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고스톱 사건
1. 개요
ゴーストップ事件
1933년 군국주의 열풍이 휩쓸었던 일본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 표면적으로는 무단횡단에 관한 해프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육군성 대 내무성의 파워 게임이었다. 여기서 고(Go)스톱(Stop)은 화투의 고스톱이 아니라 '''신호등을 뜻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청-적 사건이라고 쓴 당시 신문도 있다.
사건 초기에는 천육(天六)사건[1] 이라고도 했다.
2. 사건의 발단
1933년 6월 17일 오전 11시 40분 경,현재 오사카시 키타구#s-1.8 텐진바시 6쵸메(天神橋六丁目)에서 일본 육군의 제4사단 제8연대 제6중대에 속한 나카무라 마사카즈(中村政一) 일등병(22세)이 적신호에 길을 건넜고, 이에 소네자키 경찰서 교통계의 토다 타다오(戸田忠夫) 순사(25세)가 메가폰으로 "어이! 이봐!"라고 외치며 그를 저지했다. 교통계 순사 앞에서 무단횡단한 정도이니 당대에는 경범죄로 마무리될 만한 일이었으나 나카무라 일등병이 "왜 멈추어야 하는가? 나는 지금 공무 수행 중이다."[2] , "군인은 헌병에는 따르지만 경찰관의 명령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라며 마구 반발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3]
이 싸움은 결국 군인과 경찰이 파출소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일까지 발생시켰고[4] 구경꾼들의 신고를 받고 근처 헌병대에서 헌병 상병이 출동해 나카무라 일병을 헌병대로 데리고 가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약 2시간 후 해당 헌병대에서 다시 헌병을 파견해 '''여러 사람이 보고 있는데 제복군인을 망신준 것은 잘못되었다'''며 항의를 했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육군은 '''"일개 순사 따위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분노했다. 당연히 오사카부청의 경찰부에서는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육군이든 누구든 상관없다. 신호를 지키지 않는 것은 육군의 횡포다."라며 맞대응했다.
당대 기준으로 순사는 판임대우, 일등병은 용인에 상응하는 계급이므로 하극상이지만, 군국주의가 미쳐돌아가던 1930년대 이후의 일본은 하술하듯이 군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치외법권지대이며, 특권계급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에서도 징집당한 조선인이 휴가 나오거나, 심지어 정식 입대 직전에도 집앞 순사에게 행패를 부릴 수도 있었다. 물론 경찰에서 헌병을 부르면 되긴 하지만, 헌병 역시 "이런 일로 헌병을 오라가라인가"라며 면박을 주는 등 본토인, 식민지인을 가리지 않고 군인은 그 자체로 특권계급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의 일본에서는 신호등을 처음으로 설치한 시기이다 보니 무단횡단에 대한 인식도 미약했고 적신호에 건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법률에 없었다고 한다. 즉, 아직까지는 계도기간의 연속이니까 이야기만 잘 나누었으면 훈방조치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 일본에서 적신호가 정지신호로 법제화된 것은 1947년 GHQ가 도로교통단속법을 제정하면서부터였다. 그동안 교통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용할 따름이다.
3. 육군 vs 경찰
결국 나카무라 일등병이 속한 제4사단의 참모장인 이세키 다카마사(井関隆昌) 대좌와 토다 순사가 속한 오사카부청의 경찰부장인 아와야 센키치 경시정이 재차 말싸움을 벌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의 논리는 통수권과 황군의식을 남용해서 자신들은 천황의 군대이지 국민의 군대가 아니고, 따라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대에 대해서 국민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틀렸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세키 대좌는 "우리는 여기서 눈부신 군기를 흔들고 황군의 명예를 위해 담담하게 싸울 것이며, 최악의 경우는 명예롭고 깨끗하게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아와야: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거리에 나왔을 때 시민의 한사람으로 순사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세키: 군인은 언제 어디서나 천황의 군인이니, 거리에 나와도 치외법권적 존재이다!
