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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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라는 이름은 '외국인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며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지어줬다. 영어 앤드루(Andrew)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이름.
2. 디자인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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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에 실린 사진) 그의 옷을 입고 같이 사진을 찍은 여성은 배우 장미희와 민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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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모델은 배우 송창의와 이유리
흰색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평소에도 흰 옷을 입고 다녔으며,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기사가 딸린 흰색 현대 에쿠스를 타다 이후 흰색 벤츠 S500으로 바꾸었으며[4] 생전 자신의 방을 공개했을 때는 옷장에 평소 입는 흰 옷이 수십 벌 걸려있는 모양이 나왔을 정도. 자신의 자서전은 물론이요 의상 디자인에도 흰색을 많이 썼다. 이 때문에 흰색증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백의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컨셉을 나타냈다는 평이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흰색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80년대에 똑같은 디자인의 검은 옷을 입고 방송에 출연한 사진이 있다.
사실 흰색에 대한 집착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늘 자식들에게 순백색의 옷을 입혔다. 그런 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앙드레 김은 매일 밤 베개를 적실 만큼 울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는 흰색의 옷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즉 앙드레 김에게 흰색은 변하지 않는 순수함의 상징이자,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흰 옷에 얼룩이 묻기라도 하면 진저리를 치며 곧바로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흰색에 집착했다. 그리고 현명한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의 흰색에 대한 애착을 아름답게 승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영원한 순수함의 상징인 순백의 웨딩드레스였다. 앙드레 김의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은 결혼하는 신부에 대한 축복으로 승화된 것이다.
흔히 앙드레 김의 옷은 일반인들은 소화하기 힘들 거라는 의견도 많지만, 강남구에 있는 작업실에 가면 의외로 입을 만한 옷들도 있다. 웨딩드레스는 약간의 철면(…)이 있다면 입어볼 만한 수준의 작품. 물론 상당한 고가이지만.
화려한 의상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용복 입장에서 봐도 앙드레 김의 작품은 매우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앙드레 김은 정부사업에도 많이 참여했는데 그 예로 1988 서울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유니폼이 있다.
3. 브랜드
앙드레 김 선생이 디자인한 상품들에 붙는 브랜드 André Kim. 앙드레 김 사후 현재까지 아들 김중도 씨가 대표로 있는 앙드레 김 아뜰리에가 디자인실에서 제작한 옷을 전문으로 생산하고 있고 실질적인 앙드레 김과 관련된 곳은 이곳이 끝. 다만 앙드레 김 브랜드를 널리 알리고자 일부 사업에 라이센싱 방식으로 브랜드를 빌려주고 있다. 벽지, 타올, 우산, 속옷, 화장품 등에 앙드레 김 이름이 박혀있다면 100% 라이센싱. 다만 앙드레 김 골프 웨어의 경우 부도나면서 앙드레 김 브랜드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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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사진,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웨딩패션쇼에서 모델로 등장했던 젊은 시절 앙드레 김(좌측): 참고로 앙드레김은 평생 독신이었다)
현재는 그의 고향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있지만 '서울 사람'이 아닌 '고양 사람'이라는 지역 정체성을 가졌다.[5]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다섯 남매와 함께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땅바닥에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며 놀았는데 고양중학교 재학 때부터는 미술 자체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가 있던 시절, 극장에서 외국 영화[6] 를 접하며 배우들의 패션에 강하게 매료되고 본격적으로 의상과 관련해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본래의 장래 희망은 배우였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예술로서의 패션을 가르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외국 책을 뒤지면서 독학을 하다 1961년 국제 복장학원이 문을 열면서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나라 남성 디자이너 1호'''[7] 란 말을 들으며 의상실을 열고 반도호텔[8] 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다.
4.1.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선구자
척박한 대한민국의 패션계에 이미 1960년대부터 돌풍을 불러오며 패션계를 이끌어 온 공로가 있다. 2010년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위있는 패션 쇼나 시상식 등에는 항상 등장하며 그 위용을 과시했다.
사실 해외 쪽에서는 워낙에 뛰어난 의상 디자이너들이 많은지라 지명도는 뒤지지만, 한국에서는 일단 패션 디자이너의 대명사.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다만, 앙드레 김 본인은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4.2. 사망
2010년 8월 12일 19시 40분 경, 대장암이 악화되어 숨을 거뒀다. 향년 74세.(관련기사) 사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별세로 인해 "대한민국 패션계가 텅 비었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말년에 그는 거동이 불편해져서 신사동에 있던 자신의 의상실로 출근할 때 주변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2명이나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TV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힘든 투병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앙드레 김이 생전에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장례식도 불교식으로 치러졌다.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며, 모델 박영선이 TV조선의 프로그램인 인생다큐-마이웨이에 출연했을 때 그의 묘소를 찾는 모습이 나갔다.
