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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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사천군 출신의 농민운동가, 前 정치인이다.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17대,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뒤, 현재는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 사천으로 돌아가 본업인 농업에 종사중이다.
2. 생애
한때는 가톨릭 가르멜 수도회 소속 수도자였으나, 종신서원[3] 이 반려되고는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하여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80년대 말에는 '농촌총각장가보내기' 운동을 전개한다. 1991년 우루과이 라운드 수입 개방 반대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의 부의장이 되었다.
2.1. 정치 활동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6번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특히 농민 출신으로 항상 수염을 기른 외모에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는 독특한 의상으로 눈길을 끌었다. 2004년 7월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 국회 윤리위원회 위원에 동시에 선출되어서 겸임하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경상남도 사천시에 출마, 현역 의원인 한나라당#s-1의 이방호 후보와 대결해 '''단 178표''' 차이로 승리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애초 이방호 의원이 일방적으로 앞섰던 데다가, 지역 주민의 성향을 감안하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기적이어서 당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4]
이후 한미 FTA 반대 투쟁에도 참여했다. 강기갑 의원이 농업인 출신이고 진보정당 의원인 것을 생각하면 수입산 농산물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확대를 반대하는 것은 이념상 당연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고, 그 유명한 날으는 강기갑(강달프) 짤방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2012년 19대 총선 때 남해군ㆍ하동군과 사천시 선거구가 통합되면서, 하동 출신의 여상규와 삼천포 출신의 이방호에게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통합진보당이 분당되기 전에 당 비대위원장을 맡았으나, 혁신이 무산되자 중도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3. 정계 은퇴 이후
정계 은퇴 이후,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고 있다. 매실나무를 심고 염소를 키운다고 한다.# 강달프 매실마을 사이트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의 상임고문, 정의당 선거대책위원회 고문단이 되었다[5] . NL의 입김이 강한 전농 출신의 강기갑이 정의당을 지원하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6] 그런데 진보운동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해하기 쉽지만, 강기갑은 애초에 학생운동 출신이 아니기에 NL은 아니었다.
2013년 봄에 집안을 정리하다가 정계 입문 전인 2003년에 담아놓은 매실 발효액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 묵어 다 썩었어야 했을 발효액이 놀랍게도 식초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절친한 연구원의 도움으로 그 발효액 속에서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산균을 최초로 발견'''하였다.[7] 유산균은 강기갑의 이름을 따 K3 유산균으로 명명했고, 현재는 유산균을 이용한 미생물 농법 보급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기사
2016년 4월 10일 정의당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기사
2017년 4월 정의당 심상정 당시 대선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고문단으로 참여했다. 기사
2018년 3.1절 태극기집회에 참가했다는 가짜뉴스가 SNS를 통해 유포됐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 'GMO없는바른먹거리친환경유기농' 행사장에 참석하려다가 보수 단체들에게 막혀서 동선이 엉켰는데 이때 우연히 사진이 찍힌 것.
2018년 7월 24일, 노회찬 의원의 빈소에 조문을 오면서 간만에 언론에 모습을 비췄다.
2019년 8월 21일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에서 특별위원회로 ‘좋은농협위원회’를 출범하고 위원장에 강기갑을 위촉했다.
2019년 9월 11일 유시민의 알릴레오 한가위 특집에 출현해서 미생물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2019년 9월 25일 박창진 · 김조광수 · 양경규 · 노서진과 함께 정의당 5대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강기갑은 5대 특위 중 국민먹거리안심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경향신문 기사
2020년 3월 9일 농업 유튜브 채널 팜네이트 농부의 삶 2화에 출연해서 정치인이 아닌 농부의 삶을 보여줬다.
4. 여담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에서 박성호가 입고 있던 한복 패션이 바로 이 사람의 의상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 박성호의 개그를 강기갑 본인이 다시 역패러디해서 정치 행사 때 활용하기도 했다.
