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도서)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현대 대한민국[1] 에서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역사가 누적되어 있음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이런 역사적 맥락을 배경으로 젠더 갈등을 바라보는 책'''이다. 저자는 여기서 "맥락" 을 매우 강조한다. 예컨대, 장기간의 삶의 고통[2] 이 쌓이고 쌓이다가 마침내 폭발했을 때, 상대방이 그 폭발의 맥락을 탐지하지 못하면 "아니, 갑자기 왜들 이래?" 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맥락을 알았다면 반응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이것을 "역지사지 능력" 으로 설명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가해 왔던 가해행위가 매우 길고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여성으로부터 일말의 가해라도 경험할 경우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 라고만 주장하면서 그 이전 자기들의 가해행위에 대해서는 잊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적 맥락의 중요성을 심지어 '''맥락 전쟁'''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하여 강조하고 있다. 성차별의 피해자로서 여성들은 그 차별의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배경과 맥락을 중시" 하나, 남성들은 "그런 배경과 맥락은 무시한 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금, 여기의 팩트' 만을 강조"(이상 p.6)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맥락맹(-盲)인 경향이 있다. 이들조차 가부장제의 피해자이기는 하나, 이들의 태도는 늘 대중매체를 통해서 강화된다고 한다. 남성들이 맥락을 소거하는 것은 남성들의 소위 '사악한 음모' 같은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체제 자체가 그들을 맥락맹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가부장제가 남성들로 하여금 맥락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 중 다른 것으로 저자가 '''가족 이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가족 내에서 어머니의 가부장제 강화적 역할이 강하게 작용하며, 가족 이외의 모든 다른 구성원들을 불신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미투 운동이 발생하고 누가 성범죄를 겪었다 해도, "우리 가족만 아니면 돼" 같은 식의 사고방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본서의 제목인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은 저자에 의해서 '가부장제가 허락한 페미니즘' 으로 정의된다. 저자는 입으로는 자기들이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도 가부장제가 위협받는 순간 불같이 화를 내는 남성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이 사람들은 가부장제를 벗어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며, 그 안에서 보장될 수 있는 관용을 들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가짜 페미니즘이고, 우리야말로 진짜 페미니즘" 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 하술하겠지만 본서에서 이런 남성들은 '''운동권~친노~친문 계통으로 연결되는, 진보를 자처함에도 유독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날선 거부반응을 보이는 남성들'''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그 구체적 사례로 유시민, 김어준, 유아인, 박훈, 탁현민 등을 들고 있다. 이런 진보계 주요 인사들이 유독 여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그 경중을 평가하는 '오빠' 로서 나선다는 것.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진짜 페미니즘' 이 무엇인지 여성들에게 가르치기에는 여성들의 삶의 고통의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다음으로 저자의 저술 동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저자는 물론 남성이고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3] 소통(communication)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맥락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에 펜을 들었다고 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권력의 상층부만 갈아치워서는 끝나지 않을 장구한 혁명이 될 것이기에, '''우선 갈등과 논쟁의 역사를 앎으로써 남성들은 여성을 이해할 수 있고 여성들은 자신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저자는 자신이 남성으로서 이런 도서를 저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인식하고 있기에, 서문에서 이것이 꼰대질이나 맨스플레인으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어조는 여성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젠더이슈를 시공간적으로 나열하는 데 치중하고, 각 장마다 끝부분에 저자 개인의 성찰적 회고를 첨부하는 조치를 취했다.
본서와 유사하게 젠더 갈등의 역사성을 조명하는 페미니즘 도서로는 《대한민국 넷페미史》, 《근본없는 페미니즘》,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백래시》 등이 있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머리말: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박탈당한 여성들
- 1장: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충돌 (1990년대)
- 2장: '몸에 각인된 타성'을 둘러싼 투쟁 (2000년~2009년)
- 3장: 사회적 삶을 타락시킨 가부장제의 폭력 (2010년~2014년)
- 4장: 인내의 임계점과 저항의 티핑포인트 (2015년)
- 5장: '공포' 피해자와 관리자의 충돌 (2016년 1~7월)
- 6장: '구조' 피해자와 수혜자의 충돌 (2016년 7~12월)
- 7장: 페미니즘과 진영 논리의 충돌 (2017년 1~6월)
- 8장: 페미니즘과 촛불 시위의 배신 (2017년 7~12월)
- 9장: '제1의 민주화 운동'과 '제2의 민주화 운동'의 갈등 (2018년 1~3월)
- 10장: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파탄 (2018년 3~4월)
- 11장: 지그재그로 진보하는 역사 (2018년 4~5월)
- 맺는말: '습관의 독재'를 깨기 위한 '중단 없는 전진'
- 현대사회는 맥락이 제대로 소통되기 어려운 상태이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젠더 갈등에서도 맥락이 누락되고 있다.
