효과를 보기 시작했으나 '''역으로 1942년은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이 본격적으로 활약을 하게 된 기간이기도 했다.'''
1942년 6월부터 9월까지 발트 함대 잠수함사령부는 독일군의 병력 수송 및 해상작전 견제를 위한 잠수함 투입작전을 개시했으며 이 기간 중 가장 두각을 보였던 잠수함은 스레드냐야급 7번함인 S-7과 13번함인 S-13이었다.
[image]
[image]
당시 이 작전에 투입된 소련 잠수함들은 어떻게든 기뢰원과 대잠그물망을 돌파하기 위해서 온갖가지 방법을 쓰게 되는데, 자기감응 기뢰에 대응하기 위해 선체 전체에 플라스틱 성분이 들어간 페인트를 도색하기도 했으며 선체의 주요 돌출부에 나무 구조물을 덧대어 기뢰줄에 걸리는 것을 막기도 했고 기뢰원이나 그물망에 어뢰를 쏘고, 선수에 붙은 그물망 커터를 이용해 그물망을 절단하기도 했으며 선체에 기뢰가 접촉하거나 긁히는 소리가 나면 일시적으로 기관을 정지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수상함을 앞세워 고기방패로 삼거나''' 해군 항공대, 해안포, 수상함들이 독일군에게 어그로를 끄는 동안 몰래 수상항해나 잠망경 심도로 잠항하여 기뢰원과 그물망을 돌파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발트 해로 진출하게 된 소련 잠수함들은 총 8척.
이런 눈물겨운 개고생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던지,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을 포함해 필사적으로 발트 해로 나간 소련 잠수함들은 추축국 선박을 최소 1척씩 격침시키고 귀환했으며 소련 해군 잠수함들의 분투로 추축국은 총 23척, 총톤수 52,000톤의 선박이 격침당하고 10척, 32,000톤의 선박들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으며 이사코프 제독은 "적의 심장에 통렬한 타격을 먹였다"며 소련 잠수함들의 전공을 치하했다.
하지만 이 작전에는 실망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았는데, 추축국의 주축인 독일 해군의 평가에 따르면 '''소련 해군 잠수함들의 전략/전술적 수준이 매우 낮다'''라고 평가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일찍이 독일과 소련이 사이가 나름 좋았을 시절, 소련 해군 잠수함의 설계와 건조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독일이었기에 소련 잠수함들의 기술 수준이나 훈련 수준, 전력 규모에 대해 어느정도 간파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U보트로 막대한 재미를 본 나라의 평가답게(...) 그 평가는 나름 냉정했다.
전과가 적은 이유로 수송선단 자체에 공격을 가하기보단 혼자 돌아다니는 선박들을 주로 노렸기에 전과가 영 시원찮았으며 승조원들의 훈련 부족문제 역시 지적되었다. 이미 발트해 일대에 부설되기 시작한 기뢰들은 소련 잠수함들의 통상적인 훈련 및 초계작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낮은 수심과 좁은 해역 덕분에 훈련할만한 곳도 마땅찮았다. 이미 이전부터 소련 해군은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예산 배정부터 후순위로 밀려있던데다 훈련 수준 역시 진작에 막장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며 대숙청의 영향은 엄청났고 이런 답 안나오는 상황에 독소전쟁이 발발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버린 것.
이 때문에 소련 잠수함들은 어뢰를 발사하고 나서 표적이 침몰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할경우 '''어뢰를 쏘고 명중하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그냥 폭발음만 들리면 명중, 침몰로 판정해버린 것. 이는 전과 과장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평균적으로 2배, 심하면 5배까지 전과 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8월 11일부터 8월 21까지 활동한 소련 잠수함들이 보고한 전과는 14척 격침, 톤수 10만톤을 달성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5척 격침, 톤수 1만톤이 전부였다.'''
거기에 이들의 싸움에 피해를 입은 스웨덴은 엄연한 '''중립국'''이었고 총 5척의 스웨덴 선박이 소련 잠수함에게 격침된 것으로 추정되며 스웨덴 역시도 소련 잠수함들에 맞서 폭뢰공격으로 응대했다.
결과적으로, 분투하긴 했으나 소련 잠수함대가 보고한 전과보다 훨씬 모자란 전과만을 겨우겨우 기록했고 1,900여척 규모를 가진 추축군 선단의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40만명의 병력 수송을 저지하는데에 실패했으나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에게 있어 독일군에게 그나마 위협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다. 여러모로 1942년은 스레드냐야급 잠수함에게 있어 몇 안되는 밥값 좀 해볼 수 있던 시기.
