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역사
[clearfix]
1. 개요
중유럽 국가 슬로바키아의 역사에 관한 문서. 원래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모두 대 모라비아 왕국에서 갈라져 나왔으나, 모라비아 왕국 붕괴 이후 동부 영토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역사가 갈라지게 되었다.
2. 고대
고대 이 지역은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의 영역이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다키아 왕국이 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켈트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이후 고대 로마가 다키아 왕국을 몰아내고 다뉴브 강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게르만족들이 다뉴브강 이북으로 남하하면서, 이 지역은 로마의 국경 지대화되고 많은 게르만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로마화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 사후 몰락하고, 이후 이 지역에는 게르만족, 사르마티아인들이 침공했으며 서기 6세기 초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한 이후부터 아바르 칸국의 압력에 의해 서슬라브족이 다뉴브 유역에 강에 정착했다.
3. 중세
중세 초기까지 사모 제국[1] 과 니트라 공국을 비롯한 여러 슬라브계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다가, 10세기 무렵에는 대모라비아제국[2] 이 오늘날에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통합하고 푸스타 초원으로 확장하며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개략적인 서술로 되어 있어 초기 서슬라브족 경제와 문화에 관해 알아보려면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서기 8세기 무렵부터 슬로바키아 일대에 요새들이 건설된 것을 통해 슬라브족들이 아바르 등의 유목민으로부터 자립하여 정착 생활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모라비아는 우랄 산맥 일대에서 이동해온 유목민족인 마자르족(오늘날의 헝가리인)이 푸스타 초원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붕괴되었다. 12세기에 슬로바키아 일대는 헝가리 왕국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하지만 헝가리에 멸망당하기 이전 대 모라비아 왕국의 존재는 슬로바키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중세 연대기에는 루스와 레흐, 체흐 슬라브 삼형제의 설화를 통해 대 모라비아 왕국에 의한 서슬라브족의 국가 형성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슬로바키아의 역사는 서기 11세기부터 거의 1천년간 헝가리의 역사와 겹치게 되는데, 현재도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문화의 영향이 적지 않게 남아있으며, 이는 같은 대 모라비아 왕국의 후손이자 이웃 민족인 체코인과의 차이를 만들게 되었다.
이웃 보헤미아가 부유한 지역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슬로바키아 역시 광업으로 헝가리 왕국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이 지역에서는 금, 은, 동, 철 및 소금이 생산되었으며, 헝가리 왕국 내에서 제일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이었다.
4. 근세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 시기부터 헝가리와 폴란드, 보헤미아 사이에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슬로바키아 지역은 다른 서슬라브 지역들과의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15세기 말 후스 전쟁 와중에 체코의 얀 지슈카가 이끄는 신교 군대가 슬로바키아 일부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슬로바키아는 결국 가톨릭 지역으로 남았다.
중세 슬로바키아를 다스리던 헝가리 왕국이 모하치 전투 패배 이후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하는 와중에, 슬로바키아 일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합병되었다. 한동안 브라티슬라바가 합스부르크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제 2차 빈 공방전 이후 몰락하기 이전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잦은 전쟁으로 많은 도시가 파괴당하고 인구가 감소하였다.
5. 근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움으로 헝가리가 오스만 터키 제국으로부터 본토를 수복한뒤, 18세기 말부터 헝가리 민족 정체성 강조 정책을 시작하였다. 헝가리 민족주의가 발달하는 와중에 슬로바키아인들도 초기 형태의 범슬라브주의에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를 부흥시키면서 헝가리인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인 사이의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시대가 되면서, 헝가리인의 권리는 증대되었지만 슬로바키아인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해졌다. 이에 대한 반발 및 19세기 유럽 민족주의 발흥에따라 슬로바키아에서도 민족의 과거사, 정체성 및 고유언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민족의식이 고취되었고, 처음으로 헝가리내 자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하였다. 1840년에 들어와서는 헝가리인들의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 1843년 슬로바키아 청년당 지도자 슈투르를 중심으로 슈투르어라고 하는 새로운 문어가 창제되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슬로바키아어의 시초가 되었다. 헝가리는 1867년 헝가리-오스트리아 이중 왕정의 성립으로 국내 문제에서 자치권을 갖게 된후, '헝가리화' 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슬로바키아 민족 문화는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3개의 슬로바키아어 김나지움(학교)이 폐쇄되고, 슬로바키아 협회는 반국가 단체로 규정되어 해체되었으며, 1907년에는 헝가리어만이 초등교육의 유일한 언어로 사용되게 된다.
6. 현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기 전 범 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아 체코인들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1918)하였다. 하지만 슬로바키아의 공업 역사가 전무하여 경제적인 비중은 체코로 쏠리고, 헝가리의 핍박으로 인해 고등 교육을 받은 슬로바키아인이 적어 관료, 교사 등의 비중에서도 체코인들에게 크게 밀렸다.
