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

 


1. 개요
2. 기준과 범위
3. 정체성 정치의 출현과 출현 원인의 분석
4. 옹호와 비판
4.1. 옹호론
4.1.1. 정체성 정치를 통한 연대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
4.1.2. 정체성 정치가 파시즘적 우월주의가 된다?
4.1.2.1. 예시 : 다수의 흑발과 소수 두발색상의 관계
4.1.3. 비판론이 간과하는 것
4.1.4.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 대상은 좌파에 치우쳐져 있다.
4.2. 비판론
4.2.1. 정체성 부족화
4.2.1.1. 예시 : 다수의 흑발과 소수 두발색상에 대한 반례
4.2.2. 모든 정체성 정치는 극단을 향한다.
4.2.2.1. 극단으로 향한 정체성 : 페미니즘의 사례
4.2.2.2. 소수는 다수를 억압할 수 없다?
4.2.3. 파시즘으로의 발전 가능성, 민주주의·자유에 대한 위협
4.2.3.1. 예시 : 채식주의 교조화
4.2.3.2. 파시즘화 된 정체성 : 나치의 사례
4.2.4. 잘못된 연대의 창궐과 퇴행적 진보
4.2.4.1. 캐나다의 '법안 C-16 사건'
4.2.5. 부정적 측면의 확대
4.2.5.1. 다수자 중심 정체성 정치= 대안우파의 적대적 공생
4.2.5.2. 미국 내 안티 PC 여론의 확산
4.2.6. 비판적 관점에서의 개선 방안
4.2.6.1. 반론?
4.2.7. 좌파 및 중도파 입장에서의 정체성정치 비판
5. 관련 정당
6. 참고


1. 개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란 종교, 인종, 성별, 성 정체성, 성 지향성, 생물다양성[1] 등의 정파(政派)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민중의 지지에 영합하여,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하고, 해당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이익과 관점만을 집중적으로 대변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링크

2. 기준과 범위


정체성 정치를 하는 집단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이 대변하는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서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동조 여론무기로 사용한다. 따라서 구조적 차별, 억압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별받는 해당 정체성에 의거한 정치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권 확산 주장'과 '정치적 의견 대변'이 혼재하는 경우가 많기에 정치적 의견을 대변하는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먼저 보편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서구권 진영에서는 서프러제트 운동, 흑인노예 해방 운동 같은 것은 보편인권운동이지 이익 대변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강하다. 하지만 이건 현대의 관점이고, 그 당시 분위기를 따지자면, 국가에 대해 기여하는 것도 없는 것들이 이익을 주장한다고 보기도 했다.
서프러제트는 당시 영국의 분위기와 뗄 수가 없는데, 17세기만 해도 영국의 선거권은 국가에 대한 기여도가 이미 높거나 미래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커트라인을 두자는 의견이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웰링턴 공작은 부동산이나 자식이 없는 남성에게 새로이 투표권을 주자는 주장을 일축했다. 이들은 부동산이나 자식이 없기에 "영국에 대한 장기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본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의회에서 발언해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서프러제트 운동에 대해서도 보편인권운동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현대 페미니즘 진영에선 보편인권운동을 넘어서 여성권익을 위한 운동으로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여성 자체에 어떠한 속성을 부여했던 운동도 아니며, 재산, 국적, 인종, 연령, 성별, 신분 등등 다양한 방면에서 보통선거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지나가는 한 단계라고 보는게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정체성 정치와 그게 아닌 정치를 나누는 첩경은 "네가 속해 있는 집단이 무엇인가?"를 정치철학의 핵심으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민족주의 단체, 조직화된 종교 단체, 페미니즘 등이 정체성 정치에 해당한다.
반면 "니가 속해있는 집단이 무엇인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는 정치이념은 그렇지 않다. 물론 사회 전체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면 집단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특정 정체성을 내재화할 필요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적이며 따라서 그 해석이 개인마다[2] 자유로운 개념이 된다. 정치나 종교적인 목적의 사상이라도 계몽주의, 자유주의, 이신론, 무신론 등은 정체성 정치에 해당하지 않는다.

3. 정체성 정치의 출현과 출현 원인의 분석


정체성 정치의 기원은 한 두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매사추세츠 대학 애머스트 캠퍼스의 명예교수인 Howard J. Wiarda에 따르면 적어도 70년대, 심지어 60년대까지도 소급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3] 포스트 모더니즘사상의 영향을 받아서[4] 일어난 68운동에 의해 촉발된 신좌파 세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신좌파 특유의 정치 행태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에 세계 곳곳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책 실패로 인한 대규모 인명 피해, 또는 공산당에 의한 대량학살에 관한 소식들이 서유럽과 북미에 속속히 전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방 세계의 좌파 젊은이들 사이에서 조차도 공산주의,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했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이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러한 사상을 옹호하기 힘들어지자 '''기존의 억압자-피억압자라는 서사는 유지한 채, 자본가와 노동자의 자리에 각 정체성을 넣은 것이다.'''

4. 옹호와 비판


21세기에 들어 정체성 정치에 대한 담론은 많이 오가고 있지만 이에 대해 전면 반대하며 전체주의까지 추앙하거나, 다양성이 보장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극단주의 정체성까지 면죄부를 주는 경우는 드물다. 즉, '''어디까지가 정체성 정치이고 어디서부터 정체성 정치의 선을 넘은 것인지는 옹호론과 비판론을 둘 다 보고 각자 판단할 것.'''

4.1. 옹호론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은 과거 SJW 같이 본인들의 신념을 고압적으로 강요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배타적인 모습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신좌파가 내세우는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가 백인우월주의자나 남성우월주의, 극우파 혹은 흑인우월주의, 여성우월주의의 정체성 강조와는 다른 점도 많다. 한국의 사례을 제외한 미국의 경우 페미니스트들이 남성LGBT이슬람과도 친화적이며,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우월주의로 연결되기 보단 다른 소수인종들과 같은 유색인종으로써 연대하기 때문인데 이를 신좌파와는 거리가 먼 흑인우월주의나 여성우월주의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5]'''즉 정체성 정치는 자신의 정체성이 우월하거나 뛰어나다는걸 주장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소수자(약자)로써 숨지 말고 당당해지자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4.1.1. 정체성 정치를 통한 연대로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


페미니즘측의 정체성 정치로는 시몬 드 보부아르[6]가 본인의 저서 《모든 사람은 혼자다 (Pyrrhue et Cineas)》를 통해 정체성 정치의 뿌리로 여길 만한 성찰을 드러낸 적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만들어가야 할 존재다. 각각의 자유들은 통일되어 있는 것도,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인간이 자기 주변에 다른 인간들의 위치를 잡아줌으로써 자기 위치를 정하는 것은 세계 속에 자신을 기투[7]

함으로써다. 그리하여 연대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한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들과 두루 연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택이 자유인 이상, 그들 모두가 같은 목적을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프롤레타리아에 봉사하기로 한다면 나는 자본주의와 싸운다. 군인이 되면 자기의 적을 죽임으로써 자기 나라를 보호한다. 계급이나 국가가 어떤 통일된 성격으로 정의되는 것은 그들이 공동의 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이 없다면 무산계급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국가는 오로지 국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립을 제거한다면 총체성은 해체될 것이다. 그 집단은 뿔뿔이 흩어진 다수의 개인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정체성 정치가 필요한 것은 이 방법만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이 산산히 흩어져 무력하게 개인으로 존재하는 한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변화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고 여성은 각자 구시대적인 억압 속에서 살게 될 뿐이다. 여성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모여 하나의 단일 정체성을 구축하고 고정관념화가 된 성관념과 가부장제에 대한 투쟁을 펼쳐야만 비로소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애기가 아니다. 이는 다른 소수자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만일 조선인들이나 아일랜드인이 억압적인 지배자에게 저항하지 않았으면 문화 통치아일랜드 자유국이 생길 수 있었을 까? 남북전쟁 이후 노예였던 흑인들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을 대하는 백인이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흑인 차별은 계속되었다. 그 후 1970년대말콤 엑스마틴 루터 킹 그리고 흑표당으로 대표할 수 있는 흑인들이 인권 운동으로 어느 정도 변할 수 있었다. 하단에 사람들은 정체성 운동이 없어도 세상은 변한다고 하지만 조선의 억압적인 식민지배를 반대하는일본인이 있었고 남북전쟁 이전에도 노예 제도를 나쁜 것 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이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 다수의 각성을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을 이끌어 낼려면 소수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시오니즘이라는 유대인의 정체성 정치를 들 수 있다. 만약 시오니즘이 없었다면 지금 서구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허나, 이 문제에 정체성 정치의 폭주 사례로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인 학살을 들먹인다면 어불성설이다. 당장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서양 우파들이 시오니즘이스라엘에 대해 모순적인 입장을 취하는 지부터 생각해보자. 또한 팔레스타인인에 비해 유대인은 결코 소수자라고 보기 어려운 집단이며, 현재의 팔레스타인이라면 모를까 팔레스타인과 이슬람권 국가들도 이스라엘의 일방적 피해자들이 아니며, 팔레스타인 탄압 반대와 1국 2체제를 내세우는 좌파 시오니스트 또한 상당수 존재하기에 정체성 정치인 시오니즘 자체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 실제로 서구권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면 극우파로 욕 먹는다.[8]
신좌파에서 이야기하는 정체성 정치는 다른 집단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다. 실제 현대 서구 페미니즘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기존 백인 중상층 사회 뿐 아니라 더 다양한 집단과의 연대를 통해[9] 사회적 다수자나 우월적 지위에 있던 이들의 그늘에서 탈피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메갈이나 대안 우파에서 보이는 반대 집단에 대한 적대와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4.1.2. 정체성 정치가 파시즘적 우월주의가 된다?


비판 측에서는 나치즘을 사례로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를 비판했는데 '''현실사회주의나치즘은''' 게르만민족이나 노동자/농민 등 이름만 달랐을뿐 '''다수자 대중의 단일한 평범성이나 정체성을 강조해 극단적으로 흐르게 된 것'''이며, '''이를 근거로 차별에 저항하기 위한 소수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건 어불성설'''이다.[10]
약자/소수자가 자신이 차별받는다고 사실을 얘기하는 거랑 극우주의자들의 강자/다수자가 자신이 소수자들에게 역차별당한다고 다수자의 단일한 정체성을 조직해야 한다고 선동하며 것을 기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11]
정체성 정치와는 직접적으로 무관하겠지만 과거 영국이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세가 밀리는 나라들과 연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쪽에만 세가 쏠리면 그 세력은 결국 폭주하게 되고 영국 또한 위험해지기 때문인데,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도 다수자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대안우파같은 극우세력의 정체성 정치랑 싸잡아 극단주의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이런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또한 나치즘은 백인 게르만의 우월성을 내세웠고 흑인우월주의, 여성우월주의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신좌파들이나 소수자 운동계열의 경우 여성이나 흑인 등 특정 소수자들만이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12]
필연적으로 극단주의를 불러오는 다수자의 정체성 정치와 소수자의 제한적인 방어형 정체성 정치는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13]
역사의 사례로 봐도 미국의 교차페미나 소수자운동권이 내세우는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는 말 그대로 소수자라 궁극적으로 다수자를 전부 숙청한다는것 자체가 말도 안 되며'''[14][15], 외려 다수자들이 극우세력이 되어 자칭 맞대응을 하는게 가능하다. 반면 나치나 맑시즘의 사례는 다수대중을 기반으로 하기에 소수자들이 반대를 하면 절대적으로 유리한 다수의 힘으로 숙청시켰기 때문에 집권 당시에 소수자들이 유의미한 반대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다.[16]
비판 단락에서는 이를 "바보같은 의견이다. 역사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봤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발언이다. 대표적인 정체성 정치 집단인 나치는 결코 다수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소수파에 해당했다." 라고 하는데 문제는 '''나치는 처음에 소수였을지언정, 다수 대중 노동자/민족을 기반으로 시작한 정체성 집단'''이라는 것이다.[17] 반면 성소수자, 장애인 등 소수자 운동이 그러한가? 이념적으론 소수더라도 다수를 기반으로 한 운동이기 때문에 극단으로 흐른 것이다. 말 그대로 다수이기 때문에 폭주하면 견제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소수자들이 자기방어와 자존감, 권리를 위해 정체성을 내세우는 소수자 그 자체의 정체성 운동과 비교하는 거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소수자가 왜 소수자라고 불리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밑에 비판항목 말대로 다수자를 숙청시킬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거나 그런 상황을 만들수가 있다면 그건 소수자가 아니다. 미국에서 백인중심의 극우정권, 짐바브웨에서 흑인우월주의 정권이 들어설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소수자는 절대적으로 다수자와 극단적으로 붙어선 선천적인 권력의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에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다수자의 폭정인 나치나 마오주의의 사례와 달리 근대 이후엔 소수자(마이너리티)가 다수자(메이저리티)를 숙청한 사례는 역사에 없다.[18] 그렇기에 흑인우월주의, 레디컬 페미니즘 같은 개별적 사안이 아닌 신좌파들이 내세우는 소수자의 연대적 정체성 정치는 절대적으로 극우/극좌같은 극단주의로 흐를 수 없으며, 설령 다른 소수자를 배척하는 흑인우월주의, 여성 우월주의도 절대 주류가 될수 없다. 물론 100번 양보에서 그들이 주류가 된다면 그들은 더이상 소수자라고 부를 수가 없다. minority 자체가 소수자/비주류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성 정치의 사례에 나치의 사례를 드는 것이 부적절한 이유는 (신좌파의 정체성 정치와 비교자체가 억지인 것은 둘째치고)나치는 독일 게르만 '''다수자'''의 정체성을 내세운 것도 있지만 '''나치는 정체성 정치와 별개로도 우생학을 들먹이며 소수자 혐오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이를 신좌파의 우월주의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정체성 정치에 단지 정체성 정치는 결국 극단주의로 폭주한다는 논리로 들먹이며 비교하는 것도 편향된 극단주의이다. '''나치는''' 신좌파들이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소수자 혐오를 기반으로 한 다수자 중심 극우주의'''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신좌파들이 추구하는 바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다수자의 민족주의와 특정 세략의 소수자 혐오 조장이 문제인 것이다.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 유대인들은 소수자로써 극심하게 차별을 받았는데 그렇기에 유대인들끼리 노는 경향이 강했고 그런행위가 다수자 독일인들에겐 역차별이나 꼴사납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꾸려서 다른 유럽인들을 배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을 유대인이란 이유로 유럽인들이 배제하는것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가? 당시 유대인들이 이기주의적이라고 나치는 선동했으나 거짓과 일부 진실을 교묘히 섞어서 선동한 것이다.