- 젠더 갈등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면, 여성들이 장기간 고통받아 온 역사적 맥락 위에서 갈등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 남성들은 이 고통의 역사에 공감하지 못하기에, 정치적 진영논리를 들이대거나 혹은 막연히 양비론을 펼치게 된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본서가 나열해 보여주는 젠더 갈등에 관련된 각종 사건들을 연대기 형태로 압축 정리하고, 색상 라벨을 활용해 각각을 분류하며, 이에 대한 저자의 촌평을 소개한다. 다음으로, 저자가 비판했던 '팩트 물신주의' 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본서를 읽고 나서 비판할 만한 몇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가 갖는 가치를 다소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 1.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충돌
1990년대는 고루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과 새로운 시대를 이끌려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의식의 충돌' 시기였다. 이때 PC통신의 대중화를 바탕으로 하여 페미니즘이 비로소 대중에게 확산되었으며, 여성들이 이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에 남성들은 남성우월적 사고에 이끌려서 저항하거나, 호주제 폐지 및 군 가산점제 폐지와 같은 변화에 대해 거센 반발을 드러냈다.
- 2. '몸에 각인된 타성'을 둘러싼 투쟁
2000년대에는 월장 사건, 100인위원회, 호주제 폐지, 여성가족부 출범 등의 많은 젠더 관련 사건들이 이어졌다. 특히 전반기에는 운동권 내부의 성차별 성향이 주목 받았고, 계급해방의 대의를 위해서 피해자가 함구하라는 압력이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 극심한 경제불황이 이어지면서 페미니즘은 사치품처럼 인식되었고, 여성운동은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 3. 사회적 삶을 타락시킨 가부장제의 폭력
2010년대 초엽에 벌어진 룸살롱 고발 보도와 의대생 성폭행 사건은, 우리 가족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가족 이기주의의 극한을 보여준다. 가족 이기주의는 가족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분리하여, 남편들이 무책임해지게 하고 아내들이 무력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같은 한국형 가부장제의 폭력성은 제사 풍습과 육아 전쟁으로 인해 영속화되었고, 이것이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저해했다.
- 4. 인내의 임계점과 저항의 티핑포인트
우리나라의 침체되어 있던 여성 운동에서 전환적 변화는 메갈리아라는 뜻밖의 사이트의 개설을 통해 비로소 맞이하게 되었다. 2015년을 분수령으로 하여, 남성들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여성들의 극심한 저항에 직면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여성들이 제기하는 '을의 여성' 에 대해 '갑의 여성' 과 '을의 남성' 을 들어 반론했으나, 유독 '갑의 남성' 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 5. '공포' 피해자와 관리자의 충돌
2016년 전반기에 대한민국은 강남역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목격했으며, 여성들의 안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었다. 이는 여성들의 장기간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남성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전혀 맥락을 잡지 못하는 엇나간 반응으로 일관해 왔다. 이것은 아마도 신변의 위협과 죽음의 공포가 환기되었기 때문에 남성들이 그에 대해 보이는 방어적인 반응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6. '구조' 피해자와 수혜자의 충돌
2016년 하반기에, 넥슨이나 정의당, 고려대 등에서 보듯, 페미니즘의 발흥 앞에서 남성들은 그 메시지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사회적 구조에 무관심해지고 그 대신 처세술과 자기계발을 통해 자수성가를 해야 한다는 구조맹의 사회화가 작용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보수든 진보든 간에, 이해관계가 없는 한 누구나, 자신이 줄곧 익숙하게 접해 온 세계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7. 페미니즘과 진영 논리의 충돌
2017년 전반기에, 유시민 씨나 탁현민 씨에서 보듯, 진보측은 페미니스트들과 문재인 지지자들로 나뉘어서 극심하게 대립했다. 진영논리의 열정에 이끌려, 문재인 지지자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한 과거를 지닌 사람들에 대해서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옹호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진정 성 평등한 정부가 되는 것을 저해했고, 성적 무뢰한들이 진영논리에 의지해 보호받는 길을 열어주었다.
