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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萇山
1. 개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해발 634m의 산.
2. 역사
지질학적으로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딱 붙어 있어 동해가 아직 호수이던 시절에는 지름 5km 정도의 칼데라를 가진 높이 3,000m 정도의 거대 화산이었을 것이라고 한다.[1] 화산은 백악기 말에 생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장산에는 화산 지형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며 화쇄류가 굳어 만들어진 응회암 바위들이 널려 있고, 이런 응회암 너덜이 9개나 된다고 하며 장산으로 부터 4km 밖의 청사포 해안에서도 화산의 흔적이 발견된다. 당시 백악기 말엔 시호테알린부터 한반도 남동부를 거쳐 중국 광둥성 동쪽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벨트가 있었으며 장산은 이 화산벨트의 영향을 받아 생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나중에 일본 열도가 떨어져 나가면서 사화산이 되었고, 그 뒤 점차 풍화되고 무너져 내리고 하면서 계속 낮아지다가 현재의 장산이 되었다.[2]
역사적으로 옛날에는 상산이라 불렸다. 전설에 따르면, 상고시대에 산 아래 우시산국(于尸山國)[3] 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尸'는 고어로 'ㄹ'로도 읽고 'ㅅ'으로도 읽으므로 '울산' 또는 '웃산'이 되었다가 옛 동래지방에서 '웃뫼'라고 부르면서 상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쓰시마 섬)를 바라보기에 가장 가깝다라고 기록되어 있듯, 맑은 날이면 남서쪽 해상에 대마도가 뚜렷하게 보인다. 지형 자체는 황령산과 수영만 일대가 백악기 말에 화산 활동을 통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함께 형성된 지형이다. 하지만 화산 지형에서 발견되는 지형적 특성은 황령산에 비해 적은 편이다.
3. 등산
오랫동안 인근에 제53보병사단과 정상인근에 방공포대가 주둔해 입산을 금지했던 탓에 도심지에서 가까우면서도 자연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주말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산행코스가 많은데 특히, 5~6부 능선 위에 산허리를 한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는다. 산행 시간은 코스에 따라 적게는 2시간에서 많게는 7~8시간까지 걸린다.
장산 기슭에서는 부산의 랜드마크화된 광안대교와 센텀시티, 마린시티의 화려한 야경을 담기 위해 사진가들도 자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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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에서 바라본 해운대 신시가지.
4. 교통
부산 도시철도 2호선 장산역은 이 산의 이름을 땄지만 거리는 꽤 멀리 떨어져 있으며(말 그대로 이름만 따온 수준이다) ,해운대 신시가지 중앙 번화가 지역에 위치해 있다. 등산로 입구는 해운대 신시가지부터 재송동, 반여동, 반송동(영산대학교 해운대캠퍼스 쪽)까지 해운대구 전체에 있어서 어디로든 올라갈 수 있다. 사실상 해운대구의 80%정도를 차지하는 만큼, 해운대구 어느 방향에서도 장산을 올라갈 수 있다.
광안대교와 부산울산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도시고속도로인 장산로와 장산1터널, 장산2터널이 이 산을 관통하여 지나간다.
5. 지뢰
정상부 근처에 대인지뢰 등이 매설되어 있다. 정확히는 미확인 또는 유실지뢰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단 제한영역에 한해서 지뢰가 있다고 말할 뿐 올라가는 등산로길은 안전하니 지뢰 표지판이 있는 곳에 쓸데없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4]
지역 군부대에서는 아래와 같은 홍보문을 배포하고 주기적으로 안내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6. 여담
- 여기서 장산범이 처음 목격되었다고 알려져 가칭 장산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었다. 그런데 정작 부산 지역의 민담을 채록하거나 설화를 연구한 논문, 채록집, 시청에서 발간한 연구 보고서 등지에서는 일체 관련된 설화가 없다. 때문에 해당 항목이 사실이더라도 최소한 부산 지역과는 전혀 무방한 이야기인 셈. 사실 위 지도만 봐도 보이지만 인간이 사는 시가지에 완전히 포위되어있고 등산객도 많은 등 그런 대형 고양잇과 동물이 서식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환경이다. 영화 장산범을 촬영할 때 허정 감독도 실제로 이 장산을 몇 번 답사했지만 많은 등산객과 빽빽한 아파트촌 등 신비로운 괴담 스토리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도시화된 분위기라서 의도적으로 강원도 산촌에서 촬영하고 지역색도 흐렸다 한다.
