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선

 


''' 대한민국의 축구인 '''
[image]
''' 이름 '''
'''신문선'''
'''辛文善 | Shin Moon-sun'''
''' 출생 '''
1958년 3월 11일[1](66세) /
대한민국 경기도 안성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73cm
''' 직업 '''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 해설자
축구경영인
대학교수(명지대학교)
''' 소속 '''
''' 선수 '''
대우 축구단(1981~1982)
유공 코끼리(1983~1985)
''' 기타 '''
성남 FC(2013~2014 / 대표이사)
''' 종교 '''
천주교(세례명 : 요한 보스코)
1. 소개
2. 해설위원으로서의 면모
3. 행정가로서의 면모
4. 성남 FC 프런트으로서의 면모
6. 기타


1. 소개


대한민국축구인.
1958년 3월 11일, 경기도 안성시에서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연세대학교에 진학했고 국가대표로 뛰었다.[2] 1983년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여 프로선수를 했고, K리그 '''1호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은퇴 직후인 1988년에는 프로스펙스에 입사하여 틈틈히 MBC 축구 해설위원을 겸업했다.
당시에는 선수 출신 축구 해설위원이 드물었기 때문에 신문선은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후 상승세를 타면서 프로스펙스를 퇴사하고 전업 해설위원이 된다.