아와야: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시정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경찰관인 우리들은 공무를 집행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아와야 경찰부장은 '폐하의 군인이라고 한다면 경찰관 역시 폐하의 경찰관이다. 육군 측이 폭행과 상대 모욕죄로 고소한다면 우리도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할 것이다'라고 맞섰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며 급기야 육군대신[5] 아라키 사다오 대장이 나서, 육군의 명예를 걸고 경찰 측의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맹세했다. 반대로 내무대신 야마모토 다쓰오, 내무성 경보국장 마쓰모토 가쿠 역시 군부의 압력에 절대로 밀려나지 말고 한 걸음도 양보하지 말고 사과하지도 말고 원칙대로 체포 및 기소해야 한다고 했다. 군대를 상대로 이럴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내무성은 경찰, 특고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고 민간 관청 중에서는 가장 파워가 센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일이 점점 커지자 토다 순사가 평시에 근무했던 소네자키 경찰서의 다카야나기 히로토(高柳博人) 경찰서장은 일을 수습하다가 7월 18일 과로로 쓰러진 후 7월 28일 신장결석으로 급사했다. 소식을 들은 군부는 군의관을 보내고 문병을 가는 등 나름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고 한다. 다카야나기 서장의 후임에는 마스다 소우가 임명되었고, 마스다 서장이 이 골때리는 사건의 처리를 승계하게 되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다카다 젠베(高田善兵衛, 42세)는 참고인으로서 헌병대와 경찰서에서 연이은 소환조사를 받았는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증언하라는 식의 강압수사를 이기지 못하고 8월 24일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당시 시기의 일본제국 경찰이나 헌병 모두 고문을 수사기법으로 자주 사용했다. 해당 사건이 사건인지라 자기네 편에 유리하게 진술하라는 식으로 상대편에게 책임전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안 하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헌병대와 경찰은 미행을 붙이거나 상대측 뒷조사를 한 뒤 언론에 폭로해가며 망신을 주었다. 경찰은 나카무라 일등병이 교통질서를 7번이나 위반했다는 걸 폭로했고 헌병대는 토다 순사의 본성이 나카나시(中西)이며 데릴사위로 토다 가문에 입적되었다는 걸 폭로했다. 거기다 이 사건이 제4사단과 오사카부청이 타협하는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았더라면 경찰 측은 나카무라 일등병이 제대하는 11월까지 기다렸다가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었는데, 당시 일본 제국의 보통경찰은 재판소에서 영장을 발부하지 않아도 자의로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가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29일까지만 가능하지만 당연히(...) 28일째 되는 날 타 경찰서로 이첩한 다음 새로 영장을 발부하는 식으로 편법을 써서 한정없이 구금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육군은 그렇게 한다면 육군 병사로 전역했던 토다 순사에게 예비역 소집영장을 발부해 현역으로 만든 다음 군법회의에 회부시키겠다고 했다. 그래서 정작 처음에 싸운 두 사람은 일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4. 마무리
하지만 결국 명예고 뭐고 쇼와 덴노가 개입해서 "그런데 오사카 사건은 어떻게 되어가는가?"라는 질문 한마디를 던지자 아라키 장군은 천황에게 경찰에 대한 선처를 다짐하면서 즉각 꼬리를 내렸다.
11월 18일 제4사단 참모장 이세키 대좌와 오사카부청 경찰부장 아와야 경시정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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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앞에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마츠다 시로(松田四郎) 제4사단 제8연대장과 마스다 소우(増田曽) 소네자키 경찰서장. 왼쪽이 연대장, 오른쪽이 경찰서장. 즉 저 사고친 당사자들의 지휘관들이다.
11월 20일에는 두 당사자가 사진기자 앞에서 사이좋게 악수하는 장면을 연출, 이를 신문에 내어 국민들에게 화합하는 군대와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고 한다.
[image]
이 사진이다.
사건이 화해의 연출로 마무리된 후에는 군형법과 일반 형법을 모두 손질하여 사법관할의 범위를 확실히 규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악영향으로, 육군에 맞서기 위해서 "천황 폐하의 경찰"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던 경찰 측은 이 슬로건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고 육군과 헌병대가 일본사회에서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경찰의 특수한 지위를 일본 사회에서 수립하기 위해서 "폐하의 경찰"이라는 용어를 이후 강조하게 된다.
5. 기타
- 관련 인물
마츠다 시로(松田四郎) (제4사단 제8연대장) || 다카야나기 히로토(高柳博人)† →
마스다 소우(増田曽) (소네자키 경찰서장) ||- 베츠미야 단로의 홈페이지에도 해당 사건의 설명이 있는데, 원래 일본 육군이 채용한 독일군(독일 제국의 육군)의 군법에 따르면 영외에서 법률을 위반할 경우에 최초의 단속이 경찰관에 의해 이루어지더라도 법적인 심판은 헌병이 신병을 인도받은 뒤 군법회의를 거쳐서 진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이는 세계 공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6] 그런데, 당시 일본 군형법이나 일반 형법 모두 관련 조항이 애매모호해서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인지라 영외에서 벌어진 군인의 위법행위에 대한 사법관할을 놓고 언젠가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 곧이어 아와야 경시정은 히로시마시로 전근하면서 시장으로 부임했으나[7]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사망하였다.
- 일본 검찰은 이첩된 사항에 대해서 일단 경찰 쪽의 편을 들어주면서도, 어느 쪽의 편을 들더라도 결론적으로는 국가의 위상에 상처를 입는 일이라면서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가급적 합의를 종용했다고 한다. 합의보다는 기소를 우선시하는 검찰로서도 골때리는 일이었을 듯.
