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인천)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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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제20대 전반기
백재현

'''제20대 후반기
안상수'''

제20대 후반기
황영철

'''대한민국 국회의원 계양구·강화군 갑)'''
제15대
이기문[24]

'''제15대
안상수'''

''선거구 개편''
송영길[25]
'''대한민국 국회의원 (인천 서구·강화군 을)'''
제19대
안덕수[26]

'''제19대
안상수'''

''선거구 개편''
신동근[27]
'''안상수'''[A]
'''대한민국 국회의원 (인천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선거구 신설''
박상은[28][29]
'''안상수'''[A]

'''제20대
안상수'''

''선거구 개편''
배준영[30]
허종식[31]



'''제15 · 19 · 20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제11~12대 인천광역시장
안상수
安相洙 | Ahn Sang-soo
'''
<colbgcolor=#005bab> '''출생'''
1946년 5월 28일 (77세)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1]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 학사 68학번)
트로이 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종교'''
개신교(감리교)[2][3]
'''본관'''
순흥 안씨
'''지역구'''
인천광역시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9, 20
'''병역'''
면제(연령초과, 생계곤란)
'''가족관계'''
배우자 정경임[4][5]
'''소속 정당'''

'''현직'''

'''약력'''
제15, 19, 20대 국회의원
제11~12대 인천광역시장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자유한국당 전국위원회 의장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부회장
LG유플러스 이사
동양선물 대표
동양그룹 종합조정실 사장
1. 개요
2. 생애와 가정사
3. 정치 활동
4. 저서
5. 기타
6. 선거 이력
7. 소속 정당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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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업가 출신의 정치인이다. 민선 3·4기 인천광역시장을 지냈고, 3선의 국회의원이다.
비박계로 분류되는 정치인이며 '''장기 행방불명'''과 '''보온병''', 그리고 '''낙지와 자연산 드립'''으로 유명한 전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와는 동명이인이다.

2. 생애와 가정사


충청남도 태안군 시골 마을 가난한 어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재학 중에 인천으로 혼자 유학을 갔고 이모 댁에 머물렀다고 한다. 인천중학교[6] 재학 시절에는 자취를 하고 신문팔이,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당대의 최고 명문고등학교 경기고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등록금을 빌리러 다녀야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기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과(현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7]
그의 30대 초반에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또 안상수의 부인 정경임 교수는 뇌졸중의 일종인 모야모야병이라고 하는 희귀성 질환을 앓다가 회복되었으나, 그 기쁨도 잠시 1999년 8월, 다시 쓰러져 2010년 1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식물인간으로 지냈다. 안상수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로 부부가 같이 살던 아파트를 아내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기부했다. 이화여대는 '정경임 글로벌 인재 육성장학금'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제세산업을 거쳐 동양그룹에서 근무했으며, 1996년 신한국당의 전문경영인 영입 케이스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3. 정치 활동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인천 계양구·강화군 갑에 출마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 이기문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년뒤인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한나라당 인천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당시 전국을 휩쓴 DJP 열풍과 불과 1년 전 전국민을 울렸던 IMF 사태의 여파, 그리고 인기 절정이였던 현직 시장 최기선 후보의 아성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1999년 재보궐선거#s-3에서 인천 계양구·강화군 갑 지역구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 송영길을 누르고 당선되어 약 1년간 제15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다시 송영길과 맞붙어 낙선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시장으로 출마, 당선되었고 2006년 전임 시장인 열린우리당 최기선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각종 실정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으며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시장 3선에 도전했지만 송영길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3.1. 민선 3~4기 인천광역시장


8년간 인천광역시장을 지내면서 건실했던 인천광역시의 재정을 파탄낸 것으로 악명이 높다. 얼마나 막장이었냐면 안상수의 임기가 끝나고 보니 인천광역시 자산 중 즉시 출금 가능한 금액이 수십만원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도시전설까지 존재할 정도다.
사실 민선 3기 시절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막장이진 않았고 무난한 행정능력을 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재선까지 해냈다. 당장 버스 무료환승제도를 도입한 것도 민선 3기 시절의 일이다.[8]
그런데 2006년, 뜬금없이 아시안게임 유치선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도시 축전이나 월미은하레일 사업 등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뉴타운 열풍에 발맞추어 루원시티, 도화도시개발사업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이게 대침체 때문에 다 망해버리면서 모두 빚더미로 돌아온 것이었다.[9] 결국 이러한 막장 행정으로 인해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본인이 3선에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헌정사상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에 인천을 넘겨주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10]
이후 안상수는 2015년 보궐 선거와 20대 총선에서 승리했다.