2. 해설위원으로서의 면모


해설할 때 특징으로 경기에 집중하여 경기 자체를 해설하기보다는 스포츠 과학 이론, 선수들의 특징, 개인사 등 여담 내지 잡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때까지의 축구 해설은 공을 잡고 패스를 하고 이런 경기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만담에 가까운 재치있는 해설로 서서히 인기를 얻더니, 1997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에서 스타 선수들 못지 않은 주목을 받게 된다.[3] 이때 함께 해설한 송재익 캐스터의 만담이 곁들여지면서 일명 '''신문선-송재익 콤비'''가 떴다. 특히 한일전 1차전-흔히 말하는 도쿄대첩에서 나온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는 지금도 이들 콤비를 대표하는 걸작 애드립이다.[4]
이후 월드컵 본선에서도 많은 어록을 만들어 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급기야 신문선은 1999년 옥션 광고에 등장하면서 충격을 선사했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5] 아는 사람은 다 기억하는 '''만 원에 천 원 더! 낙찰~'''이라는 대사가 유명하다. 또한 이 사람을 패러디한 '신문지'란 개그맨[6]이 등장했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특유의 어투와 "골이에요~ 골~" 등의 멘트는 다른 사람들이 자주 하는 성대모사이며 연예인들도 많이 따라해서 배우 전지현이 데뷔 시절 개인기로 신문선 성대모사를 했다.
이 당시 신문선-송재익 캐스터가 신드롬을 일으킨 상황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 등으로 해외축구에 대한 접근성이 대중화된 2000년대 이후와 달리 그 이전에는 해외축구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었고 소수의 매니아[7]를 제외하면 해외 선수나 팀은 철저히 남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축구의 인기가 국가대표 경기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K리그 경기보다 국가대표 경기에 더 비중이 실리지만, 당시 대중적으로 축구는 곧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경기밖에 없었다.
이렇게 단절된 상황은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우리 그 자체였고, 상대하는 해외팀은 무조건 적에 가까운 인식이었으며, 이에 부합한 것이 송재익-신문선 중계진이었다. 또한 신문선 해설위원의 재치있는 입담, 오랜 중계경력의 송재익 보조자의 순발력까지 합쳐져 우리 팀이 이겼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전투의 승리처럼 배가되었던 것. 여기에 해설의 편파성을 지적한 목소리도 있었지만, 세간의 비판과는 달리 해설의 객관성 측면은, 2002년 솔트레이크에서 오노의 반칙에 눈감던 미국 해설자들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들이 제일 크게 할약했던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1, 2차 포함 패전은 단 한 번밖에 없었을 만큼 승승장구하던 국가대표팀의 활약까지 겹쳐, 신-송 중계진 또한 신드롬이라 할 만큼 화제가 되었고, 축구 게임 FIFA 시리즈의 해설까지 녹음할 만큼 유명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도 비판이 있었는데 경기에 집중하지 않고 경기 상황과 관계없는 잡담이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 송재익 캐스터의 애드립까지 심해져서 전문성보다는 개그 만담 콤비 같은 느낌이 심해졌다. 그 때문에 어느정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다.
그 후 4년 후 국내에서 펼쳐질 월드컵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 2001년 송재익과 함께 SBS로 이적하고, MBC에서 축구영웅 차범근 전 감독을 영입해 맞불을 놓으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입담은 초보자인 차범근 해설위원이 "네~ 좋아요!"를 남발하던 것에 비해 천양지차로 나았지만, 축구팬들은 이것마저도 간결한 해설로 받아들이고 차 감독의 분석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던 것...특히,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회를 앞두고 프랑스와 가진 평가전에서는 지네딘 지단의 부상을 오판한 것으로[8] 심각한 구설수에 오르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이전부터 신문선의 전문성에 대한 비판이 많았는데 지단 부상에 대한 오판은 사실상 축구 해설위원으로서의 전문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수준의 심각한 것이었다.
이후 2006 FIFA 월드컵 독일 조별예선 스위스전에서 발생한 프라이 선수의 골에 관한 오프사이드 논란에서 당시 신문선 해설 위원의 오프사이드에 대한 해석과 차범근-차두리 부자 중계진의 해석은 달랐다.[9] 이때 신문선은 프라이의 골에 대한 오프사이드 논란에 대해 "저건 오프사이드가 아니므로 정당한 판정이다."라고 해설했다가 당시 여론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자진사퇴, SBS 축구 해설위원에서 물러났다고 하는데 말이 자진사퇴지 SBS 측의 일반적인 통보였다고 한다. 해설에 대한 반국민적 정서가 강했다는 게 방송사 측 의견이었다고 한다. 당시 시청률 경쟁에 급급했던 방송사의 만행이었던 셈. 오프사이드가 맞다고 해설한 차범근조차 위 상황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을 정도. 기사링크 관련기사 신문선 중도하차 건뿐만 아니라 시청률 경쟁에만 급급해 축구중계의 질보단 애국심 위주의 자극적인 방송을 하게 하는 방송사들의 상업주의적인 행태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했다. 신문선도 어느 정도 비뚤어진 애국심의 피해자인 셈. 후에 신문선을 매국노 취급하던 당시 국민들의 반응을 비판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물론 그때도 축구관련 사이트나 블로그를 보면 신문선을 중도하차시킨 것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신문선 관련 기사만 나오면 댓글에 항상 이 얘기가 나올 정도.... 근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의 일 덕에 신문선은 성남 시절의 무능한 행정에도 불구하고 적폐 세력에 늘 피해를 보는 참 축구인이라고 지지자들에게 꽤 쉴드를 많이 받는 편이니 새옹지마라고 봐야 될지도.
한동안 명지대학교 기록정보대학원 교수직에 전념하다가[10] 2011년 아시안컵 기간 중에 MBC SPORTS+ 축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MBC 축구중계에 복귀하여 10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결국 지상파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10/11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AC 밀란vs토트넘전에서는 피터 크라우치를 '''크라우처'''라고 발음하지를 않나[11] 경기 흐름은 물론 토트넘, 밀란에 대한 최신 정보 부족도 드러내며 원성을 들었다. 물론 '''가투소 선수 얼마나 화가 났으면 지구를 때리네요''' 드립은 좀 터졌다는 듯 밀란의 골키퍼인 아비아티가 크라우치와 충돌해 부상을 입고 목에 깁스까지 하고 교체되었는데 부상 이유를 스트레스를 못 견뎌서 나갔다고 목에 깁스하는 와중에도 주장해서 시청자를 벙찌게 만들었다.
해설 중에 선수들의 플레이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재밌게 얘기를 해주지만, 이런 면모 때문에 오히려 싫어한다는 사람도 많다.#
2012년 6월 9일, JTBC가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 중계권을 따내면서 JTBC에서 신문선에게 해설을 맡겼다. 그리고 대한민국 對 카타르 경기 시작 전에 JTBC의 월드컵 예선 중계권 획득에 대해 '축구 컨텐츠의 다양화 측면'이라고 말하며 JTBC를 옹호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2015년 11월에는 TV조선에서 중계한 (중국 우한에서 열린) 올림픽 국가대표팀 4개국 친선경기 대회의 해설을 맡았다.
2016년 3월에는 뜬금없이 바둑 해설자로 나섰다. 알파고이세돌의 대결로 큰 관심을 모았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MBN에서 해설했다. 바둑을 아마 5단쯤 둔다고 한다.[12]
2017년 E-1 챔피언십 경기 중계를 맡으며 일본은 3군 드립을 쳤다가 빈축을 샀다. 그런데 본인은 '''"기존의 선수 이름값에 연연하지 말고, 국내파 해외파 구분 없이 실력 있는 이들을 대표팀에 불러 건강한 경쟁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명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는 선수가 곧 대표"'''라고 했던 바 있다.