과거 홈페이지(http://www.gigap.net\#)에 소개된 어린시절 이야기로 빈축을 산 적이 있다. 전학생을 왕따시키는 듯한 내용을 어린시절부터 비범한 지도력을 뽐냈다는 것으로 포장했기 때문. 학교 왕따 문제가 현재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상된 상황에서 전학생을 왕따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을 마치 영웅담처럼 묘사해 놓은 것에 대해 네티즌들은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강기갑 대표 측은 “이 글은 현재 홈페이지 관리자가 아닌 예전 관리자가 17대 초반에 작성했던 글”이라며 “우리도 처음 봤을 때 수정의 필요성을 느꼈다. 곧 수정하겠다”고 말했다. 당시부터 보고 불편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강기갑이 직접 작성한 건진 몰라도 고연령대의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8]
강기갑이 누군지는 잘 몰라도 공중부양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사진. 2009년 1월, 미디어법 날치기 시도 때문에 벌어진 국회 공성전 때 일어난 사건이다. 강기갑 의원 말고 당시 민주당의 강기정 의원 역시 이때 폭력 사건으로 징계를 먹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 사건을 회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소박하고 검소한 이미지가 있는 것과는 다르게 축산업으로 성공해서 수십 억의 재산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국회의원 2012년 고위공직자재산 공개에 따르면 약 2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나와있다. 물론, 강기갑은 실제로도 농사를 하면서 자수성가로 돈을 벌었으며 매사에 검소한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축산업은 직업 특성상 재산이 많지 않으면 제대로 경영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면, 소 한 마리가 몇 백만~몇 천만 단위인데 소를 오직 한 마리만 키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러다 보니 재산도 많아야 하고 소에게 먹일 사룟값만 해도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재산이 많다고 해서 꼭 생활수준이 동급의 재산을 지닌 강남 건물주같이 여유로운 수준인 것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서 거액의 빚으로 바뀌는 경우가 흔하다. 괜히 농사가 도박의 일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서양권에서는 '''"도박을 하려면 카지노에 가지 말고 밭으로 가서 농사를 지어라."'''라는 농담이 있다.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양권의 농부들 사이에서는 진짜로 이런 농담이 있다. 농사라는 것은 사람이나 기계가 아니라 자연과 경제가 상당 부분의 영향력을 관할하는 것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한 해 농사가 풍작이라고 해도 오히려 돈을 못 벌고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오죽하면 이런 뉴스도 있겠는가? #1#2#3
물론, 국회의원도 당선되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재산의 여유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사회 및 정치 활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9]
17대 국회 당선 이후, 여성계와의 인터뷰에서 "가부장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받고 "과거에는 의식이 모자랐지만 많이 배워 가고 있다."는 답변을 하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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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을 자르면 이렇게 된다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1996년 이후 경남자영고등학교[2] 정의당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입당은 하지 않아 당원은 아니라고 밝혔다.https://news.v.daum.net/v/20201007050714779 [3] 평생토록 수도자로 살겠다는 서약. 수도회에 입회하면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지원자 → 청원자 → 수련자 → 유기서원자의 단계를 거쳐 종신서원을 한다. 종신서원까지는 대략 10년 가까이 걸린다.[4] 이는 사실 당시의 여러 복잡한 사정이 얽혀서 빚어진 기적이었는데, 가장 큰 요인은 '''계파 갈등'''이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친이계에 의한 공천 학살이 일어나자, '''박근혜 팬클럽 회원들이 친이계 후보를 찍을 바에 아예 야당 후보를 찍겠다고 나선 것.''' 친이계의 실세이자 당 사무총장으로 공천 학살을 주도한 이방호의 낙선을 위해, 친박 성향의 유권자들이 정치 성향을 초월하여 강기갑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호는 구 삼천포시, 강기갑은 구 사천군 출신이었기에 구 사천군 지역에서 강기갑에게 몰표가 쏟아진 것도 한 몫 했다. 이런 조건들이 겹친 결과, 서부 경남권 최초의 비보수정당 의원 당선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야말로 희대의 정치 코미디.'''[5] 역시 정계은퇴를 선언한 권영길도 평당원으로 정의당에 입당해서 활동하고 있다. 정계은퇴한 평당원을 능가할 인물이 별로 없다는 엽기적 상황이, 정의당이 얼마나 열악하고 작은 정당인지 현실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정계로 완전히 복귀할 가능성은 굉장히 낮은 편.[6]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사태 때 겪은 경기동부연합의 패권주의에 염증을 느껴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전농의 다른 주요 인사들은 통진당 해산 이후 경기동부가 중심이 되어 창당한 민중연합당에 들어갔다. 정의당 내에서 영향력이 큰 NL계 인천연합(정파)과의 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인천연합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광주전남연합과 동맹관계였고, 이들과 가까운 전농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통진당에서도 여성농민운동가 윤금순을 비례대표 경선에서 1위로 당선시켰다.[7] 무려 식초에서 수년(!)을 버틴 유산균이다. 사람들이 유산균을 위산에서 보호하고 장까지 살리겠다고 코팅까지 한 것을 생각해보자.[8] 사실 요즘 학생들이 폭력적이 되어 가고 청소년 범죄가 늘어가고 있다는 기성세대와 청년들 모두의 오해와는 다르게 청소년 범죄는 과거에 비해서 감소한 편이다. 사회적 문제인 학교폭력 역시 과거라고 지금보다 덜했던 것은 아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학교 VS 학교 집단 패싸움 등 현재로는 일진들도 거의 안 할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영화)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나, 현재의 중년이나 노인들은 그러한 학창시절을 낭만화하게 되는 경향도 있다. 또한, 과거에는 폭력적인 사회였지만 공동체주의적인 면을 띠고 있어 구성원을 배제하는 일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과 양상이 조금 다르다. 그래서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 식의 긍정적 시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싸우면서 죽는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학부모로서 자녀가 피해를 보는 일을 겪어보지 않는 이상 현재의 고연령대들은 학교폭력에 대해 인식이 모자란 부분이 있다.[9] 한국은 정치자금법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상당히 엄격한 규정으로 채워져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이 없으면 활발한 정치 활동이 매우 어렵다. 흔히 '한국 국회의원 연봉이 억 단위네' 하는데, 사실 국회의원들의 각종 정치 활동에 필요한 비용이 워낙 많아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사비까지 투입하며 적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10] 사실 강기갑이 특별히 여성 문제에서 논란을 일으킨 적은 없다. 그냥 농부 + 한복 + 수염이 어우러져 이미지가 그렇게 보일 뿐이다.[11] 서부경남에서의 진보 정당 의원 최초 배출. 강기갑이 당선되기 전에는 창원, 마산 등 동부경남과 달리 서부경남에선 진보정당 의원이 배출되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