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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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제6대 국무총리.'''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려는 것이다'''
1960년 5월 3일, 과도내각 출범 후 발표한 5개 시정방침 中[6]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 직에서 하야하자 외무부장관으로서 헌정사 최초로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후 3차 개헌을 통해 헌법부칙에 따라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의원내각제 체제 최초의 행정수반 국무총리가 되었다. 제5대 총선으로 윤보선과 장면이 정식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취임할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로서 과도정부를 이끌며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제6공화국까지 격동의 시기를 모두 지나온 사람이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12.12 사태 등 여러 차례의 쿠데타 및 민주화와 죽기 하루 전날 개최된 1988 서울 올림픽까지 지켜본 사람이었기에 '국로'(國老)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재임 기간 및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 대통령/명단 참조.
2. 생애
1896년 부산부 초량에서 출생하였으며 선교사의 영향으로 개신교도로 자라났다. 이동휘의 강연을 듣고 상경 후 보성중학교,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를 거쳐 보성법률상업학교 법률과를 졸업하였다.[7]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다시 미국 뉴욕으로 갔고, 뉴욕한인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에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활동을 도왔고, 1923년 3.1 운동의 이름을 따 창간된 교포신문《삼일신보》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2년 귀국하였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이승만 정부에서 교통부장관, 사회부장관, 국무총리 서리 등 중요 직책을 역임했다.
1952년까지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후 재입각하지 않고 정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긴 휴식기 끝에 1957년 12원 14일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서울시장직이었기에 이승만 정부에서 장관, 국무총리서리 등 고위직을 역임했던 허정이 임명되자 거물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1959년 5월 필라델피아 시장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 시카고 등 여러 도시들을 시찰하였다. 미국 방문 후 한국으로 귀국한 다음날인 6월 12일 갑작스럽게 경질되었는데, 이 배경에 서울시장으로서 자유당에 협조하지 않아 친야당 성향이라는 자유당 강경파의 공격이 있었다는 관측이 있다.#
1959년 8월 10일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는데, 이 시기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 문제로 회담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의해 촉발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들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모두 사표를 제출하자, 허정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무위원 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받았다. 22일, 23일 이승만과의 만남에서 허정은 자유당에서 손을 떼고, 부정선거 책임자를 처벌하고, 공무원과 경찰을 중립적으로 각편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각료직은 맡지 못하겠다고 거절했으나, 결국 4월 25일 내무부장관에 이호, 법무부장관에 권승렬과 함께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27일 사임서를 국회에 전달했다. 허정은 곽상훈 민의원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의 사임과 함께 자신도 사직하겠다고 하였으나 그러면 정부가 완전한 공백상태에 빠진다고 만류하여 자리에 남았다. 허정은 대통령과 부통령 부재라는 중대한 권력공백 상황에서 수석국무위원의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여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서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4월 29일 6명의 장관을 새로 임명하여 내각 공백을 일부 메웠고, 5월 3일 과도 정부 5대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혁명적 정치 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는 허정 과도정부를 대표하게 되는 유명한 표어가 등장하였다. 이 시정방침에서 반공주의의 재천명, 강압과 폭력으로 제정된 법률의 철폐, 우방국과의 우호 강화등 혼란수습을 위한 여러 방침들을 발표했는데, 이중 추후 혼란을 다시 불러오게 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고 이는 바로 '부정선거 처리에 있어 처벌의 대상은 부정을 지시한 고위책임자와 국민에게 학살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추후 허정 과도정부가 선거사범 처벌에는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 한정된 선거사범들조차 국민 기대 이하의 가벼운 처벌을 사법부로부터 선고받자 시위대에 의해 국회 회의장이 점령당하는 등 큰 혼란이 발생했고, 추후 군사 쿠데타의 빌미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허정의 과도 정부 기간 중 혼란 수습과 헌법 개정 및 정권 이양 등의 성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1960년 6월 15일 3차 개헌으로 수석국무위원 신분이었던 허정은 헌법부칙에 따라 국무총리에 자동으로 취임했다. 이 개헌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면하게 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돌고 돌아서 제5대 국회의원 선거로 국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다시 맡게 되었다. 이때의 지위는 '''대통령 권한대행 + 국무총리 + 외무부장관 + 한일회담 수석대표.'''#
1961년 5.16 군사정변과 뒤이은 군정에 반대하여 1963년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하여 정치 일선에 복귀하였으나 곧 물러났다. 1969년 국토통일원(지금의 통일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8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1988년 9월 18일에 92세로 사망하여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묻혔다. 저서에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1982년 청와대의 홀에 약 20명의 원로가 모여 앉아 서로 잡담을 하고 있는데 의전실장이 대통령께서 나오시니 "모두 앞으로 나와서 줄을 지어 서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허정은 벼락같은 소리를 냈다 한다. '''"무엇이 어째? 줄을 서라고? 내가 이럴 줄 알고 안 나오려고 했다!"'''하고 외치자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Y씨[8]
가 "대통령께서 나오시는데 줄을 지어 서야 할 것 아니오?"라고 하자 허정은 더 큰 소리를 질렀다. "당신 혼자나 나가서 서시오!" 이렇게 되니 누구 한 사람 나가서 서려고 하지 않았다. 비서들이 몇번씩 들락거리고 나서야 전두환 대통령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원로들이 앉은 자리에서 모두 일어섰고 대통령이 창가로 돌아다니면서 위촉장을 한 사람씩 전달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위촉식이었으며 나는 근래에 이런 기골있는 인물을 처음 보았다(...)
3. 선거 이력
4. 기타
- 농촌 지역의 금융 기관, 농산품 유통 및 매매 관리를 전담하는 농협을 설립하는데 기여한 중요 인물이다. 농협은 본래 1958년에 생긴 협동조합과 농업은행으로 서로 전혀 관계없이 일을 처리하던 조직이었으나 1961년을 기점으로 2개의 조직이 통합 및 신설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허정 혼자만의 업적이 아닌 박정희 정부와 당시 민주당 계열의 합작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는 금융 부문과 농업 부문으로 다시 나뉘어 있다.
[1] 초명은 허성수(許聖壽)[2] 재임기간 동안 국무총리 서리 겸임 (1951년 11월 6일 ~ 1952년 4월 9일)[3] 수석국무위원(내각수반) 겸임 (1960년 4월 25일 ~ 1960년 6월 14일) 수석국무위원직은 국무총리직 부활과 동시에 폐지되고, 허정은 헌법 부칙에 따라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국무총리에 자동 취임하였다. 당시의 내각수반이라는 직함은 관습적으로 쓴 직함이었을 뿐 법률상의 직함은 아니었다.[4]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0년 4월 27일 ~ 1960년 6월 15일)[5]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0년 6월 23일 ~ 1960년 8월 7일)[6] 당일 조선일보 기사 참조[7] 이기붕과 보성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였다.[8] 윤보선 대통령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전두환을 더러 존대를 할 이유가 없으니 확실치는 않으나, 허정이 과도기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허정에게 후술된 발언을 할 정도의 사람은 윤보선 뿐이다.[9] 범일동, 좌천동, 수정동, 초량동, 영주동[10] 범일1동, 범일2동, 범일3동, 범일4동, 범일5동, 좌천1동, 좌천2동, 수정1동, 수정2동, 수정3동, 초량1동, 초량2동, 초량3동, 초량4동, 초량5동[11]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