3.1.1. 월미은하레일


'''뭐라 변명할 수 없는 최악의 실정'''.
위의 도시축전 개막에 맞추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다가 부실공사 논란에 휩쓸려 준공 승인 조차 못 받고 백지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백지화된 이유는 2010년에 안상수가 퇴임하고 나서야 알려졌는데, 인천시가 의뢰한 감사원에서 밝혀진 바로는 '''무면허 업체가 하도급을 받아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것까지 나왔다'''. 이로 인해 철도 동호인들에게 두고 두고 까이는 중. 자세한 건 해당 항목으로...

3.1.2. 151 인천타워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착공식 이후 잠정 중단되었다. 송도국제도시의 자본금을 야금야금 빼돌린 안상수 전 시장에게 잘못이 있다는 평가가 많다.

3.2. 2010년 이후


낙선 이후 2년간 야인 생활을 하다가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5위'''로 떨어졌다. 그 후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대선 캠프에서 공동선대위원장 겸 가계'''부채'''특별위원장을 맡았다.
2014년 초까지 상대 후보였던 송영길의 실정, 그리고 인천시 기반 정치인 중 최상위권의 인지도를 가졌다는 장점으로 인해 새누리당 인천광역시장 후보로 거론되었다. 당시 유력 후보군으로는 친박 실세 윤상현, 이학재 등이 거론되었으나 두사람 모두 안상수와의 대결에서는 밀린다는 의견이 중론이였기에 충분히 해볼만한 대결이였고 안상수 본인도 경선에 의욕적으로 임했었다.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인천 서구 강화군 을 선거구에 출마, 새정치민주연합 신동근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이번에도 약 1년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공천에서 컷오프되어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인천광역시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개표 결과 31.9%(41,504표)를 획득하며 당선되었다. 참고로 31.9%라는 득표율은 20대 총선 전국 지역구 후보 중 최소득표율 당선 기록이다.[11]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후 '''비상대책위원회 준비위원장'''이라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2018년 7월 16일 부로 후반기 국회 예결특위 위원장이 되었다.
2019년 12월 21일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범투본) 집회에 참석해 마이크를 쥐고 " 전광훈 목사를 구속하면 그 다음 날로 정권이 망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또 청와대 선거 개입 의혹과 관련해 "3.15 부정선거 해서 당시 내무부 장관이 사형되지 않았느냐"며 "선거 조작한 사람들은 처단돼야 할 것이다. 맨 꼭대기에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
2020년 2월 1일엔 범투본 집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통마늘 7개 넣고 끓인 물을 하루 3번 마시면 효과가 있다."란 헛소리를 퍼트리기도 했다.#
21대 총선에서는 본인의 지역구를 떠나 인천의 험지인 계양구 갑에 공천을 신청했다.[12] 20년 동안 보수정당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험지이자 자신이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계양구에서 문재인 정권 심판을 외치겠다며 출마의 변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2월 28일, 미추홀구 을에 단수 추천되어서 다행히 비교적 무난한 곳에 출마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이 지역구에서만 3번 연속 당선윤상현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나섰는데[13], 선거 결과 안상수는 3위로 선거를 마치면서 다음 선거를 기약하기 힘들어졌다. 만약에 인천광역시에서 누군가가 지역구를 상실할 경우, 그때 딱 다시 잡을 수는 있겠다만, 그런 일이 있기는 매우 힘든 일이고, 설령 하더라도 공천받을 거란 확률이 100%란 확률도 없다. 거기다 팔순에 접어든 고령이라는 약점까지 있어 향후 정치 활동이 진짜 불투명해졌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맞붙었던 윤상현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기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7월 무렵 자신의 부하 직원을 시켜서 고소했을 때도 검찰은 경찰에게 윤상현을 입건하지 말라고 2번이나 말했지만, 10월 초 공직선거법 위반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안상수가 직접 고소장을 써서 내자 나흘 만에 수사를 해서 기소를 했다고.#

