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구

 

'''최일구
崔一九 | Choi Il-gu'''
[image]
'''출생'''
1960년 11월 20일 (63세)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학력'''
대성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 / 학사)[1]
'''가족'''
형 1명, 누이동생 1명
'''경력'''
문화방송 기자 (1985~2013)
-사회1부 부장대우
-인터넷뉴스부장
-스포츠취재팀 팀장
-보도국 부국장
-뉴스데스크 앵커
더불어민주당 미디어행정특보위원
TBS FM 최일구의 허리케인 진행(2017~)
MBN 종합뉴스 주말 앵커 (2017~)
1. 소개
2. MBC 뉴스데스크 앵커 시절
4. MBC 총파업
6. 이후의 활동
8. 여담

[clearfix]

1. 소개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 前 MBC기자이자 現 MBN 앵커.
기자 생활 중에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건 시사매거진 2580에서 식인 상어 취재를 하면서부터이고, 이는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서도 말한 적이 있다. 피를 퍼트렸는데 바다는 연못이 아니라서 결국 상어CG로 대신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기자 커리어에 남을 대표 특종 기사 중 하나를 꼽자면,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발생하고 2개월 후, 당산철교부실 공사를 취재한 것이다.''' 최일구 기자가 직접 당산철교에 올라가서[2] 부스러지는 구조물을 만져보는 장면과 한국기계연구원의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는 장면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거는 어떤 기술자들이 한번 구멍을 뚫어 보고서 한번 지켜보면 어떨까 농담이나 할 수 있는 그런 일인데 이게 어떻게 사람을 가득 싣고 전철이 다니는 철교에 이런 짓을 하는지 이건 정말 미친 짓입니다."'''[3]라는 김용준 박사의 코멘트가 압권이다. 보통 뉴스 한 꼭지에 2분 정도 방송하는데, MBC 뉴스데스크에서 이 기사는 거의 '''6분''' 가까이 할당되었다.[4] 이로 인해서 당산철교는 결국 재공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최일구의 특종 보도가 하마터면 당산철교가 무너져 불귀객이 될 뻔했던 출퇴근객 수천 명[5]의 목숨을 살린 셈이다.
참고로 이렇게 최일구 기자가 부실 공사에 대해 유독 민감한 이유는, 그가 바로 '''와우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이다. 기자에게 있어 현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뼈로 느끼니 기사의 품질도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

2. MBC 뉴스데스크 앵커 시절



김상수

<colbgcolor=#05104f> '''최일구''' (2003~2005)

연보흠
왕종명

'''최일구''' (2010~2012)

최대현[6]
사회1부 부장대우 시절인 2003년 10월 11일, 최초로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 직을 맡게 된다.[7] 그러나 첫 멘트부터 발음이 샜다(…). 이후, 그는 2005년 3월 13일까지 주말 뉴스데스크의 앵커 직을 지켜왔다.[8] 앵커 직에 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그가 하는 멘트가 인터넷 등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데…''' 자세한 건 최일구 어록 참고.
해당 문서에도 나오지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찬반 양론이 팽팽했었지만, 이로 인해 그의 어록들이 인기를 타면서 영화 괴물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9]
이와는 별개로 최일구가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던 기간 도중에 평일 뉴스데스크의 간판 엄기영이 휴가를 간 사이, 하필이면 당시 세간을 놀래킨 살인범 유영철이 체포되면서 최일구가 평일 앵커를 잠시 맡게 되었다. 그 전부터 엄청 열심히 연습했는데, 카메라의 빨간불 나오는 것이 엎어져 있어 (이게 불이 들어와야 오디오가 나오는 줄 알았다고 한다.) 가만히 있다가 후배가 "선배 뭐 해!"라고 소리쳐서 그제서야 멘트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마저도 계속 버벅거려서 눈앞이 캄캄해졌었다고 밝혔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메인 MC를 맡아 또 다시 화제를 모았다. 후보들의 권투 자세와 함께 MBC 개표방송 흥행을 이끈 양대 요소.