3. 행정가로서의 면모


1990년대에는 축구 행정가로서도 활동하여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한 적이 있으며, 현재도 축구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독선적인 활동으로 융화되지 못했던 점을 지적받는다.
특히 연세대 출신 인물로 고려대 출신 인물을 지나치게 비판해온 것이나, 잦은 설화 등이 문제인 듯. 그래도 김우중이 축구협회장일 때는 어느 정도 활동했으나 정몽준에게 잠깐 기용되다 내쳐진 이후에는 반 정몽준 파로서 활동했다. 현재도 이런 점에서 축구협회의 정치역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신문선의 대표적인 위대한 업적(?) 으로는 1992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국가대표팀이 아닌 대학선발팀을 내보냈다가 본선 조별예선에도 못 가보고 예선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김우중은 축구협회장을 관두면서 '''"내가 앞으로 허승표, 신문선 패거리와 축구 이야기를 하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13]
그 이후 지속적으로 반 정몽준파인 허승표[14]의 축구회장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축구협회와는 사이가 나쁘다.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일본은 백년지대계를 수립해서 차근차근 진행해가는데 축구협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 라고 비난하자 당시 조중연 축구협회 전무가 "신문선 위원은 옛날에 축구협회에 계셨는데 그때는 왜 그런 장기 계획을 못 만드셨습니까?" 라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15]

4. 성남 FC 프런트으로서의 면모


2013년 12월 26일 성남 시민 프로축구단 초대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계약기간은 1년이고, 성과에 따라 연장하기로 했다.
스포츠서울 - 2014/01/14 '데스크가 만난 사람' 신문선 성남시민구단 초대 대표이사 "박종환 감독과 힘겨루기 없다. 시스템으로 분업화할 것"
취임 이후 다양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시민구단의 구태를 밟아가지 않을 것이며 시민구단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언론사에 인터뷰를 하더니 -시민 구단의 새 모델 되겠다”… 신문선 성남 대표, 취임 일성 - <프로축구> 신문선 교수 "성적보단 구단가치 높이는 데 주력" - 성남FC 신문선 대표 “시민구단 흑역사를 지우자”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허상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창단식에서 야심차게 네이버를 스폰서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16] 막상 네이버는 무슨...제대로 된 스폰서 계약조차도 하나도 따내지 못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2월 24일 기준으로 유니폼, 스폰서는 물론이요 주경기장, 표값까지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결국 성남은 롤링 주빌리라는 공익사업을 메인 스폰서(?)로 내세우는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프로구단이 되었다.[17][18][19]
그뿐이 아니다. 일화가 성남에 손을 떼고도 탄천종합운동장에 남아있는 일화의 잔재(통일스포츠라든가)조차도 완벽하게 벗겨내지 못했다. 물론 모든 직원이 스폰서를 위해서 사력을 다해 발벗고 뛰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런 사소한 것들은 준비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으나, 한두 시간만 공을 들인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신문선의 구단 지휘능력이 모자란다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또한 위에 언급했던 대로 시민과 함께 하는 구단이 되겠다고 천명은 했으나 개막전 2주일 전까지 개막전 일정을 홍보하는 현수막 하나도 성남에서 제대로 보기 힘드며, 팬과의 소통을 천명하던 취임 초기와는 달리 팬과의 제대로 된 미팅조차 가지지 않은 채 조기축구회 회원들과만 만나는 모습을 보여줘 선거운동에 이용되는 것 아니냐는 질타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돈새는 성남 FC, 용품 후원사로 빚어진 초라한 현실 게다가 루머로만 돌던 스폰서 뒷통수마저 사실로 밝혀지며 맹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도 박종환 감독이 폭력을 행사하여 논란이 났을 때 강하게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끝내 자진사퇴를 이끌어냈다. 최소한 '''상식적인''' 행동을 하였던 것은 잘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제대로 진행되는 일은 없고, 이상윤 감독 대행을 '''성적부진'''을 이유로 경질, 그 다음에 이영진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임명했다가 '''다시 1경기만'''에 김학범을 신임감독으로 올렸다. '''3경기 동안에 감독이 3명이 들어선 꼴이고, 그중에서 이영진은 1경기 목적'''이었다. 당연히 감독대행에 임명되었던 이영진은 자신이 1경기 만에 잘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등의 인터뷰를 한 뒤였다. 이상윤 전 대행은 FA컵 준결승 포부를 밝힌 뒤에 아예 쫓겨났고, 이영진 전 대행은 후임 감독 김학범의 수석코치로 남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2014년 12월 29일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성남 FC 대표이사직을 사임하였다.