5. 기타
고양군 출신이라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 아닌 고양군이라고 했으나 그의 말투는 서울 사투리를 잘 사용했었다.[9] 사실 경기 중북부 방언이나 서울 방언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
잘보면 조빈과 비슷하게 생겼다.
6. 오해와 진실
한국의 대중들은 앙드레 김을 알게 된 것이 그의 패션 디자인이 아니라, 여러 매스컴에의 출연과 연예인들이 출연한 패션쇼, 그리고 남녀 커플이 함께 하는 유명한 패션쇼의 피날레 때문인 것이 사실일 것이다. 사실 앙드레김 옷 디자인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은 편이며, 일부에서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혹평도 있다.
옹호하는 측에서는 앙드레김의 옷은 패션으로써 보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들로는, 일단 앙드레 김의 옷은 슬림화라든지 디테일이라든지 테일러링이라든지 하는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있다. 예로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의 김연아의 옷(참고자료)을 들 수 있다. 물론 같은 것을 반대 시각에서는 늘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디자인에서 탈피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앙드레 김은 "자신의 옷을 상품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패션을 상품화하고 돈과 연결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그 때문에 앙드레 김이 만든 옷은 노출이 없다. 그리고, "남성 디자이너 1호"라는 수식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게다가,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여는 서울 패션위크에 참가한 경력이 없다. 대신 지자체나 기업의 후원을 받아 비정기적으로 자주 패션쇼를 열었다. 여는 횟수는 1년에 약 10여회. 일반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1년에 2번 패션쇼를 여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많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앙드레 김의 패션은 프레타 포르테[10] 보단 오트 꾸튀르[11] 의 특징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입원단을 절대 쓰지않고 국산원단만을 고집하는 등,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지는 서양문화 선호적인 이미지(아마도 영어를 자주 써서)와는 달리 한국적인 면이 많았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겹옷 드레스 (8~9벌 가량의 여러벌의 드레스를 겹쳐 입는 것)은 한국여성의 한을 상징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해외의 스타들에게 옷을 디자인해서 주기도 했는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같은 유명 배우도 포함된다. 또한 마이클 잭슨이 생전 그의 옷을 특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화려한 용 무늬의 자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유명한 시상식에는 물론이요, 외출할 때도 입고 나갔다. 특히 잭슨의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던 '''This Is It''' 콘서트 발표회 때 입었던 옷(참고자료)이 바로 앙드레 김의 의상이다.
실제로 잭슨은 앙드레 김에게 자신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앙드레 김이 '자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기에 한 가수의 전속이 될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다만 그를 위해서 매년 맞춤복을 보내줬다고 한다.
7. 사생활
비리나 로비 같은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다. 오히려 성실 납세자로 표창을 받은 경력도 있다.
다만, 김대중 정부 초기인 1999년 일어난 옷로비 사건 때 증인으로 나온 적은 있다. 이 사건은 헌정사상 최초 특별검사제도가 시행된 로비 사건이기도 했으나 그 요란한 재수사, 특검 등 노력에 비해 실제로는 흐지부지 끝났던 사건으로, 그 사건의 증인[12] 으로 나와서 김봉남이라는 본명이 이 사건을 계기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때 본명이 다소 '촌스럽게'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놀림을 받았기에 본인은 굉장히 상처를 받았었다고 한다. 어쨌든 앙드레 김의 입장에서는, 본명이 알려진 문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공들여서 만든 작품이 더러운 정치권 로비에 쓰였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때 언론들은 "검찰이 밝혀낸 건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다."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본명이 알려지면서 신비주의가 점점 옅어졌고 친근한 이미지로 바뀌기도 했으며 아울러 사업상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리고, 앙드레 김은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배웠다."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이었지만 입양한 외아들 김중도를 소중하게 키웠고[13] 남 모르게 기부 활동을 하는 등, 대인배적인 면모가 많은 사람이었다.[14] 아들인 김중도 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앙드레 김 아뜰리에를 운영하며 패션 디자인 사업을 하고 있다.
생전에 나이 70이 넘어서 화장을 하고 다녀 기괴한 모습과 흰옷 + 프랑스에서 살아서 그런지 희한한 한국어 발음과 묘한 영단어 사용[15] 때문에 주로 개그의 소재로 활용되는데, 개그맨 이혁재와 정종철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종철은 2006년 KBS2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에서 패션 옥 캐릭터로 연기를 했으나 그전에 했던 옥장군에 밀려 인기를 못 끌었다. 2010년에 앙드레 김 본인이 사망하면서 성대모사 개그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래도 사실 발음이 독특했다 뿐이지 영어와 프랑스어에 매우 유창했다고 한다.