이후, 가을 개편과 함께 2010년 11월 6일 8시로 1시간 앞 당겨진 주말 뉴스데스크에 컴백하였다. 심지어 주요 포탈의 메인 화면과 자사 TV광고를 통해 그의 컴백을 홍보하는 뉴스데스크 광고를 내보내기까지 했다. 광고는 외국 UCC 어느 직장인의 하루 패러디다.
그리고 그의 입담은 돌아온 주말 MBC 뉴스데스크에서도 여전했다.[10] 클로징 멘트에서는 문지애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 받기도. 깔깔깔깔 또 다른 걸로는 "오징어가 풍년이면?" / "시집가요." / "언제가요?" / "몰라요."라는 만담(?)을 나눴는데, 얼마 되지 않아 문지애 아나운서의 열애 사실이 밝혀졌고 최일구 앵커는 짝궁인데 비밀연애를 했다면서 분노했다(...) 나중에는 문지애 아나운서의 결혼 소식이 밝혀진 마당에 별 다른 멘트를 하지 않아서 서운하다는 기사가 뜰 정도였으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클로징 멘트에서 언급
그 외에도 <마이크를 빌려드립니다>라는 단독 코너(?)가 생겨서 직접 최일구 앵커가 찾아가서 특정 계층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3 수험생이라든가 시장 상인들. 그래도 최일구 앵커가 직접 낙지 취재를 하고, 뉴스 멘트를 톡톡 튀게 함으로써, 뉴스의 예능화가 이루어졌다.
[image]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인연 때문인지 섭외를 받아 라디오 스타가 메인 프로로 올라간 첫 날에 오프닝을 담당하면서 뿌잉뿌잉하는 민망한 애교를 부렸다.
참고로, 인터넷 뉴스부 부장 시절에는 1987년부터 2007년까지의 뉴스데스크를 6개월의 작업을 걸쳐 업데이트했다. 시기는 1987년 2월 3일부터라고. 이 때문에 덕혜옹주의 사망 소식과 이방자 여사의 사망 소식까지 지금 우리가 앉아서 볼 수 있는 것도 다 최일구의 공이다.

3. 최일구 어록



뉴스를 장난스럽게 진행하는 면에 대해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하고 있으나, 지금까지도 인터넷에서는 자주 화제가 되는 편이다.
여기에 상술하다시피 진행 파트너[11]를 멘붕할 정도의 진행은 덤!

4. MBC 총파업


[image]
왼쪽은 김정근 아나운서.
2012년 2월 MBC 파업이 시작되면서 15분 분량으로 줄어든 뉴스데스크를 홀로 진행하는 등 분투했으나,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냐는 말이 나왔다. 결국 그는 '''부국장직을 내려놓고'''[12] 파업에 합류하면서 MBC 이사진으로부터 3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MBC, KBS, YTN 공동 파업 선포식에서 2012년이 되었는데 87년 6월항쟁 이전으로 되돌아 간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황금어장에서 민주화운동이 거세질 때 보도가 다 잘려서 마음 속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발언한 바 있었는데, 시위대가 MBC 차량을 보고 돌을 던져서 창문을 깨는 등 달려드는 등의 경험과 연결되는 스탠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MBC 파업이 끝난 뒤에도 주말 뉴스데스크의 진행을 맡지 못하였다. 문지애, 허일후, 오상진도 자신들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다시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 상황에서 3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까지 받은 최일구 앵커에게 다시 진행을 맡기지는 않았다.
3개월 정직 및 교육은 다시 3개월 연장되었고, 6개월 정직이 다 끝날 때쯤 회사의 허가 없이 외부 강연을 다녔다는 이유로 인사위원회에 회부, 다시 3개월 정직이 추가되었다.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하고 2013년 2월 8일 사표를 제출, 당일 사표수리가 되어 정든 MBC와 결별하게 되었다.

5. SNL Korea


[image]
2013년 4월 13일 2AM편 인트로에 등장하며 크루 확정. 안영미와 함께 Weekend Update 진행을 맡는다.
[image]
[13]
'''"인생 뭐 있습니까? 전세 아니면 월세죠?"'''라는 유행어를 SNL에서 요즘 밀고 있다.
그리고, 지난 5월 18일 크루스페셜 방송분에서 드디어 콩트코너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의 역할은 파파라치. 근데 뭘 쫓아다니냐면... '''김민교박재범모텔에서 나오는 현장'''... (...)
클라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리기도...
그러나 23화를 마지막으로 SNL에서 하차했다. 사실 최일구의 기용을 두고 논란이 많았던 데다가, 일각에서는 CJ그룹 비자금 사건으로 CJ가 알아서 기는 차원에서 하차시켰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최일구 역시 앵커 시절에는 삼성과 SK 등 대기업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당시 이재현 회장과 CJ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안했고 대충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는 시늉만 했다. 끝장토론 재개도 기약이 없는 데다 SNL에서도 하차하면서 최일구의 커리어에도 먹구름이 끼는 듯.
2017년 11월 19일, 다시 SNL에 출연해 신동엽과 함께 Weekend Update를 진행했는데, 하차 이후로 SNL의 섭외에 응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MBC가 총파업을 하지 않았냐. 나야 MBC 나온 지 좀 됐지만, 짠하지 않냐. 나 혼자 잘났다고 ‘SNL’ 나와서 혼자 웃고 떠드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신동엽이 “그래서 그런지 훨씬 표정이 밝아졌다”고 하자 “'''MBC 파업이 끝나지 않았냐. 춤이라도 출 수 있다'''”며 행복한 모습으로 춤을 춰 눈길을 끌었다. ##