5.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 출마


한동안 조용하더니 권오갑 총재 임기가 만료될 시점 새로 총재후보에 지원했다. 하지만 여기서조차 대한축구협회에 지원금을 요구하겠다는 것과 K리그 '''샐러리캡 도입'''[20]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공약을 내세워서 모든 K리그의 팬들을 벙찌게 만들었다. 결국 권오갑 총재가 다시 총재 재선에 나서고 말았다. 어차피 신문선이 낙선하면 다시 권오갑 체제를 이어가기는 하지만... 여담으로 권오갑 총재는 신문선의 공약을 듣고 "나 총재 계속해야할 팔자인가보다."며 한숨을 쉬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문선은 낙선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신문선의 출마는 기존의 사실상 범 현대가의 내정된 추대형식이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관행을 실질적인 선거형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샐러리캡과 분배금 문제는 시민구단의 육성과 그로 인한 대기업 위주에서 벗어난 축구저변의 확대라는 축구계의 포기할 수 없는 과제를 상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프로리그의 이념적 방향성에 관한 본질적인 가치논쟁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기업의 홍보수단으로서의 프로리그와 자생적 축구리그의 대립 및 과연연봉상한제(샐러리캡) 없는 우수선수편중과 고액외국인 선수도입에 따른 질적 향상을 둘러싼 대립 등의 여타 종목들의 프로리그에서도 오래된 가치논쟁과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이는 명확한 정답이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예컨대 프로야구의 성공사례와 프로농구의 실패 사례가 겹치는 불확실한 정책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한 정파를 손들어주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범 현대가가 한국축구계에 남긴 긍정적인 유산에도 불구하고, 카운터 파티로서 신문선의 출마와 낙선은 보기에 따라 충분히 상반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안인 것이며 앞선 본문에서처럼 일방적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비록 신문선의 행정가로서 수완이 그의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여 비판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가 제시한 방향성 및 카운터 파티의 의의 자체는 폄하될 수만은 없다는 얘기이다. 문제라면 그 축구 야당의 역할을 성과를 거둔 바가 없어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던 신문선이 맡는 바람에 설득력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사실 김우중이 축협 회장이던 시절에 신문선은 축구운영위원으로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 가서 골프만 쳤다고 한다. 그리고 김우중은 "내가 다시 허승표, 신문선 패거리들과 상종하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래서 김우중은 그 뒤로 축협 회장직에서 떠났고, 축구 야당 포지션이 되어서 허승표 패밀리를 까고 있었던 것이다.

