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환

 

윤석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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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KBO 리그 신인왕


1985,1988 KBO 리그 승률왕


1984,1988 KBO 리그 구원왕

OB 베어스 등번호 35번
결번

윤석환(1984~1990)

강병규(1991~199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7번
권영호(1982~1989)

윤석환(1991)

최일언(1992)
두산 베어스 등번호 70번
김평호(1999~2003)

윤석환(2004~2011)

김경원(2012)


[image]
두산 베어스 코치 시절.
[image]
선린인터넷고등학교 감독 시절
이름
윤석환(尹錫環 / Seok-hwan Yoon)
생년월일
1961년 7월 17일 (62세)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서울봉천초 - 선린중 - 선린상고 - 성균관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4년 1차 지명 (OB 베어스)
소속팀
OB 베어스 (1984~1990)
삼성 라이온즈 (1991)
지도자
OB 베어스 1군 투수코치 (1992~1998)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00~2001)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04~2011)
선린인터넷고등학교 감독 (2015~2017)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해설자 시절
5. 지도자 복귀
6. 평가
7. 연도별 성적
8. 관련 문서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했다. 前 SBS Sports 해설위원,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 전 감독.

2. 선수 시절


1984년 OB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여 그 해 57경기 146이닝 12승 8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으로 신인왕과 구원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윤석환을 KBO 리그마무리 투수로 보기도 하나, 대개 1985년부터 마무리로 전업한 삼성권영호를 첫 마무리 투수로 인정한다.
1984년에 57경기[2]에 등판, 146이닝이나 던질 정도로 워낙 혹사당했기에 이후로는 신인 때만큼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3]. 1986년 선발로 전향했으나 7승을 올리는 데 그쳐 이듬해인 1988년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13승(모두 구원승)[4], 14세이브을 올려 구원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2년간 부진해[5] 1990년 시즌 후 조범현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됐다. 1991년 결국 재기에 실패하고 은퇴했다.

3. 지도자 시절


1992년부터 1998년까지 OB 베어스의 투수코치를 맡아 팀의 평균자책점이 좋아지고 1995년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2000년대 중반까지 현대의 김시진, 삼성의 양일환과 함께 KBO 리그 3대 투수코치로 손꼽히기도 했다.
2000년에 SK 와이번스의 투수코치를 맡았으나, 2000년에는 8개팀 중 팀 평균자책점 최하위를 기록했고 2001년에는 팀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으나 타선 부진으로 팀이 하위권에 머물러 2001 시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4년 다시 두산의 투수코치로 복귀해 팀의 3차례 준우승에 기여했지만, 두산 팬들에게는 쓸 만한 신인 자원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했다고 까였다. 팀이 어수선했던 2011 시즌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4. 해설자 시절


2012년에는 SBS ESPN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여 해설가로서 좋은 평을 받았다. [6] 2013년 일간스포츠의 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14년에 다시 SBS Sports로 돌아와 1시즌 간 해설을 맡았다.

5. 지도자 복귀


2015년에 전임 감독의 비리 문제로 감독직이 공석이 된 모교 선린인터넷고교의 감독을 맡아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이영하김대현 원투펀치를 앞세워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17 시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는 2018 시즌 암흑기를 겪었다.
이후 2019년 9월 25일 윤석환의 야구TV라는 채널명으로 유튜브를 시작했다.

6. 평가


1990년대 OB 시절에는 양상문 감독과 동급이라 할 정도로 칭송받았던 투수코치였지만[7], 2000년도 두산 때의 평가가 이상군급으로 악평을 받는 이유는 투수들을 심하게 갈군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이건 당시 두산 김경문 감독과 일맥상통했는데, 감독이고 투수코치고 선수 감정 생각 안 하고 그냥 너 공 빠르니 피하지 말고 걍 던져.식으로 윽박을 지른다음 볼넷이 나오면 엄청나게 투수를 갈군다고 악평이 자자했다.
2007년도 부터 2009년도 까지는 쓸만한 중간계투진들을 만들었고 KILL 라인이라고 불리는 고창성, 이재우, 이용찬, 그리고 나머지 언급 불가한 선수, 그 이외에 선발로 올스타에 뽑힌 홍상삼[8], 조현근, 금민철, 정재훈 등 여러투수들도 발굴했다. 그래도 투수코치를 꽤나 오래했음에도 1군 현장과 2군 현장을 꼼꼼히 체크하면서 유망주 발굴에 힘썻다는 점 이건 김진욱 두산 전 감독 역시 윤석환과의 행동이 비슷했다.
"그런데" 2010년도부터 그런지 계투에서 올라온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가 맛탱이가 가지 않나 2년차 징크스인데 선발+계투에서도 개털린 홍상삼도 맛가지 않나 이재우도 망가지고 이용찬/고창성도 조금씩 털리지 않나 희한하게 작년보다 방어율이 폭등하더니[9][10] 윤석환 투코가 2군으로 내려가고 조계현 코치가 1군 올라와서 투수진이 뜬금없는 안정화를 이룬 이유도 이거였다. 조계현 코치는 슬슬 피하면서 변화구 위주 피칭을 하라고 주문한다면, 윤석환 코치는 그냥 공이 빠르니까 피할 필요없이 냅다 가운데 꽂아라 식의 주문을 너무 남발했기 때문.[11]
하지만 결국 조계현은 윤석환보다 더 못해서 재계약에 실패했고 KILL라인 역시 실패했다. 그래도 짧은 3년간 삼성/SK 팀에 비해서 가장 투수력이 비벼볼 만한 팀었다. 후임 정명원 코치도 첫 해 유능하다고 두갤에서 반응이 좋다가 이듬해 2013년 508 대첩 이 후로 다시 욕 바가지로 먹었다. 짧은 2년 동안 윤석환 처럼 얻은 수확과 잃은 수확이 비슷비슷해야할까나?