6. 이후의 활동


그러다가 2013년 8월 27일 오전에 갑자기 '''회생을 신청했다'''라는 기사가 떴다. 뉴스1의 보도에 따르면, 친형의 부동산 및 지인의 출판사 공장부지 매입 등에 '''연대보증'''을 섰다가 30억 원대의 부채를 떠안고 이를 갚지 못해 지난 4월 13일 의정부지방법원에 회생을 신청했고, 법원은 5월 20일 회생절차를 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출판시장이 장기 불황 상태에 놓이면서 지인이 사업을 실패해 채무가 가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의정부지방법원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수익을 올려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역시 그놈의 '''보증'''이 문제다. 결국 2015년에 회생하지 못하고 파산신청을 하고 말았다.
2013년 11월 XTM에서 방송되는 '국가가 부른다'의 진행을 맡았다.
이후 사기 혐의로 고소되는 등 악재가 겹치고 있다. 이번에도 '''보증 문제가 얽혀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16년 6월 4일 약 3년 만에 TV조선 B급 뉴스쇼 짠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복귀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뉴스가 아니라 거의 쇼 프로그램이라 봐도 상관없다. MBC 총파업에도 참여했던지라 놀라운 선택이라는 평가가 대다수. 하지만 보증 문제가 꽤 알려져 있는지라 '오죽하면 TV조선에 나가냐'는 의견이 많다. 한 강연에서 본인에 의하면, 'TV조선 뉴스 앵커로 나오라고 했으면 거절했겠지만, 쇼 프로그램이라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같은 해 쌍꺼풀 수술을 한 모양이다.#. 나이 때문으로 추정.
결국, 2016년 8월 22일 마지막 회로 B급 뉴스쇼 짠은 종영이 되고 말았다. 안습.
괴물에 이어 판도라에서도 다시 한 번 앵커로 출연했다.
요새는 강연을 많이 다니는 듯하다.
2017년 3월 문재인 캠프의 미디어특보단에 합류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전 직장인 MBC의 정상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합류하게 된 듯.
2017년 4월 4일부터 민주종편TV의 '''"최일구의 팩트폭격기"'''의 진행을 맡았다. 민주종편채널 오프닝 곡이 그가 부른 <로케트를 녹여라>이다(...).
2017년 8월 18일에 MBN 뉴스 8 주말 뉴스의 앵커를 오는 9월 2일부터 맡는다고 MBN이 밝혔다. # MBN 뉴스 8이 예능 8이 될지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2017년 가을 개편으로 tbs FM 지상렬의 브라보 브라보후속 프로그램인 최일구의 허리케인 라디오의 진행자로 발탁되었다.

7. MBN 종합뉴스


[image]

'''"사람냄새나는 뉴스 진행 해보도록 하겠습니다."'''[14]

2017년 9월 2일부터 MBN 뉴스 8[15]의 주말 앵커를 맡고 있다. 뉴스 오프닝 때 실수인지,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MBN 뉴스8을 "MBC, 아니 MBN 뉴스 8" 이라고 말했다.
추가로, 그 입담은 여전한 듯 하다. 자세한 건 위 '최일구 어록'의 4번 문서를 참고하면 되고, 아래는 대표적인 거.
2021년 2월 21일 MBN종합뉴스 클로징 때 핸드폰 진동소리가 여과없이 들리는게 방송에 보도 됐다. 옆에 정아영 앵커도 있어서 소유주를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최일구 앵커가 손을 책상 밑으로 넣어서 컨트롤 한 것을 보면 최앨구 앵커의 핸드폰일듯 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tvh&sid2=74e&oid=057&aid=0001551099 정아영 앵커의 순간 썩은 눈빛을 봐도(링크 영상 17초)... 베테랑 경력자가 이런 중대한 실수를 하였음에도 별 일 없이 지나쳐감.