4.1.2.1. 예시 : 다수의 흑발과 소수 두발색상의 관계

30명의 학생으로 이루어진 어느 학교의 반이 있다고 치자. 이중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연 흑발인데 10명도 채 안되는 학생들은 금발이나 빨간 머리다. 검은 머리 학생들은 소수인 이들을 대놓고 혹은 은근한 차별을 하고 이들은 자신의 금발과 빨간 머리가 아름답다고 정체성 정치를 한다. 이게 흑발금발이나 빨간 머리보다 열등하다는 그러한 우월주의라고 볼 수 있을까? 외려 흑발 아이들이 꼴보기 싫다고 다수의 힘으로 "응 아냐 흑발이 정상적인 거고 느그들은 돌연변이야."이라고 모욕하고 집단괴롭힘을 시젼하는게 다수자의 중심 극우주의다.
그런데 이러한 다수자 중심 극우주의는 단순히 힘과 선동으로 억누르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소수자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척 하면서 이들이 이러한 역차별을 통해 다수에 비해 큰 혜택을 보고 있다고 역으로 설득해 버리는 것이다. 즉 위의 경우로 들자면 다수의 흑발 학생들이 '아름다운 천연금발과 적발 때문에, 태어날 때 부터 흑발이던 우리가 역으로 피해를 보고 있으니 그들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선 힘있는 다수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자'로 낙인찍힌 소수자 정체성들은 최소한의 결집조차 이기주의의 취급되며 더욱 큰 차별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다수자 중심 극우주의는 자신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권력을 악용해서 선동을 통해 특정 소수자를 혐오하는 문화를 조장하는 것을 넘어, 소수자들의 저항과 결집마저 (침묵하는 다수에 비해) 불공평하다는 프레임을 씌워버리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문제점을 망각한 뒤 소수자들에게 정체성 정치를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면 '''너희 극단주의자들 의견은 듣기도 싫으니, 입 닥치고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침묵해라'''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변질되기 쉽다.

4.1.3. 비판론이 간과하는 것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은 우파나 사회적 소수자의 특수성을 무시한 입장에 지우쳐져 있다.
버니 샌더스는 기존 신좌파와 리버럴들과는 입장차이가 있어서 정체성 정치와 계급이슈에 있어서 후자에 중점을 두는 편이다. 그래서 트럼프 당선 이후 민주당에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자고 제안했다. 허나 소수자에 대한 유리장벽이나 위협, 차별등이나 소수자들의 권익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존 민주당이 무관심했던 백인 중하류 노동계층과 진보적 중산층과 연대하려는 성향에 가깝다. 영상을 보면 소위 대안우파나 조던 피터슨 지지자들이 말하는 정체성 정치라고 보는건 어찌보면 우파적 시간에서만 해석한 모순이라 판단될수도 있다. (당장 피터슨은 마르크스주의와 노동계급 운동을 정체성 정치라고 말한 사람이다.) 우파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가 페미니스트고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운동을 지지한 정체성 정치가로 보이겠지만 좌파적인 시각으로 보면 샌더스는 정체성 정치보다 계급정치를 우선으로 놓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이것이 꼭 옳다는 법은 없으며, 차별받기 쉬운 소수자의 온건한 수준의 리버럴들의 정체성 정치보다 좌익포퓰리즘을 기반으로한 샌더스식 사회주의가 더 안전하다고 보기도 힘들다. (실제로 샌더스는 유럽 주류사민주의 기준으로 보기에도 급진적인 편이다. 코빈은 더 급진적이긴 하다만...)
보편평등을 위한 소수자 인권운동은 정체성 정치라 보기 어려우며, 또한 자기보호와 실질적 차별에 저항하기 위한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는 민족주의에 비해서 훨씬 참작의 여지가 있다. 허나 민족주의는 대부분이 아니라 민족주의 그 자체가 정체성 정치이며 정당성을 확보할 이유 자체가 없다.[19] 정체성 정치와 그게 아닌 정치를 나누는 첩경은 "네가 속해 있는 집단이 무엇인가?"를 정치철학 핵심에 깔고 있는 정치인데 모든 민족주의는 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민족주의는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보다도 정당화할만한 근거가 없다.
사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할때도 나치 등 극단적 민족주의의 사례가 나온다. 그러나 여성, 성소수자, 각종 (민족, 인종, 종교를 제외한) 소수자들의 방어적 정체성 정치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것을 비판할 때 민족주의나 종교를 끌어들이는데 그들이 민족주의나 종교마냥 대량학살에 준하는 범죄를 일으킨바가 (최소한 현재까지) 없으며, 아무리 극단적이라고 해봤자 SJW나 역차별 옹호 정도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점도 있다. 사실 국내에도 대안우파의 악영향인지(영향이란거지 위키러들이 대안우파란 얘기는 아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소수자를 위협하는 민족 정체성 정치보다 소수자의 방어적 정체성 정치에 훨씬 더 비판에 열을 올리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는 정체성 정치 끝판왕이며, 인권향상이라는 명분도 없고 차별 등에 맞서는 것도 아니며, 민족의 이익 그 자체를 추구하기 때문에 민족주의 자체가 곧 해악이다. 그리고 명분도 부족하다.
정체성 정치와 그게 아닌 정치를 나누는 첩경은 "네가 속해 있는 집단이 무엇인가?"이며,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 신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종교 그 자체야말로 가장 오래된 정체성 정치이다. 종교는 서프러제트같은 운동과 달리 보편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종교끼리 화해를 도모해도 니가 속해있는 집단이 무언인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종교 그 자체가 정체성 정치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논리랑 다를게 없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이 주체가 되어 대량학살에 준하는 범죄를 벌인 적은 없지만 민족이나 종교는 수도 없이 많이 했다.(물론 전근대군주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런 정체성이 아닌 민족이나 종교 정체성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 절대적이다.) 근데 피터슨 추종자들이나 대안우파들은 이점을 무시하고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보다 종교, 민족이라는 정체성 정치가 더 해악임에도 전자만 위주로 때린다.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이 양립할 수 없다는 논리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동의하지는 않으며, 신좌파나 자유주의 좌파의 의견을 배제한 (21세기에는 좌익~극좌로 분류되는) 시대착오적 마르크스주의의에 한정된 입장이므로 중립적이지는 못하다.
또한 정통 좌파란 것도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할 무렵에 온건한 고전적 자유주의나 막 탄생한 사회자유주의도 그 시대에는 다 중도좌파였고, 얘들은 리버럴 페미니즘을 지지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자유주의는 현대에도 중도좌파 이념이다. 즉 정통 좌파도 중도좌파의 경우 페미니즘을 옹호하기도 했다.
또한 차별받는 소수자, 약자의 경우 차별 철폐를 위해서라도 "니가 속해있는 집단이 무엇인가?"는 분명 중요하다. 단순히 이 개념으로만 정체성 정치를 나눈다면 거의 모든 민권운동으로 인한 인종차별 , 소수자차별 철폐와 평등 추구도 정체성을 내세워서 이룩해 낸 것이다.
생각해보자, 1950~60년대 미국에서 흑인이나 유색인종이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것인데 그런 정체성을 "니가 속해있는 집단이 무엇인가?"를 무시하고서 얘기할 수 있는가? 마틴 루터 킹이나 맬컴 X가 흑인 정체성을 내세웠다고 해서 비난할 수 있는가? 더 넓게 봐서 지금까지의 소수자 인권운동이 정체성 정치를 완전히 배제하고 평등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지금은 흑인이나 유색인종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차별받지는 않는다고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한국의 사례로 예시를 들어보자.
성소수자 등 일부 소수집단의 경우 아직까지도 단순이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배제된다. 이러는데 어찌 정체성을 빼놓고 보편평등을 논할 수 있는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으로 차별받는데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고 보편평등 논하라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되는가?[20] 보편평등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수준의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가 용인되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이러한 경우에도 우파논리대로 "니가 속해있는 집단이 무엇인가?"는 정체성 정치이므로 절대로 추구하면 안되는 금기인가? 또한 시간이 지나 한국에서 성소수자 등의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이 제도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서 사회문화적으로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혁명수준의 변화로 인해 사회문화적으로 사라졌다고 해도 그 전까지 있었던 차별로 인한 정신적, 사회적 상처는 바로 아물지 않을 것인데 이를 할당제어퍼머티브 액션 없이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님 그냥 다수자와 불평등한 환경에서 자라고 살아왔는데도 할당제나 어퍼머티브 액션같은 보호 정책 없이 100% 완벽히 똑같이 다수자들과 무한경쟁해야 하는가?[21] 이거야말로 사회적 소수자(Minority)들의 현실을 무시한 다수자(Majority)의 편협한 이상주의적 발상이다.
또한 전세계적으로도 흑인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들 중에서도 큰 돈을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때 사회 주요층(기업 임원,고위공무원)중 소수자의 비율은 현저히 낮으며 이것이 단순 노력의 문제일까? 유대인등 극히 일부 소수자들이 예외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각기다른 소수자들은 실제 사회의 비율에 비해 사회 주요층에서 비율이 낮은데 이것이 순수 능력주의의 결과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해 순수 능력주의의 결과라고 해도 과연 다수자에 비해 소수자라는 이유로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보장되며 차별을 받지 않고 자라왔을까?
이부분에 대해선 우파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명쾌한 답을 하지는 못할것이다.[22]
또한 좌파계열에서 소수자의 평등과 인권향을 위한 방어적 정체성 정치마저 깡그리 부정하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마르크스주의나 비주류 급진 사회주의 논리를 가져온다는 것도 문제점이 크다. 정체성 정치를 부정하는 계급주의적인 극좌세력이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를 옹호하는 중도좌파보다 낫다고 볼 순 없다. 왜 극좌이고 왜 중도좌파이겠는가?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라는 것은 특정 좌우세력의 주장이지만 극좌는 말 그대로 맨 왼쪽에 있는 극단주의 그 자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엘리트 집단이나 대중 집단과 달리 사회적 소수자들을 제도적으로 우대하거나 보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도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여성은 머릿수라도 많으니 그나마 낫겠지만 그 외의 소수자 집단들은 대중보다 머릿수가 적어 던질 수 있는 표도 적고, 엘리트보다 훨씬 정치, 사회, 문화적 권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즉 엘리트나 대중 집단과 달리 자신을 보호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수단이 절대적으로 적다.
또한 '좌파 및 중도파 입장에서의 정체성정치 비판' 항목에서 "비단 젠더 문제 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기존 좌파가 정체성 정치를 거부한다고 해서 결코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우파들처럼 차별을 정당화 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좌파는 모든 억압받는 대중들의 연대를 통한 차별의 철폐를 추구한다. 그런데 내 옆에서 같이 연대하는 동지를 차별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단지 좌파가 정체성정치를 거부하는 것은 자의적인 잣대를 가지고 대중들을 분열시키는 그 특유의 배타성 때문이다." 라고 지적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강자와의 약자가 오로지 한줌의 상류층과 다수의 대중으로만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머릿수도 없고 개개인으로 보면 권력도 없거나 적은 경우가 많은 평균적으로 대중보다도 약자인데 소수[23]의 상류층과 맞서는 대중은 정당하지만, 다수의 폭정이나 대중독재 맞서는 소수자[24]의 운동은 부당한가? 이것은 지나치게 세상을 대중의 관점으로만 바라본 사고이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저 멀리있는 엘리트 집단이 아닌 당장 대중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작금의 성소수자 혐오 여론도 엘리트가 주도한 것인가, 아님 대중들의 우경화로 엘리트계층이 수용한 것일까 생각해보자.[25]
대중은 항상 약자가 아니며 또한 선하지도 않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극단주의적인 사상을 통해 소수자가 항상 선량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이를 무시하는것이 포퓰리즘이다.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엄연히 다르며, 포퓰리즘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적일 수밖에 없지만, 모두가 1인1표라는 민주주의 체제상 포퓰리즘 문제에서 완전히 안전하지 않으므로, 서구권에서는 양원제, 혐오선동 제재, 간접민주주의 등 제도를 통해 이를 막으며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대중은 항상 선이 아니다. 당장 조던 피터슨이 소수자 운동을 때리겠답시고 정체성 정치 운운하며 들먹이는 나치대중이 만들었지 유대인 같은 당시 소수자들이 만들었는가?[26] 물론 조던 피터슨은 비록 소수자들의 방어적인 정체성 정치이더라도 한 번 분노에 빠진 집단이 결과적으로 보편인권을 넘어서 나치의 우생학 등의 폭정으로 변모할 위험성이 있다 라는 의도로 말한 것이기에 피터슨의 그런 발언들이 100%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비단 방어적 정체성 정치만의 문제가 아닌, 좌우를 막론하고 일어날 수 있으며 주로 오랜 기간 동안 받아온 불만에 분노하여 기존의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 니체가 말한 자신도 심연 속 괴물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에 가깝다. 도가 지나친 경우. 이런 경우는 피터슨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안우파와 같은 세력들도 그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피터슨이 경계하는 것은 극우주의나 래디컬 페미니즘 같은 극단주의 사상들의 위험성이기에 광범위한 의미의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다.
또한 이념적으로 레디컬 페미니즘이나 흑인우월주의같은 극단주의가 아닌 이상 수도 적고 권력도 적은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를 정치학계에서 일반적으로 극좌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반면 정체성 정치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는 21세기 기준에선 좌익 내지 급진좌파/극좌 세력으로, 정체성 정치를 표방하지 않으며 소수자 차별을 조장하는 우파(장애인차별, 성소수자차별)나 다수자 정체성 정치를 표방하는 대안우파는 학계에서 극우로 분류한다. 무조건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를 신좌파의 다수자 역차별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왜 그럴지부터 생각해봐라.
결국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더라도 정체성 정치 유무보다 우선되어야 되는것은 그가 이념적으로(좌우파적으로) 극단주의에 속해있는가다. 실제로 서구권에서는 이를 더 중요시한다. 정체성 정치가 있는 중도우파나 중도좌파보다 그것이 없는 극우와 극좌가 훨씬 더 위험하다.[27]

4.1.4.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 대상은 좌파에 치우쳐져 있다.


