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성(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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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오늘날
5. 목록
6. 하위 목록
7. 매체에서
8. 같이 보기



1. 개요


임진왜란정유재란일본군한반도 남부에 일본식으로 축조한 들을 말한다.

2. 역사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국시대 일본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운 조선성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북진한다. 그러나 각지에서 의병이 들끓게 되고 전란으로 백성들이 산성으로 숨어버리면서 현지 보급은 물 건너가 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상진격 마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막히면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른다. 거기에다가 조선의 풍토병까지 덮쳤고, 결국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면서 일본군은 수세로 전환하면서 퇴각과 수성전을 치루게 된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교통로와 마을에 위치한 조선의 읍성은 공략하기도 쉬우나 당연하게도 지키기도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침공군인 일본군이 조선군이나 의병처럼 산성에 짱박힐 수도 없는 노릇. 공격 측으로서는 교통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공세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조선군이나 의병이야 자기 땅이니까 산성에 박혀도 버티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지만 침략군인 일본군이 산성에 주둔하는건 난 여기에서 굶어죽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당장은 조명연합군의 공세를 버티되, 언제든지 공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반도 주요 거점에다가 자기네들 축성법으로 성을 축조하여 농성하는데, 이것이 왜성이다.

3. 특징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기 쉽게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있게 배치되었다. 또, 동래읍성 같은 경우는 기존의 조선성곽에 붙여서 왜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성벽 축조는 구루와(曲輪, くるわ), 고구치(虎口, こぐち), 석벽과 성루(石垣, いしがき), 노보리 이시가키(登り石垣, のぼりいしがき)를 통해 한국의 산성들과는 달리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조달한 자재를 썼지만 전국시대의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올렸다. 기장의 죽성리 왜성의 건축엔 일본의 축성기술사가 직접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왜성들은 적을 지연시키고 고립시키기 위한 특유의 구조 등으로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대군을 막았다. 규모가 있는 왜성은 혼마루나 천수각 등도 있었으나 목건물은 현재는 모두 부서지고 없다.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준 것 치고는 현재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선군이 얻어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기초해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고, 일본군의 전국시대 스타일 석축은 조선식에 비해 빠르게 올릴 수는 있지만 내구력 자체는 약해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빨리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가택건축의 안정성과 유지력에서 분화된 다른나라의 축성술과 달리, 오로지 성을 쌓기 위해서만 방벽으로 발달한 일본식 축성술의 특징으로, 왜란 당시까진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올리는 '''메쌓기'''(Dry stone/空積み,野面積み)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폭우가 내릴 시 따로 배수구를 개공할 필요없이 돌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며, 재해나 공세에 의해 무너져도 어차피 돌만으로 쌓은 벽이기에 흩어진 자재를 다시 쌓아올리면 되지만, 돌 틈새로 해충이나 잡식성 동물(야생동물) 등이 침범하기 쉽고,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음새를 침범하거나 기반을 무너뜨리는 등 유지보수가 꾸준히 요구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인스턴트 성벽일수도 있는 것.
그리고 왜성을 쌓은 위치도 침략군인 일본군에게 적합한 위치에 지었기 때문에 역으로 조선군이 방어용으로 재활용하려 해도 입지가 애매한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우도 방치하거나 아예 돌을 빼서 다른 데다 쓰면서 형체를 잃어버렸다. 다만 서생포왜성처럼 일부 적당한 성은 많이 개조하지도 않고 그대로 조선군 주둔용으로 재활용하기도 했다.

4. 오늘날


일본 학자들이 꽤 자주 연구목적으로 찾는다. 그 이유는 현재 일본에는 정작 원형을 보존한 일본식 성(천수각지)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오랜 전란으로 사라진 경우도 많고, 에도 막부 성립 이후 평화의 시대가 지속되다보니 군사 기지로서의 역할이 사라지고 다이묘들의 대저택으로 개조당해서 원형을 잃은 경우도 많고, 막부의 '일국일성령', 메이지 유신의 '폐성령'으로 허물어지거나 규모가 대폭 축소되는 등 자기 스스로 없애버린 성들도 꽤 되고,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공습으로 무너진 것들도 있었으며, 경제발전기에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등 상당수가 소실되고 그나마 남은 것들도 대부분 상기한 과정들을 거쳐서 변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작 본토인 일본에서는 제대로 연구할 일본식 성의 씨가 말라있는데 오히려 한반도의 왜성들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중요하게 쓰인 적이 별로 없으므로 전국시대 일본성의 건축 양식이 잘 남아 있어 일본 학자들에겐 귀한 연구 자료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불길은 낙동강 전선 안쪽인 부산이나 거제 등 영남 남해안을 피해가기도 했으므로 그 덕분에 여러 왜성들이 아직도 있다.
왜성이 대한민국의 '문화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기존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던 왜성 문화재들은 조선총독부 청사(구 왜성대) 철거 등 일본 잔재 청산에 열심이던 문민정부 시대에 지방기념물로 무더기로 격하시켰던 만큼[1] 왜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은 편. 가끔 복원 논의도 하지만, 국민 감정을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 때문에 전반적으로 왜성의 보존 상태는 대부분 방치 정도에 그치는 정도로 열악하다. 근데 사실 한국 성도 몇몇 유명한 성[2]을 빼면 방치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다만 복원을 한답시고 원형 다 훼손해먹고서 재창작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손 안대고 방치해두는 것이 원형 보존 측면에서는 더 낫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21세기 들어서는 문민정부 때처럼 전부 지워버리자는 분위기에서는 벗어나서 기본적인 정비는 해 두는 편이다.