- 8. 페미니즘과 촛불 시위의 배신
2017년 하반기까지 진영논리적 갈등은 이어졌으며, 촛불시위의 민주적 성취와 페미니즘의 메시지는 대중으로부터 엄격히 분리되었다. 배우 유아인 씨의 논란을 포함하여 페미니스트들이 겪은 많은 피해는, 유독 여성에게만 가혹한 대한민국의 사회구조적 특징을 보여주었다. 때마침 국내에 소개된 개념인 '백래시' 는 이 현상에 대한 이름붙이기를 가능하게 했으나, 현실은 백래시 정도가 아니라 더 가혹했다.
- 9. '제1의 민주화 운동'과 '제2의 민주화 운동'의 갈등
2018년 연초에 불거졌던 미투 운동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민주화가 아닌 일상 속에서의 민주화를 이루려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공적 민주화의 핵심세력을 겨누었기 때문에, 미투 고발자들이 많은 피해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일상의 민주화가 어려운 이유는 여성들에게 항의와 투쟁보다는 순응과 타협을 우선적으로 가르쳐 온 우리들의 사회화 방식에 있다.
- 10.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파탄
기나긴 미투 운동은 곧 '미투 저격', '유투', '미 온리', '진짜 피해자에 대한 모욕' 같은 비난을 받으며 수많은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는 남성들이 여성이 처한 현실과 그 조건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하게 여성에게 비난을 쏟아내는 것에 가깝다. 남성들이 여성의 삶의 현실을 잘 모른다면, 이는 어째서 남성들이 말하는 '올바른 페미니즘' 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이유일 것이다.
- 11. 지그재그로 진보하는 역사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죄 지은 사람처럼 조심해야 했고, 미투 운동 역시 4월 들어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또한 홍대 누드모델 불법촬영 사건은 메갈/워마드의 극단성을 보여주지만, 이들에 대비된 결과로 주류 페미니즘 학계의 목소리는 수용되었다. 13년 전 호주제 폐지 때처럼, 역사의 진보를 막으려는 흐름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 역사는 진보할 것이고 모두들 그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2.2. 대한민국 젠더 분쟁사
본서에서는 1994년에서 저술 시점인 2018년 5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벌어진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 관련 사건사고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를 연대기 형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본서에서 모든 사건들을 전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으므로, 본서에서 다루지 않은 사건들을 확인하려면 다른 정보원들과 대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무위키에 한하여, 유사한 성격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색상을 달리하여 라벨로 다시 정리하였다. (이하의 범례는 다소 유연하게 적용하였다.)
(이하의 표는 본서에서 언급한 것만을 기록하였으므로, 본서에 언급이 없는 사건을 추가하지는 말고, 각주로 링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함이 좋을 듯하다.)
[ 1990년대 ]
[ 2000년대 ]
[ 2010년~2014년 ]
[ 2015년 ]
[ 2016년 ]
[ 2017년 ]
[ 2018년 1월~5월(현재) ]
위에서 보다시피 국내의 페미니즘 진영은 진보주의 시민운동의 한축이었음에도 '''사실상 그 운동의 시작부터 "진보마초" 라고 불리는 남성 진보주의-안티페미니즘 진영과 내부적인 대립을 해왔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는 운동권이, 2010년대 전반기에는 김어준을 비롯한 음모론적 진영과 의대, 검찰을 포함하는 인텔리 진영이, 2010년대 후반기에는 안티페미니즘 성향의 극렬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이 그 역할을 맡는 식으로 얼굴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저자 본인도 본서에서 언급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의 적은 보수주의, 수구꼴통(…) 진영만이 아니었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나 비판하는 '오빠' 역시, 전통적 성 역할이나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지지하는 우익 진영만이 아니라,[4] '''누구보다도 진보의 가치와 힘을 신뢰하는 남성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도 페미니즘에 대해서 적대적인 거부반응 혹은 진보주의자로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느끼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맨스플레인이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같은 반발을 사게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몰락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는 전환기에 남성들이 더 이상의 사회불안을 원치 않았기에 페미니즘의 전복적 메시지에 유달리 저항적이었다는 시대적 특수성도 고려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2.3. 팩트 물신주의
저자는 박가분 및 일베저장소 같은 몇몇 사례를 들어서 '''팩트 물신주의'''(fetishism of facts)를 제시한다. 이 표현은 당초 언론인 드와이트 맥도널드(D.MacDonald)가 미국의 보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했던 것으로, 미국 보수층들이 '''추상성과 거시성을 싫어하고 개개의 팩트들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리켰다. 이후 이 개념은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K.Merton), 폴 라자스펠드(P.F.Lazarsfeld)에 의해서 사실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of facts)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자크 엘륄(J.Ellul)은 더 이상 선전선동이 거짓에 기초하지 않으며, 오히려 팩트에 가장 크게 동력화된다고 하였다.
