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범죄자)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삼풍건설산업 창업주이며, 동시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주범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배경
1922년 10월 22일[4] , 경기도 양주군(現 양주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만주군 관련 친일 경력이 있다. 1941년 중국 베이징에 있던 천주교계 대학인 보인대학(補仁大學)에 입학하여 1943년까지 다녔다.[5] 1963년에 국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2.2. 백화점 건설 이전
만주 생활 시절 배운 중국어 실력으로 6.25 전쟁 때 통역장교로 복무했고,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요원으로 근무했다. 그 외에 뛰어난 사교술로 주한미군 등 외교사절단과 인맥을 쌓아 1946년 한중교역 사장, 1962년 국제과학문화연구소 공사관리소장을 지냈다. 42세가 되던 1963년 미군 군납 건설과 전기공사업을 주로 하는 동경산업을 설립했고, 1967년 상호를 삼풍건설산업으로 바꾸면서 건설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2.3. 백화점 건설 이후
군과 중정 근무 시절 쌓아온 인맥들을 활용해 당시로서는 굵직한 공사였던 서울 중구 을지로 삼풍상가, 여의도 순복음교회, 청계천 평화시장 공사를 따내고 70년대에는 부동산 투자에 눈을 돌려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6] 이후 강남 개발로 눈을 돌려 1974년 서울특별시 성동구[7] 서초동에 5만 7천 평의 부지를 사들여 주한미군 하사관 숙소 및 음식점 등 미군주택단지를 조성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1975년 해외건설업 면허를 따 중동에도 진출했으나 장남의 사망과 중동 붐 퇴조로 1983년 들어 해외건설업 면허를 반납하고 주택건설업에 집중했다. 1987년에는 서초동 주한미군 타운을 철거하고 그 부지에 삼풍백화점과 삼풍아파트를 함께 건설해서 떼돈을 벌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삼풍건설산업도 건설부문 및 백화점부문 2개로 개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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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당시의 광고(CF)에 쓰인 음악은 존 윌리엄스의 "올림픽 정신(The Olympic Spirit)" 으로 19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링크.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에 개장한 백화점으로, 당시 전국 2위 규모를 가진 단일 매장으로 기록될 정도로[8] 현재 롯데월드 건물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규모인 단일 쇼핑몰로서는 초대형 건축물이었으며 하얀색 바탕의 기존 백화점 건물 디자인을 탈피하여 외형 색상을 분홍색으로 채택하였고[9] 콘크리트와 유리의 조화로 디자인된 건물 외관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게다가 호화 쇼핑몰의 콘셉트으로 출발한 삼풍백화점은 당시로서는 각종 고급 수입품과 명품들을 주로 진열 및 판매함으로서 1980년대 신흥 부촌으로 명성을 날리던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 고객들을 끌어모으게 된다.
백화점과 함께 지어진 삼풍아파트 역시 1986년 분양 당시 최고 10대 1의 경쟁률을 보였고 당시로는 국내 최고 분양가를 기록하는 등 화제를 뿌렸으며 삼풍백화점 붕괴 전까지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압구정 한양아파트 다음으로 강남구/서초구 지역에서 인기 좋고 집값도 높은 아파트 단지중 하나였다. 숲을 연상시키는 나무가 가득한 단지 내 도로와 명문 강남 8학군 소재, 주변에 고급백화점인 삼풍백화점을 비롯해 법원/검찰청,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등 당시 서울의 주요 랜드마크들이 즐비한 데다, 32평, 45평, 46평, 56평, 57평, 58평 등 중대형 평수로만 구성된 대단지로 당시로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10] 삼풍아파트는 정상적으로 건축되어서, 2020년인 지금까지 건재하다. 비교를 한다면 지금의 도곡동 타워팰리스나 삼성동 아이파크의 폭발적인 인기와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보면 된다.