정체성 정치는 주로 좌파를 비판할 때 제시되는 근거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미국내 보수 우파내에서도 정체성 정치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다. 현재 트럼프에 대해서 백인 정체성정치라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으며 이에 대해 트럼프식 정체성 정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
고찰해보면 현재 모든 정당에서 자신들이 대변하겠다고 하며 공략하는 지지층들이 분명하다. 민주당도 마찬가지고 공화당도 마찬가지고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공략한 것은 바로 기존의 공화당에서 외면해왔고, 차별적이라는 사회의 비난속에서 자신의 지지 성향을 밝히길 거부한 소외받는 백인 노동자들이였다.[28]
일부에선 트럼프도 정체성 정치를 했다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의 공약들과 주장들을 살펴보면 설득력이 부족하다. 트럼프는 자신이 누구에게 지지를 얻고자 하는지 매우 명확하며, 자신이 반대하는 가치와 타 집단들[29]에 대해선 무자비한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때문에 트럼프의 승리에 대해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가 원인이라는 일갈(?)이 크게 지지를 받았지만 가면 갈수록 민주당에서 자신들의 지지층에 대해 소홀히 하였다는 점. 민주당에서 자신들이 대변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작 민주당이 자신들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는 것들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점차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파는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에 대해 혹독하게 비난하며 정체성 정치를 공격의 수단으로 삼았지만 정작 본인들도 끝내 정체성 정치의 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A를 대변하느냐 B를 대변하느냐 차이만 있지 결국 사회 모두를 어우르면서 정체성 정치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하였다.
투표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져 지지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민주당에서 정체성 정치를 하였으며 가뜩이나 분절화되고 있는 사회를 제대로 개선하질 못했다고 하지만 정작 보수 우파에서도 똑같은 문제점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과연 분절화된 사회, 정체성 정치가 난무하는 현 상황에 대해 과연 정체성 정치에 대해 한쪽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회의감이 적용된다.
투표가 바로 그 사례인데 과거부터 투표는 자신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후보와 정당에 대해 투표를 하는 것이 장려되어왔었다. 그리고 이러한 투표 제도로 인해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대변하는 가치관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투표로 선택을 받아왔다. 결국 선택을 받으면 선출되는 것이고 선택받지 못하면 선출되지 못해왔다.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의견을 실제 사회에 반영하는 방식이였다. 결국 애시당초부터 선호되는 가치관과 정책이 많은 쪽부터 우선적으로 선택되도록 시스템이 짜여져 있었고 때문에 현대의 민주주의가 이러한 정체성 정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사회 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감과 의문이 드는 이유이기도 한다. 지금까지 정치를 보면 사회를 통합하는 쪽 보다 자신들의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 왔다. 사회 통합에 대해 중요하다고 역설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사회 통합은 항상 후순위였으며 자신들의 지지자들의 가치관과 인식을 대변하는 것을 더 우위에 두었다.
현재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로 인해 이득을 보았다고 여겨지는 트럼프도 자신들의 가치관과 인식을 사회 정책등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반대파들의 비판에 대해선 듣지 않고 제대로 고려도 하지 않는건 매한가지인 것은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미국 내 일자리의 부활을 위한 정책들이 그 사례. 이게 언뜻 보기엔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특정 산업의 노동자들에겐 이득이지만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에겐 전혀 아니다. 버지니아 샬러츠빌 폭동에서도 본인도 차마 어떻게 옹호를 하기가 불가능하니 끝내 양비론으로 나서면서 공화당, 민주당 모두에게 극딜을 당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특정 집단에 대해 옹호를 할 정도였다.

4.2. 비판론


정체성 정치를 옹호하는 측에선 자신의 정체성이 우월하거나 뛰어나다는걸 주장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정체성 정치가 있는 중도우파나 중도좌파보다 그것이 없는 극우와 극좌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그 부분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대하게 커진 특정 정체성 집단은 자신들이 보호받아야 마땅할 소수자라 자처하며 과거 SJW처럼 자신들의 신념을 고압적으로 강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인 예시로 래디컬 페미니즘과 그 밑의 여러 여성주의적인 면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체성 정치 옹호 입장에서는 '그건 더 이상 소수자들의 방어적 정체성 정치' 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분명히 해야할 것은, '''이런 극단주의 집단들이 모두 정체성 정치를 기반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정체성 정치 비판론의 핵심이다.
즉,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는 '''실제론 이미 강자라고 부를 만한 힘이 있는데도 소수자(약자)인 척 하는''' 집단들에게 유리하게 작동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약자일 수록 그 만한 혜택이 오는 상황에선 각 정체성이 쉽게 우월의식로 발전하고, 사회적 약자간의 연대를 저해함으로서 정작 보호 받아야 할 진짜 소수자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저오기 쉽다. 정체성 정치 아래에선 각 정체성들이 소수자(약자)로써 숨지 말고 당당해지자는 의미를 넘어, 각 집단들이 자신들의 비윤리적 행보와 불평등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 셈이다. 비판론의 주된 핵심은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에 대한 제동이 필요하다'''는 것과 '''광범위한 의미의 정체성 정치 자체가 극단주의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4.2.1. 정체성 부족화


다시 말해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정체성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를 위해선 박해받는 소수자들을 위해 정치참여자들을 각 정체성 집단별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정체성은 각 구성원들이 처한 환경, 출생, 문화 등에 의해 개개인 단위로 극히 세분화 되는게 가능하다. 심지어 신경다양성 까지 포옹해서 한명의 인간 안에 서로 다른 인격체가 공존하고 있다는 영역까지 들어가면 말 그대로 개인의 정체성은 무한하게 나뉘어질 수 있으며, 이를 하나의 정치 공동체의 틀로 묶는 건 불가능해진다.
현실세계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대략 인간에게 3개의 인종(흑인, 백인, 동양인)과 2개의 성별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6개의 정체성 카테고리가 발생한다. 여기에 성소수자-비성소수자 정체성을 추가할 경우, 12개의 정체성 카테고리가 발생한다. UN에는 193개의 국가가 가입되어있다. 국가 정체성이라는 요소까지 고려하게 되면 정체성 카테고리는 2316개까지 늘어난다. 그리고 인종의 갯수는 어느정도 세분화 하느냐에 따라 무수히 증가할 수 있다. 대략 30개의 세분화된 인종 카테고리를 고려하면 21360개의 정체성 카테고리가 발생한다. 게다가 젠더학에 따르면 성별 정체성은 단순히 남성, 여성 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별 정체성은 무한하게 증가할 수 있으며, 이것은 성 지향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소수자적 정체성은 무한하게 증가할 수 있다.
문제는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에선 이런 소수자적 정체성들의 요구를 100%에 가깝게 인정하거나 해결하지 못할 경우 '''소수자 보호한다는 정권이 소수자를 묵살한다'''라는 가장 치명적인 정치실패 상황이 발생한다. 때문에 각 정체성들은 자신이 바로 보호 받아야 할 가장 위태로운 소수자를 자처하며, 사회 전반이 서로간의 공통점을 찾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많은 정체성 부족들로 갈라서게 된다. 당연히 각 정체성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체성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강자로 취급하며 배척하며,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지 않으려 하는 부족 간의 정상적인 협상과 타협은 일어나기 힘들게 된다.
이러한 부분들이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정체성 정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지점이다. 소수자적 정체성은 개인 단위로 분해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을 참으로 향상시키는 것은 정체성 집단 간의 투쟁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생명권, 사유재산권,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을) 오롯이 보장하는 것이다.


4.2.1.1. 예시 : 다수의 흑발과 소수 두발색상에 대한 반례

옹호론에서는 30명으로 이루어진 학급에서, 다수의 흑발 학생이 소수의 금발, 적발 학생을 억압하는 상황을 예로 들었지만 현실에서는 문제가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소수자인 금발, 적발 학생들이 다수자인 흑발 학생들을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사람의 정체성이 모발의 색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발 학생 A는 의사 집안에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반면에 흑발 학생 a의 집은 기초생활수급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갈 정도로 가난하다. 이 경우 금발 A와 흑발 a 중 어느 쪽이 더욱 약자인가? 문제의 복잡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흑발 학생 b는 동성애자이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흑발 학생 c는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흑발 학생 d는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이고, 흑발 학생 e는 사회적으로 박해받는 소수 종교의 신도이다. 이러한 소수자적 정체성은 '''무한하게''' 늘어날 수 있다. 허나 정체성 정치 집단화 된 금발, 적발 학생들은 오직 금발, 적발이 당해온 억압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며 흑발 학생 a, b, c, d, e를 흑발 특권의 수혜자라고 비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어보자.

81명으로 이루어진 학급에서 모든 개인은 각각 흑·금발, 경제적 (중산층+고소득층)·저소득층, 이성애자·동성애자, 주류 종교·소수 종교 여부로 구성된 4개의 정체성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여기서 전자는 다수자 집단, 후자는 소수자 집단이며 그 비율은 2:1이라 가정한다. 편의를 위해 다수자 집단은 O, 소수자 집단은 X로 표기한다.

|| 다수자·소수자 여부 || 흑·금발 || 경제적 계층 || 성소수자 여부 || 종교 ||

|| O || 54 || 54 || 54 || 54 ||

|| X || 27 || 27 || 27 || 27 ||

|| 총합 || 81 || 81 || 81 || 81 ||

여기서 모든 부분에서 다수자면 4:0으로, 모든 부분에서 소수자면 0:4로 표기하자. 각각이 독립적으로 분포되었다 가정하면, 다음과 같은 표가 도출된다.

|| 다수:소수 || 4:0 || 3:1 || 2:2 || 1:3 || 0:4 ||

|| 비율 || $$ \begin{pmatrix}4\\0\end{pmatrix}\times\dfrac{2}{3}^4\times\dfrac{1}{3}^0$$ || $$ \begin{pmatrix}4\\1\end{pmatrix}\times\dfrac{2}{3}^3\times\dfrac{1}{3}^1$$ || $$ \begin{pmatrix}4\\2\end{pmatrix}\times\dfrac{2}{3}^2\times\dfrac{1}{3}^2$$ || $$ \begin{pmatrix}4\\3\end{pmatrix}\times\dfrac{2}{3}^1\times\dfrac{1}{3}^3$$ || $$ \begin{pmatrix}4\\4\end{pmatrix}\times\dfrac{2}{3}^0\times\dfrac{1}{3}^4$$ ||

|| 총합 || '''16''' || 32 || 24 || 8 || '''1''' ||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다수자·소수자 여부가 랜덤하게 결정되었다 가정하면, 모든 부분에서 소수자인 사람의 수는 81*(1/3)^4=1, 즉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부분에서 다수자인 사람은 모든 정체성 범주를 고려해도 '''16'''명이나 존재한다.