저자는 오늘날 소위 팩트폭격, 팩트리어트, 팩트폭력, 사이다 같은 표현들이 실상은 '''맥락 정보를 함께 소통하지 않으며, 강자들의 관점에 편향적으로 영향을 받는 언설'''이라고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일베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팩트물신적 경향은 철저하게 각자도생의 무한경쟁 논리에 입각해 있다. 즉, 사회구조적 유불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개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설명되는 것이 바로 팩트 물신주의라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 보자.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게시물을 올려서 그 서두에 "우리 팩트만 놓고 말하자" 라고 운을 뗐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그 게시물의 최종적 결론이 "따라서 우리는 사회를 개혁하고 기득권을 향해 항의해야 한다" 로 이어진 사례가 몇 건이나 있을까? 사람들은 늘 '팩트만 놓고' 말할 때 "그건 너희들이 선동과 날조에 놀아났기 때문이고, 움직이지 않는 팩트만 놓고 보면 남한테 항의할 것 없이 너희 탓" 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의중이 있다.[5] '''개인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사회 전체에 책임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맥락 정보가 소거된 팩트만을 가지고 말하려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팩트는 그것이 취합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과관계를 고려하지 못한다. 팩트 물신주의는 늘 "지금 여기" 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자 하고, 이와 같은 몰(沒)역사성은 그 '지금 여기' 에 관계가 없는 팩트들은 수용하지 않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팩트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거부되거나 간과되는 팩트들이 발생하게 된다.''' 팩트는 문자 그대로 사실을 가리켜야 하지만, 편집된 팩트는 사실의 전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자들은 그 편집된 팩트를 접하면서 그것이 사실의 전부인 것처럼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편집된 팩트에 역사적 맥락 정보를 함께 결합해서 보아야만 사실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도 똑같이 팩트를 들어서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이 방법에 대해서 상당히 비관적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팩트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여성에게 '''페미니즘은 단순히 지식만이 아닌 '삶 자체' 이기 때문에 그걸 팩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p.165)이다. 질박하게나마 예를 들자면, 거친 미국 교도소에서 하루하루 살아내는 아시아계 재소자에게 비누를 줍는 행동의 위험성이 과장되었다고 '팩트' 에 입각해서 말해주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아시아계 남성은 남자답지 못한 게이라고 인식되는 오랜 차별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우리나라의 밤거리 치안은 세계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이 공인된 '팩트' 이긴 하나, 여성스런 외모의 미성년의 남성에게 치마를 입혀 여장시킨 후 그 밤거리를 홀로 걷게 할 때에도 그 팩트가 과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당장 내 몸이 위협에 노출되면, 남성보다는 여성이 심야시간대에 특히 더 범죄의 타깃이 되기 쉽다는 문화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크 랑시에르(J.Ranciere)의 표현을 빌어서, 여성의 삶의 고통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감각의 문제'''라고 하였다.
3. 남은 의문점
- 역사적 접근에 대한 조명
'약자들의 기억', '고통의 역사', '항쟁의 계보' 같은 것들은 이미 페미니즘을 포함하여 각종 사회운동 분야들에서 익숙하게 공유되고 있는 문제의식이며, 상기했듯이 이미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 중에도 이런 목적으로 쓰여진 책들이 여럿 있다. 그렇다면, 다른 유사한 여성사(史) 도서들과 비교할 때 본서만이 갖는 독창성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단순히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할 게 아니라, 유사한 의미와 맥락의 사건들끼리 서로 묶어서 분류하고 검토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예컨대, 페미니즘이 진보마초들과 대립했던 사례들끼리만 묶어서 한 챕터를 구성하거나, 2005~2015년 사이의 페미니즘의 침묵기에 관련된 사례들끼리만 묶어서 한 챕터를 구성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단순한 '사실의 나열' 보다는 어떤 큰 흐름을 읽어내고 통찰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서는 "여성이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박탈당했다" 고 말하면서 사건들의 단순 나열에만 치중하는 데 그쳤다. 사건사고의 아카이빙 정도라면 심지어 페미위키에서도 대신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의 작업이다.