1943년에 접어들며 핀란드 만을 봉쇄하는 추축국의 기뢰원과 대잠그물망의 효력은 무시무시했으며 '''거의 모든 소련 발트함대가 발이 묶여버렸다.''' 그렇기에 1943년에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4.2. 북해 함대
'''밥줄을 지키며 활약하다.'''
'''수송선단 보호와 추축군의 기뢰부설 저지를 위한 노력'''
[image]
4.3. 흑해 함대
4.4. 태평양 함대
'''조국을 구하기 위한 장대한 항해'''
'''본격 꼬꼬마 소련 해군 잠수함들의 세계일주 모험기(...), 장장 1만 7천마일의 대장정'''
독소전 개전 직전,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에는 총 6척의 S급 잠수함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전황이 상당히 나빠지고 북해 콜라 반도의 무르만스크 항에 도착하게 되는 랜드리스 물자 수송라인에 대한 위협이 심각해지자 태평양 함대 잠수함전단에서는 북해 함대에 2척의 L급 잠수함과 4척의 S급 잠수함을 파견, 북해함대 소속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태평양 함대에 배치된 S급 잠수함 전체의 반을 넘는 척수인데, 1941년 12월경 정체불명의 잠수함의 공격에 의해 소련 수송선단이 피해를 입고 4척의 수송선이 격침당해 태평양 해역의 긴장상태가 높아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결정한 일이었는데, 그만큼 동부전선의 전황은 매우 다급하고 소련에게 있어서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잠수함은 소련 해군 태평양함대의 본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출발해 북해 함대의 본거지 중 하나이자, 영/미로부터 지원을 받는 막대한 군수물자들을 수령받는 중요 요충지인 무르만스크까지의 항해가 최종 목적인데, 북극해를 통해 이동하기엔 유빙과의 충돌 문제나 바다가 얼어버려 쇄빙선의 지원 없이는 항해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최대한 안전한,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안전하지만은 않은 항로인 태평양 횡단 후, 파나마 운하를 통해 대서양으로 이동한 뒤 북대서양 항로를 따라 북해로 이동하기로 결정되었다.
아무리 최대한 안전한 항로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항로 곳곳에는 각종 장애요소가 산재했다. 이미 극동 지역은 일본 해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한 해역이었으며 특히나 이들의 항로가 될 쿠릴 해협은 일본 해군 함정들이 수시로 초계임무를 수행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굳이 쿠릴 해협이 아니더라도 이미 태평양 전쟁 초기, 북태평양 일대 해역 및 미국 서부 해역은 일본 잠수함들의 초계 빈도가 높아 언제든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무엇보다 북대서양에서 U보트의 활동은 위협 그 자체였으므로 태평양 항로보다 훨씬 더 위험할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그린란드 남동쪽의 항로를 이용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곳도 U보트의 공격에서 안전하지 못했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 역시도 독일 공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한 곳이었기에 '''문자 그대로 가시밭길이 따로없는 항해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장장 1만 7천마일, 3만 1천 484킬로미터의 기나길고 위험한 항로를 수중배수량 1천톤짜리의 잠수함으로만 항해한다는 것.'''[2]
이 임무에 투입되는 S급 잠수함은 '''S-51, S-54, S-55, S-56'''으로서 S-56은 기함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 소함대의 지휘관은 S-56의 함장 그레고리 셰드린 중령이 맡았다. 이 작전은 각 잠수함의 함장 등 소수의 인원만 알고 있는 비밀 작전이었지만 조기에 미 해군과 영국 해군의 지원을 약속받게 된다.
'''마침내 1942년 10월 6일 아침 7시경, 이 네 척의 S급 잠수함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떠나 근 1만 7천마일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도중 일본 해군의 기뢰부설함과 조우해 교전의 위기는 있었으나 다행스럽게 교전은 없었고 동월 14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캄차카스키 항에 무사히 기항하여 장기간 항해를 대비하기 위한 물자 보급을 실시하게 된다.[3]
[image]
1941년 10월 17일, 소함대의 지휘관인 그레고리 셰드린 중령은 휘하 잠수함 승조원들에게 이 항해의 정확한 목적을 전파하고 다음 목적지인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를 향해 닻을 올린다. 동년 10월 27일, 이들 잠수함은 무사히 더치 하버에 입항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미 해군으로부터 매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약 2주전 먼저 출항한 두 척의 L급 잠수함 중 한 척인 L-16이 국적 불명 잠수함에게 공격당해 침몰'''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미 해군 잠수함의 공격[4] 으로 여겨졌으나, 이 잠수함의 정체는 다름아닌 일본 해군의 다쿠미 아키치 중좌가 지휘하는 순잠 1급 잠수함 I-25였다. S급 잠수함들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더치 하버에 기항한 다음 날인 10월 28일 서둘러 출항을 하게 된다. 이때 이들 잠수함은 클렘슨급 구축함 폭스(Fox)와 다른 구축함인 사로스(Saros)의 호위를 받아 철저한 대잠경계 하에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이동했으나..