|| 금발 || 동성애자 || 금발이면서 동성애자 || 금발이거나 동성애자 || 금발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님 || 총합 ||

|| $$ 81\times \dfrac{1}{3} $$ || $$ 81\times \dfrac{1}{3} $$ || $$ 81\times \dfrac{1}{3}^2 $$ || $$ 81\times \left(1 - {\dfrac{2}{3}^2}\right) $$ || $$ 81\times \dfrac{2}{3}^2$$ || $$ 81 $$ ||

|| 27 || 27 || 9 || 45 || 36 || 81 ||

이런 상황에서 상호교차성을 도입해, 금발 학생들이 동성애자 학생들과 연대하는 시도를 한다 가정하자. 얼핏 보기에 이러한 연대가 차별과 관련된 문제를 깔끔히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문제를 더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연대하는 45명의 학생들 중에서도 9명의 학생은 흑·금발 및 이성애자·동성애자 여부에서 모두 피해자-소수자지만, 나머지 36명은 어느 한 부분에서는 가해자-다수자이다. 심지어 연대하는 학생들의 수가 연대하지 않는 학생들의 수보다 많아, '''오히려 주류인 학생이 소수자 입장에 있게 된다. 즉, 주류인 학생들이 역으로 연대를 형성해 소수자 집단을 공격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때 모든 부분에서 다수자인 사람의 비율은 다수자:소수자의 비율을 극단적으로 매우 큰 x에 대하여 x:1이라 가정할 때, 정체성 집단을 무한히 늘리더라도 그 비율은 $${1 \over e}\times100\approx36.8\%$$ 미만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들의 연대는 그저 동성애-금발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카테고리를 하나 더 늘렸을 뿐, 결과적으로 갈등 요소를 더욱 늘린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두발색이 아니라 성적지향에 따른 갈등상황이 유발될 경우 같은 동성애 정체성 사이에서도 갈등국면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셈이다. 이 경우 만일 위의 금발학생 A가 실은 동성애자였다면, A는 같은 정체성 집단에 소속된 이로서자신이 이성애자일 흑발a의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냐고 동성애자 흑발 b를 끌어들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금발 학생 A가 기초생활수급자 흑발 학생 a를 향해 "권력을 내려놓으라"며 윽박지르고, 흑발동성애자b가 이런A를 흑발a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가난하고&병걸리고&소외되고&박해받는 이들까지 싸잡아 비난하다, 서로를 배신자 or 위선자라고 외치며 난투를 펼치는 블랙 코미디가 벌어지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싸움을 유발시킨 흑발차별 문제는 책임 여부만 산산히 부서지기만 할 뿐, 실질적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저런 문제성이 다분한 예시를 꺼내드는 것이 정체성 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기반에 깔려있는 흑백논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나와 적으로 이분할하고 단순화시키니 예시를 들 때도 이면에 깔려있는 복잡한 집단구조를 인식하지 못하고 머리색으로밖에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가 가장 극명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십수년 전만 하더라도 정치 지형은 거의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는데, 2010년 후반부터는 남과여, 세대, 진보와 보수, 진보와 보수 내부에서도 다시 계파로 갈리고, 경제적 계급으로도 쪼개지며, 성 정체성과 지향성, 지역, 학벌, 직업, 안보에 대한 견해 등등 끝없이 분화되고 있으며 갈등의 양상이 예전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힌다. 요약하자면 '''한 개인은 무수히 많은 정체성을 지니며, 다른 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어떤 정체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4.2.2. 모든 정체성 정치는 극단을 향한다.


정체성 정치 환경과 같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본격적인 정체성 정치에선 "무수하게 많은 소수자적 정체성 중 어떤 정체성을 보호해야하는가?" 라는 등의 정치적 문제가 발생시 각 집단간에 '''타협이 불가능한''' 첨예한 대립이 발생한다. 단적인 예로 "억만장자 운동선수 집안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과 저소득층 백인 남성 중 누가 더 억압받고 있는가?",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명문대를 다니는 여성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저임금 노동으로 연명하는 남성 중 누가 더 억압받고 있는가?"와 같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에서 패배 시, 해당 정체성 집단은 자신의 정의관념과 상식 선에선 이해할 수 없는 정체성 보호활동을 목도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사유 때문에 정체성 정치는 내부 정치 과정에서 극단주의적 성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타협하지 않는 자라거나 선각자등의 평가를 받고 고위급 인사가 되기 쉽다. 이는 사소한 변수 만으로도 깨어질 수 있는 부족화 된 정체성 간 연대보다는 성별이나 인종과 같은 변경이 힘들고 그 범주가 넓은 정체성의 단합을 촉진시키는 편이 정치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주를 견제해주는 것이 외부 집단의 견제 및 협력인데 정체성 정치에선 외부집단의 개입=다른 정체성의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해당 정체성 집단에 내부의 적을 심음으로서 그들의 추진력을 크게 파괴하는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으며 무수히 분화될 수 밖에 없는 소수자 정체성 특성상 사소한 변수만으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로 돌변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체성 정치는 각 정체성 파벌의 극단주의 성향을 가중시켜 "선민의식", "피해의식", "배타성" "공격성" "인간성 마비" 등을 주입시키는 것에 특화되게 된다. 이런 극단주의화가 계속 진행되면 '''"모든 (자신의 정체성)은 영구적으로 약자이고, 강자에 대한 혐오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우리에 대한 비판은 모두 (기존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자들의 백래쉬(backlash)에 불과하다."''' 라는 반성의 포기 단계에 이르게 된다.
정체성 정치 옹호 측은 이런 형태의 극단주의화와 폭주를 일부 정치인이나 집단의 문제로 몰아가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정체성 정치 이론 핵심에 이런 방향의 자기발전이 배제될 수 없는 상태로 설계되어 있다고 본다. 사실 이 운동들의 폭주 양상은 너무나도 예측 가능했고 충분히 익숙하다. "억압 때문에 이럴 수 밖엔 없다." 라는 식의 자기정당화는 역사적으로 정체성 정치 집단의 단골 레퍼토리이며, 식민지나 핍박받는 민족의 민족주의는 방어적이고 평화적이기에 해로울 수 없다는 논리가 대표적 예시이다. 폭주하도록 설계된 이념에 폭주를 걱정하는 추상적 개념 몇 개 넣는다고 폭주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했던 것[30]에 불과하다.
점차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정체성 정치는 각종 '''특권(privilege)용어'''를 써가며 다른 집단을 공공연하게 악마화하고, 자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 자체가 혐오라고 주장한다.

4.2.2.1. 극단으로 향한 정체성 : 페미니즘의 사례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므로, 남성에 대한 혐오성립하지 않으며, 젠더 기득권인 남성에 대한 공격은 감수되어야 한다.

2016년을 전후하여 한국 여성계에 불었던 캐치프레이즈

현존하는 다양한 페미니즘 분파는 서로 약간씩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만, 대개 목표로 삼는 공통의 적은 남성성 그 자체이다.[31] 다른 정체성 운동들의 전례대로, 적지 않은 수의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론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곧 페미니즘은 극단주의 세력일지라도 남성성 그 자체에 대응하기 위해 해당 세력을 포옹해 나가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폭주에 대한 경고를 하거나 이에 주저하는 자는 곧 약함,변절자로 평가되어 연구직, 조교수직 단계에서부터 숙청되었고 교수들마저 직위를 박탈당하며 극단주의화가 가속되었다.
대한민국에서도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나중에에서 주요 언론사, 논객, 교수, 정부 관료들이 잠재적 가해자, 기울어진 운동장 등의 용어를 써 가며 정체성 정치 집단을 옹호한 바가 있다(언론의 메갈리아, 워마드 옹호 문서 참고.). 거기다가 다문화적 요소가 한국 내에 거의 없던지라 LGBT를 제외하면 페미니즘이 독보적인 사회적 약자 정체성 집단이 되었고 해외와 대비해도 상당한 속도로 극단주의화 되었다.
현 시점에선 페미니즘은 확고부동한 권력은 가진게 아니다. 그리고 비백인, LGBT, 이슬람주의와 같은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는 사회적 약자연대라는 명분으로 네 정치성 집단이 같이 행동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도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는 기원 후 7세기경 만들어진 교리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을 강제하는데,이들의 사상은 장기적으로 공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생각할 필요도 없고. 페미니스트들과 LGBT 사이는 젠더 이론을 토대로 우호적인 이론 개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미래는 아직 미정인데 TERF처럼 LGBT가 배척되고, 오직 생물학적 여성만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극단주의자도 무시 못할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고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페미니스트는 오직 여성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체 페미니스트 중 에서도 다수를 차지하는 등의 내부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성향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정말 사회 내에서 확고부동한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면, 이들의 내부의 사상을 정리하고, 내적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인데, 보통 이런식의 폐쇄된 환경 속의 싸움은 기본 체급이 크고 완고한 쪽이 승리를 거둔다.정체성 정치의 성향상 극단주의자가 점점 더 힘을 얻기에 혁명을 이끌어낸 온건한 성향을 숙청해버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새력 안에서 가장 기본 체급이 크고 변경하기 어려운 정체성은 다름 아닌 '''생물학적&선천적 여성'''이며, 수많은 정체성 스팩트럼의 특성상 사회 고위층과 연관되어 있음에도 스스로를 약자의 대변인으로 포장하기 매우 쉽다.
그 때문에 이런 정치권력의 힘을 입은 극단주의 세력에 패배한 측은 사회적 매장과 같은 숙청을 당하게 될 것이고[32][33] 극단주의화 된 페미니즘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성성만 인정하는 완전한 여성우월주의로 정착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각종 혐오 정서(남성 혐오, 여성 혐오 둘 다)가 촉발되고 무분별한 혐오 발언과 근거가 없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자국이성을 아예 터부시하는 등 성별문제에 대해서 정체성 정치는 상황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4.2.2.2. 소수는 다수를 억압할 수 없다?

기존 옹호론에서는 소수자가 다수자를 숙청한 사례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역사적으로 반례가 많다.
동서고금 인류 역사 언제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에 비해 극히 소수였다. 또 한 인구수가 많아도 호전성이 강한 전투민족에게 힘으로 밀려서 노예계층이 된 사례는 로마,몽골처럼 역사상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인도카스트 제도를 구상해낸 인도아리아인 상층 카스트는 인도 인구의 5%~10%를 넘은 적이 없지만 2천년간 인도를 지배했다.
그럼 도대체 소수가 어떻게 다수를 억압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을 법 한데, 그 방법은 바로 정치 권력간의 연대였다. 해당 집단이 주변 환경이나 세력과 대비하여 자기 자신들을 '정당한 소수자'를 자처, 이를 통해 다른 집단으로부터 영향력을 끌어 모음으로서 다수를 압도할 수 있던 셈이다. 그리고 만일 이렇게 집중된 권력이 제3자의 견재를 받지 않는다면, 극소수의 정지적&사상적 독선 끝에 사회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코소보 사태 당시 대량학살을 자행하던 세르비아인들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절대 다수인 우리 세르비아인들이 소수자인 알바니아인들을 학살하자." 라고 선동했으면 씨알도 안먹혔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피해를 입은 우리 세르비아인들은 더 이상 이슬람세력의 압제적 만행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선동으로 세르비아인들의 악행을 이끌어 냈다.
나치 독일도 유럽 최대 판도에 유럽 최다 인구수의 게르만족이기도 했지만 프랑스 영국 러시아 3국에게 포위당했고 중앙집권화가 느렸기 때문에 300년에 걸쳐 숱하게 공격받고 매번 패하면서 계속 영토가 줄어들었다. 그 과정에 국제전만 벌어지면 독일인들만 매번 학살당하는건 덤이라 스스로가 약자라고 주장했다.그러니깐 대표적인 정체성 정치 집단인 나치는 결코 다수파가 아니였으며, 오히려 권력으로나 숫적으로나 소수파에 해당했다.
현대만 봐도 로디지아(현 짐바브웨),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는 백인우월주의 정부가 들어서 있었고, 1969년 로디지아에서는 4.5%의 백인이 95.5%의 유색인종을 지배하고 있었다. 르완다의 투치족은 인구의 30% 가량이지만 르완다의 영향력을 차지해왔고 르완다 내전에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긴했지만 2배가 넘는 인구를 가진 후투족을 내전에서 제압하고 지금 현재도 지배층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모국들이 직간접적 영향력을 가해서 백인우월주의 정부가 무너진 뒤에 벌어진 끔찍한 백인학살과 박해사건은 불가능하다는 소수자 박해가 눈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걸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반증사례들이다.
집권 세력, 정치적 주도권을 가진 세력(집단)이 숫자(인구)면에서 (극)소수 였던 사례, 극소수가 절대 다수를 억압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다. 상기의 예시들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다음의 예시들을 보라.
  • 몽골 제국 - 핵심 지배계층인 몽골인의 소수성은 설명이 필요 없는 수준. 과연 1%는 되었을까?
  • 무굴 제국 - 일명 티무르 제국 2로 불리는 국가. 지배층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었으며 종교도 이슬람이었지만, 300년에 걸쳐서 다수 힌두교도 토착 인도인들을 지배.
  • 청나라 - 소수의 만주족(여진족)이 수십배 인구의 한족을 지배.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300년 이상 이집트를 지배했지만, 핵심 지배층은 순수 그리스인으로 이집트인과는 통혼하지 않았으며, 언어도 그리스어를 사용.
  • 유럽 왕족 - 중세 이후 20세기 초까지 유럽 각국은 국가를 구성하는 주류 민족, 문화적 정체성과 상관없이 소수 귀족, 왕족 가문끼리 왕위를 주고 받았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독일 출신 러시아 황제, 그리스어를 모르는 영국 출신 그리스 국왕,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프랑스 출신 나폴리 왕, 스페인어를 모르는 오스트리아 출신 스페인 국왕이 난무하는 역사가 무려 1,000년에 걸쳐 이어졌다.
  • 나폴레옹 - 코르시카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 심지어 부모와 조부모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성향이었다.
  • 히틀러 - 오스트리아[34]의 평민 출신으로 프로이센 귀족들을 통치
  • 스탈린 - 조지아(그루지야) 출신이며 민족적으로는 오셰트계[35]
  • 시리아 - 현대 시리아를 지배하며 다른 종파를 억압하는 알라위파는 전체 시리아 인구의 12%에 불과.
  • 대한민국의 영남출신 대통령 - 1948년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 11명 중 영남 출신은 7명. 비영남 대통령 4명 중 두 명이 짧은 재임기간에 실권 없는 대통령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실질 비율은 7:2까지 벌어진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 중 영남인의 비율은 25~30%선[36].
  • WASP - 미국 전체 인구에서 WASP로 볼 수 있는 인구는 1/4 이하지만, 역대 미국 대통령의 90% 가량을 배출.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은 1인 1표제로 선출함에도 이렇다.[37]
즉, 스스로의 정치적 스팩트럼을 정의로운 소수이자 타 집단 대비 약자=언더도그마로 맞추고, 이런 관점을 타 정체성 집단들에게까지 전이시킬 수 있다면 소수가 동조하는 다수집단의 힘을 입어,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집단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게 가능하다. 올바로 작동한다면 기존에 소외받는 계층에게도 빛을 안겨주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소수집단의 손해와 권리침해를 당연시 하는 악용도 할 수 있는 셈이다.

