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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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
新黨
'''한글명칭'''
신당
'''영문명칭'''
New Party: '''NP'''
'''설립일'''
1993년 8월 22일
'''명예주석'''
위무밍(郁慕明)
'''주석'''
우청디옌(吳成典)
'''이념'''
중화사상
중화민국 내셔널리즘
양안통일주의
국민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스펙트럼'''
우익 ~ 극우[1][2]
'''의석수(입법원)'''
0석 / 113석
'''웹사이트'''
홈페이지 페이스북유튜브 채널
1. 개요
2. 상세
3. 당명 변경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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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新黨 / New Party: '''NP'''
범람연맹에 속하는 대만정당. 본부는 타이베이시 쑹산구에 위치해 있다.

2. 상세


리덩후이 정권에서 리덩후이가 중국 국민당을 대만화하자 린양강[3]하오보춘을 위시로 한 외성인리덩후이계의 본성인 간 갈등이 극에 달해 린양강의 파벌인 신국민당연선(新國民黨連線)이 당권 경쟁에서 패배해 뛰쳐나와서 만든 정당이다. 이로 인해 중국 국민당과 신당으로 분당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민주당, 신당, 공당 등 당시 비주류 좌파정당들과 합당하면서[4] 당을 세웠기 때문에 시작부터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노선을 내세웠다. 1994년 지방선거 당시 타이베이에서 높은 득표율을 올리며 천수이볜 후보가 당선되는 데 기여(?)했고, 1995년 입법원 총선에서 외성인 표를 대거 확보했고, 수구적인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위해서 사회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창한 덕택에 국민당 비토파의 지지도 일부 얻으면서 21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이 선거에서 국민당이 과반을 겨우 넘는 의석을 확보했고 민진당도 생각보다 의석을 못늘렸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는 평을 들었지만, 1996년 총통선거와 국민대회 선거에서 리덩후이가 민진당 성향 유권자들의 표까지 일정부분 가져가면서 압승을 거두고 국민대회 선거에서도 국민당이 압승하면서 시원하게 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신당의 근본적 정체성 한계에 있었는데 신당의 최대 표심은 외성인을 중심으로 한 독립 반대론자들이었다. 즉 총선에서도 '(독립파로부터) 중화민국을 지키자!'라는 캐치프라이즈로 나갔는데 막상 실전에서는 중국이 군사훈련을 하면서 대만을 압박했고, 이 때문에 리덩후이가 중국에게 강력하게 대항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갖추면서 신당의 포지션이 애매해진것이다. 신당 당원들조차 '그럼 군소정당보다 기성정당에 투표하는게 더 현실성있지 않느냐'라는 논리로 국민당에 몰표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득표율은 생각보다 많이 건지기는 했다.(14%)
어쨌든 총통선거에서 패배한 이후로 망조가 들기 시작하여서 내분이 터졌고, 1997년 지방선거와 1998년 입법원 선거-지방선거에서도 잇따라 패배했으며 상당수 세력들이 국민당을 지지하며 국민당으로의 탈당을 거듭했다. 거기에다 2000년에 쑹추위친민당을 창당하자, 신당의 외성인 당원 중에 친민당으로 빠져나간 당원도 적지 않았다. 2000년 총통선거에서도 0.1%대의 득표율을 내는데 그치며 철저하게 망해버렸다.
2000년 총통선거 이후로 리덩후이가 국민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에 신당의 존재 이유도 사라졌고, 이후로 진먼을 중심으로 겨우 겨우 세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신당이라는 이름을 쓰며 살아있다.
사회복지를 주장하나, 보수주의와 대리민주주의를 주장하고 대만의 독립에는 대놓고 반대하 는 등 국민당보다도 더 수구적인 이미지가 있다.
진먼/롄장 등지에서 지지세가 꽤 된다. 비례대표도 그렇고 2016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신당 후보가 국민당 후보에 이어 2위를 했다. 이 외에 타이베이 등지도 그렇다. 민진당대만단결연맹/시대역량과의 단일화를 하듯이 국민당과의 단일화를 어느 정도 하면 의석을 얻을 것 같은데 단일화가 안 되니 국민당에게 표를 빼앗겨 의석이 없다.
이후 군소정당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타이베이 시의회 2석)에서만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입법원 선거에도 계속해서 후보는 내고 있으나 득표율이 부진하여 계속해서 낙선한다. 2016년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득표율이 4%로 5위를 기록했고, 특히 진먼·롄장 지역에서는 두 자리 수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원내 진출은 역시나 실패했다.
하오보춘의 아들 하오룽빈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으로 복당하기 전까지 이 정당 당원이었다.
'신당'이라는 당명에 걸맞지 못하게 광고가 기괴하다.광고(발퀄주의!) 대만 내에서도 악평이 자자하다. [5]