도중에 일본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으며 '''일본 잠수함이 쏜 어뢰가 기함인 S-56의 선체 밑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막장 상황이 발생.''' 공격을 받은 소련 잠수함/미국 구축함 함대는 이에 대해 반격을 개시했으며 이 일본 잠수함은 도주하고 만다.
11월 5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메어아일랜드 해군기지에 입항했으며 이후 6일의 휴식기간을 거쳐 11월 11일, S급 잠수함 4척은 파나마 운하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으며 이때 미 해군에서는 이들을 위해 대잠 코르벳 2척을 붙여주며 이들 소련 잠수함들이 파나마 운하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를 해 주었다.
[image]
캘리포니아 앞 바다를 항해 중인 11월 18일 밤중, 돌연 일본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함정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 함정은 소련 잠수함들에 대해 어뢰공격을 시도했으나 다행히도 S-56의 함교에서 견시임무를 수행중이던 견시장교가 어뢰의 항적을 발견해 어뢰를 피할 수 있었으며 곧이어 미 해군 코르벳함이 폭뢰 공격을 가함으로 이 잠수함은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공격을 물리치고 무사히 파나마 운하에 들어서게 된다.
미 해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파나마 운하를 횡단한 소련 잠수함대는 카리브 해의 미 해군기지 코코 솔로에 도착했으며 상세한 U보트의 배치 현황을 미 해군으로부터 제공받은 후 12월 2일 네 척의 소련 잠수함들은 코코 솔로 미 해군기지를 떠나 북대서양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소련 잠수함들은 먼저 쿠바 섬의 동쪽 끝에 있는 미 해군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잠깐 들렀다가 미 동해안을 따라 캐나다 노바스코샤 제도의 핼리팩스 항까지 가는 방향을 잡았다.
S급 잠수함 네 척은 2척씩 나눠 대형을 유지하며 선두에 S-51과 S-56이 먼저 출항하여 간격을 두고 S-54와 S-55가 뒤따라 출항하는 식으로 이동했는데 미 해군은 지속적으로 이들 소련 해군 잠수함 그룹에 한 척 씩, 두 척의 대잠 코르벳함을 지원하여 노바스코샤까지 거의 전 항로를 에스코트했다.
12월 18일 S급 잠수함들은 캐나다 해군의 호위함들과 만나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 항에 입항하였는데 이 핼리팩스에서 2주 앞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동료 잠수함을 잃고 외로이 항해를 했던 L급 잠수함 L-15와 만나게 된다. 총 10일간의 휴식을 마친 소련 잠수함대는 1942년 12월 28일, 노바스코샤를 떠나 북대서양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잠수함대는 3개의 팀으로 나뉘어 항해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첫번째로 L-15와 S-51이 먼저 출항하게 되고 이후 12월 29일 S-54와 S-55가 두번째로 닻을 올리며 핼리팩스를 떠났으며 마지막으로 기함인 S-56이 단함 혼자서 출항을 하게 된다.
선두 팀인 S-51과 L-15는 그린란드 방향으로 이동하였는데, 도중 기상상황 악화로 두 함정은 헤어지게 되고 S-51은 홀로 항해하여 1943년 1월 12일,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 항에 도착하게 된다.
한편, 다른 잠수함들인 S-54, S-55, S-56 세 척은 무사히 목표로 한 곳인 영국 스코틀랜드의 레셔스 항의 영국 해군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면 S-51과 헤어진 L-15는 폭풍으로 인해 선체에 손상을 입었고, 겨우겨우 레셔스 항에 입항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이들 잠수함은 입거하여 수리를 받게 되었으며 홀로 낙오(...)된 S-51은 1943년 1월 17일, 최종 목적지인 소련의 무르만스크를 향했으며 이들 잠수함들 중 가장 빠른 시간인 1월 21일, 드디어 바렌츠 해에 들어설 수 있었고 1월 24일 마중나온 소련 구축함의 호위를 받아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무르만스크 인근의 예카테린 소련 해군기지에 입항하는데에 성공했다.