4.2.3. 파시즘으로의 발전 가능성, 민주주의·자유에 대한 위협


정체성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개인 자신이나 혹은 그가 속한 집단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전 인류적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강요'''할 뿐만이 아니라 극단적으론 '''파시즘'''과 유사해질 수 있다.

정체성 정치에선 자신들이 대변하는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써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깐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수많은 정체성 집단 중에서, 어느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억압 당하는지 누군가는 측정하고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수자 정체성이 무한히 나뉠 수 있는 특성 상 이를 분류하기 위해선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측정 권한이 필요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선 대부분 구조에 정밀하게 개입할 수 있는 극도로 강력한 강력한 행정능력이 필요해진다. 그러니깐 "누가 측정하고 집행할 것인가?"
이 수준의 막대한 측정 및 행정력을 감당할 수 있던 인류조직은 역사적으론 거대 관료집단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애시당초 특정 계층에게 편익이나 불이익을 줄 것을 전제로 만들어 진 이 관료집단에게 소외된 정체성은 측정대상에서 제외되는 방식으로 격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개인단위까지 나뉘어 질 수 있는 정체성 집단의 특성상, 해당 정체성은 다른 소수자를 위협하는 강자로 강제로 낙인찍힌 뒤 일방적인 린치를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진 시스템은 곧 권력 그 자체로 변질되게 되고, 해당 관료집단을 차지하기 위한 각 정체성 집단간의 생사를 건 갈등이 유발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정체성 정치집단은 그들이 선전하는 선전 활동을 들여다보면 잘못된게 하나도 없는 "피해자의 정당한 분노"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언제나 외친다는 공통점이 있고 일견 그게 옳아 보인다는 함정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각 정체성 집단들은 관료집단을 차지하기 위헤 명백히 비윤리적인 사상과 행보에 면죄부를 주면서 까지 충돌하게 된다.
이 극단적 갈등의 끝에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잠재적 위험요소로 보는 편집증적 이데올로기 관료집단이 탄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정체성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거대 관료집단이 어떠한 방식으로 탄생했고, 이들이 어떤 을 할 수 있는지 20세기에 제2차세계대전과 냉전을 통해 처절하게 겪은 적이 있다. 측정 수단을 들고 있으니 언제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대상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다른 정체성 집단을 악으로 규정한 뒤 삭제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런 격한 대립은 분노한 다수자의 대두 끝에 해당 사회 및 관료조직이 진짜 소수자 채로 매장되기 까지 첨예화 되거나, 아예 현실사회 및 민중의 의사표현이 격리된 준 파시즘적 사회로 재구성되어버림으로서 마무리 되기 쉽다. 오히려 진짜로 지켜줘야 할 소수자들이 권력 싸움의 명분거리로만 악용당하며 희생되는 것이다.

4.2.3.1. 예시 : 채식주의 교조화

예를 들어 법으로 채식주의가 강제되는 사회를 떠올려보자.
이렇게 되면 채식주의를 거부하는 '범법자'에 대한 처벌규정은 물론 해당 법을 어기고 동물권을 침해할 육식을 개인단위로 감시감독할 조직이 필요해진다. 만일 이 정도로 확실한 조치가 없다면 사실상 유명무실한 탁상공론에 그처 해당 정체성 집단의 분노만 키우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경우 동물권은 확실하게 충족 될 것이고, 동물애호가들은 그런 것들이 육류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나,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해도 그런 법이 허용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폭력적인 억압을 의미한다. 설령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다수의 항의가 들어오더라고 이미 해당 제도를 실행중인 관료조직은 소수자=채식주의자의 동물권을 수호하기 위해 해당 의견을 묵살할 수 있다. 그 결과 권력의 힘을 입은 교조화된 채식주의 관료집단은 대중과의 소통구조 자체를 파괴한 뒤, 자신들의 정체성 사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에만 골몰하게 되기 쉽다.
이렇게 정체성 정치는 일시적인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있을지언정 일정한 순간이 지나면 특정 사상을 교조적으로 강요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위험한 흉기다. 종교 민족 나치 등의 정체성 정치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던 사람들 중에 이런 이념들이 많은 희생자를 낳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외부개입없이 자정된 경우도 거의 없다. 아내가 남편을 혐오하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증오하게 만들며 엄마가 애를 장애물로 여기고 형제가 서로 반복하게 만들며 이웃이 서로를 죽이게 할 정도로 결국 신 앞에서의 단독자 [38] [39] 인 개인의 양심과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것이 정체성 정치의 가장 끔찍한 점이다.
요컨대, 정체성 정치의 극단성은, 정치라면 무릇 보편적 민중과 상호작용해야 할 '기본적인 소통 구조'까지 저해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람들을 갈라놓고 분쟁을 일이키기는 쉽지만 이 상처는 깊고 오래가며 치유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4.2.3.2. 파시즘화 된 정체성 : 나치의 사례

현대 시점에서야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진심으로 나치를 추앙해?'라고 쏘아 붙이며, 당시 나치당 휘하 독일 대중들을 그저 권위적 권력와 집단사고에 굴복한 것이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당대의 나치는 독일 민족을 '''유럽 전체와 비교해서''' 핍박받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선동한 결과물이었다.
  • 독일 민족국가

우리는 독일 통일 운동에 기반한다. 유럽의 국가들은 민족 단위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데 독일만은 다수의 작은 왕국과 영방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포함한 세계 열강들은 독일 통일을 적극적으로 훼방해왔다. 이 같은 취약함 때문에 유럽 내 대규모 전쟁은 모두 독일 영토인 친영/친프/친러 왕국들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었고 독일은 모든 유럽 국가의 전장으로서 를 입었다. 우리의 민족주의가 성장하면서 통일 독일 제국을 이루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독일이 통일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프/러의 개입으로 모두 실패했다. 나폴레옹과 영국은 서로 사생결단을 내려 싸웠지만 나폴레옹은 라인연방으로 독일을 산산조각내려했고 영국은 빈체제로 독일 제국(諸國)[40]

의 분열을 영구화했다. 실로 그들은 독일을 분열시켜 이득을 얻는 것에는 단결해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끝없는 방해를 물리치는 모든 시도는 전쟁 위협까지 가하며 방해를 했고 결국 우리는 그들의 수도를 점령하기 전까지 우리의 제국 성립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악행을 반성하기는커녕 무한한 앙심을 품었고 결국 그들은 우리의 위대한 제국을 갈라 놓기위해 끝없이 분열책을 펼치고 마침내 단결하여 전쟁을 걸어온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당시 독일민족의 부채라고 할 수 있던 1차 세계대전의 책임은 완전히 사라진다.

  • 패전에 대한 나치의 입장

1차대전이 끝난 후 그들은 독일을 산산 조각내었다. 우리는 항복을 한 것이 아니다. 휴전을 제의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를 비천한 패배자들처럼 원하는 영토를 마음껏 독일 영토에서 가져갔고 우리의 정당한 땅을 폴란드 덴마크등 비천한 국가들에게 할양하도록 강요했다. 러시아에서의 완전한 승리서부에서의 불리한 전선 상황을 감안했을 때 유럽의 오랜 전쟁 습관상 우리는 정당한 휴전 협정을 맺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일단 우리 사이에 틈이 벌어지자 순식간에 공산주의 반란군들이 우리 정부를 무력화 시켰다. 비열한 유대인들은 자금줄을 끊어서 우리 군을 굶기게 만들었다. 그들은 단 일주일 만에 비등한 전쟁이 완전한 패전이 되도록 우리를 몰아갔다. 우리가 끝까지 단결하여 대항했다면 서부전선에서 얼마나 많은 프랑스인미국인이 죽었겠는가? 그들을 충분히 죽이면서 끝까지 저항했다면 우리는 이런 비참한 협정을 맺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가 불리했던 건 사실이지만 우리를 이렇게 가혹한 협정을 맺는 완전한 패전국으로 만든 것은 우리 내부의 배신자들이 우리의 등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구성원들에게 남아 있던 패전에 따른 역사적 교훈은 완전히 부정된다.

그들은 우리를 중앙집권 정치를 펼치지 못하도록 영방국가로 되돌려 놓았다. 이에 대한 정당한 반발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위대한 독일민족은 절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악한 그들은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도 믿지않는 효율성을 가진 체제. 그들이 이상적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한 소위 "바이마르 공화국" 을 우리에게 강요했다. 우리는 그따위 괴뢰 정부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 독일 민족의 통일 국가이자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제3제국을 이끌어나갈 정당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만이 유일하다.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은 선진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선전했다. 보라. 어떤 제국들이 이런 체제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정치체제의 본질은 "절대로 작동하지 않게 고안된 것"이다. 이런 열강이 강요한 거짓된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는 우리의 도덕 체계와 정치 체계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

이 시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핵심이던 민주주의와 시민 의식은 뿌리까지 완전히 부정된다.

지방자치란 것은 다름아닌 독일의 분열이다. 그들은 단일한 영도력을 가진 강한 독일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오로지 독일인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만을 바란다. 민주주의란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신성한 독일 황제의 권위 하에 오랫동안 단일 제국을 이루어왔다. 독일민족은 단일한 영도력을 가진 "퓌러"에 의해 지도되어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 못지않게 우리도 이런 강력한 권력 체제를 가질 자격이 있는 민족이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체제. 하나의 총통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방자치는 물론 나치를 제외한 모든 정치집단의 존재의의가 완전히 부정된다.

우리의 위대한 독일 제국을 괴롭히는 것들 중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사악한 금융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독일의 모든 부를 전쟁 배상금으로 빨아들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는 끔찍한 부의 착취를 겪었다. 그러나 독일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부의 착취는 금융가들이 조장한 것이데 모두에게 알려져 있듯이 금융업계는 사악한 쥐새끼들이 지배하고 있다. 독일 영토내에 암약하는 이 해로운 독극물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사주받아 금융 업계를 지배하고 독일인들을 갈취한다. 그렇다! 그들은 '''유대인'''들이다. 이들이 착취하는 것은 우리의 부 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제국을 붕괴시키고 제1야당을 이루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보라. 영국땅에 사는 사악한 유태인인 마르크스는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 독일을 뿌리까지 흔들고 있다. 그리고 독일 땅의 유태인들은 우리의 땅과 재산을 긁어모아 영국에 가져다 바치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줏어먹어 비대하게 살이 쪄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었을 보편인권 의식 및 최소한의 도덕관까지 완전히 부정된다.

이렇게 위의 나치의 선전도 정체성 정치에 대해 아무런 면역이 없을 경우 현대인들 입장에서조차 매몰되거나 반박하기 어렵게 되어버린다. 실제로 나치 집권 당시 독일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며 나치를 지지한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결과 나치의 논리를 받아 들인 당대 바이마르 공화국은 역사상 유래없던 전쟁에서 패한 지 고작 20년 만에 모든 형태의 역사적 교훈을 망각한 뒤 압도적인 지지 속에 새로운 대 전쟁을 시작했다.
나치의 성장이 몇몇 극단적 정체성 세력과 다를바 없다는 건 바로 이것들이 전부 정체성 정치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모든 형태의 정체성 정치는 암묵적으로 자신들이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할" 자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사악한 "타자"에 의해 압박받고 있고 이들을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척결"하고 "우리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상향"을 만들자는 주장을 가지고 있다. 그 정체가 독일 민족이냐, 노동자냐, 여성들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들의 정치적 수사는 서로 유사하며, 이들이 정치 집단화되고 타인들에게 적대감을 보이며 정치권력을 손에쥐면 다른 정체성 집단에 대한 폭압으로 폭주한다는 것까지도 유사하다.
여담으로 이 모든 참사가 끝난 뒤, 전 세계에선 어디선가 독일 '민족주의'와 '우생학'이라는 소리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물론 독일내에서는 이게 훨씬 더 심해서 일단 자국우선주의 관련 정책이나 발언이 나오기만 해도 진저리를 칠 수준이다. 독일 민족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던 나치가 역으로 독일민족의 운신의 폭을 좁혀버린 셈.