- 상수로서의 가부장제?
본서는 1990년대부터 2018년 5월까지의 거의 20년에 달하는 세월의 기록을 다루고 있다. 이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사건사고들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가부장제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간 크게는 여성가족부가 출범하고, 작게는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많은 사회 운동을 펼쳐 왔다. 여기에 가부장제는 어떻게 반응하고, 타협하고, 강화하거나, 양보했는가? 문제는, 본서에서는 가부장제를 마치 '단지 상수' 인 것처럼 취급했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우리 사회의 젠더 현황이 90년대 이래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행간의 메시지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여성억압 문제의 심각성과 만연함을 강조하는 데에는 효과적이겠으나, 이것은 학술적으로도 비(非)역사적인 접근이 되며, 사회 운동의 차원에서도 비관적인 접근이 된다. 지금껏 아무리 난리쳐 봤자 하나 쓸모도 없었다는 식의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반응을 다차원화하여 어떻게 변화해 가고 어떻게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지 분석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예컨대, 본서에서 짤막하게 다루었던 "메갈리아 남성 이용자" 사례들에 대해서 이들이 어떤 요인에 의해 그런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 더 자세히 소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의 초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인지 이런 가능성이 구체화되진 않았다.
- 문제의 포커스 : 왜 하필 남성인가?
본서에서는 TMT와 같은 이론적 조망까지 간접적으로 동원해 가면서 남성들의 동향을 문제시한다. 하지만 무엇을 문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예측이나 패턴으로부터 유의미하게 달라지는 독특성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 독특성에 대해서 "그렇다면 그것은 왜 그러한가?" 라는 식으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요청되는 것이다.[6] 본서에서 남성들에게 설명이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행히도 본서는 이 설명을 생략했거나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결과, 단순히 저자와 생각이 다른 남성들을 이해할 수 없기에 손쉽게 그들을 연구 객체화하고 병리화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저놈들 정말 연구대상이야" 같은 생각은 학문적으로도 건전한 질문이라고 보기 어렵고,[7] 대중적으로도 생각이 다른 타인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졸지에 '연구대상' 으로서 비정상 취급을 받은 남성들이 과연 편한 마음으로 본서를 읽을 수 있을까?
- 남성에게 변화의 가능성은 있는가?
위에서 남성에 대한 인식론적 배경을 문제시한다면, 이번에는 남성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본서에서 인용한 논자인 정희진 씨의 경우, 자신의 칼럼에서 한국의 남성성을 기껏 고생스럽게 세분화해 놓고도, 곧장 소위 '남성연대' 를 거론하면서 그 다양한 남성성들을 도로 전부 합쳐놓고 본질화, 병리화했다. 남성성의 다양성을 탐구하려는 것은 현재의 지배적 젠더 체계를 전복할 수 있는 자생적인 힘이 남성성의 내부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성성의 다양성을 들어서 '남성연대' 라는 남성 전반에 대한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남성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변화의 여지가 있다" 는 판단이 나오는 게 더 자연스럽다. 남성들은 가부장제를 떠받치는 악마화된 존재가 아니라, 분명 어딘가에서는 소위 '주변부로부터의 전복적 기획과 실천' 의 징조가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본서는 정희진 씨의 분석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들이 아무리 다양하건 간에, '남성연대' 라는 이름 하나만 있으면 남성들은 개전의 정(?)이 없는 답도 없는 존재들이 되고 만다. 이것은 인식론적인 막다른 길이다. 남녀 간의 소통이 벽에 대고 대화를 하는 것과 같다면,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작게는 젠더 분리, 크게는 남성 배척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역시 책의 초점에서 벗어나기 때문인지 관련언급이 부족한 상태이다.