8. 여담



작사·작곡이 가능한 싱어송라이터라서, 자작곡 싱글을 발매하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MT 장기자랑용으로 만든 ''''로케트를 녹여라'''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순전히 자기 돈으로 발매한 앨범이라고 하며, 그 돈은 다름 아닌 영화 괴물의 출연료였다고. 이 덕분에 그는 '소원 중 하나가 내가 작사·작곡한 노래를 실은 음반을 내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대단히 기뻐했다고. 그리고 이 노래는 본인이 진행하는 '최일구의 팩트폭격기'의 오프닝이 되었다.

이후, 빨간탱크록 음악 버전과 댄스 버전의 2가지 리메이크를 내놓기도 했다. 이 동영상은 락 버전 리메이크.
엠빅월드 어드벤처에서도 불렀다고 한다. (…)
2014년 이후에는 방송 활동이 뜸하고, 주로 초청강연에서 그의 얼굴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모교인 경희대 행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MBN 종합뉴스 주말 앵커의 자리를 맡고 있다.
퇴사 이후엔 같은 방송사 출신 중 정계에 입문한 이들의 지원 유세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수원시 정 선거구에 출마한 과거 MBC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이자 기자 출신인 새정치민주연합 박광온 후보의 선거유세에도 참여했다. 신인인 박 후보는 해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또한, 언터처블(드라마)에 북천24시 앵커로도 출연했다.
이름이 최일구인데, 한 일자에 아홉 구자이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는데 마땅한 이름을 고민하다가 최일구가 태어난 해에 있었던 4•19 혁명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방송활동이 뜸해서 잊혀질 듯 했으나 2020년 초부터 전 국민의 관심을 받은 사건으로 인해, 강일구와 함께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본인도 2020년 4월 13일 라디오에서 코로나19 이야기를 인정했다(...)

[1] 믿기 어렵지만, 가수 유열과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다.[2] 물론, 운행 중에는 할 수 없으므로 운행이 다 끝난 새벽에 진행했다.[3] 보도 원문 및 실제 장면 모두 저렇게 나왔다.[4] 비교적 오래 주어지는 카메라 출동 코너라는 것을 감안해도 1분은 더 주어졌다. 여담으로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당시 앵커는 정동영 前 의원.[5] 물론 이 멤버 및 시간대가 고정적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몇 배~몇십 배를 더 곱해 줘야 한다.[6] 정식 진행 기준이며, MBC 파업으로 인해 정연국, 황헌 기자 등이 진행을 맡은 바 있다.[7] 평일 진행은 기존처럼 엄기영 앵커가 맡았다.[8] 더군다나 주말 진행이어서 방송 횟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9] 단, 이 역할은 같은 前 뉴스데스크 앵커였던 백지연에게 먼저 제의가 갔다고 한다. 하지만 백지연이 거절했다고.[10] 복귀 후 첫 보도 내용이 안개 소식이었는데, 이를 '안개 전국'이라고 말하는...[11] 앵커 시절, 그의 역대 진행 파트너(괄호 안의 기간은 최일구가 앵커를 했던 기간)는 최윤영(2003년 10월 11일 ~ 2004년 10월 3일), 박혜진(2004년 10월 9일 ~ 2005년 3월 13일), 김주하(10일), 배현진(2010년 11월 6일 ~ 2011년 4월 3일), 문지애(2011년 4월 9일 ~ 2012년 1월 15일)이다.[12] 보직을 사퇴해야만 노동조합원 자격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이때 같은 직급인 김세용 부국장(現 원주MBC 사장)도 파업에 참가하여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13] 여담으로 MBC 뉴스데스크 앵커 때 노래의 심의 규정이 들쑥날쑥 한다는 보도에 '''혹시 제 이름이 일구(19)라서 뉴스데스크 19금 되는 거 아니겠죠?'''라는 드립을 날렸다(...) 바로 저 위의 2011년 어록 영상을 보면 나온다. 게다가 이름 한자 마저도 "一九"다(...)[14] 첫 진행에 밝힌 포부이다.[15]MBN 종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