머리가 벗겨졌었는데, 하고 다닌 머리는 '''샤넬 마스카라 1통을 한꺼번에 칠한 것'''(…). 문신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와 친분이 있거나 그의 패션쇼에 출연해 본 몇몇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한 발언을 보면 "여름에 뵈었을 때 땀을 많이 흘리시다가 시간이 지나니 머리에서 검은 물(?)이 흐른 적이 있었다"든가, "시간이 없을 때 직접 거울을 보시며 빈틈(?)을 매직으로 잠깐 칠하시는 걸 봤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칠하였던 게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디자인숍 막내들이 마스카라를 구비하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미지만 보면 상당히 작은 양반이었을 것 같지만, 사진상에서 작아보이는 것은 옷이 펑퍼짐해서 그런 것뿐. 실제로 보면 키가 꽤 크기 때문에 크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즐겨 입던 옷이 흰색에 넉넉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시너지로 인해 실제로는 180 중반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게다가 모델 출신이기도 하며, 후에 본인 스스로 밝힌 일화에서는 청년기에 방송이나 영화계 관계자에게 아예 전업 배우를 해 보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본인이 직접 연기라는 분야에 자신이 없어서 거절을 했었다고 한다.
교보문고 본점에서 교보 직원이 사인을 요청하자 유성매직이 '''옷의 팔부분'''에서 나왔다고(…). 누군가가 같이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들어주기도 했다.
그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와는 달리 소탈하고 검소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주로 식사는 분식집에서 해결했다고 하며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여기에 분식집에서 같이 식사하던 중, 고등학생들의 기념 촬영과 사인 요청을 친절하게 받아주고 그들의 식사비를 모두 자신이 지불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년 여름마다 모 호텔의 노천 카페를 방문해, 옛날 팥빙수를 먹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직 팥, 연유, 얼음만 쓴 기본 팥빙수를 주문하곤 했다고. 그 외에 들리는 말로는 진열된 자기 옷을 간절히 갖고 싶어하는 여성을 보고 "가진 돈만 주고 가져가도 좋다"고 하며 사게 해줬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본의 아니게 희화화가 자주 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폄하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 듯하다. 이혁재가 앙드레 김 성대모사로 인기를 끌었을 때,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을 정도.[16] 하지만 폄하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후에 이혁재를 격려해줬다고 한다.[17]
재한 외교관 부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우리나라 관련 정보 당국에 귀띔을 해준 일화가 있다. 본인 나름대로 국익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했던 것. 또한 고인의 선구적인 노력이 오늘날 의류업의 위상이 달라진 큰 원동력의 하나로 꼽히는 점을 감안하면, 학식만 쌓고 실행력은 부족했던 일부 지성인들보다 오히려 낫다 할 수 있다. ('''~장이'''라 천대받았던 사람이 이러할진대...)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우리말 해침꾼' 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터뷰 등을 보면 앙드레 김이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많이 섞어 쓰는 편이기는 하다. 외국에서 발달한 분야에 외국어를 섞어 쓰는 경향은 많지만 앙드레 김은 불필요한 맥락에서도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도 요새 패션 프로그램들을 비롯하여 요리, 연예 등등을 보다보면 앙드레 김의 외국어 오남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수준. '쉬크한 필로 필링해준 블링블링한 액세서리... 라이징 스타로서 블랙 칼라와 매칭한... 매쉬드 포테이토에 피넛과 올리브오일을 어쩌구 플레이팅하면...'
그가 가장 많이 옷을 만들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성악가 조수미로, 사망하기 전까지 조수미에게 20년 동안 드레스 약 200여 벌을 제작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조수미의 열렬한 팬 중 하나였다고. #
특이한 교복이 나올 때마다 흔히들 앙드레 김이 직접 디자인한 교복이라고 학교마다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만 봐도 당시의 소문을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실제 본인이 직접 디자인해준 교복은 용인시에 위치한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부설고등학교의 것이 전부였다. 아들이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 것과 인연이 있어서였다. #
그의 아들이 외대를 졸업한 후 2005년 외대 재단 측에서 앙드레 김에게 교복 디자인을 부탁했고, 이 제안을 앙드레 김이 흔쾌히 수락하였으며 디자인 비용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 그런데 "교복을 앙드레 김이 디자인했다!"했는데 교복이 다들 아는 앙드레 김의 그 복장으로 교복이 바뀌었다는 유머로 만든 웹툰도 존재한다.