여기에 종교적인 차이[3] 도 덧붙여진 탓에 슬로바키아인들의 원성이 컸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탄하면서 구실로 삼은 것이 슬로바키아 민족의 독립이었으며 이에 따라 1939년 3월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탄 이후 1945년 소련 점령 이전까지 요제프 티소를 대통령으로 한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라는 괴뢰 정부가 존재하였으나, 헝가리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남쪽 영토들을 헝가리에 할양하여야 했다. 헝가리에 할양한 영토중 남부는 독일이 패망하고 다시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지만, 동쪽 카르파티아-루테니아는 소련이 우크라이나 영토로 합병하고 돌려주지 않는다. 2차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이끈 벨벳 혁명을 계기로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하기로 했으며, 1993년 1월 1일에 평화롭게 분리 독립함으로써 슬로바키아는 독립된 민족국가로서 존재할수 있게되었다.
초대 메치아르 총리 정권은 권위적인 통치스타일, 정실인사와 부정부패, 폐쇄적인 경제정책, 러시아 편향적 외교정책, 소수민족 억압정책 등으로 EU 및 NATO에 가입하지 못하고 서구사회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어려움으로 약 18%의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였다.[4]
1998년 총선에서 당선된 쥬린다 총리는 친서방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며 EU 및 NATO 가입에 성공하였고, 적극적인 경제자유화 및 개방 정책을 추구하여 외국인 투자유치에 성공함으로써 슬로바키아 경제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쥬린다 총리는 연정내 분열, 급진적 개혁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 등으로 2006.6. 조기총선에서 패배하였고, Smer-SD(사회민주당)의 피쏘 총리가 ĹS-HZDS(민주슬로바키아운동) 및 SNS(슬로바키아국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집권하였다.[5]
피쏘 총리는 국회 의석수의 절대 우위를 바탕으로 노동법, 의료보험법, 연금법 등 소위 사회보장 3법 개정에 성공하여 저소득 서민층으로부터 호응을 얻고, 쉥겐존 및 유로존 가입 등 EU로의 통합을 강화하는 대외적 성과를 거양하였다. 그러나, 정권 관련 각종 부패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반민주적인 언론법 개정(2008)으로 대언론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연정파트너인 SNS(슬로바키아 국민당) 당수의 극우주의적인 발언으로 인해 헝가리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등의 많은 문제점 노정. 피쏘 총리는 언론, 사법부, NGO, 소수민족들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와 정책을 견지하였다.[6]
유럽경제위기가 본격화된 2009년 집권한 라디쵸바 총리는 국가 재정건전화를 위해 긴축재정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공공기관의 보수 삭감, 공공사업의 재평가를 통한 불필요한 사업 추진 취소 등을 통해 국가운영 비용을 대폭 절감하였다. 아울러, 라디쵸바 총리의 집권 기간 동안 슬로바키아 민주주의가 크게 향상되어, 언론 민주화[7] 및 정보자유접근법을 통한 정보통제 해제, 사법부 개혁 및 부패척결, 헝가리인과 집시에 대한 차별 금지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2011년 10월 유로존 구제금융을 위한 유럽재정안정화기구(EFSF)에 대해 연정 제2당인 자유연대당(SaS)이 반대하자, 라디쵸바 총리는 동 문제의 국회 승인을 정권에 대한 신임과 연계하는 모험을 시도하였으나, 국회 승인이 부결되면서 결국 라디쵸파 연정은 붕괴하였다.[8]
이후 2012년부터 2018년까지 피쏘 총리의 시대가 돌아왔으나 2018년 3월 부패 스캔들로 인한 반정부시위 확산으로 피쏘 총리는 3.15. 사임을 발표하고 후임총리로 펠레그리니 부총리(전 국회의장)를 차기 총리로 키스카 대통령에게 추천하였다. 새로 출범한 펠레그리니 정부는 부총리 및 내무, 문화, 보건, 법무장관 등 내각 5명을 교체하여 신내각을 구성하였으나, 대부분 피쏘 총리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인물들로 구성하였다. 펠레그리니 총리는 피쏘 총리의 정책과 사실상 동일한 정책안을 채택하였다.[9]
슬로바키아 총리, 이고르 마토비치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
[1] 오늘날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체코 일대에서 슬라브족의 반 아바르 봉기를 지도하여 성공시킨 프랑크 상인 사모가 세운 제국[2] 현재의 슬로바키아 중부 및 서부, 체코, 폴란드의 일부, 헝가리, 독일 등 포함[3] 체코는 (개신교 자체의 실질적 영향력과 별개로) 후스파에 기반한 민족주의를 발전시켜 왔지만, 슬로바키아는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4] 출처 외교부 외교간행물 슬로바키아 개황(2018.4)[5] 출처 외교부 외교간행물 슬로바키아 개황(2018.4)[6] 출처 외교부 외교간행물 슬로바키아 개황(2018.4)[7] 언론의 독립성 존중, 논란이 된 2008 언론법(기자들의 자체 검열 및 명예모독에 대한 징계수위 강화 등) 개정 등[8] 출처 외교부 외교간행물 슬로바키아 개황(2018.4)[9] 출처 외교부 외교간행물 슬로바키아 개황(20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