- 좌동 방향에서 양운폭포를 통해 정상으로 등반하면, 체육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너덜겅이라는 돌무더기 지대를 통해 정상으로 가는 방향과 억새밭이라는 표지판을 통해서 올라가는 길로 나뉜다. 이때에 억새밭 루트를 택하면, 태극기가 게양된 집이 나온다. 이곳은 모정원이라는 곳으로 청산리대첩에 1중대장으로 참전한 강근호(姜槿虎)선생 (1898~1960)의 집이다. 정확히 말하면 강근호 선생은 이곳에서 산 적이 없으며, 한국전쟁 이후에 영도에 정착한 후 60년에 사망하여 봉래산에 안장된다.
이후 강근호 선생의 아내 이정희 여사(1932~2016)가 1964년에 한국전쟁에서 퇴역한 군인들과 장산개척단이라는 생활 공동체를 장산에 꾸린다.[5] 이후 이정희 여사는 퇴역 군인들과 함께 민둥산이던 장산을 개간하면서 산림 복구 및 퇴역 군인 생활 지원 등의 활동하였고, 모정원은 이정희 여사가 장산에서 생활한 곳이다. 집의 내부에는 강근호 선생과 이정희 여사의 독립운동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고, 광복절과 현충일에는 이곳에서 관련 행사가 진행된다. 규모가 크지는 않으니 장산 등정 후에 잠깐 들르는 것도 좋다.
- 2019년 11월부터 1년 동안 이어진 조사에서 79개의 이산표석[6] 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임야 조사 사업에서 해당 지역이 조선 왕실의 것임을 확고히 하는 표석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것이 이산 표석으로 전국에 있는 왕실 소유의 산에 설치되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이 장산 이외에도 와우산달맞이 고개, 성죽골(금정구 동대 마을), 개좌산(회동수원지 동편), 부흥봉·구곡산·아홉산 등지에서 총 20개의 표석을 발견했었다. 그중 한 개를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었고, 기존에 발견된 이산 표석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장산 삼림욕장 관리사무소에서 동편 등산로를 따라 40여 분 올라 해발 350m 동부 산등성이 길 왼쪽에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장산반딧불이보존동호회에 의해서 1년 동안 80여개가 추가로 발견된 것. [7]
[1] 참고로 백두산 천지도 지름이 4.5km밖에 안 된다.[2] 만약 장산이 높이 3,000m의 높이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다면 '''한라산은 물론 백두산을 능가하는 위상을 자랑했을지 모른지만 활화산으로 남았다면 동아시아 역사는 바뀔 가능성이...''' 칼데라의 지름 또한 5km로 추정되는데 천지 칼데라가 4.5km인점을 감안했을 시 그 크기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산체의 위상이 다른 한국의 영산은 물론 해외의 유명 화산들과 맞먹었을테지만 백두산과 한라산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것은 불과 100만년전인 신생대 제3기 말 혹은 4기초이고 백두산은 지질학적으로 최근에도 분출이 있던 활화산이며 후지산은 겨우 10만 년 전에 형성되어 아직도 활동을 하는 활화산인데 장산은 최대 1억 년 전 부터 최소 6600만 년 전 사이에 만들어진 사화산임을 감안할 때, 풍화는 피할 수 없다 하겠다. 또한 언급한대로 백악기 당시 한반도 남부는 가까웠던 섭입대의 영향으로 거대 화산의 천지였고, 직경이 30~40km는 되는 화산 함몰체들이 남아있어 장산은 되려 작은 축에 든다.[3] 역사서 삼국사기에도 등장하고, 지금의 경주시를 중심으로 발전하던 신라가 우시산국을 책략을 써서 정복하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이 우시산국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고도 여겨진다.[4] 참고로 부산광역시와 그 인근지역은 후방에서 지뢰가 가장 많이 매설된 지역이다. 특히 태종대에서는 M14 발목지뢰뿐만 아니라 M16 도약지뢰와 M15 대전차지뢰가 매설되었다가 앞바다에 유실된 것이 스쿠버다이버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들 지뢰는 故 한주호 준위가 이끌던 EOD팀에 의해 폭파해체된 바가 있다. 그리고 동백섬에서도 크레모아가 발견된 적이 있다.[5] 이 과정에서 강근호 선생의 묘도 장산으로 이장되었다. 현재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6] 해당 지역이 조선왕실의 소유라는 것을 알리는 돌로 된 표석[7] https://news.v.daum.net/v/20201105111231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