6. 기타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이라고 조롱받던 시절, 신문지상에서 조광래와 함께 히딩크를 혹독하게 비판[21]했다.
그런데 2001년 히딩크에 관한 책을 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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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 이 시기에 오대영 별명 등으로 히딩크의 이미지가 악화하면서 책은 자연스럽게 묻히고 사실상 폐기할 뻔하다가 2002년 월드컵 신화 이후 재발매해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월드컵 직후 쏟아져 나오던 다른 히딩크 관련 서적들과는 달리 월드컵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었는데 시기가 안 좋아서 묻혔다가 후에 다시 빛을 본 케이스다. 위와 같은 신문선의 행보와 모순적인 상황이기에 편견을 가질 수가 있는데 이 책의 실질적인 저자는 이인석 씨고 책 자체는 잘 쓴 책이다.
이후 월드컵 1주년 대담이랍시고 한 인터뷰에선 '폴란드와 첫 경기 전 라커룸에 들어가니 천하의 히딩크가 벌벌 떨더라.' 라는 소리도 했다.# 그런데, 경기 전의 선수단 라커룸은 특히 다른 경기도 아닌 FIFA 월드컵에서 다른 시간도 아닌 경기 직전에 라커룸은 1급 보안대상이라 선수단이나 코칭스태프 아니면 관계자도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다. 관계자도 아닌 데다 하물며 일개 해설위원이 들어갔다는 얘기인데 아무리봐도 거짓말이 뻔하다.
이렇듯, 신문선은 언제나 남에게 신랄하게 까는 비판을 일삼지만 정작 자신은 과장을 많이 하고 말만 요란하고 자기미화로 포장을 일삼는 주제에 성남 FC의 사장으로 일했을 때의 여러 가지 병크를 생각하는 축구팬들에게는 "신문선은 말만 요란하지. 능력도 없다."라면서 실속이 전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특히, 허승표와 가까운 관련 인물이라서 대한민국 축구 암흑기 시절의 실세였던 허승표를 싫어하는 안티들은 학을 떼면서 싫어할 정도다.
차범근에 대해서도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2002년 당시 성공적인 해외 커리어를 보낸 선수조차 극히 드문 한국 축구 선수들 중에서도 현대적인 윙포워드 개념으로 분데스리가 레전드였던 차범근에 대해 성공한 선수는 아니라는 말로 깎아내리며, 히딩크가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보이자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차범근과 달리 경질해야한다는 의견을 계속 내비쳤다. 하지만 결과는 결국 차범근이 옳았고, 2002 월드컵 이후 신문선은 그 어떤 사과나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슈틸리케 감독 경질 이후, 한국 축구를 위해서는 히딩크를 재선임해야한다는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결정체를 보여줬다.
링크 영상의 6:05초부터 봤을 때 2002월드컵 이태리와의 경기에서 안정환의 페널티킥 실축을 보고 전반이 끝난 후 휴식시간에 "패버려야했는데"라는 말을 시작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반면 차범근은 당시 경기를 중계하면서 페널티킥 실축이 아쉽다면서도, 선수들이 팔꿈치 공격에 눌려서 자신감을 잃었다고 염려했다.
[1] 다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는 1957년 생인데, 동사무소에 화재가 나 호적을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1958년 생으로 오적됐다고 한다.[2] OBS 나는 전설이다에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본인과 대학 동기동창인 최동원, 박철순이 이 프로그램 첫 회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최동원의 건강사정 때문에 좌절됐다.[3] 당시 중계권은 MBC가 독점으로 가지고 있어서 더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예선 3경기를 남기고서야 타 방송사의 중계도 시작되었지만, 이미 송재익-신문선 콤비로 주도권이 넘어간 뒤었다.[4] 정작 신문선과 송재익의 관계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창 메인 중계진으로 활약하던 당시에도 둘 사이의 불화설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정설에 가까웠고, 시간이 지난 후 모 대학 강의에 참여한 신문선에게 한 학생이 불화설의 진위 여부를 묻자 좋은 관계는 아니라고 시인했던 적도 있다고. 그럼에도 네덜란드전 중계 당시에는 안타깝고 정신없어서 그런지, 송재익이 신문선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지금 0:4야? 0:5야?"라고 물어 봤다고...[5] 유명 대전액션게임을 이상하게 섞었다.[6] 본명은 차승환으로 MBC 출신 개그맨으로 MBC 표준FM '즐거운 오후 2시 이택림 김나운입니다'에서 개그맨 김학도와 콤비를 이루어 송재익-신문선 콤비를 패러디한 김학도-신문지 콤비로 만담개그를 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이후로는 뮤지컬 배우를 하다가 현재는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013년 3월 배우 김예분과 결혼.[7] 스타 TV 등을 통해 프리메라 리가 경기를 중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중계가 우리말로 진행되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선수/팀/경기 등에 대해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할 환경이 제공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분명 벽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그 선수나 팀에 대해 더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여 더 충실한 팬이 될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8] 당시 지단은 김남일의 태클로 허벅지 부상을 입었고, 교체 사인을 벤치에 전달한 후 나중에 벤치로 돌아가 얼음찜질을 하며 진통제를 먹었다. 