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1. 개요
2. 문제점
3. 관련 링크
4. 강준만의 저서
5. 관련 문서


1. 개요


'''우리는 창문을 깨고 불을 질러요. 전쟁이 남자들이 들어주는 유일한 언어니까요.'''

-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 분), 영화 《서프러제트》(2015)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또는 남자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란, 평소에는 페미니즘에 관심도 없다가, 급기야 과격한 방법을 채택하니 그제서야 "그런 과격한 방식의 페미니즘은 '이 오빠들'이 허락해줄 수 없다" 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비꼬는 담론 혹은 레토릭(rhetoric)이다. 즉 일종의 반어법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뒤집으면 "저들의 허락따위 필요없는 과격한 방식의 페미니즘 운동을 하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유사한 담론으로 '독재자가 허락한 민주주의,' '회장님이 허락한 노동운동', '백인이 허락한 흑인 인권운동', '정상인이 허락한 장애인 인권운동' 등이 있다.
이 담론은, '오빠'와 '허락'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지위가 높은 남성이 낮은 여성에게 허락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대한 비판도 동시에 품고 있다.
일부 계층에서만 동의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본 담론에 동의한다.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많은 편.
참고로 "저들이 '허락'한 온건한 방식으로는 지금껏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격한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식의 논리는 사실 어떤 사회운동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적이 더 드물다.
물론 극단적인 수단이 사용된 운동이 처음부터 극단적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온건한 방식으로 수없이 요구하였으나,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거나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극단적인 수단이 등장한 사례는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존 브라운, 스톤월 항쟁,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투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위에서 인용된 영화 서프러제트의 대사도 이를 함축하여 보여준다.
예전에는 대표적인 페미니즘 집단만 나열해 보라고 해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민우회 정도라도 언급할 수 있으면 그나마 잘 아는 축에 속한다. 즉 이 담론을 옹호하는 측의 주된 논지는 "우리가 이렇게 난리발광을 치니 그나마 여러분이 관심이라도 갖지 않느냐"는 것.

