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갑

 

1.1. 개요
1.2. 출연작
2. 대한민국의 작곡가, 기타리스트


1. 대한민국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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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희갑(金喜甲)
'''출생'''
1923년 7월 13일, 함경남도 장진군
'''사망'''
1993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본관'''
김해 김씨
'''학력'''
메이지대학 중퇴
'''가족'''
부인, 슬하 1남 5녀
'''데뷔'''
1946년 영화 〈장화홍련전〉

1.1. 개요


대한민국의 희극 및 영화배우로 1923년 7월 13일 함경남도 장진 출신.
장진 공립보통학교와 회령 공립상업학교를 거쳐 1943년 일본 메이지대학 상학과를 중퇴하였으며 1945년 해방 및 남북분단이 되면서 탈북하여 독문학자 서항석의 문하로 들어가 반도가극단에 입단하여 프롬프터로 일하면서 무대연기를 배웠다. 영화데뷔는 1946년 11월에 찍던 영화 〈장화홍련전〉에서 변사또역을 맡은 배우가 갑자기 잠적하면서, 대역으로 출연하던게 첫 데뷔였다. 이를 계기로 <옥루몽>, <에밀레종> 같은 영화에 꾸준히 나오면서 6·25전쟁 중에는 선무공작단 일원으로 종군하였다. 그리고 데뷔 10년차인 1956년 한형모 감독 영화〈청춘쌍곡선〉으로 본격적인 주연을 맡게 되면서 알려진다.
이후로 빨간 마후라, 오부자(五父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팔도강산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합죽이' 라는 별명을 얻으며 서민들로부터 대인기를 얻었다.
박정희 정권 때 재일교포 고향 방문단을 위문하는 공연에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구슬프게 불러서 화제였고, 이 일을 계기로 가수로도 유명해졌다.[1][2]
팔도강산 시리즈 등 국책 홍보 영화에도 출연했고,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당대 높으신 분들과 친했지만 생전에는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출연 영화 수만 해도 최대 700여편이나 되기도 하였다.[3] 당시 중앙일보 연재물 '청와대 비서실'에서 회고하기를 70년대 팔도강산 세계편을 찍을 때 외환관리법으로 기관에 끌려 간 적이 있으며(...)[4] 홍콩에서 영화 사기범들에게 걸려서 곤욕을 치를뻔 했다. 그냥 사기범도 아니고 최은희와 신상옥을 북한으로 데리고 간 알선업자였으니, 하마터면 북한 인민배우 김희갑을 볼 뻔한 일[5] 80년대는 영화에는 출연이 거의 없어서 주로 웃으면 복이와요같은 TV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가요무대등에 간간히 얼굴을 보이거나 혹은 밤무대에 출연하였고 꽃뱀에게 걸려서 신문에 잠깐 나오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연기 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0년대말 전성기 시절 임화수로부터 모진 구타를 당했다는 일화. 정치행사에 참석하라는 임화수의 요구를 김희갑이 거부하자 구타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김희갑 구타 사건으로 유명하다.[6] MBC가 1981년 방영한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이 에피소드를 촬영할 때[7] 김희갑이 직접 자신의 역할로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촬영일자와 해외 공연 스케줄이 겹치는 바람에 무산되면서 제작진은 긴급히 김희갑과 흡사한 외모의 연극배우 정진을 캐스팅하여 김희갑 구타사건 에피소드는 무사히 방영될 수 있었다. 정진이 배우로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시기가 이때부터 였다.
야인시대에서는 78화, 111화 후반과 112화 초반에 잠깐 등장한다. 임화수가 극장 안에서 배우들을 집합시켜 기합을 주고 최무룡을 방망이로 패다가 김희갑이 끌려오자

임화수 : 야, 합죽이! 너 이새끼야 너 죽어야 알겠어? 어?

김희갑 :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임화수 : 뭐? 뭐가 어째? 야 이 쉐끼야! 너 지난번 내 작품에, 바쁘다고 출연 거부했다면서? 어? 그리고 이번 소집때 왜 안나왔어? 어?

김희갑 : 그거야 나도 사정이 있으니까 못나오는거 아닙니까? 바쁜데에?

임화수 : 뭐라고? 사정? 너 이 새끼가!

김희갑 : 도대체 왜 때리시는겁니까?

임화수 : 뭐가 어째? 왜 때리는지는 맞고 나서 다시 물어봐 이 새끼야!