- 나카무라 일등병과 토다 순사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다. 하필이면 나카무라 일등병이 속한 제4사단 8연대가 일본 육군에서도 멍청한 부대로 유명했으며, 특히 러일전쟁 당시 연전연패를 거듭해 '패전이 두렵지 않은 부대'라는 별칭까지 있었다. 그래서 상비사단임에도 불구하고 1937년까지 최전선에 투입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당시에도 방콕에서 휴식 중이어서 일본군에서 가장 전사자가 적은 부대였던데다 귀국할 당시 혈색이 너무 좋아서 본토의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 이 문제 이전에도 오사카에서는 '松島事件' (마츠시마 사건)이라 해서 1884년 육군 병사들과 경찰관 사이의 충돌이 있었다. 1883년 12월 31일에서 1884년 1월 2일 사이에 병사가 경찰서에 노상방뇨를 하여 연행되거나 말투가 불량하다며 싸움을 하는 등 두 집단 사이 극심한 악감정이 있었다. 경찰은 사무라이 계급이 메이지 유신으로 폐족 처분을 받은 후, 서남전쟁과 함께 임용된 사례가 많고 역할 역시 계승하였다. 하지만 군대는 일본제국 헌법에 명시된 국민개병제 논리에 따라서 징병제를 실시해 평민 계급 출신을 위주로 징발했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대립적인 관계였다. 그 결과 1월 4일 1,400명의 육군 병사와 600명의 경찰이 일본도를 동원한 난투극을 벌였다. 헌병 100여명이 진압을 시도했지만 진압에 실패했다. 육군 사망자 2명, 중경상 40여명, 경찰 중경상 10여명을 기록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일본어 위키백과의 松島事件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 이 문제 때문에 이후에도 일본 제국의 보통경찰과 일본 육군의 사이에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그 여파는 패전한 직후에 일본 본토의 경찰관들은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그럴 줄 알았지"라며 비웃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런 감정은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어서 지금도 일본 경찰과 자위대의 사이는 서먹서먹한 편이다. 소련 공군 조종사가 MiG-25 전투기를 몰고 망명했을 때는 경찰이 수사를 빌미로 공자대의 조사를 대놓고 방해한 적이 있고, 육상자위대가 훈련 때문에 도로로 전차를 이동시키던 중 경찰차가 나타나 과태료 딱지를 끊으며 딴지 건 사례도 있다.
- 이 사건은 일본 육군의 잘못이 맞지만 사실 일본 제국의 보통경찰도 심심하면 시민을 미행, 고문하고 인권을 탄압하던 만만치 않게 막장인 집단이다. 토다 순사 역시 반말부터 시작했다. 거기다 일본제국 경찰들의 행태를 생각해보면 훈방이랍시고 그 자리에서 싸대기를 때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21세기 들어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도시에서조차 경찰들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외곽이나 벽지로 가면 아직도 경찰들이 민간인에게 자연스럽게 반말을 구사하는 행태는 여전하다. 일본 경찰 문서 참고.
- 이 사건 직후 도쿄 경시총감 후지누마 쇼헤이는 도쿄 헌병대 사령관 모치나가 아사하루에게 만약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면, 군대가 경찰에게 사과했을 것이냐고 질의하자 모치나가는 흥분하여 황군은 천황 폐하의 오른팔이므로 당연히 사과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열받은 후지누마도 그렇다면 경찰도 도쿄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사과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통보하는 병림픽이 벌어졌다(...).
- 경찰과 군대 간의 마찰은 한국에서도 존재했었다. 대표적으로 1947년 4월에 조선경비대 4연대와 전남도 경찰국 영암 경찰 사이에서 서로 기관총과 수류탄을 동원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 사건은 일본군의 사례처럼 파워게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과거사 청산 문제와 사상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자세한 건 영암사건 문서 참고.
[1] 사건 발생지인 텐진바시 6쵸메(天神橋六丁目)를 줄인 표현이다.[2] 사실 훈련이나 작전을 위하여 이동하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것도 아니었다. 휴가를 나와서 영화를 보러 가던 길이었다.[3]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Print.aspx?news_id=NB10229235 기사가 링크되어있었으나 현재는 삭제된 상태.[4] 둘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으면(...) 나카무라 일병은 고막이 터져 전치 3주, 토다 순사는 입술이 터져서 전치 1주 판정을 받았다.[5] 일본군에는 육군성과 해군성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육군대신이 육군과 육군 항공병력을 통솔하는 장관급 인사였다.[6] 현재 한국군의 대민범죄 역시 경찰에 의해 입건되더라도 실질적인 수사는 군 수사기관에 신병이 이첩된 후 시작한다.[7] 근대 일본의 경찰 조직은 지금의 대한민국 지방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부청과 현청 및 주청과 도청 직할의 부서였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의 경찰관들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2제국의 경찰행정법을 본받아 내무성 직할의 경보국과 도쿄 시내의 경시청에서 근무하면서 내무대신에게 복종하는 중앙경찰 및 도도부현을 다스리는 현청에서 근무하면서 현지사에게 복종하는 지방경찰로 인사체계가 분리되어 있었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민정문관이 군수로 승진한 뒤에 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순환근무도 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