4.2.4. 잘못된 연대의 창궐과 퇴행적 진보


신좌파에서 이야기하는 정체성 정치는 다른 집단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며 메갈이나 대안 우파에서 보이는 반대 집단에 대한 적대와 확연히 다르다고 언급된다. 즉 서로 다른 소수자 정체성들이 서로 연대하므로 20세기에 실패한 정체성 정치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정치세력들이 공동의 적 혹은 공동의 이익이 있으면 연대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했다.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 상황에선 패배한 측은 억지로 상대적 강자로 낙인 찍힌 뒤 격렬한 박탈감과 동시에 실질적 손해를 입기에 각 정체성 파벌들은 일단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상대 정체성 파벌을 비판하거나 대중의 지지 및 정체성 간의 단결을 끌어내기 위해, 서로간엔 아무런 공통점과 합의점이 없긴 해도 손을 잡아야 하며, 이론적으론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소수자 집단간의 교류 끝에 서로간의 공통분모를 찾아 유화적으로 변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최소한의 의사소통만 가능한 일시적인 회색계층만 형성된 뒤, 공조가 파국에 달하는 그 순간 해당 정체성 세력 내에서 근본적 우위를 가진 극단주의 세력에 따른 숙청 및 내부정화만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공조를 통한 사회적 발전 대신 일시적 동맹을 맺거나 파기하길 반복하는 춘추전국시대와 유사한 상황이 구성된다. [41]
그리고 이런 난세에 가까운 정체성 파벌간의 다툼은 대중의 피로를 유발시키기 쉽다. 대중의 시선에선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이 난장판 속에 누가 소수자고 누가 구조적 강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누구라도 좋으니 질서만 잡아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버린 대중들의 의해 명백히 소수자 탄압적인 사상이 재평가 되며 부활하는 지경이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정체성 정치는 극단적으로 자신의 집단 외 다른 집단을 공격하므로 이미 사라진 집단마저도 되살릴 정도로 퇴행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즉,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예전에 도퇴되었던 반진보적 집단들을 새로운 정체성 집단으로 되살리거나, 극단주의 성향을 지닌 정체성 집단이 아무련 자기반성도 하지 않은 채 상호간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연대하며 서서히 덩치를 불릴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과도기 단계에 불과한 통제된 극단성이라는 옹호마저도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4.2.4.1. 캐나다의 '법안 C-16 사건'

법안 C-16은 캐나다 인권법에서 금지 된 차별 근거 목록과 형법에서 증오 선동, 제노사이드 선동으로부터 보호 된 식별 가능한 집단의 특성 목록에 "성 정체성 또는 표현"을 추가하는 법률이다. 때문에 우파 관련 정체성에선 다른 정체성 집단은 몰라도 성소수자 운동권이 어떻게 이성애자들을 억압할 수 있겠나? 라는 반박에 대한 근거자료로서 주로 사용되어 왔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양 진영의 선별적 자료추출 및 선동- 그리고 이에 따른 전근대적 차별발언의 대두였다.
  • 성차별주의라는 입장.
조던 피터슨에 따르면 이 법안은 '모든 젠더지향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명사로 불릴 권리가 있고 '''이에 반하면 처벌한다''''는 법안이다.[42] he she가 아니라 ze/sie/zie/ey/per등인데, 피터슨은 '자신이 특정 대명사로 불리고 싶다면 타인에게 그 필요성을 요청하고 인정받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정직당하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해고당할 위기에 처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불러주길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주겠지만 그것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지만, 진보진영은 피터슨 교수를 나치, 트랜스혐오자(transphobe)로 몰아가며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했다. 하지만 피터슨은 '기존의 영미권 법체제에 누군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한다거나, 말하면 안된다는 법안이 존재했었던 적이 없고, 이런 종류의 검열과 언어적 강요를 허용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국가에서나 있었던 법안이었다'고 변론했고, 토론토 대학은 숙의 끝에 그를 해고하지 않기로 했다.
피터슨은 정체성에 대한 호칭은 타인과의 관계성 하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목수라는 정체성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목수로 보여질만한 기능과 활동을 보여줘서 인정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재소를 열고 가구를 만들어 판매하는 모습등을 보여주면 자연히 "목수네집"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째로 날리고 그저 본인이 목수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타인이 그를 목수로 인정할 이유도 없는데 그렇게 부르도록 법안으로 강제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소수자 집단이 주장하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타인은 당신의 생각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 라는 식의 생각은 아직 사회화가 되지 않은 3살짜리나 할만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애가 놀이터에 간다면 도대체 누가 놀아주겠냐고 반문하며 그 3살짜리 아이에게도 그런 사고방식을 유지시키는 것은 절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언중에게 ze/sie라는 별도의 대명사를 필요로 할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면 강요하지 않아도 남들이 그렇게 불러줄 것이고, 그런 대명사가 필요할 정도의 차이가 없다면 그렇게 부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트랜스젠더 공동체 내에서도 성소수자 정체성을 다른 성별과 분리하고 정치집단화해서 정체성 정치를 하고싶어하는 "운동권"을 제외하면 별로 인기없는 운동이다. 많은 수의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을 별도의 성이 아닌 편입대상의 성별로 봐주기를 원한다. 본인들에 대한 별도의 대명사를 개발해서 번번히 남들이 자신이 ze인지 sie인지 물어보는 "프릭쇼"를 하는게 싫으므로 he나 she외의 다른 단어가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she나 he로 불리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트랜스젠더도 있을 것이다. 안드로진이나 에이젠더, 제3의 성 등의 항목을 참조하면 감이 올 것이다. TERF는 이런 정체성을 그냥 복장도착자 남성, 혹은 자신들이 부수려고 애쓰는 여성성이라는 신화를 강하게 동경하는 변태남성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건 돌고돌아 트랜스젠더라는 그룹이 최초로 소개되었을때 대중이 보인 반응과 거의 동일하다. 이런 부분 때문에 논쟁은 사실 끝이 없다. 결국 이걸 일일히 구분해서 만드는 대명사가 그들 그룹에서는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왜 남들이 그 사람을 부를때 외적으로 차이도 없고 자신과의 상호작용에서 다른 트랜스젠더 그룹과 다르지 않은 이들을 일일히 신경써야하느냐는 말이다.
이건 이미 존재하는 카테고리에 대해 어떤 특정인의 정체성을 강제로 정하는 것도 아니고 트랜스 젠더를 인정하지도 않았던 트랜스젠더 혐오와는 다른 문제다. 너 하나 때문에 카테고리 하나 더 만드는거 귀찮고 나한테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대충 she든 he든 니가 정하고 그외 엔 신경끄겠다고 하는 문제다. 뉴욕시 기준 젠더리서치 그룹이 연구한 공적으로 보호받는 성별 정체성이 31개인데 사실 학문적으로 따지면 200개도 넘어간다. 공적으로 인정받는 것만 31개나 되는 복잡한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트랜스젠더와 퀴어들을 위해서 다시말해 너무나 종류가 많아서 각 카테고리당으로 따지면 평생 한번 만나보기도 힘든 사람을 위해 남들이 그 대명사와 활용형을 일일히 외우고 구분할 이유를 제시하는건 너희의 문제라는 것이다. 수를 충분히 불리던가. 퍼레이드를 하던가 해서 남들에게 알리라는 의미이다. 난 시간이 너무 많이 심심해 죽겠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길 강박적으로 바래서 그걸 외우고 활용하자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주변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서 그 사람이 불러주길 바라는 대명사 딱 하나만 외우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신종 관종들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건 내 자유에 해당한다. 어디서 누가 정했길래 모두가 그렇게 부르길 강요하고 심지어 그걸 어기면 처벌한다고 하는건 얼마나 급진적인 아이디어인가?
이런 별도의 대명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룹은 모든 PC언어 순화 운동처럼 굉장히 급진적인 소수 그룹에서 급작스럽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정체성 정치는 이런 급진적인 아이디어가 순식간에 대표의견으로 둔갑하는 매직이 번번히 발생한다. [43][44] 이런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타인의 판단력에 대한 법적인 억압이며 그런 제멋대로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도록 권장하는 법체계는 생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억압하므로 명백히 해롭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렇게 불리고 싶다면 그렇게 행동해서 사회적으로 받아 들여지도록 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원하는 목표가 있다고 해서 동의를 받지도 않고 단지 '''법으로 강제'''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수단적"으로도 해롭고 "사회적"으로도 해로울 뿐이라는 주장이었지만 여전히 성소수자 집단에서는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 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 법안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법안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저 허수아비 때리기, 혹은 허풍이나 과장쯤으로 취급하는 주장을 펼치며 법안 어디에도 he/she라 불렀다고 처벌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ze/sie 등의 호칭을 쓰지 말자는 주장도 아니고 '그런 호칭을 도입하기 위해선 법적인 강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교수가 직장에서 정직당하고 짤릴 뻔 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온갖 인격모독과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다. 단지 호칭의 도입 절차를 비판했을 뿐인데도 이런다면, 호칭 자체를 반대했을 경우엔 어떤 일을 당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데도 법안 자체엔 명목상의 처벌조항이 없다고 눈 가리고 아웅한다고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 이에 따른 반론
법안 어디에도 ze/sie/zie/ey/per같은 성중립적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내용은 없어 SJW가 아닌 이성적인 진보주의자들도 일부 보수파들이 의도적으로 SJW, 퇴행적 좌파들과 논쟁해서 허수아비 때리기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제로 '''캐나다 법률전문가들에 따르면 선호되는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은 행위 자체는 적개심이나 증오심 표현을 위한 법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절대로 처벌할 수 없다고 한다.'''[45]
성 표현과 성 정체성을 캐나다 인권법의 보호 근거로 추가하고, 증오 선전, 대량학살 선동, 형량 악화 요인을 다루는 형법 조항에도 추가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성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 처벌한다고 해석하는 데에는 논리적 비약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성 표현에는 남성과 여성도 있는데 당연히 남성을 여성이라고 부르고 여성을 남성이라고 불렀다는 이유, 혹은 남성을 남성이라 안 불렀다고 '''처벌되지 않는다.''' Bill C-16 법은 딱 그정도 수준의 법률이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반대하듯 공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성차별을 반대하는 일종의 차별금지법에 더 가깝다.
실제로 캐나다대법원은 2013년 한 사건에서 누군가가 인권법을 위반하기 위해서는 증오심을 적극적으로 조장할 필요가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국민은 취약계층의 권리나 특성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거나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증오와 그 폐해에 노출될 수 있는 객관적 방식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성중립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려면 캐나다의 형법을 개정하여 "집단학살"과 "증오의 대중적 선동"이 아닌 논쟁적인 언행들을 싸그리 다 범죄화해야만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피터슨이 비난받은건 법적 문제가 아니라 교수로써의 도덕성이다. 선호되는 호칭을 강제하는 법이 아닌데 그러한 법이라고 선동하다 짤릴 뻔하고 성소수자 운동가들의 과민반응을 유도해 SJW라고 선동하며 유튜브를 통해 PC충들이 장악한 자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을 만드려 한다!며 전세계 시민들을 상대로 신나게 극우가짜뉴스를 퍼트려놓고 "직장에서 정직당하고 짤릴 뻔 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온갖 인격모독과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 재반론
반론하는 측에서는 피터슨 교수의 주장을 일면 호도하고 있다. 먼저 법률로써 무언가에 대해 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강제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피터슨은 이를 우선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사실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언어의 관습에 따라 'he' 혹은 'she'라고 부르는 것이지 법으로써 그게 강제되어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반론 측에서 먼저 지적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자승자박 꼴의 논리를 펴고 있는데, 다시 말해서 '''성별을 지칭하는 대명사는 캐나다는 물론 영미 문화권 어느 나라에서도 법률로써 강제되고 있지 않다'''. 하물며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에 대한 법률적 강제가 필요한가? 먼저 피터슨은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반론하는 측의 논조는 '너 이거 어겼지? 그래서 너 잡혀감? 거봐, 안 잡혀갔잖아. 그래서 니가 하는 게 선동이란 거야'라는 식이다. 피터슨이 지적하는 요점은 다시 말해 법률로 언어를 제정하려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 특별한 강행 규정이 없기에 상관이 없다거나 차별금지법 수준의 법안이라는 식의 논증은 좋은 반박이 아니다.
피터슨이 비판했던 부분은 법안 자체의 처벌의 수준 같은것들 보다는, Bill C -16 법안 발의가 가지는 상징성에 대한 부분이 컸다. 나치정권등의 파시즘에 대한 연구경험을 바탕으로 '급진 좌파세력들이 표현의 자유를 법으로 제한하기 시작하는 현 상황은 독재정권이 시작되는 상황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언어에 대한 장악을 필두로 한다.'라고 언급했다. 법률적인 문제를 비판했다기 보단, 파시즘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다분한 사회적인 상황을 비판한것이다. 반론에 주장된 대로 Bill C-16 법안이 실제로 언어를 통제하며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처벌 될 수도 있다고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소지는 남겼으나, 그것 뿐이지 실제 논지와는 다르다.
즉 Bill C-16 사례 그 자체는 법률로서 성소수자들의 정체성이 강요된 사례라고 단정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동반된 좌 우를 가지리 않고 일어난 선동과 선별적 자료해석에서 정체성 정치의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다.

4.2.5. 부정적 측면의 확대


정체성 정치는 이제 더 이상 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체성 정치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한 이후,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민주당좌파들의 정체성 정치에 지친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해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당선에는 '소외된 자국민'이라는 중장년층 이하의 쇠락한 직종에 종사하는 그룹의 정체성 정치가 크게 작용했다는 의견이 있다.