당가가 꽤나 비범하다. 제목은 '대지일성뇌(大地一聲雷)'. 노래는 창당 당시 대만의 유명한 가수 리젠푸(李建復)를 섭외했다. 한국의 태극기 집회나 국민당의 한궈위 지지자들처럼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이때만 해도 신당이 국민당보다 골수 친중이 될지 몰랐을 것이다.[6] 2017년 친중 간부 왕빙충(王炳忠)이 리메이크했다. #

2017년 12월 19일에는 왕빙충(王炳忠) 등 신당 간부 4명에 대해 대만 정부가 국가안전법 위반 혐의로 가택수색을 하고 강제로 연행해 사정 청취를 시도했으며 이를 거부한 1명을 구금했다. 왕 의원 등이 9일에서 16일까지 중국을 방문해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과 접촉했고 중국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 위정성(兪正聲) 등을 만난 것이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이며 사정 청취는 9월에 국가안전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중국인 유학생 저우훙쉬(周泓旭)가 신당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난 것으로 인해 감행되었다.
2020년 국민당이 이미지 관리하기 위해 축출된 친중 정치인 추이(邱毅)가 신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지만 지역구에서조차 한 표도 얻지 못해서 비례대표조차 낙선.
한궈위가 파면되고 나서 왕빙충은 뜬금없이 한궈위 파면에 도움을 준 대만기진 타이중 제2 선거구 천보웨이(陳柏惟)를 파면시키자는 운동을 했다. 발기일 때 옌콴헝(顔寬恒) 국민당 입법위원을 파면시키자고 말실수를 했다. #
코로나19홍콩보안법으로 인해 대만 내에서 반중 감정이 격화된 현재로서는 점점 더 중앙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아질 전망이다. #

3. 당명 변경 가능성


젊은 대만인들 사이에서 중국 정체성이 옅어짐에 따라 중국 국민당이 당명에서 '중국'을 떼버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신당에서는 중국 국민당이 당명을 바꾸면 자기네가 당명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명할 수 있음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중국 국민당으로 명칭을 바꾸면 중국 국민당과 당명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할 가능성이 높을 수 있으므로 2021년 현재까지 변경 가능성이 희박하다.

[1] 대만 정치 기준이다. 실례로 극우(far-right)라 칭한 서적도 있다.[2] 대만의 극우는 '대만 정체성'을 거부하고 철저히 중화우월주의적 태도를 취하는데, 이 때문에 90년대나 2000년대까지만 해도 고토수복 운운하는 극우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데다가 중국 대륙이 미국과 본격적으로 패권다툼을 벌이게되면서 2010년대 이후 대만 극우세력의 주도권은 철저히 친중공 세력이 잡게 되었다. 냉전시대에 극단적 반러(반소)였으나 21세기에는 극단적 친러가 되어버린 유럽 극우세력이나 트럼프와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다.[3] 사실은 지금의 난터우현 출신 본성인이다. 다만 아버지 세대 때 푸젠성에서 타이완성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4] 민주진보당이 대만 독립을 내세운것과는 다르게 이들 정당은 중국과의 통일을 내세웠는데 이 때문에 여론의 시큰둥한 반응만 얻었으며 별로 세가 없었다.[5] 대만에서 신당의 존재감은 한국에서 우리공화당에 비길 수 있다. 둘 다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6] 극단적인 중화사상과 민족주의 성향에다가 근래엔 친중공적 경향까지 강해져 어느 정도 미국과의 외교도 중시하는 국민당과 달리 극단적 반미, 반서방 성향도 점차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