결국 꼭지가 돌아버린 임화수는 방망이가 아닌 주먹으로 김희갑을 죽도록 패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112화에서 자신을 찾아온 기자들까지 폭행했으며, 신문에까지 기사가 나는 것도 모자라 4컷 만화 고바우 영감에까지 나온다. 참고로 작 중 김희갑이 임화수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나 사실 '''임화수보다 2살 어리다.''' 게다가 나레이션이 하술하듯이 김희갑은 검경과 신문사에 인맥이 있어 임화수를 그대로 역관광 보냈다. 이 일로 임화수는 유치장에 가게 되나 곧 풀려난다.

"이른바 김희갑 구타 사건. 지금도 연예가에 화제거리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임화수를 한때 최악의 위기 속에 몰아넣게 되는데…" - 야인시대 111화

이른바 김희갑 구타 사건.

김희갑은 함경도 장진 출신으로, 많은 연예인들 가운데 그 성격이 곧고 경우가 밝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강한 성격이 결국은 임화수의 비위를 긁게 되고 병원 신세를 지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됐던 것이다.

김희갑은 임화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박성환이 그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고, 검찰의 강 모 부장검사도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것은 결코 그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임화수의 폭력을 눈여겨보던 각 신문사의 기자들이 이때다 싶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임화수를 규탄하기 시작한 것도 임화수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6대 주요 일간지에서는 김희갑 폭력 사건을 무려 1주일간 대서특필, 임화수의 모든 치부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야인시대 112화 中 내레이션

1963년 영화 쌀과 1972년 작은 꿈이 꿈꿀 때를 통해 대종상 남우조연상, 1993년 옥관문화훈장, 대종상 청룡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에는 북한에서 남북 예술공연단 일원으로 출연하여 고향인 함경남도 장진을 방문하였고 1993년 5월 18일, 만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담인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임화수 유족이나 지인들이 김희갑이 잘못하여 맞은 짓이라는 개소리+고인드립을 지껄이다가 김희갑 유족들의 분노어린 반발과 고소미 엄포에 찍소리 못하고 입다물던 적이 있다.
또 1970년대 초반 농심의 초기 전속모델이었다.

1.2. 출연작


  • 오부자(1958,1969) - 아버지 역
  • 팔도강산 시리즈 - 아버지 역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빨간 마후라
  • 작은 꿈이 꿈꿀 때
  • 박서방(1960) - 항섭 역
  • 마부(1961) - 김 서기 역
  • 돼지꿈(1961) - 천 선생 역
  • 서울의 지붕 밑(1961) - 노몽현 역
  • 골목안 풍경(1962) - 산부인과 의사 역
  • 외룡선생 상경기(1962) - 와룡선생 역
  • 남자 식모(1968) - 반창고 역
  • 신세 좀 지자구요(1969) - 이재명 역
  • 내 팔자가 상팔자(1969) - 허풍선 역
  • 뭔가 보여 드리겠읍니다(1980) - 주일 아버지 역
  • 사후세계(1982) - 최회장 역

2. 대한민국의 작곡가, 기타리스트


[1] 그 노래를 부를 가수로 김정구가 꼽혔으나 염두해 두었으나 그가 가끔 코믹한 노래도 불렀던 가수였기에 분위기가 안 살수 있다는 판단하에 김희갑이 대신 나갔다[2] 그런데, 가수는 본업이 아니었고, 배우로서는 심각한 역할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희극에 출연하였다. 영화에서의 역할만으로 보면 동 시대에 활약했고 (나중에 본격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구봉서도 김희갑과 성격이 비슷하다.[3] 한국 영화 중흥기인 60-70 년대에는 신성일 위키리 등 인기 배우들은 영화 수백편을 찍어서, 본인들도 몇 편이지 기억을 못 한다.[4]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해외 여행은 관광 목적은 안 되고 공무 출장, 해외 영업 관련 출장이나 해외 취업 등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가지고 갈 외화도 극히 적었다. 그런 이유로 암달러상을 만나다가 걸렸다는...[5] 다만 여기에는 이설이 있는데, 그 알선업자는 순수한 알선업자였고 북한에게 이용을 당하거나 혹은 최은희 부부가 월북을 한 것을 남한에서 납치로 몰았다는 이야기, 진실은 저 너머에[6] 무풍지대에서는 문풍지, 야인시대 김희갑 역할 배우는 코미디언 배영만이 대역을 맡았다.[7] 임화수 역은 오지명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