아파트와 백화점으로 돈을 쓸어 모으며 모 기업인 삼풍그룹도 그 규모 또한 대단하여 당당히 대기업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실제 삼풍그룹의 총 자산 규모는 당시 액수로 4,000억 원대[11] 로 추정될 정도로 대단했으며 만약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지 않고 계속 사업을 했었다면 현재의 롯데쇼핑이나 신세계와 견줄만한 쇼핑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을 것이란 의견까지 있을 정도이다.[12]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재벌 수장의 반열로 성장하게 된 이준은 더욱더 물질만능주의자로 변했다. 게다가 붕괴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협회 회의 등 대외활동에 잘 나서지 않아 업계 입장에선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고, 모기업 삼풍건설산업 역시 본업보다 유통업에 치중해 도급순위도 800위대까지 하락했다.
그러다가 1995년 6월 29일, 결국 백화점은 무너져버렸고, 이는 참사 발생 이틀 후 서초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더 자세한 것은 후술.
참고로 대검찰청, 그러니까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맞은 편에서 소환 조사를 받았다.
2.4. 백화점 붕괴 이후
사고 이후 7년 6개월을 복역한 뒤, 2003년 4월에 만기출소했다. 하지만 전부터 앓고 있던 당뇨병과 고혈압이 심해진 데다가 감옥생활 과정에서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신장병까지 얻는 바람에 출소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다. 건강 상태가 나빴는지 병원에서도 투석기를 달고 살았고, 나중에는 신장 기능까지 약해져 거의 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는 사고의 여파로 인해 재산은 모두 압류된 상태였고, 몰지각한 언행 때문인지 지인들도 모두 떠나버려서 소수의 가족들만이 남아 있었다. 결국 빈곤하고 병에 찌든 말년을 보내다 동년 10월, 병마 끝에 고통스럽게 숨졌다.
또한 한참 늦었기는 하지만 죽기 직전에는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자각은 했는지 자신은 죄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며 그리고 장례식은 본인의 유언대로 가족장으로만 치러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준이 버리고 가서 백화점 잔해 안에서 죽을 뻔 했던 '''큰며느리[13] 도 참석'''했다.
3. 비판
3.1. 적반하장스러운 반응
위의 영상은 1995년 7월 4일 자 뉴스데스크 보도 영상으로, 저 말을 하기 직전에 '(만약에) 공공장소에서 사고가 나고 (건물이) 무너진다 하면 그걸 가만 둬서야 되겠어요? (기자들에게) 내 한번 반문을 하고 싶어요'라고 한 뒤 저 말을 하였다. '여보쇼'는 다른데서 편집 해 따온 것. 언뜻 보면 '나는 그런 걸 알기 때문에 건물을 무너지게 지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뉘앙스의 반론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자신은 불법 증축을 일삼은 데다가 설사 자신의 말대로 사장이 부실 공사를 주도하고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최고 경영자로서 피해자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이나 도의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은 커녕 오히려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오리발 내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부실공사를 철저하게 막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잘못 조여진 볼트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체크하는 습관[14] 을 보이던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과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 자신이 아주 억울한 입장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막말인데, 이 인간은 자신이 가해자인 마당에 이런 미친 말을 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 따지자면 피해자들은 목숨을 잃고 그게 아니라도 다쳤으니 병원에 가서 수술 및 치료를 받아야 하므로 이 쪽도 재산을 잃는데 이 인간이야 자신이 잘못해서 잃는 것이니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지만, 피해자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는 거고, 그보단 내 재산이 먼저지''' 따위의 발언을 했으니 그야말로 망언이 아닐 수가 없다. 게다가 좀 거칠게 말하자면 재산은 다시 되찾을 수라도 있지 목숨은 잃으면 다시 되찾을 수 있는가? 