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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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일본에 귀속되어 있던 류큐 열도를 미국이 분리하여 1972년 류큐 열도를 일본에 반환하기까지 통치하던 시대이다. 크게 미군이 직접 통치하던 류큐 열도 미국군 정부(USMGR, 1945년 ~ 1950년)와 미국군 정부의 후신인 류큐 열도 미국민 정부(USCAR, 1950년 ~ 1972년) 시기로 구분한다. 오키나와 본토에서는 ''''미국시대(アメリカ世, あめりかゆー)\''''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2. 전후 정리
1945년 4월부터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5년 6월 오키나와를 완전히 점령한 미국은 조선처럼 이 지역을 일본에서 떼어놓기 위해 류큐에 군정부를 세웠다. 동년 8월에는 일본이 패망했고 일본의 본토 역시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세를 잡아 버리고(1949), 급기야 북한이 6.25 전쟁을 터뜨리는 바람에(1950) 미국의 류큐 독립 정책은 흑역사가 되어버렸고, 미국은 일본과 함께 애치슨 라인에 이 지역을 집어넣으면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군사 기지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때부터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이후 오키나와는 동북아 미군의 거점이 된다. 동중국해 포위망의 정중앙이므로 중국이 오키나와를 손에 넣을 경우 한국과 타이완을 손쉽게 양동공세로 밀어붙이는 게 가능하며, 한국과 대만이 중국의 손에 떨어질 경우 일본과 필리핀도 무사할 수 없다. '''사실상 오키나와를 포기할 경우 극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며 중국의 태평양 진출로가 생기게 된다.''' 오키나와 반환 및 미일안전보장조약에 관한 미국 내부 협의에서도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고 이를 보장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 중 하나였다.[6]
우선 일본이 패전한 직후부터 살펴보자면, 당시 승전국이었던 미국 국내 여론은 당시 전쟁의 최고 책임자였던 쇼와 덴노(히로히토)를 당연히 전범재판에 세우려고 했으며 천황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히로히토는 미국이 자신을 재판에 세우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 데 필요한 전진기지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히로히토는 당시 주일 미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협상을 벌였으며 결과적으로 히로히토는 법적 책임을 권력 박탈과 재산 몰수로 끝내고[7] , 전(前) 총리 도조 히데키 같은 A급 전범들만 형사책임을 지게 되는데, 그 '''대가로 미국에 넘어간 게 오키나와'''였다.
3. 미군정 시대
1950~60년대 당시 일본에선 안보투쟁과 함께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평화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해 미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본토 내의 미군기지를 1/4까지 줄이는 데 합의했지만 결과적으론 본토에서 줄어든 기지만큼 오키나와로 옮겨가게 되었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기지화하면서 민폐를 끼치기 시작한다. 먼저 기지 건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해 땅을 빼앗거나 헐값에 강매하도록 하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고, 1954년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闘争)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해 미군은 오키나와의 경제를 흔드는 것으로 대응하였지만[8] 결국 땅값을 올려서 지불하는 것으로 오키나와 주민들과 합의하였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들어서자 미군의 행패도 크게 증가했다. 1959년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를 비롯하여 잦은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 오키나와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게다가 사격 훈련으로 자연이나 농지가 훼손되고, 군사기지에서 나온 오염물질이 우물이나 하천을 오염시켰으며, 심지어 원자력 잠수함에서 방사능이 누출되기까지 했다. 미군들이 벌인 범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 아무튼 이러한 미군의 민폐는 오키나와에서는 일상다반사였다. 1970년에는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미군 병사의 뺑소니로 인해 고자 시(コザ市)에서 고자 폭동(コザ暴動)이 발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군정 하에서는 버틸 수 없다는 분위기 속에 1960년 오키나와 조국 복귀 협의회(沖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조직되어 조국복귀운동(祖国復帰運動)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귀속되면 평화헌법을 통해 미군 기지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진행된 운동이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 안보투쟁에 참여거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도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9] 를 쫓아내기 위해 오키나와의 복귀를 지지했다.
고자 폭동(コザ暴動)과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의 여러 모습들.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가 1965년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반환 없이는 일본에 전후(戰後)란 없다"고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9년 사토 에이사쿠와 리처드 닉슨과의 회담에서 1972년에 오키나와를 반환하는 것으로 양측은 합의하였다.
1972년 당시의 '복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지역 내에서 독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많고 오키나와 현에서도 독립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설도 있지만, 독립하고자 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입장을 묵살해 버리고 날치기로 오키나와 현 유지안을 통과시켰다는 설도 있어 두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당시 주민의 24.9%는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미군 핵무기 철수를 포함한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에 대해 반대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상사태 발생 시 전쟁 억지력의 감소를 심각하게 우려했었다. #
4. 역대 지도자
- 류큐열도 미국군정부(USMGR, 1945년 ~ 1950년)
- 류큐열도 미국민정부(USCAR, 1950년 ~ 1972년)
5. 관련 문서
[1] 1945~1950[2] 1950~1972[3] 이 깃발은 류큐 상선들의 깃발로 1950~1967년에 사용.[4]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5] 미국이 오키나와 한정으로 발매한 군표.[6] 『미일동맹: 안보와 밀약의 역사』 출처.[7] 정확히 말하면 이런 점에서 민사상 책임은 진 셈이다.[8] 전쟁 직후의 오키나와의 실질적인 화폐는 미군의 군표였다.[9] 오키나와는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보내던 B-52 폭격기의 기지로 쓰이는 등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중요한 후방 지원기지였다.[10] 오키나와 전투 중 전사. 사후 대장 진급[11] 오키나와사령부 사령관[12] 1945년 7월 31일까진 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