- 팩트에 대한 회의감
물론 본서에서 제시한 팩트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온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본서는 마치 팩트라는 '무기고' 를 안티페미니즘 세력에게 양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165페이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여성들의 삶의 경험을 고스란히 팩트로 옮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팩트가 필요할 때에는 팩트로 이야기해야 한다. 상대방이 팩트에 의해 설득된다면, 그들에게 팩트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에는 마땅히 팩트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8] 한 예로, 많은 페미니스트들 및 친 페미니즘 진영 사람들은 나무위키를 비판하며 종종 이퀄리즘 문서가 게시되었던 사례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날조 시도와 이에 대한 동조 움직임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나무위키가 바로 그 팩트를 통해서 불과 100여 개의 토론 코멘트 즈음에 이미 기존의 서술이 전부 날조였음을 깨달았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후 토론 탭의 코멘트가 거진 25,000개가 넘어가도록 수없이 들어온 반론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팩트' 때문이었다.
- 사회적 지표로서의 인터넷 덧글?
본서 271-272페이지에서도 언급되듯이, 미투 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88.6%가 찬성론일 정도로 높았고, 피해자를 격려해주고 싶다는 반응도 73.1%에 달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본서 278페이지에서 언급된 펜스 룰에 대한 여성비하적 덧글을 보면 앞의 사회조사 결과와는 도저히 합치되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본서는 불행히도 설문조사 결과는 체면을 위한 겉치레이고, 인터넷 덧글은 솔직하지만 더러운 속마음인 것처럼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인터넷 덧글을 분석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연구방법론에 대해서, 저자는 커뮤니케이션학 전공자로서 사전에 정당화를 시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써제끼고', 사람들이 열심히 추천 버튼을 눌러주었다면, 사회조사 급으로 유의미한 사회적 지표가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한 "여성에 대한 가혹한 억압" 의 근거가 인터넷 덧글이라면, 어떻게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물론, 분명 이 분야에는 인터넷 덧글에 대한 방법론적 정당화의 논의가 존재할 것이고,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덧글이란 덧글일 뿐인 게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이상, 비전공자 독자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4. 의의
본서가 갖는 가장 큰 의의는 '''남녀 양측이 화해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바로 역사인식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집단 간 갈등과 화해를 연구하는 마이클 월(M.J.Wohl)이나 매튜 혼시(M.Hornsey) 등의 사회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두 집단이 화해를 하기 전에 먼저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 있다. '''첫째,''' 가해집단의 역사인식을 피해집단의 역사인식에 일치시키는 것이고, '''둘째,''' 가해집단이 자신의 역사적 과거로부터 단절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금전적인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한일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째서 일본 정계 고위층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 때마다 한국이 발칵 뒤집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집단이 가해행위를 했음을 이해함으로써 집합적 죄책감(collective guilt)을 느끼고, 그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끊어내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의 경우, 남성들은 이 두 가지를 확실히 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혐오는 나쁜 것", "싸우지 말아요" 정도만을 바라고 있는 상태이다.
피해자들의 역사적 기억을 정리하는 것은, 사실 피해집단의 '기억의 보존' 으로서의 아카이브 역할도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가해집단이 '''피해집단의 역사를 간접 체험'''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다고 해서 물론 백 대 맞다가 한 대 때린 사람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백 대 때렸던 사람이 "그게 다 때렸던 거였다고?" 라고 깨닫게 할 수는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백 대 맞은 역사가 있다고 해서 피해집단이 "그럼 우리도 두 대, 세 대, 아니 열 대 때려줄래, 괜찮지?"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단순히 보복의 연쇄에 불과하다.'''[9] 그 대신, 우리는 기계적인 '쌍방폭행' 의 논리에 입각한 채 그저 "어쨌든 혐오는 나쁜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이 눈새(?) 수준의 상황인식이라는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기계적 중립의 태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본서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또한, 본서는 '''남성이 쓴 페미니즘 관련 도서'''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이것은 오찬호 씨와의 공통점이기도 한데, 남성의 관점에서 쓰다 보니 남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한 비유를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가 서로 다를수록 좋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적어도 저쪽 세계에서 하는 말을 이쪽 세계의 언어로 '번역'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불필요한 오해와 반목은 감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사례 중 하나로, 5장에서 저자가 활용한 '군대 비유' 를 하단에 다소간 각색하여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5. 둘러보기