5. 목록


대표적으로 '학성'으로 잘 알려진 '''울산왜성'''과 울주군의 '''서생포왜성''', 그 밖에 '''순천왜성'''과 '''구포왜성''', '''사천선진리성''' 등이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왜성들 중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3] 대표적인 곳이라면 단연 서생포왜성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자세한 위치는 문화재청 사이트나 지식백과를 참조바란다.

6. 하위 목록


  • 고성읍성(고성왜성):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 서외리, 수남리 일대
    • 고성왜성: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36번길 42
    • 고성왜성(현 고성읍성)이 축성된 시기는 정유재란(1597년) 때 왜장 깃카와 히로이에와 일본군 구쓰키 모토쓰나가 축성했는데 고성읍성 남문 방면(고성읍성 남쪽)에 설상으로 돌출된 미고지에 축성한 왜성으로 고성읍성의 남쪽 체성(体城)과 연접해 있다. 구조는 다곽식으로 혼마루(본환)-니노마루(2지환)-산노마루(3지환) 등이 확인되었고 외벽 경사도는 70도 이며, 고성읍 수남리 일대에 체성이 확인된다.#
정유재란 당시 주둔 병력은 7,000명이었고 주변에는 체성 일부가 남아있는 민가들과 주차장이 있다. 낮은 산 정상부근에 위치했던 관계로 500년이 지났지만 체성(외벽) 흔적이 잘 남아있다.
  • 호포왜성지(호포왜성): 양산시 동면 가산리
  • 자마산성(자마왜성):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 명동왜성: 창원시 진해구 명동
  • 지세포진성(지세포왜성):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 2가지 설이 있다. 당시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함락한 후에 성을 왜성으로 재건축했다. 원래는 조선시대의 성곽 이였으나 현재는 조선시대의 성곽과 왜성으로 보고 있는 성으로 알려져있다. 현재는 지세포왜성이라고 알려져있고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4]
  • 견내량왜성(멸실): 관리를 하지 않는 바람에 농경지 개설과 농촌살림을 위해 주인장의 사유로 2019년 2월 초순경에 포크레인으로 철거되었다. 견내량왜성은 원래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른 왜성들과 달리 왜성으로 보기 힘들어서 관리가 힘들었다고 한다.
  • 양산 증산리 왜성[5]: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 부산일본성(부산왜성, 증산왜성):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6]##
    • 좌천동과 범일동 산 위에 있던 성이였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때 일본군 침략의 근거지였다. 1593년부터 1598년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부산항으로부터 내륙에 들어오는 입구를 막을 수 있도록 했다. 성터만 남아 있는 꼭대기에 장대를 지었던 흔적이 있고, 출입구가 서쪽과 남쪽 두 곳에 있다. 그 구조나 형식에 있어 일본식 색채가 짙으며, 고니시 유키나가가 방어의 진지로 쌓았다는 설이 있기도 한다.
조선 선조 때에 왜장 모리 데루모토가 축성했다.

7. 매체에서


임진왜란을 구현한 문명 5/시나리오 사무라이의 한국 침략에서 일본군 특수 시설로 등장한다. 일본어로 'わじょう' (Wajo)이다. 100% 방어 보너스, 주변 적에 2 데미지 효과로, 일반 게임에서 위대한 장군을 소모해서 만드는 성채와 능력이 동일하다.

8. 같이 보기


[1] 이 때 사적 지정을 해지한 왜성들은 다음과 같다. 울산왜성(사적 제9호), 부산일본성(사적 제35호), 마산일본성(사적 제36호), 순천왜성(사적 제49호), 사천선진리성(사적 제50호), 김해 죽도왜성(사적 제51호), 기장 죽성리왜성(사적 제52호), 창원 진해 안골왜성(사적 제53호, 웅천 안골왜성), 서생포왜성(사적 제54호), 양산 증산리 왜성(사적 제63호, 물금 증산리 왜성).[2] 수원화성이나 공산성, 남한산성 등.[3]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 바위로 된 석축 구조만 잘 남았을 뿐 흔히 일본 성 하면 떠올리는 천수각(天守閣, 덴슈) 같은 목조 건축은 사라진 지 오래다.[4] 지세포왜성의 지세포(Jisepo)는 송진포왜성의 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5] 한자는 물금(勿禁)을 사용한다.[6] 일부는 좌천동이였는데 지번은 현재 범일동이다. 문화재청 사이트와 카카오맵에선 범일동이다. 네이버 지도와 구글 지도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