이때 지단이 교체 사인으로 손을 들어 빙빙 돌리는 모션을 취했는데, 차범근은 이 상황을 그대로 파악하고 해설하였다. 그러나 신문선은 지단이 손을 빙빙 돌리는 모션을 보고 심판 머리가 어떻게 된거 아니냐고 심판을 욕하는거라고 설명했다...[9] 당시 신문선과 차범근-차두리 부자 중계진의 오프사이드에 대한 해석이 달랐던 것은 2006 독일 월드컵 본선부터 적용된 당시 오프사이드 규정인 "공격수가 상대팀 최종 수비수보다 앞서 있을 때 해당 공격수가 공격에 관여할 경우 오프사이드에 해당한다."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2006년 이후 해당 규정은 현재까지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10] "교양축구"라는 교양 수업도 진행했는데, 수많은 축구 매니아 덕분에 수강신청 하기가 매우 어려운 교양 수업 중 하나였다. 수업도 이론 위주이지만 특유의 입담과, 지루해질 때쯤 한 번씩 욕설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등 학생들에게 평가는 좋았다. 매학기마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수강생들과 술자리를 하며 학생들에게 덕담을 하는 등 인간미도 보여, 수업을 듣고 그의 팬이 되었다는 학생이 많았다.[11] 덕분에 샤다라빠에 의해 킹 오브 챔스, 크라우처에게 먹은 골의 원한을 풀지 않고 배길쏘냐 등으로 패러디되며 까였다.[12] 아마 5단이면 상당한 고수 축에 속한다. 아마추어 바둑 단수는 7단이 끝이다.[13] 다만, 이때의 책임은 신문선보다 허승표가 더 크다는 지적이 많다.[14] 인텍웨이브 회장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 출범 전에 영국 리그에 최초 진출한 한국 선수였다. 당시 아스날 B팀에서 뛰었고, 1973년에는 코벤트리에서 뛰었다. 기록은 34경기에 17골. 다만 저 영국진출이 실력으로 스카우트 된 게 아니라 견학 수준에서 그런 게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축협의 무능함에 질렸던 일부 축구팬들이 멋도 모르고 개혁가로 알고 있는데 축협이 그냥 커피면 이 양반은 T.O.P 수준이다. 과거 축구협회 행정가로 AFC에 파견되었는데,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골프만 친다고 AFC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당연히 당시 대표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은 건 물론이다. 게다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당시 금품 살포 의혹까지 받은 적이 있는 인물. GS그룹에서도 일찌감치 선을 긋고 외면했을 정도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15] 참고로 신문선은 일본의 백년지대계는 실컷 떠들면서 축구협회에서 유소년 투자를 얼마나 하는지는 전혀 언급 안 한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비리 등 여러 이유로 많이 까인 조중연은 적어도 유소년 축구를 양성한 것만큼은 호평받고 있다. 이 때 발굴된 선수들이 카잔의 기적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다.[16] 이게 참 어이가 없는 게 '''네이버 본사가 성남에 있다는 이유'''로 그냥 지목했다.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네이버에 제의했는데, 네이버는 절대 甲의 존재지 시민구단 따위에게 굽실 거릴 乙이 아니다. 네이버보다 규모가 작은 NC소프트가 야구단을 운영하는데, 하물며 네이버도 마음만 먹으면 야구단이든 축구단이든 거느릴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다.[17] 야구에서 롯데 자이언츠유니세프와 협약을 맺고 있지만, 모든 경기에 유니세프를 달고 뛰지는 않는다.[18] 하지만 이 롤링 주빌리도 신문선이 그만두고 나간 다음 2015 시즌에 한 것이다. 결국 신문선이 스폰서 모집에서 한 건 아무것도 없는 셈.[19] 그러나 이 쥬빌리 은행 스폰서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었다. 바로 쥬빌리 은행의 주 후원자가 네이버였던 것. 다시 말해 네이버가 쥬빌리 은행을 통해 성남을 우회 후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남 FC에 직접 후원하면 다른 단체들도 거액의 기부를 요구해오기 때문에, 프로구단인 성남 FC 후원이 다른 사회단체 기부와 거의 동급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부터 기가 막히지만, 여기에 더해서 이렇게 우회후원을 해야 할 정도로 답이 안 나오는 스폰을 울며 겨자먹기로 서야만 하는 네이버의 처지가 안쓰러울 지경이다.[20] 샐러리캡NBA, NFL처럼 종목 내 경쟁 상대가 없는 리그에서 비싼 선수가 한 팀에 몰리는 걸 방지하려고 하는 제도인데, 경쟁 시장이 전 세계인 축구판에다 도입한다는 것은 대책없이 K리그 선수를 아시아 전역으로 다 유출시키고 리그를 하향평준화 시키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21] 뭐 당시 한국인 축구관계자 치고 히딩크를 옹호한 사람은 극소수이긴 했다. 당시 이용수 기술위원장과 차범근 정도만이 히딩크를 옹호했지, 나머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축구인들은 모두 비난 일색이었다. 물론 가장 앞장서서 비판했던 사람들이 조광래와 신문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