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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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공교롭게도 동명이인 안상수와 나이도 같고 두 명 모두 서울대 출신[14]이라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 둘의 경력도 꽤 비슷하다. 둘 다 같은 정당 소속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시장을 역임했고, 비박, 친이 출신이며, 고령으로 병역면제를 받았고, 본관#s-1도 같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이 문서의 안상수는 자녀가 아예 없지만, 창원의 안상수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는 것과 종교도 이 문서의 안상수는 개신교(감리교)지만, 창원의 안상수는 개신교였다가 천주교개종하였다는 것.
  • 재선 국회의원(15대, 19대)이지만 두 번 모두 국회의원 임기만료 1년여를 남긴 재보궐선거로 당선되어 국회의원 활동은 초선의원 임기의 절반인 2년 정도밖에 하지 못하였다. 더불어 정식 총선에서는 모두 패하였으나 20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정식 총선에 당선된 경력을 만들었다.[15]
  • 숫자 2와 연관이 은근히 많다. 인천시장 2번 당선, 인천시장 2번 낙선, 국회의원 2번 낙선 게다가 '안상수'란 이름의 정치인이 2명이다. 거기에 기호 2번 홍준표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즉 선대위원장도 2명)을 맡았다는 것도다.
  • 패션 감각이 남달라 보통 정치인들이 흔히 입는 검은색 정장을 입는 경우가 드물고 파란색, 보라색 계열의 정장을 즐겨 입는다. 물론 나이가 나이인데다 직업의 특성상 꼴사납다는 의견이 상당수이긴 하지만[16]... 종종 TV에 비춰질 때마다 남다른 주목을 받기도 한다. 주로 보라색 깔맞춤 정장이나 그림이 그려진 자켓 등을 입은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 토론 태도가 다른 보수 정치인들에 비해선 점잖은 편이다. 물론 희한한 논리를 들이대는 편이나 상대방의 의견을 무조건 깎아 내리지는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타입이다.
  • 태권도 명예 8단이다. 실제 태권도 2단인데, 아시안 게임올림픽에 태권도를 정식 종목으로 계속 유지하는데 도움을 줬다 해서 국기원 명예 8단이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계양·강화 갑

24,697 (27.93%)
낙선 (2위)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광역시장

238,708 (34.26%)

1999
1999년 재보궐선거
인천 계양·강화 갑
'''36,784 (56.4%)'''
'''당선 (1위)'''
'''초선'''[17]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계양
48,953 (44.41%)
낙선 (2위)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광역시장
'''393,932 (56.17%)'''
'''당선 (1위)'''
'''초선'''[18]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526,932 (61.93%)'''
'''재선'''[19]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469,040 (44.38%)
낙선 (2위)

201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인천 서·강화 을

'''33,256 (54.11%)'''
'''당선 (1위)'''
'''재선'''[20]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중·동·강화·옹진

'''41,504 (31.87%)'''
'''3선'''[21]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동·미추홀 을

17,843 (15.57%)
낙선 (3위)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6 - 1997
정계 입문

1997 - 2012
합당[22]

2012 - 2016
당명 변경

2016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16 - 2017
복당

2017 - 2020
당명 변경

2020
합당[23]