7.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4
OB
57
(1위)
146
12
8
25
(1위)
0.600
2.84
108
17
46
111
49
46
1.03
1985
41
110⅓
5
1
6
0.833
(1위)
3.34
114
13
35
44
48
41
1.31
1986
18
63⅓
2
4
0
0.333
3.13
66
3
31
13
28
22
1.52
1987
25
105
7
8
2
0.467
3.94
124
5
40
41
50
46
1.54
1988
40
(1위)
108
13
(5위)
3
14
(2위)
0.813
(1위)
2.08
(2위)
96
6
40
53
28
25
1.24
1989
24
54
2
3
1
0.400
4.67
60
8
29
12
28
28
1.65
1990
14
17
1
0
2
1.000
6.88
22
1
7
6
13
13
1.7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1
삼성
16
29
1
0
0
1.000
6.52
29
5
12
13
21
21
1.72
<color=#373a3c> KBO 통산
(8시즌)
235
632⅔
43
27
50
0.614
3.44
628
58
240
293
265
242
1.35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5년
1완투
0완봉
1987년
3완투
2완봉
<color=#373a3c> KBO 통산
4완투
2완봉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5
OB
1
1
1.000
1
1
0
0
2
1
0
0
1.000
2.000
1988
2
2
.000
0
0
0
0
0
0
0
0
.000
.000
<color=#373a3c> KBO 통산
(2시즌)
3
3
.333
1
1
0
0
2
1
0
0
.333
.667

8. 관련 문서



[1] 체육교육학과 (1980학번)[2] 1984년에 투수들 중 등판 경기 수 1위였다.[3] 1984년과 1985년에 선발로 2승을 거뒀다[4] 비록 모두 구원승이지만 이 기록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두산은 이 이후로 2013년 유희관이 나오기 전까지 근 25년 동안이나 한 시즌 10승을 기록한 토종 좌완 투수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두산이 왜 일본에서 돌아온 혜르노빌에게 11억 원이나 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혜천은 2001년에 선발로 9승이나 했었던 선수다.[5] 1989년에는 땜질 선발로 2승을 거두기도 했지만 3패 1세이브에 그쳤고 1990년에는 한 차례의 선발등판이 없었으며(14경기 모두 구원) 1승 2세이브[6] 실제 자신의 후임 투수코치인 정명원 코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엠팍에서는 차범근신문선을 섞어 놓은 목소리라는 듯.[7] 양상문 감독 역시 2007년을 기점으로 이상군급으로 능력이 나쁘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8] 소포모어 징크스가 와서 털린 뒤 계투로 전환됐다.그리고 홍상삼이 각성한것은 두산시절 김진욱(1960)감독,정명원코치의 공이 더크다고 볼수있다.[9] 그러나 이는 윤석환의 탓이라기엔 김경문의 혹사 때문으로 보여진다. 당시만 해도 '벌떼 야구'로 대표되는 계투를 혹사하는 경기 운영이 주류였는데, 김경문은 김성근과 더불어 이 부문 투탑이었다. 저 당시 혹사에 둔감하여 별 말은 없었으나 2010년대 들어 혹사 문제가 부각된 이후, KILL 라인의 운용을 보면 지금 기준 투수 혹사에 부합한다고 보여진다.[10] 설령 당시 윤석환이 아무 말 안 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묻는다 해도, 상하 권위주의가 매우 높은 KBO 리그에서 감독에게 직언 같은 거라도 했다간...[11] 어찌보면 유망주를 못키우고 어린 투수들이 털리는 이유 중 이게 제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