4.2.5.1. 다수자 중심 정체성 정치= 대안우파의 적대적 공생

여기서 정체성 문제의 가장 심각한 점이 보이는데 정체성 정치에 지친 유권자들이 반대 방향의 정체성 정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더이상 사회 공통적으로 추구할만한 진보적 가치가 실종되어버린 결과 소수자를 보호하겠다는 정체성 정치에 '''"우리가 바로 소수자 담론에 희생된 진정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다수자 중심의 정체성 파벌=대안우파'''가 난입하게 되며, 이들의 개입 끝에 정체성 정치 그 자체가 붕괴하거나 건설적인 논의를 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버린다.
아래에서 길게 설명되었다시피, 트럼프의 지지층은 철저히 '''자국우선주의'''와 '''반이민''', 그리고 기존 신좌파 사상에 극단적인 반감을 보이며, 배타적인 성향을 공유하고 있다. 유럽/미국 백인 남성은 여전히 인구비례로 굉장히 큰 인구집단이지만 이들이 진보세력에게 해줄 수 있는건 도태되어주는 것일 뿐이었고 그 박탈감과 위협의식이 대안우파를 성장시켰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한다는 진보담론은 전혀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인종/성별 대립으로 소모되고 있다. 서구에서 급속히 세를 확장한 권위주의 신우파[46]도 반이민정책, 제조업 노동자 우대정책, 적극적인 자국중심주의와 국가주의 등으로 스스로 이미 '중장년 이하의 남성' 정체성 정치임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대안우파를 비난하는 것이 우스운 일인 것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도태되어달라고 하는데 순순히 그렇게 해주는 집단이 있을리 없고 그게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른 집단을 매도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시도는 이너서클에게는 신선한 진보이며 바람직한 사회변화겠지만 아웃서클에게는 그렇지 못하며 일방적으로 두들겨팼는데도 반격당하는 일에 놀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을 껴안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며 이르던 늦던 닥칠 일이었다.
과거 나치즘(National Socialism, 민족 사회주의)부터가 게르만 계열 백인들의 '''인종 정체성'''에 호소하는 사상이다. 즉, 한쪽에서 정체성 정치를 시작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모두가 피해자 또는 가해자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중도주의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결국 가해자로 내몰린 측에서는 방어를 위해서라도 정체성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근본부터가 집단 정체성에 호소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약자라서 해도 되지만 너희들은 권력이 있으니까 하면 안된다.' 식의 진영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지적받는다.
나치스를 잠재운건 독일의 노력뿐만이 아니다. 사실 한국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독일은 서방에 별로 양보한게 없다. 독일민족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사실 프랑스가 가장 많은 희생을 했다. 전쟁 초반에 나치에게 패전하고 어마어마한 굴욕과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전례대로라면 독일에 가장 가혹한 보복을 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ECEC(유럽 석탄-철강공동체)를 통해서 점령할 수 있던 오랜 자원/영토 분쟁지역지역을 포기함으로서 분쟁을 종결시켰으며 동쪽의 잃어버린 영토를 아쉬워하는 독일인들을 위해 국경을 서로 개방했다. 독일에게 EU라는 공동의 목표를 제시하고 양국의 국사교과서를 공동으로 발간하며 자국중심의 역사관을 수정하는 희생으로 적극적인 화해를 시도했다. 그리고 2차대전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독일의 영토 할양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이런 대응은 프랑스 내부 강경파나 심지어 주류여론에까지도 어긋나는 것이었는데 많은 논쟁과정끝에 프랑스는 결국 이걸 받아들였다. 1차대전 종전 후 독일 영토를 병합하고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가혹한 전쟁배상금을 물린 대응과 판이한 대응이었는데 이것은 독일과 공동으로 추구할만한 목표를 가지고 함께 노력해나가는 것만이 양국간의 불행한 소모전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배웠기 때문이다.

4.2.5.2. 미국 내 안티 PC 여론의 확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인 세계적인 정치 철학자 마크 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The Once and Future Liberals)라는 저서가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책이다. 마크 릴라는 이 책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한 원인을 정체성 정치로 규정하면서 진보가 재집권하기 위해서는 정체성 정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8년 6월 10일,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한국어판이 번역 출간되었다. 해제는 유창오[47]가 썼다. 출간 직후 리얼뉴스 등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대안 언론에 서평 기사가 게재되고 출판사에서 자체 제작한 카드뉴스 광고가 SNS 상에서 화제가 됐다. 힐러리가 여자라서 졌다고?
해당 저서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해왔던 전통적 좌파들, 혹은 대안우파 세력[48]들은 쌍수들고 책의 출간을 환영했지만, 반대 세력들은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특히 정체성 정치의 끝판왕인 페미니즘 진영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사상이 과도기적 사상에 불과하다는 책의 메시지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4.2.6. 비판적 관점에서의 개선 방안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체성 정치가 한 개인이 여러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을 분열시키며 다른 정체성 집단을 혐오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헬렌 마그라리타는 베를린에서 일하는 여직공인데, 그녀는 독일인이기도 하고 노동자이기도 하며 여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한 정체성을 선택할 것을 서로 다른 정체성 정치 집단에 의해 요구당한다. 그녀가 그 셋 중에 무엇을 선택하건 자동으로 다른 정체성 정치잡단의 배신자로 선택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정체성 정치의 함정은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각 개인의 정체성은 한개, 두개의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계나 역학도 그런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의 분파 중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인 경우가 대표적 예시다.[49] 실제로 이들은 상류층 여성과 그 외 하류층 여성의 생활상, 가치관. 삶의 태도의 차이에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오로지 어떤 생식기를 지니고 있는가에만 집중하며 이를 정체성으로 확정하고 남성 전체를 가부장으로 확정하고 공격한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수 없이 많은 집단 정체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체성 정치 집단들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너에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것을 강요한다. 그들은 이 질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들의 폭정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독일인 가톨릭 수녀에게 기독교인, 독일인, 노동자, 여성 넷 중 어느 하나의 정체성을 택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각 개인의 정체성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정치집단"이 정할 수는 없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만약 독일인 수녀가 낙태에 대해 "불지옥에 직행할 극악무도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낙태는 죄악이라고 가르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기독교 쪽은 환호하겠지만, 페미니즘, 특히 래디컬 페미니즘인 경우는 명예남성 취급을 할 것이다.
물론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이슬람 페미니즘, 20세기 후반부터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처럼 정체성 자체를 혼합하는 시도는 저런 문제점은 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차도 기본적으로 정해진 형태와 분량의 믹싱만 허용할 뿐이기 때문에 A에서 파생된 A'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A'를 기반으로 근원 집단인 페미니즘과 이슬람 등과도 트러블이 생긴다. 공통의 적을 무찌르기 전까지 외연을 넓히기 위해 저런 서로 다른 정체성의 조합을 통한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공통의 적을 상대로한 일시적 연대를 정당화할 때까지만 의미가 있고 정체성 정치 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게 현실적인 문제를 완화시켜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근대이전 가장 강력한 정체성 집단인 종교 단체들은 완전히 다른 이교도보다 자신들의 약간의 변종인 이단에 더욱 적대적으로 대응했고 중국수정주의자들은 농민을 포함시킨 보다 완화된 사회주의라고 주장했지만 소비에트교조주의자들 보다 훨씬 강한 강도의 순수성 운동을 진행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정체성 정치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이 정치적 입장이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무엇을 이상으로 삼는 것인가?'''가 아니라 '''너는 무엇인가?를 기반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 정치집단은 끝없이 분열하고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를 타자화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독교 문명 vs 비기독교 문명으로도 나뉠 수 있고 유럽인 vs 아랍인 vs 기타 인종으로도 나뉠 수 있으며 주류백인 vs 이민자 등이 될 수 있고 정교회 vs 가톨릭 vs 개신교의 구도도 가능하며 주류교단 vs 이단 교파들로도 분열될 수 있다. 정체성 정치집단은 언제나 끝없이 분화되고 분열을 만들어낸다. 정체성 정치에 익숙한 자들은 자신이 그 집단에서 중요한 간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카테고리 안에서 희생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조직하여 갈등을 창조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의 주요 동인이 그들이 선전하듯이 사회를 더 좋게 만들기보다 세상의 불확정성을 부정하거나 책임 회피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은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다''''만큼 달콤한 이야기는 없다. 화산폭발은 부정한 행위를 하는 자들에 대한 신의 응당한 징벌이니 이단자와 이교도를 찾아 처단해야 하고 비가 안오면 왕의 부덕의 탓이니 왕을 제물로 바쳐서 신을 만족시켜야한다. 전염병이 돌면 우물에 독을 푸는 사악한 마녀를 찾아 화형시키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모르는 이유로 벌어진 세상의 문제를 어떤 악당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조차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치환시킬 수 있고 대상을 배제하는 걸로 손쉽게 해결책을 구상할 수 있다. 이 논리를 적용하면 설명과 해결이 안되는 사회문제가 없어진다. 이것은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실과는 아무 관계 없는 것이지만 소집단의 권력을 쥐고 싶어하는 사상가들의 권력의지가 이것을 바로잡기는 커녕 더욱 부채질한다.
이는 전근대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독일이 끝없는 내전으로 고통받았던건 사실이지만 남이 개입하지 않아도 독일인들끼리도 시도때도 없이 내전을 벌였던 것은 무시하고 오로지 외부의 제국과 내부의 불순 유대인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독일인들에게 너무 달콤한 것이었고 산업시대에 늘어난 인구로 인해 삶이 질적으로 저하되고 생산력이 늘어난만큼 경기진동의 폭이 커져 생긴 실업문제는 그저 탐욕만 부릴줄 아는 자본가 탓이라고 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이슬람권에서 원리주의자들이 불황이 닥치고 세상이 혼탁하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것은 알라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교도들이 알라의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하면 정신적으로 고양된다. 사회변화로 인해 여성들의 노동력이 가치를 가지게 되자 이전에 가치가 없었던 것은 그저 남자들이 생성해내는 가부장제의 굴레 탓이었고 지금 여성들이 천국같은 삶을 누리지 못하는건 모두 남자들의 탓이라고 주장하면 자존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구상하는 정치는 언제나 실패한다. 실제 현실에서는 유대인을 죽이고 자본가를 죽이고 남자들을 거세하고 이교도들을 개종시켜도 그들을 괴롭히는 문제가 전혀 해결될 수 없다는건 정체성 정치의 논리하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문제다.
정체성 정치로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만들어지고 좋은 시도라 일컬어지는 일들이 아무리 실패해도 언제나 단어, 설정, 대상만 바꿔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이들에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구호는 이들의 목적이 아니라 책임회피와 거짓된 인과관계를 설정해 안정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 그를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심가들의 권력 의지를 그럴듯하게 숨기는 자기합리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는 그것이 추구하는바가 비현실적이거나 달성하기가 어려워서 문제가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쉬운게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편향과 부족주의적 마인드 덕분에 우리 집단과 상대 집단을 나누고 너희가 부당하게 억압을 받고 있다고 까지만 말하면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자동적으로 굴러간다. 대중 동원철학이 어려워봐야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런 원시적인 욕망들에 쓸데없이 난해한 개념을 부여하고 선동하는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고 그래서 그 피해가 끔찍할 정도로 확산된 것이다. 정체성 정치로 어린애들을 선동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걸 부수는 게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게 진짜 문제다. 정체성 정치집단이 입에 달고 사는 소위 '공부하세요'라는 이야기는 근대 이전 가장 강한 종교 집단의 '성경/불경 공부하세요.'라는 이야기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
'무엇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가'에 대해서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입장이라 할지라도, 여러가지로 의견이 나뉜다. 여러 의견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특이점주의자들은 오로지 과학기술만이 인간의 삶을 실제로 더 좋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종교, 윤리를 통해 그 스스로의 인격 도야를 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개선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조던 피터슨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정체성 집단들의 투쟁이 아니라, 개인의 철저한 자기성찰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후자쪽에 속한다. 다소 낭만주의적인 입장인데,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고전적 자유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는 좌파를 집중적으로 비판하지만 페미니즘이나 이슬람주의 정당들을 싫어하는 것 만큼이나 헝가리의 빅토르 반스총리처럼 유럽의 기독교 정체성을 지킨다거나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핍박받는 남성들을 조직하자는 식의 남성주의, 대안 우파 운동도 싫어한다.
정체성 정치에 대항하는 방법은 정체성 정치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지 새로운 정체성 정치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연세대의 예처럼 여학생회학생인권위원회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것으로 변경해서 정체성 정치를 그만두는 것이 옳은 것이지 여학생회가 있으니 남학생회를 만들어서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병존하자는 식의 해법은 정체성 정치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4.2.6.1. 반론?

서구권에서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사회적 움직임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학생인권위원회 자체도 엄밀히 따지면 학생 정체성 정치인 것이다. 신체장애인이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벌여도 정체성 정치고,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차별을 반대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도 정체성 정치이다. '''서구권에서 정체성 정치는 이러한 가치중립적 의미로 쓰인다.'''[50] 모든 형태의 정체성 정치가 과연 필요없는가? 실제로 서구권에선 강경 우파~극우가 아닌한 정체성 정치를 역사속에 파묻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강경우파가 아닌데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은 모든 형태의 정체성 정치 자체를 무필요하다고 매도하는게 아니라 어떤 정체성 정치가 지나친 것인지 비판하거나 혹은 정체성 정치에'만' 함몰되지 말고 모두를 위한 시민적 의제에도 적극 관심을 가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4.2.7. 좌파 및 중도파 입장에서의 정체성정치 비판


구좌파가 정체성 정치를 거부한다고 해서 결코 차별을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니다. 좌파는 모든 억압받는 대중들의 연대를 통한 차별의 철폐를 추구한다. 그런데 '''내 옆에서 같이 연대하는 동지를 차별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는가?''' 구좌파가 정체성 정치를 거부하는 이유는 자의적인 잣대를 가지고 대중들을 분열시키는 배타성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는 대중들의 피로감을 가중시키고 결집력을 약화하여 오히려 |차별을 철폐하는 원동력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민주당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세계 대부분의 정당들이 표방하는 사상인 사회자유주의는 정치 스펙트럼에서 좌파 자유주의에 해당한다.[51]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사회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곤 했던 약자를 위한다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곤 했다.
이렇듯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대는 우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좌파/중도파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정체성 정치를 반대하는 좌파와 중도파들의 가장 큰 걱정은 딱히 정치덕후가 아니라서 정치 자체에 큰 관심이 없던 일반 대중들이 갑자기 터진 정체성정치 이슈에 피로감을 느낀 나머지 대안우파로 흑화하는 것이다.
https://news.v.daum.net/v/20200302205825790
국내의 대표적인 진보언론 중 하나인 시사인에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 기사를 2020년 3월 첫째 주 표제 기사로 실었다. 주로 민주당의 팬덤 정치와 묶어서 비판하고 있다.