2020 -
당명 변경

8. 둘러보기










[1] 당시 충청남도 서산군 원북면.[2] 출처.[3] 계산중앙감리교회 권사#s-2이다.[4] 1952년 생이다. 1983년결혼했는데, 결혼하자마자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회복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2010년에 작고했다.[5] 노회찬처럼 자녀가 없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2008년에 경제 비타민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자녀가 없어서 2주에 한번씩은 꼭 조카들을 집으로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으로, 투병중인 아내로 인하여 (안상수) 본인여동생과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고도 밝혔다.[6] 현재 연수구 연수동의 있는 그 학교이긴 한데, 원래는 제물포고등학교와 같은 핏줄의 학교였기에 안상수가 재학하던 당시에는 중구 전동에 학교가 있었다. 특히 중학교 입시 폐지 이전에는 인천에서 학력 수준이 가장 높은 명문 중학교로 이름을 떨쳤다.[7] 경기고 3학년 때 3선 개헌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가 주동자로 몰려서, 학교에서는 법대 등 주요 학과의 입학원서를 써 주지 않아 사범대 체육학과를 택했다고 한다.[8] 하지만 무분별하게 환승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서, 문제가 생겼고, 결국 2006년이 돼서야 제도를 수정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인천광역시 시내버스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9] 송도국제도시청라국제도시 등 경제자유구역은 최기선 前 시장이 추진해 안상수 전 시장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업이다. 사실 인천경제자유구역 사업 자체는 당시 크게 적자도 아니었고 나중에는 당연히 흑자 사업이 되었고 문제가 아니었으나 경제자유구역 개발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아시안 게임, 도시축전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10] 여담으로 안상수를 꺾고 당선된 송영길 인천광역시장 역시 무대책으로 일관했고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을 짓는답시고 공사를 남발하다가 재정 건전화는 커녕 인천을 막장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고 그 결과 새누리당유정복 시장이 인천을 탈환하게 된다. 하지만 두 전임 시장의 막장 행각으로 인해 4년 임기 동안 빚만 갚다가 친박 디버프+이부망천 막말 디버프를 제대로 뒤집어쓰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인천시장 선거에 출마한 박남춘에게 다시 인천을 빼앗겼다. 그런데 이 박남춘 시장도 앞 전 시장들에 버금가게 일을 못 한다. 인천 붉은 수돗물 사태 당시 이미 전조현상이 충분했는데도 이를 방관하다가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수만명의 피해자가 속출하고 2000여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데도 보름동안 손 놓고 있다가 대책을 내놓았다. [11] 그런데 만약 강화군이 선거구에 합구되지 않았다면 안상수가 낙선할 수도 있었다. 왜냐면 같은 선거구 내에서도 자치구별로 1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중구와 옹진군에서는 배준영 후보가 1위였고 동구에서는 조택상 후보가 1위였다. 결국 강화에서만 안상수가 1위를 하고 나머지는 다 2위를 했는데 강화의 득표율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덕에 당선될 수 있었다.[12] 인천에서 계양구민주당계 정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다.[13] 공교롭게도 이전 선거에서도 안상수와 윤상현은 나란히 새누리당 공천을 못 받고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나왔다가 당선된 이후 복당한 전례가 있다.[14] 다만, 둘 다 학번은 4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 항목의 안상수는 68학번이고, 창원의 안상수는 64학번이다.[15] 재미있게도 20대 총선에서는 공천 불복 후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다시 말해 정식 총선에서 제대로 공천받아서 이긴 경험이 없다는 진귀한 기록을 가지게 된 것. 그리고 안상수의 지역구가 개편되어 동구 부분은 전희경이, 나머지 부분은 배준영이 그대로 공천되었다. 또한 안상수는 윤상현의 지역구인 동•미추홀 을에 공천되었는데 여론조사에서 윤상현은커녕 오히려 더불어민주당남영희보다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3위로 낙선해(심지어 득표율은 15%를 겨우 넘어 선거비 전액 보전도 아슬아슬했다) 이 기록은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16] 단순히 웃어넘길 문제가 아닌 게 한국 정치판은 정당의 이념을 떠나서 상당히 보수적인 곳이다. 17대 국회 때만 하더라도 유시민국회의사당에 백바지를 입고 나타났다가 곤혹을 치른 적이 있고, 최근에도 자유한국당의 청년 비대위원이 회의장에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가 당직자들의 수근거림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같은 자리에 있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우리도 무작정 싸잡아 욕만 할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17] 이기문(새정치국민회의) 당선 무효로 인한 재선거[18] 11대, 민선 3기[19] 12대, 민선 4기[20] 안덕수(새누리당)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21] 20대 총선 당선자들 중 최저 득표율로 당선. 2016.06.16 새누리당 복당[22]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23]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