[1] 6.10 항쟁으로 성립된 대한민국 제6공화국 레짐.[2] 여성들이 겪는 고충을 페미니즘이 개념화하는 방식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본서에서는 구체적으로 특정하기보다는 일상 전반에서의 '삶의 고통' 을 논의하고 있다. 특히 가족이라는 사적인 제도적 영역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때, 본서는 여러 분파들 중에서도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 이라고 외치는 '''래디컬 페미니즘'''에 가장 가깝다. 참고삼아 언급하자면, 흔히 국내에서 '래디컬' 하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문화적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고충을 성애화(ex. 시선 강간, 강간 문화, 리벤지 포르노, 몰카, 성적 대상화)로 개념화하고, 리버럴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고충을 공적 억압(ex. 임금격차, 유리천장, 유리절벽, 경력단절)으로 개념화한다. 페미니즘 수입국 신세인 국내에서는 상당히 혼합된 경향이 있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은 사적 억압(ex. 가부장제, 남아선호, 수동적 성 역할, 모성신화)을 강조하므로 본서가 포커싱하는 '가족' 에 가장 가깝다.[3] 미리 명확히 하자면, 저자는 메갈리아를 위시한 페미니즘 진영에 대해 전적으로 호의적이고 옹호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물론 메갈리아에 호의적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본서의 메시지는 "내가 메갈리아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문제삼기에는, 남성들이 지금껏 해 온 짓들이 너무 많지 않나?" 라고 할 수 있으므로, 어쨌거나 일독할 만하다.[4] 위에서 보듯이, 이쪽 진영은 안티 페미니즘적 관점을 계속 유지해왔지만 정작 공론장에선 호주제 폐지 이후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일간베스트 등 극우성향 남초 커뮤니티들을 제외한다면 조직적으로 큰 두각을 드러낸 적이 드물다. 독특한 사례지만 적의 적은 동지라는 논리로(...) 안티 페미니즘, 안티 LGBT 성향인 태극기 부대가 친박전선의 확장을 위해 우파여성을 표방한 워마드 가입자들과 손을 잡았던 일화가 있다.[5] 다른 예로, "안 생겨요" 문제와 관련하여 대충 두 메시지를 만들어 보자. "여친이 없다고? 팩트는 이거다. 너도 여친이 생길 조건이 된다는 것", "여친이 없다고? 팩트는 이거다. 넌 여친이 생길 조건이 안 된다는 것". 양쪽 모두 약간 억지스럽게 '팩트' 라는 단어를 동원하기는 했지만,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자연스럽게 소통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뼈아프다", "묵직하게 때리네" 같은 호응(?)이 따라오는 경우도 흔하다. 팩트 물신주의의 기저에는 '''인간을 현실도피적인 동물로 가정'''하는 기본 전제(basic assumption)가 존재할 수도 있으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6] 이 논리를 잘 따랐던 사례가 바로 시사IN에서 보도했던 "20대 남자 현상" 이다.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유독 20대 남성 인구집단에서만 고연령층 이하로 극도로 낮게 나타나는 '유의미한 독특성' 이 발견되었기에, 이를 근거로 20대 남성을 특수하게 보고 연구 객체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7] 당장 인종차별과 같은 다른 주제에 있어서도, "인종차별이나 하는 꼴통들, 저놈들 대체 뭐가 모자라서 저러고 사나" 같은 연구동기보다는, "무엇이 인종주의자와 평등주의자를 나눌까? 양측은 서로를 어떻게 인식할까? 갈등의 양상은 얼마나 동적일까? 위험요인과 완화요인은 무엇일까? 문화는 양측에 얼마나 우호적일까?" 같은 질문들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유도하는 좋은 인식론적 수단이 바로 이론적 배경이다.[8] 그런 의미에서, 매해 정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성범죄 관련 통계 데이터들과 연감, 백서 자료들, 구조적 차별의 예시들을 통째로 외워두었다가 활용하는 것의 가치는 꽤나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넌 살아男았잖아!" 라고 슬로건을 외치는데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논파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게 여러모로 용이하다[9] 역사적 기억이 보복의 근거가 되지 않으려면 양측의 갈등을 조정(settle)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칙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나, 이는 쉽지 않다. 예컨대, 여성들이 지금껏 괴로운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보상하기 위해 제도적 우대정책을 활용해서 각종 시험이나 채용, 승진 등에서 혜택을 준다면, 그것은 과연 공정한가? 누군가는 동의하겠지만 누군가는 동의하기 힘들 수 있다. 이런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우악스럽게 뭔가를 하려고 들려다간 자칫 보복성 조치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한일관계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