5. 관련 정당


공식적 혹은 객관적으로 Identity politics로 분류되는 정당만 적음.
  • 유럽연합
    • 유럽자유연맹[52] - 유럽 각국 내 소수민족 정체성과 인권보호를 내세우는 진보주의 정당.
    • 유럽 기독교 정치운동[53] - 기독교 정체성을 내세우는 기독교 민주주의 중도우파~우익정당.
    • 정체성 민주당 - 각국의 다수자 내셔널리즘을 표방하는 우익~극우 정당
  • 핀란드
  • 네덜란드
    • 50플러스 - 연금생활자(주로 노인과 장애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도 정당
    • 덴크 - 네덜란드 내 무슬림 소수자 권리를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 좌익 정당
  • 터키
    • 인민민주당 - 쿠르드족 보호와 페미니즘을 내세우는 좌익 정당.
  • 캐나다
  • 말레이시아
    • 말레이시아 인도인 회의[54] - 말레이사아 내 소수계인 인도인 정당. 국민전선 소속.
    •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 - 강경 이슬람주의 우익 정당.
    • 통일원주민당 - 말레이인 민족주의 정당
    • , [55]
  • 내셔널리스트 정당
  • 여성주의 계통 정당
  • 동물권 정당

6. 참고



[1] 이 때문에 사람뿐만 아니라 개, 고양이 등의 특정 애완동물이나, 혹은 모든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 심지어는 추상적인 자연에 까지도 정체성을 부여한다.[2] 물론 사상의 전제와 맥락을 다 알아야 하므로 사실상 지성인마다 혹은 학자마다가 된다.[3] https://books.google.co.kr/books?id=1hHtCwAAQBAJ&pg=PA150&redir_esc=y#v=onepage&q&f=false Wiarda, Howard J. (8 April 2016) 1st pub. Ashgate:2014. Political Culture, Political Science, and Identity Politics: An Uneasy Alliance. Abingdon: Routledge. ISBN 978-1-317-07885-2. OCLC 982044314[4] 다만 신좌파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내용을 차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명백한 오용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권위자들은 처음에는 정체성 정치를 지지했으나 실상을 알게 된 이후에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대표적으로 말년에 68혁명을 겪으면서 학생들과 갈등하다가 불운하게 사망한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있으며,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에 분개하여 좌파 파시즘이라는 용어로 신좌파의 폭력적인 행태를 비판했다. 심지어 '''신좌파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조차도 '''신좌파가 자신의 사상을 오독했음'''을 명백히 주장하며 비판적 지지를 표방했다.[5] 단편적으로 대안우파들의 정체성 정치는 타 인종에게 적대적이지만 서구권 신좌파 내의 흑인이나 히스패닉등이 내세우는 정체성 정치는 다른 사회적 약자(소수자)들과 연대한다.[6] 프랑스의 철학자로 현대 페미니즘의 기틀을 세웠다고 한다.[7] 던저지다.[8] 물론 한국 국내에서는 서구에 비해 이슬람공포증만큼 반유대주의도 꽤 심각한지라 시오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우파 사상에 주화입마한 조던 피터슨이 시오니즘을 좌파들의 다른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수준으로 시오니즘을 비판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주로 우파계열이지만) 현시대에 가장 폭주하는 정체성 정치중 하나 아닌가?[9] 이슬람 사회, 사회 발달이 미약한 저개발국, 저소득층, 흑인, 성소수자인 여성들, 남성 소수자들과의 연대 등. 기존 페미니즘이 남성을 적대시하고 여성들의 차별이 환경과 사회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무시한다는 비판과 한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10] 진지를 빨자면 물론 해석에 따라 차이는 있을수 있으나 노동계급 그 자체는 소수자가 아니다. 그들이 소수자였으면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고 학살한 소련같은 사례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11] 여담으로 레디컬 페미니스트인 메갈리아 워마드는 생물학적 여성에만 집착하기에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다.[12] 게다가 신좌파들은 이스라엘 우파 시오니즘 같이 '''메이저리티가 된 정체성 정치는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즉 권력적 불합리함에 있어서 형평을 맞추기 위한 운동일 뿐이다.[13]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듯 소수자가 마이너리티를 의미하므로 수적 개념은 아니지만 현대에선 개개인이 평등하므로 수적 효과도 무시할수 없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무슬림이 수적으로 다수인 지역은 자연적으로 기독교인/무슬림이 다수자일 수밖에 없다.[14] '''소수자가 다수자를 숙청시킨다는거 자체가 불가능하다.''' 역사적인 사례도 전혀 없을뿐더러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를, 미국 흑인이 미국 백인을, 여성이 남성을 나치나 유대인 숙청하고 소련이 자본가들 숙청한것처럼 숙청한다는게 상상조차 되는가? 다만 소수자였던 민족이 성장해 다수자가 되어 본래 다수자였던 민족을 학살하거나, 다수자나 완벽히 소수자라고 보기 힘든 민족 집단들이 타 민족 학살을 자행한 사례들은 존재한다.[15] 이에 대한 비판으로 전근대의 소수민족이 지배층이 된 사례를 들먹이는데 근대에 민주주의는 만인이 1인 1표다. 나치정권, 파시스트정권, 소련 공산정권 등 각종 극단주의는 Majority에 속하는 대중이나 엘리트의 광기로 이루어낸 것이지만 Minority 집단들이 저런 괴물들을 탄생시키지 않았다.[16] 나치의 경우 유럽의 소수자들에 의해 무너진 게 아니라 연합국에 의해 박살이 났으며, 소련도 다수자 대중에 의해 무너진거지 소수민족이나 동성애자가 무너트린 게 아니다.[17] 또한 르완다 내전을 예시로 드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소수민족이 아니었다.[18] 짐바브웨의 백인 학살은 독립으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관계가 백인이 식민지배자에서 수적 소수로 바뀌었기에 다수자가된 흑인이 백인을 학살한 것이다.[19] 당연히 좌파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다. 애시당초 민족주의자들은 좌우에 따라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소수자의 인권을 후순위로 생각하거나 아얘 노골적으로 무시, 혐오한다. 신좌파의 소수자 정체성 정치는 나치의 사례를 비롯한 다수자들의 집단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나온것이다.[20] 실제로 기독교 우파나 호모포비아들은 동성애가 후천적이며,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이성애자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게 하려는 것을 동성애 독재라고 헛소리하며 매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 자체가 불평등이며 이성애로써 보편평등을 누려야 한다! 이러는데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빼놓고 어떻게 보편평등을 논하자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무슨 북한 돼지수령마냥 축지법이라도 쓰라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정체성 정치 없이 그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어떻게 그러한 궤변을 논파할 것인지 정체성 정치를 대신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21] 물론 흑인이 10%이므로 흑인이 10%을 고용해야한다는 정책이 지나치게 유동적이지 못한 비합리적 정책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허나 어퍼머티브 액션 제도의 개선하는 일반 우파의 논리와 아얘 폐지하는 대안우파의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10% 고용이 부적절하다는 것도 논의가 필요하다.[22] 일부 우파들은 젠더 리얼리즘을, 극우세력들은 인종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문제라고 핵심을 외면하겠지만 문제는 다수자 집단에 비해 거의 모든 소수자 집단은 비율이 적은 이유를 단순히 그들이 능력이 딸려서 그런것일까? 어찌보면 그것은 우생학적 사고일 것이다.[23] 이는 한국어로 수적 개념을 의미한다. 또한 개별적으로 봤을때 엄연히 강자이다.[24] 이는 사회적 약자인 Minority를 의미한다. 즉 앞에서말한 소수랑 상관없다.[25] 또한 좌파들이 모든 차별을 반대한다고 했는데 100년전까지만 해도 좌파들 가운데서도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사례도 빈번하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건은 중도좌파들이 그런거라 반박하겠지만 그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 교조적 공산주의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며, 마르크스마저도 봉건국가의 경우 제국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로 진보하는 것 자체는 마냥 부정하지 않았다.[26] 여기서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를 들먹일때 이스라엘 시오니즘 들먹이는것도 절대적으로 부적절하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은 더 이상 소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좌파는 Minority를 보호하는것이지 과거의 Minority를 옹호할지언정 강자가 된 Majority의 정체성 정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좌파의 정체성 정치 자체를 나치와 비교하는 것은 극단주의 시각일뿐더러 어불성설이다.[27] 이걸 볼드체한 이유는 소수자의 방어형, 실질적 차별철폐를 위한 정체성 정치 비판엔 리버럴이나 중도우파, 중도좌파보단 극우나 극좌의 논리를 끌어들이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28] 이들에 대해선 샤이 트럼프로 부르고 있다.[29]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무슬림, 불법 이민, 히스페닉계이다.[30] 주디스 버틀러는 유럽의 포스트 모던철학을 영미권으로 번역해 가져온 대표적 페미니즘 철학자이며 이후 많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여성"을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국한하거나 "이념"으로 만드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지만 다수의 후학자들은 당췌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고 앨런 소칼은 이들에게 "그들은 자기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31] 페미니즘에서 주로 적대시하는 건 생물학적 남성이라기 보단 남성성이다. 이에따라 생물학적 남성은 남성성에 의해 고통받으므로 정신적으로 거세하면 그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다. 애완동물이라면 중성화 수술을 했겠지만 같은 인간인데다가 여성을 낳아줘야하니까 거기까지는 시도하는 분파는 없다.[32] 대체적으로 현 시점에서 보는 숙청 방법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범죄 [33] 다만, 이런 것들이 진짜 숙청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한 상태이다. 차별금지법 참고.[34] 출생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35] 이란 계통[36] 호남보다 많기는 하지만 수도권 인구 중 호남 출신의 비율이 높음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크게 줄어든다[37] 흑인 인구 비율은 10%대에 불과하므로 흑인 투표권은 변수가 되지 않는다.[38] 여기서 신은 특정교단이나 이상화된 아이돌로서의 신이라기보다는 본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다시말해 일상생활을 가능케하는 사고방식의 기반에 가깝다. 그게 어렵다면 나치나 페미니스트나 커버해줄 사람없이 최후의 심판정에서 신과 단독으로 독대해서 유대인을 죽인 이유, 반동분자를 죽창으로 찌른 이유, 뱃속의 아이를 기계로 갈아버린 이유를 설명해야한다고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생각해도 좋다. 사회전체적인 의미에서, 혹은 누구탓이기 때문에, 더 좋은 선을 위하여, 등등의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걸 느낀다면 이 사람의 일상생활을 가능케하는 사고방식의 기반과 이 사람이 믿고있는 이념이 괴리가 있다는걸 자신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39] 여기서 말하는 신도 결국 본인이 떠올린 신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짜배기 사이코패스가 떠올리는 신은 옆집 소녀를 납치해서 삶아먹었다고 고백해도 잘했다고 칭찬해줄 것이다, 왠지 내 말을 듣고 신이 화를 내지 않을까? 불안을 느낀다면 이 문장을 통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치도 초기에는 유태인 학살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도 인간이기에 살해된 태아를 보면 눈물흘리는 사람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념들이 종국에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몰아넣고 태아를 가위로 잘라서 워마드에 인증하는 끔찍한 괴물들을 만들어낸다.[40] 독일 연방을 이룬 여러 독일계 국가들.[41] 단적인 예로 나치만 해도 독일식 사회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당 하부에서는 공산주의와 유사한 이념을 공유할 정도로 공산주의와 친화성이 아주 강했다. 그러나 정권의 주도권을 잡는 시점에서 장검의 밤 숙청이 일어나며 나찌와 공산주의 간의 연대로 인한 변화 및 연결고리는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42] 해당 영상[43] 성소수자 활동가들은 그 자신이 성소수자이건 아니건 성소수자에게 선출된 사람들도 아니니 적법한 대표자들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실제 성소수자에게도 공개적인 조리돌림을 당하는 위험을 감수해야할 만한 위협이다.[44] 그리고 이게 위에서 말한 정체성 정치 반대론자들이 모든 정체성 정치는 극단으로 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45] “No, the Trans Rights Bill Doesn’t Criminalize Free Speech (en-ca)”, 24 October 2016 작성.
“The professor versus gender-neutral pronouns”, 4 November 2016 작성. 1 October 2018 확인.
[46] 미국의 대안 우파, 유럽의 극우 정당들[47] 이낙연 국무총리실 소통메시지비서관[48] 다만, 대안우파는 본인 스스로도 정체성 정치에 매몰된 사람들이다.[49] 19세기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계열도 이런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 대한 우머니즘, 블랙 페미니즘 등 여러가지 분파의 비판을 수용한게 20세기~21세기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다.[50] 반론 항목에 '?'를 적은 이유는 학생인권위원회 자체도 넓은 의미의 정체성 정치이며, 한국이 아닌 서구권에선 이런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지 개선방안 자체를 반대하려는 논지가 아니기 때문이다.[51] 이에 대응하는 우파 자유주의에는 보수자유주의가 있다. 정치는 단순히 진보좌파-보수우파라는 1차원적인 개념이 아니라, 좌파 vs 우파라는 X축과 자유 vs 전체라는 Y축으로 이루어진 2차원적인 것이다.[52] European Free Alliance. 대표적 소속 정당으로는 중도좌파 정당인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있다.[53] European Christian Political Movement[54] Malaysian Indian Congress, 타밀어 : மலேசிய இந்திய காங்கிரஸ்[55] 공식적으로는 특정 정체성을 대변하지 않아 정체성 정치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실질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