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수(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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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겸 연출가, 소설가, 외화 번역가.
2. 생애
1938년 경기도 경성부(현재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초동교회 조향록 목사의 주선으로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국립극단 제1기 배우로, 1955년 고등학생 시절 참가한 전국 고교 연극경연대회에서 연출가 임영웅의 연출 데뷔작인 <사육신>에 출연해[1]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이후 1962년 연극 배우로 첫 데뷔하였다. 이후 연출, 외화, 외국 연극 번역가로도 활약하면서 약 2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하였다. 또한 한국연극협회 연기분과위원장, 한국배우협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한국 연극계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7년 KBS 드라마 욕망의 문으로 처음 텔레비전 배우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인지도가 상승한다. 왜냐하면 맡은 역할이 박정희를 모티브로 한 대통령이었는데 실제 인물과 싱크로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 이후 KBS 《훠어이 훠어이》, MBC 《제2공화국》, 《제3공화국》[2] 과 《전쟁과 사랑》에서도 박정희 역을 맡아 이창환 이전 박정희 전문배우로 널리 알려진다.
1988년 영화 《나신들》의 단역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글솜씨도 있었는지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라는 소설을 발간하고, 《현대 영미 희곡집》이라는 희곡 작품집을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또한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기독교방송에서 《이진수의 세상만사》라는 아침 시사프로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1998년 9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던 도중 21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60세. 영결식은 동년 9월 23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야외무대에서 범 연극인장으로 치러졌다.#
3. 여담
- 박정희를 워낙 닮았기에 관련 일화가 꽤 있다. 동숭동 대학로에서 돌아다니거나 술을 마실 때 사람들이 실제 대통령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랐던 것은 이야깃거리도 못된다. 또한 택시를 탈 때마다 많은 기사분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더니 감히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돈을 받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에서 박 대통령 역을 맡았던 이창환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3]
- 1993년 6월 26일 방송된 MBC 예능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한 적이 있다. ''93 토토 올스타 가요제전'에서 최주봉, 남능미와 같이 심사위원으로 나왔다. 《제3공화국》이 한창 방영 중일 때라 선글라스를 끼는 등 박정희 분장을 하고 성대모사까지 했다.
- 실제 박정희가 그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따로 만난 건 아니다. 1992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칼럼 《무대 뒤의 인생》에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명동(서울)에 있던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옮겨 새로 지을 때, 박정희의 특명으로 제작된 개관기념공연작 《성웅 이순신》이란 연극에서 그가 선조에게 전황을 보고하는 장군을 맡았었다. 선조가 "그 쪽 전황은 어떻소?"하고 물으면 그가 "...사망한 자가 300명이 넘고, 부상자 수는 부지기수라 하옵니다."란 대사로 보고를 마무리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마지막 날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직접 와서 관람을 했던 것. 당연히 너무 긴장했던 그는 "...사망한 자가 300명이 넘고, 죽은 자 수는 부지기수라 하옵니다."라고 실수를 했다. 그러자 어느 관객이 가소롭다는 듯 "자식, 되게 웃기고 있네"라며 중얼거렸고 그 소리가 극장 안에서 너무 잘 들려 관객과 연기자들이 폭소하여 연극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육영수 여사는 물론 박정희까지 웃었다고 한다, 이 후에도 다른 배우가 실수를 한 번 더 했고[4] 그 때문인지 원래 계획되어있던 박정희가 금일봉을 주며 무대에서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기로 한 것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
- 1992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출세기》라는 작품을 할 때의 일화. 공연이 끝난 뒤에 많은 관객들에게 사인을 해주다가 어느 날 경찰과 어떤 여성이 와서 작은 종이를 꺼내어 본인의 사인이 맞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맞다고 하니 그저께 저녁 8시 쯤 이걸 가지고 성남의 술집에서 맥주를 먹은 적이 있냐고 묻더란다. 알고보니 그 종이는 수표였고, 그 무렵 택시 강도 2명이 손님의 수표를 비롯한 돈을 갈취한 뒤 술집에 나타나 맥주 마시고는 이진수의 사인이 담긴 수표를 내놓고 잔금을 챙겨 사라졌다고 한다. 당연히 그는 그 시간에 공연을 하고 있었고, 단순히 관객에게 사인해준 것일 뿐이라 혐의에서 벗어났지만 이젠 배우가 사인도 마음 놓고 못해준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고.#
- 명동 국립극장 시절 있었던 안타까운 일화.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이란 작품을 할 때 마지막 날 밤 공연에서 유독 선배들의 태도가 무성의했다고 한다. 대충대충하면서 무대 밖에서 슬픈 표정으로 자꾸 그를 쳐다봤다고 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마지막 공연이니 바빠서 못 본 장면들을 봐두려는 것이겠거니 했다고 한다. 연극 끝나고도 출연자들이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알고보니 개막 30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는데 공연 중이던 이진수가 소식을 바로 전달받지 못했던 것. 아버지의 사망 소식도 모르고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채 열심히 공연했던 그를 다른 배우들이 측은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일화를 회고하며 "피에로의 인생은 그래서 더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남겼다.#
- 전유성이 자신의 저서 《구라 삼국지》에서 밝히기론 굉장히 장난기 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연극배우 시절 천승세의 희곡 만선#s-3에서 마을 주민들이 단체로 "돛 달아라!"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이진수는 혼자 돛을 ㅈ이라고 외치고는 무대 밑에서 혼자 낄낄거렸다고 한다. 두 단어가 발음도 비슷하고 단체로 크게 돛 달아라라고 외치는 것이니 혼자 돛을 틀리게 외친다고 티가 날 리는 없는 상황. 그런데 하루는 동료 배우들이 이진수를 골탕먹이기 위해 다 같이 대사를 안 하기로 짰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이진수는 이 장면이 오자 우렁차게 평소대로 대사를 외쳤고 이진수는 국립극장의 전설이 되었다나...
- 위에서 언급했듯 신학대학을 다녔었는데 한 때 정말로 신학 쪽으로 가려고 했다고 한다. 내적 갈등 끝에 그만 두기는 했지만 이런 그의 종교적 성향이 《비틀거리며 달리는 사람들》과 1인극 《빌라도의 고백》 등 여러 작품에 녹아 들어있다.
[1] 이 때 같이 작업한 사람이 배우 박근형, 성우 안종국 등이다.[2] 다른 공화국 시리즈와는 다르게 박정희의 탄생부터 다룬다. 이진수는 해방 이후 만 29세의 모습부터 연기하는데 그래서 '''형''' 박상희 역을 맡은 '''김상중'''과 같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 어색함이 느껴진다.(...)[3] 여담으로 이창환은 이진수 이후 박정희 전문배우로 활동했으며, 첫 박정희 연기가 《제3공화국》에서 이진수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것이었다.[4] 무슨 실수냐면, 이순신 장군이 죽고나면 병사들이 북을 치며 무대가 돌아가면서 막을 내리기로 했는데 기계소리만 들릴 뿐 무대 회전이 안되었다. 쓰러진 연기를 한 이순신 장군 역의 배우가 그걸 모르고 기계 소리가 멈추자 극이 끝난 줄 알고 일어났던 것. 참고로 그 실수를 한 배우가 장민호. 한국연극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원로배우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진석(원빈)의 노년기를 맡았다. 2012년 11월 2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