하다못해 이 사람도 삼풍백화점 붕괴 전에 본인만 살려고 먼저 밖으로 토낀 정신나간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자기 재산을 잃는 게 싫으면 애초에 재산 잃을 짓(삼풍백화점 졸속 건립)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당장의 이익(삼풍백화점을 운영해서 얻는 사업소득) 때문에 미래의 어마어마한 손해(삼풍백화점 붕괴 및 그로 인한 삼풍그룹 도산)를 감수한 어리석은 선택을 했으니 더더욱 욕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발언이 '''사람도 죽고 다치지만 재산도 망가진다'''가 아닌 '''재산이 망가지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 죽고 다친다는 거야'''로 반대 발언이 되었다면, 과연 이 자가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하지만 위에 서술된 내용은 당시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기반하고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회장 등 경영진들이 붕괴 14분 전 붕괴 사실을 인지하고 일제히 건물 밖으로 긴급하게 대피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검찰 조사 및 청문회 내용에 따르면 이준 외 경영진들은 백화점이 무너질 때에도 백화점 건물 내에서 계속 보수 계획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붕괴의 시점에서도 이들은 건물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붕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 그러나 임원진들의 회의장은 무너진 A동이 아닌 B동에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와 언론 모두 붕괴 사실을 알고 이들만 먼저 미리 빠져나갔다고 잘못 이야기하며 일제히 삼풍백화점 경영진에 대한 비난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15] 이는 KBS아카이브 프로젝트 <시대유감, 삼풍>을 보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암튼 저런 말도 안 되는 대답에서 볼 수 있듯이 앵커들은 감정에 휘말려서는 안 되는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크게 분노까지 할 정도였다. 더구나 위의 MBC 취재 동영상을 보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촬영 중인 기자들에게 짜증이나 내며 삿대질을 하였고, 기자들의 취재 세례에 열이 뻗치기라도 했는지 "조사하자고 여기 데리고 오더니 사진 찍으려고..."하며 조사 담당 형사에게 역정까지 내는 당당함을 보였다.
더불어서, 기자들이 명색이 최고 책임자인데 할 말이 없느냐고 힐난하자 "그거는 알고 싶거든 사장한테 물어보셔!"(영상 1분 14초)라고 답하는 회피 행위까지 보였다.[16]
이러한 이준의 태도에 전 국민은 격노했고, 심지어 뉴스의 기자나 아나운서들마저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이례적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낸 보도를 했을 정도였다.[17]
결국 이준의 망언은 전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더불어서 기자들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이준의 행위까지 전세계까지 중계되면서 나라 망신 한번 제대로 당했다. 일본의 주요 언론에서는 "우리 일본 같으면 설사 회장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도의적인 책임을 스스로 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미국, 유럽,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도 저런 자는 죽을 때까지 감방에 처넣어도 모자란다고 비난했다. 특히, 바로 위의 영상에서 더스틴 브리지스라는 미국인은 미국에서라면 최고형을 받아 여러 해 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3.2. 인성
1995년 7월 1일 자 매일경제 5면에 따르면, 성격이 매우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서 변화하는 유통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부하 직원들이 항명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건물은 부실하게 지어놓고 풍수지리에 심취해서 자기 사무실 구조도 바꿀 정도였다.
그의 썩은 인성은 차남인 이한상도 물려받았는지 독선적인 경영으로[18] 부하직원들과 갈등을 빚었고, 동생인 이한창[19] 과도 경영 문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20]
4. 가족
- 부인: 조현옥(1926 ~ )
- 장남: 이한웅(1950 ~ 1977)
- 며느리: 추경영(1950 ~ )
- 차남: 이한상(1953 ~ )
- 삼남: 이한창(1957 ~ )
- 장녀: 이경희(1959 ~ )
그 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딱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백화점 A동 지하 1층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다 붕괴사고로 매몰 뒤 14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추경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추경영씨는 이준의 죽은 장남 이한웅의 아내, 즉 이준의 맏며느리였던 것이다.[21] #, #
추경영의 남편 이한웅은 1977년[22] 중동 건설현장에 파견 근무하다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23] 요절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추경영은 낳았던 아이[24] 때문에 이준의 집안에 남았고, 이준은 삼풍백화점에 조그마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한 개 내주었는데, 붕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25] 백화점이 무너질 때 이준을 비롯한 임원들은 백화점 B동에서 건물의 보수를 위한 긴급 회의를 하고 있었다.