며칠 뒤, 기함인 S-56 역시 예카테린 해군기지에 입항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3월 8일 S-54와 S-55 역시 무르만스크 인근의 포라노즈 항에 입항하게 되었으며 손상으로 인해 수리를 받은 L-15가 3월 28일 포라노즈 항에 입항하게 되며 장장 1만 7천마일의 장대한 항해는 끝이 났다.
하지만 머나먼 극동에서부터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며 북대서양의 눈보라와 싸워가며 먼 길을 달려온 잠수함들의 운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는데, 1943년 12월경 S-55가 초계 작전 중 실종되었고 1944년 3월에는 S-54가 같은 해역에서 침몰하였다. 그 머나먼 거리를 항해해 왔으나 절반의 피해를 입은 것.
하지만 기함 임무를 수행하던 S-56은 북해 일대에서의 작전으로 많은 전과를 세워, 적기 훈장을 수여받고 친위함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전후까지 살아남았으니 크게 여한은 없었을 듯.
[image]
하지만 태평양함대에 잔류한 S-52, S-53은 별다른 활약 없이 초계임무만 수행하거나 항구에만 짱박혀있다 2차대전 종전을 맞는다.
5. 전후
전후 S급 잠수함들은 50년대에 대거 퇴역을 하게 되나 S-24, S-25는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에 공여되었고 이들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최초의 잠수함으로서 사용되었다. 최종 퇴역년도는 1975년으로 현재 1척인 S-56이 기념함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물관 함선으로 보존 전시중이다.
[image]
6. 자매함 목록 및 전과
* 추축국 전투함 격침 및 손상 기록은 '''굵은 글씨'''로 작성, 보존 중인 함선은 파란 글씨, 전쟁 중 손실된 잠수함은 함명과 함번, 해당 경력란에 빨간 글씨로 작성되었습니다. '''또한, 정확한 전과가 아닌 점 참고하시길 바라며 지속적인 수정을 요구하며 또한 정식적인 군함이나 상선이 아닌 보트 등의 격침전과는 산정하지 않았습니다.'''
6.1. 제9 계열
6.1.1. S-1
6.1.2. S-2
6.1.3. S-3
6.2. 제9계열 개량형
6.2.1. S-4
6.2.2. S-5
6.2.3. S-6
6.2.4. S-7
6.2.5. S-8
6.2.6. S-9
6.2.7. S-10
6.2.8. S-11
6.2.9. S-12
6.2.10. S-13
6.2.11. S-31
6.2.12. S-32
6.2.13. S-33
6.2.14. S-34
6.2.15. S-35
6.2.16. S-51
6.2.17. S-52
6.2.18. S-53
6.2.19. S-54
6.2.20. S-55
6.2.21. S-56
6.2.22. S-101
6.2.23. S-102
6.3. 제9계열 개량 2형
6.3.1. S-14
6.3.2. S-15
6.3.3. S-16
6.3.4. S-17
6.3.5. S-18
6.3.6. S-19
6.3.7. S-20
6.3.8. S-21
6.3.9. S-22
6.3.10. S-23
6.3.11. S-24
6.3.12. S-25
6.3.13. S-26
6.3.14. S-103
6.3.15. S-104
6.4. 미취역 함선
7. 여담
소련 해군에서 가장 많은 활약을 해낸 잠수함 답게, 인민영웅도 여럿 배출해냈다.
[image]
[image]
8. 평가
9. 내관
[image]
1. 장교 식당
[image]
[image]
2. 전방 어뢰실
[image]
3. 방수 해치
[image]
[image]
[image]
4. 조타실
10. 매체에서의 등장
11.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Soviet_S-class_submarine
[1] 추가로 S-1을 제외하고도 잠수함 4척, 구축함 1척, 쇄빙선 1척이 자침 처분을 받았다.[2] 이미 위험도를 떠나서 초장거리 항해로 인한 승무원들의 피로는 이루 말할 것도 없을 건 자명했다. 당장 림팩 2000훈련 당시 장보고급 잠수함 박위함의 승조원들은 진해에서부터 하와이까지 왕복 항해를 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3] 이때 잠수함에 적재되는 상당한 양의 물자들을 보고 그제서야 잠수함 승조원들은 이 항해가 매우 긴 항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고 한다. [4] 당시 견시를 맡았던 L-15의 승조원의 증언에 따르면 잠망경의 형태가 미 해군의 S급 잠수함과 유사했다고 증언했으며 실제로 L-15는 샌프란시스코의 메어아일랜드 해군 기지에 입항하여 미 해군에게 항의를 했으나 미 해군 역시도 해당 해역에서 유조선 두 척을 상실했고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범인은 미 해군의 S급 잠수함이 아닌 일본의 순잠 1급 잠수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