2. 문제점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원천봉쇄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일종의 마법의 말이라는 것이다. 즉 어떠한 과격한 방식의 운동들도 (심지어 반사회적인 흉악범죄까지도) 이 구호 하에 다 정당화된다.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네 다음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식으로 반박하면 끝이다. 당장 메갈리아워마드의 각종 극단적인 행동들(각종 극단적 증오발언, 무차별적 미러링, 성범죄, 연예인 사이버 불링 등)은 모두 이 구호 하에 정당화되었다.[1] 이는 지나치게 과격화되어 엇나가버린 다른 사회운동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실 급진계열이 온건계열과 반대파를 적으로 두는 경우가 많았고, 원천봉쇄의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로 들자면 공산주의 국가였던 북한, 소련에서 일어난 사민주의자, 트로츠키 주의자 등 나머지 사회주의 계열을 반동으로 몰아 숙청시키는 사건 등이 있다.
또한 아무리 사상이 좋고 근본이 부드럽다고 해도 별개로 행위 자체의 책임소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앞서 언급된 존 브라운만 하더라도, 그가 인종차별 철폐운동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5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살인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을 졌다. 또한 앞서 언급된 영화 서프러제트에서도 알 수 있듯,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2] 감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하며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른'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김좌진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는 일제에 붙잡혀 순국을 했어야 되었다. 또한 민주노총의 폭력시위도 신자유주의 시대에 악화된 노동자 인권을 위해 싸운다는 좋은 의도지만 대중들에게 너무 행보가 과격하다는 비판을 듣는다. 추가로 성소수자계의 무장투쟁이라고 불리던 스톤월 항쟁도 현재는 LGBT를 위한 평등을 위한 초석이라고 불렸지만 대중들의 반발이 심했다.
이처럼 극단주의적이고 과격한 행보를 보이는 자에게 가해지는 비판과 비난은 그가 사회적 약자이어서가 아니다. '''과격해서이다.''' 사회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목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냐 이전에 일으킨 문제부터 본다. 사연을 듣는 건 그 다음이다. 즉, 페미니즘 자체에는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 않지만 만약 페미니즘을 앞세워 과격 행위를 자행하고자 한다면 비판과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정작 위에서 말한 존 브라운의 인권운동과 서프러제트 그리고 민주노총의 폭력적인 노동운동 등은 사회적 평등 등 철저히 '''공'''적인 이유로 저지른 행위로, 모두 다 각각 흑백 평등, 여성참정권, 노동권 등 사실상 기본권에 침해가 많이 되거나 보장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났으니 '''그래도 어느정도 정당하지 않느냐'''라고 옹호발언이라도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국가와 주류 사회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현실에서''' 소위 시민 불복종 차원의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해결 안되는 상황에서 무력이란 선택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나 다른 현대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공민권 자체를 보장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게다가 존 브라운의 경우 '''막상 본인은 백인인데도 순수하게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 하나만으로도 어떤 해방노예도 하지 못했던 과격한 폭력 투쟁을 추구했다.''' 이러한 역사적 문맥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이를 압도하는 '''개인의 지사적 순수성'''으로 인해 존 브라운의 경우 2010년대 현대 들어와 그 행동의 과격함을 비난하는 사람들보다 그 이상과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경력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다. 민주화 투쟁, 독립 운동도 마찬가지다; 안동시 하나에서만 나온 천여명급의 독립운동가들 치고 상당수는 적당히 일제에 영합하며 썩어빠진 동네 유림의 잔반들로 충분히 호의호식 할 수 있었음에도 사대부이자 망한 왕조의 엘리트로서 책임을 다한다고 전답, 논토 다 팔아서 본인들은 동토 만주 감옥에서 얼어, 굶어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이들을 존경하는 것이고, 민주화 운동가들 마찬가지로 많은 수가 어디 고등학교만 나와도 고급 인력 취급 받았던 그 시절에 대학까지 나와 한창 성장하는 중진국의 엘리트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데도 자신들의 물리적 이득과 하등 관계 없는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시민사회, 불완전한 독립 이후 분단이라는 아픔을 남긴 선대 열사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자발해서 노동 현장에 잠입 취업하고, 백골단에 처맞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사람들이라 추앙 받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시기는 위에서 말한 서프러제트와 1980-1990년대의 무수한 여성운동가의 사회적 평등을 위한 노력등으로 인해 '''제도적''', '''사회적'''으로 성평등이 어느 정도 된 시기로 위에서 나온 운동들과 달리 변명할 여지도 없다. 세부적 환경을 무시하고 사회적 운동은 폭력을 동반한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시대 독립투사, 민주투사를 예로 드는데, 그렇게 앞 뒤 다 자르고 폭력성의 정당화에만 초점을 맞추면 일베의 폭력적 행위도 정당화가 못 될 이유가 있을까? 특히나 결과만 좋으면 과정도 정당화 된다는 논리가 은연 중에 제시되는데.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독재도 괜찮다는 것하고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누누이 주장하는 페미니즘 담론에도 어긋난다. 래디컬 페미니즘 문단에서 보다시피 과격한 노동운동(투쟁)이나 서프러제트, 흑인 인권운동은 '''공'''적인 차별을 해결해서 성평등을 이루자는 리버럴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의 인권문제에도 이를 적용하는 교차 페미니즘에만 알맞지 이를 주장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 트페미[3], 여성시대, 워마드 이용자들과는 전혀 알맞지 않는 사례이다. 왜냐하면 위에 나온 사례의 인물들은 공적인 평등을 위해 그런 과격한 행동을 벌였지, 이들이 백인, 남성, 기업가, 이성애자에게 말로 조롱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어디 여성 투표권 운동가들이 동네에 남아 나는 돈도 빽도 없는 그냥 아저씨들 상대로 싸움걸면서도 돌아다녔던 줄 알 일이다.
즉, 이들의 말은 '''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심지어 '''페미니즘'''을 근거로 해도 정합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서프러제트 운동가들이나 존 브라운, 일제시대에 활동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들이 피꺼솟할 말인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허락하지 않는 과격한 방식의 페미니즘 운동을 하자"는 게 결국 아동 학대 등에 불과하다는 면에서, 차라리 정상적이고 인간다운 방식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하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일부 트페미들은 '#일베발_페미_사회적매장사건'이라는 해시 태그를 달아 이 사건의 정체성이 페미니즘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호주 아동의 어머니 (여성)는 이런 방식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또한, '''나쁜 페미니스트들 덕분에 소라넷이 폐지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사실 소라넷 운영자를 검거하기 위해 경찰이 비밀리에 수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분탕을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 들통이 났으므로 '덕분에'는커녕 '''수사를 오히려 지지부진하게 한 주범이다.'''

3. 관련 링크


독립된 담론으로서의 인지도는 높다고 하기 힘들지만 몇몇 언론들에서 언급은 되는 듯하다.

4. 강준만의 저서


해당 문서 참고.

5. 관련 문서



[1] 해당 행동들이 정당했거나 효과적이었는지의 여부는 본 문서에서 서술하지 않는다.[2] 작중 주인공에게 '''"너 서프러제트니?"''' 한마디로 주인공의 입을 막아버리고 그녀를 떠나는 남편(벤 위쇼 분)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3] 꼭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붙인 이유는 트페미라고 모두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