추경영의 입장 때문에 국민들은 더더욱 분개했고 이준과 기업은 더더욱 욕을 먹었다. 당시 추경영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이준의 손자를 키우는 입장이었고, 때문에 도의적이나 하다 못해 법적으로도 업무상 사고로 죽은 남편 이한웅의 재산과 지위(주식)를 상속받아서 삼풍그룹 내에서 이사나 부사장급의 임원인 줄 알았으나, 이준은 며느리와 손자에게 백화점 내에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 달랑 내주고[26] 며느리와 손자를 진짜로 버렸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더더욱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추경영씨는 구조 당시 초기 생존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이준의 큰며느리라는 것이 알려지고서는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하고 이준 일가의 일원으로서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이준 일당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전했다. 게다가 추경영씨는 구조 후에 인터뷰를 할 때도 사고현장에서 자기와 함께 있다 사고를 함께 당한 여직원[27] 까지 걱정했고 여직원도 무사하다는 말을 듣자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도 피신했던 이준 일당과 달리 추경영은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붕괴 조짐을 전혀 모른 채 백화점에서 매몰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케이스임에도 막장 시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죄를 하고 다녔기에 실질적인 여론은 씁쓸한 동정 또는 안타깝게 바라보는 현실에 가까웠고, 아울러 당시 이준의 삼풍그룹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집단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이 사람은 후에 시아버지 이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자신을 버리고 도주한 시아버지 장례식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대인배라는 말이 있었으나, 실제로 이준, 이한상을 비롯한 임원들은 B동에서 건물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어서 붕괴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건물이 붕괴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최소한 시아버지 일당이 자신을 버리고 도주한 것은 아니다.[28] 물론 인간성이 막장인건 팩트지만.
연예인 신현준이 이준 회장의 친손자라는 헛소문이 있었다. 다만, 이준 회장의 여동생이나 친척일가가 신현준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실제로 과거 신현준과 관련된 언론 기사에서(특히 여성지) 신현준이 삼풍백화점 회장 일가와 친척 관계라는 기사는 있다.[29] 90년대 초/중반 신현준에 대한 기사가 실린 잡지에선 대놓고 '삼풍백화점 회장 아들'이라며 기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여느 잡지가 다 그렇듯이 저런 것들도 믿을 만한 것은 별로 못 된다.
반면 그가 붕괴 이전 소유했던 숭의학원에선 의외로 평판이 나쁘진 않았다. 삼풍백화점과는 달리 숭의학원(숭의여자대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의초등학교)은 제대로 경영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숭의학원만 운영하거나 무리한 욕심을 부려가며 삼풍백화점을 부실하게 건설하지만 않았더라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이준 본인 또한 지금처럼 존재 자체가 흑역사 취급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5. 관련 문서
[1] 본인은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참척한 장남 이한웅의 묘비에 "全義李公漢雄之墓(전의이공한웅지묘)"라고 써져 있다. 이를 통해 전의 이씨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아들이 대사성공파 31세손 한(漢)자 항렬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준 본인은 대사성공파 30세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2] 1995년 7월 1일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이 회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건설을 맡았고 한경직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준의 아들이자 백화점 사장이었던 이한상 대표도 역시 같은 오순절교회이다. 현재는 몽골로 건너 가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게다가 사진의 산소 앞 비석에 크리스천을 상징하는 십자가 표시가 있는 것만 봐도...[3] 다만, 해당 기사 이외에는 이준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내용이 교차 검증이 되지 않고, 아들인 이한상은 삼풍백화점 붕괴 전까지는 냉담자였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젊었을 때라면 몰라도 삼풍백화점 시점에서는 그냥 냉담자였을 가능성도 크다.