동복은 웨스턴/오리엔탈, 하복은 웨스턴/사파리 2종류가 있다. 웨스턴은 정장, 오리엔탈과 사파리는 간편복 개념으로 입는다고. 외대부고생들 말에 따르면 웨스턴이 간지나지만 오리엔탈과 사파리가 무척 편해서 이쪽을 선호한다고. 과연 앙샘. 여담으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교복은 이것을 고친 것이다.
마지막 유작은 국내 최대 버스 회사인 KD 운송그룹의 승무원 제복으로,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최초이자 유일한 회사 제복이다. 처음에 허명회 KD운송그룹 회장이 비서진에게 앙드레 김에게 승무원 제복 디자인을 승낙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승낙 못 받으면 회사에 복귀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비서진의 설득이 안 먹히자 결국 회장이 직접 나서서 "승무원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 주고 싶다."라고 소신있게 설득한 끝에 5년 만에 승낙 받았다고 한다. 이 승무복은 KD 내에서는 승무예복이라 부른다.
3억 원의 비용으로 디자인을 받고 KD 운송그룹 자체 피복 공장인 KD 어페럴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앙드레 김의 디자인 중에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꾸준한 리뉴얼로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몇몇 KB국민카드의 카드상품은 앙드레 김 디자인이다. 예전에는 포인트리 3종 시리즈가 앙드레 김 디자인이었지만 리뉴얼되었고, 2012년 3월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금융포인트리 체크카드. 그리고 2009년에 롯데시네마 티켓 역시 그가 디자인했는데, 2011년경 이후 로켓 사진이 나오는 티켓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영수증형 티켓으로 나온다.
2010년 12월호 엘르 부록으로 앙드레 김 전기인 《나는 앙드레 김 입니다》가 나왔는데 단행본으로 팔아도 될 정도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 앙드레김 자서전인 《앙드레 김 My Fantasy》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도 남는 훌륭한 서적이니 구해 읽어보면 좋다.
2009년에 삼천리자전거에서 Andre Kim이라고 따로 브랜드를 만들어 미니벨로, 부인용을 포함하여 자전거 12종을 내놓았다. 원래 다음 해에도 내놓을 예정이 있었던 것 같으나 별세로 인해 결국 2009년 한 해만 나오고 단종.
또한 같은 해 공군을 위해 빨간마후라를 특별 제작하기도 했다. #
2008년 한국도자기에서 앙드레 김 홈세트, 예단용 칠첩 반상기, 디너, 커피, 머그세트를 출시하였다. ##
1999년 마이클 잭슨이 그에게 전속 디자이너를 하자고 오퍼를 넣었으나, 그는 "한국의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며 딱 잘라 거절하며 100벌 넘는 옷을 주었고, 2009년 마이클 잭슨 사후 2010년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VIP 시사회만큼은 나타났다.
2008년경 지나가던 중 우연히 서울 코믹월드 행사를 발견하고, 행사장 외부를 돌아다녔다는 증언이 있다.
8. 대중매체에서
우리나라 패션업계의 아이콘이다보니 여러 매체에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캐릭터에 그의 이미지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에서는 그가 모티브가 된 인물 앙드레 장쥐르가 나온다. 게임 제작자로서의 정태룡이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제 중 하나. 게임 트릭스터에서도 앙드레김을 본따 NPC를 만들었고 테라에서도 앙드레김의 말투를 하는 패션 디자이너 NPC 메르무슈뭉이 있다.
-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에도시대 상업에 대한 부분에서 그의 패러디인 재단사 '앙도레 친'이 등장한다. 본명은 친복돌.
- 2013년 중에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나오기로 했고, 젊은 시절의 앙드레 김을 맡을 배우는 하정우로 결정된 상태로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나, 중간에 촬영 중단이 되었는지 엎어졌는지 소리소문없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무산된 듯. #
-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산에 왔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영어를 중간 중간 섞어 주변 인물을 당황시킨다. 별 헛소리를 한다는 투로 말하는 주인공 고모는 덤.
- 만화 신과함께 이승편에서 언급된다. 일직차사 이덕춘이 "이승 최고의 디자이너가 이쪽으로 오셨잖아요."라고 말하고 단물 차사와 탄석 차사가 입은 옷의 색이 흰색 정장인 것을 보면 앙드레 김을 묘사한 내용이 맞다. 해당 내용이 나온 이승편 51화가 연재되기 전 쯤에 앙드레 김이 타계했는데, 그에 대한 조의의 표시인 듯 하다.
[1] 음력 8월 24일. #.[2]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3] 1981년생. 앙드레 김이 1982년에 입양한 아들이다. 참고로 앙드레 김은 평생 독신이었다.[4] 1세대 에쿠스에서 S클래스로 바꾸었다. W221 페이스리프트 이전 S500L. 지금이야 S클래스는 길에 상당히 흔한 차지만, 당시에는 수입차 자체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억대 가격의 S클래스는 보기도 힘들었고 대부분은 검은색 또는 은색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흰색 S클래스였다고. 그 외엔 스타크래프트밴을 타기도 했다.[5] 정치인 손학규도 비슷한 케이스로, 지금은 서울 금천구로 편입되어 있지만 태어날 당시 행정구역대로 '시흥 사람'이라는 지역정체성을 갖고 있다.[6] 앙드레 김 회고록에 의하면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화니 페이스였다고 한다.[7] 하지만 당시 재봉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디자이너라는 말 자체가 퍼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앙드레 김 '''여사'''로 소개된 해프닝도 있다.[8] 롯데호텔 서울자리에 있던 곳으로 1939년에 세워져 해방 뒤 교통부, 국제관광공사가 각각 운영하다 1973년 호텔롯데에 부지가 팔려 1975년에 철거되었다.[9] 지금의 지축동, 삼송동은 02 지역번호를 쓰듯이, 당시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지역은 서울 사투리를 사용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튜브 등에서 그의 생전 말투를 들어 보면 전형적인 서울 사투리를 들을 수 있으며, 특히 지금을 '''지끔''', 먼저를 '''먼처'''라고 하듯 서울 사투리를 사용하여 서울 토박이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지만, 뼛속부터 고양시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또한 손학규와도 상당히 비슷한데, 현재의 금천구에서 태어났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뼛속까지 경기도 시흥군 사람이라고 강조했듯이 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은평구의 전신인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과 고양군 신도면 일대는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가 많았고,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도 그렇다. 다만, 현재의 삼송동과 지축동과 은평구 진관동은 각각 삼송지구 개발과 은평 뉴타운으로 인하여 토박이들이 상당히 많이 사라졌다.[10] pret-a-porter, 실용성에 중점을 둔 고급 기성복 [11] haute couture, 예술성에 중점을 둔 고급 맞춤복 [12] 사건 관련자인 부인들에게 옷을 판매했었다. 그리고 부인은 그 옷을 로비용으로... [13] "앙드레 김 아들에 대한 지독한 사랑" #[14]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것에 반해,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인해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아들의 이름이 '철수'인데, 너무 굴려서 주위 사람들은 모두 '찰스'라고 알고 있다는 둥의 헛소문이 있었다.[15] 흑역사로서 방송에 나와서 fashion을 프랑스식으로 "빠숑"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fashion이라는 말 자체가 영어 단어이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대체로 "패션"이라고 한다. 참고로 "파송"이라고 불리는 불어 façon(방법)은 영어 fashion의 어원이 되기는 하지만, "옷차림"이라는 특정한 뜻은 없다. 본인은 '옥스퍼드 영어'라 주장하였으나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물론 한참 나이가 들어서 영어를 배웠으니 억양을 완전히 없애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16] 인터뷰에서 이혁재의 성대모사에 대한 질문에 약간 불쾌한 태도의 무표정으로 '조금 불편해요. 저는 그런 저질 영어 단어를 쓰지 않아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시 그런 질문에 이덕화나 이주일처럼 성대모사의 대상으로 자주 써먹히던(?) 연예인들이 이런 질문에 가볍게 '재미있다'거나 웃으며 '너무 이상하게 하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정도로만 말하는 경우가 많은 방송계 특성상 '저질 영어 단어'라는 명백히 부정적인 단어로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 흔한 일이 아니라, 당시 나름대로 연예계 이슈였다. 이혁재도 추후 이 소식에 '선생님께서 화나셨구나'라고 생각해서 걱정했다고 한다.[17] 그러나 어느 정도 좋은 분위기로 이슈가 마무리되며 시간이 흐른 이후에도 연예 정보 프로그램 단독 인터뷰에서 그의 패션쇼에 대해 주로 묻던 리포터가 여담으로 이혁재에 대한 질문을 하자, 웃으며 부드럽게 대답은 하였지만 "이혁재 씨가 제 흉내를 내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저는 절대 '저질 영어 단어'는 쓰지 않으니, 흉내내실 때 제발 '저질 영어 단어'는 쓰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번 성대모사시 사용된 영어 단어에 대한 불만은 남아 있음을 확실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