[4] KBS 9시 뉴스 1995년 8월 4일 방송분에서 그가 소유했던 신당동 자택과 주민등록번호가 공개되었는데, 앞번호가 221022(1922년 10월 22일 출생)였다.[5] 보인대학은 국공내전 이후 대만에서 복교하여 현존하고 있으며 공산화 이후 대륙에 남은 학생 및 교직원과 장서 등의 재산은 중국정법대학으로 통합되었다.[6] 이런 이준의 이력은 전 SBS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의 조필연이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다.[7] 그러니까 강남구를 거쳐서 서초구가 생기기 전이다.[8] 단일매장 규모 1위는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이었다. 이 롯데 본점의 규모는 90년대 초반 규모 측정 당시 구관 바로 옆에 새 건물로 지어진 신관이 구관과 내부까지 완전히 이어 붙여진 상태에서 파악한 규모다. 따라서 별도의 증축이나 확장 없이 처음부터 단 하나의 건축물로 설계된 단일 매장 규모로서는 삼풍백화점이 사실상 1위인 셈이다.[9] 오픈 당시에는 위 사진처럼 하얀색으로 도색 했다가 94년초에 분홍색으로 재도색했다.[10] 강남, 서초 지역 아파트 중 테헤란로 이북의 아파트들은 이미 1981~1982년에 분양이 끝났다. 당시 강남 최고의 아파트로 인정받았던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압구정 한양아파트도 1980년대 후반에는 지은 지 10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그런 이유로 서초동에 '새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것은 대단한 인기 몰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지금은 상당한 부촌이며 인기 거주지인 대치동과 도곡동 일대(즉 테헤란로 이남)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압구정동, 서초동 일대보다 한수 아래로 취급받는 분위기였다.[11] 1995년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1,500원 전후였으니, 오늘날 액수로 환산하면 최소 1조 원 이상으로 이 정도 규모면 백화점 기업으로서는 당시 잘나갔다는 그랜드백화점을 능가 할 정도의 규모.[12] 당시 삼풍백화점 매출이 하루에 수억 원일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아서 백화점 붕괴사고 직후에 돌아온 억대 어음들도 모두 결제했을 정도이다. 결국 이듬해 1996년에 삼풍그룹이 도산했으나 4,000억 원대의 자산을 서울시가 몰수해 경매로 모두 처분하여 삼풍그룹 부채 탕감과 희생자, 부상자들 및 백화점 입점주들의 피해 보상금으로 썼다.[13] 추경영 씨. 사고 당시 45세(1950년생).[14] 그렇게 지어진 포스텍은 2017년 포항 지진에도 끄떡없었다.[15] 물론 그것과 별개로 이준이 삼풍백화점 붕괴와 관련하여 1차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16] 그래서 어떤 형사는 "지존파도 이러지는 않았다!"라고 경악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지존파도 자신의 행위는 부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 중에는 잘못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17] 21세기 들어서는 뉴스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라 앵커들이 종종 사견을 내보이기도 하지만, 20세기까지 방송계는 매우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를 자랑했으며, 특히 뉴스의 앵커들은 사견은 커녕 스타일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었던 매우 딱딱한 시기였다.[18] 붕괴 즈음에는 이준이 건강이 나빠져서 이한상이 사실상 경영을 맡았다[19] 이준의 3남[20] 특히 부실공사 문제로 엄청 싸웠는데, 실제로 이한창이 '''"아버지!! 차라리 땜질 식 보수공사라도 해요!!!"'''라고 고함을 쳤을 정도였다.[21] 이때도 인터뷰 당시 가족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렸다.[22] 19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출처는 매일경제신문.[23] 이 때 이한웅과 아내 추경영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24] 이준의 손자[25] 당시 그녀는 직원과 함께 가게에 있었고, 마침 손님에게 주문을 받은 참이었는지 밀크셰이크를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람이 막 위에서 내려오는 걸 느꼈고 곧이어 천장이 그들의 위를 덮치는걸 봤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통보 없이 당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26] 그래도 이 아이스크림 가게는 알짜로 유명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재산을 일부라도 제대로 상속해 준 것도 아니고 달랑 점포 하나 내어 주고 무관심하게 지낸 것은 진심으로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상 생색내기나 마찬가지였던 것.[27] 인터뷰에서 '우리 아가씨' 라고 칭하던 사람이다.[28] 상식적으로 아무리 가족관계라도 자신만 살자고 도주했다면 의절을 해도 이상할게 전혀 없다.[29] 1995년 9월 여성잡지 '퀸', 1996년 3월 월간 여성동아, 1996년 8월 여성잡지 'FEEL'에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