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근(축구)

 


'''김도근의 역임 직책'''



'''중남 코디온 FC 감독'''
[image]
'''김도근 (金都根 / Kim Doh-Keun)'''
출생
1972년 3월 2일 (52세)
강원도 강릉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가족
아내 장순우,아들 김찬민 딸 김태경 김윤경 (쌍둥이)
포지션
미드필더,올 라운드 플레이어[1]
신체조건
180cm
소속팀
전남 드래곤즈 (1995~2000)
베르디 가와사키 (2000)
세레소 오사카 (2001)
전남 드래곤즈 (2001~200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5)
경남 FC (2006)
지도자
한양대학교 (2007 / 코치)
광양제철고등학교 (2008 /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09~2011 / 2군코치)
전남 드래곤즈 (2012~2014 / 코치 )
상주 상무 (2015 / 코치)
경남 FC (2016 / 코치)
안후이 허페이 구이관 FC(2016~2017)
중난 코디온 FC (2017~)
국가대표
[image] 28경기 2골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타


1. 개요


전남 드래곤즈에서 10년간 선수생활을 했던 선수.현재 중국 코디온 유나이티드 총감독을 맡고 있다. 축구단 창단을 준비하고 있으며, 현재 자녀와 아내는 전라남도 광양시에 거주중인 기러기 아빠다.
2020년 현재 자녀들의 학업으로 인해 수원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강릉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축구부를 나왔다. 대학 초기에는 공격수였지만 그 후 수비수로 전환했다. 1학년 때 올림픽 대표팀에 처음 차출되었는데, 수비수로 차출된 것이다.
대표팀에서 입은 부상으로 4학년 때는 1년을 통째로 쉬었다.
전지 훈련에선 대우 로얄즈와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그 당시 대우가 꼴찌였기 때문에, 김도근은 대우에서 그를 지명할 줄 알았다고 하지만, 전남 드래곤즈전북 다이노스가 창단하면서 지명권 3명을 할당받게 되었고, 김도근은 전남으로 가게 되었다. 여담으로 전북으로 입단하게 된 선수가 바로 김도훈.

2.1.1. 전남 드래곤즈 1기


[image]
전남 드래곤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다만 첫 해에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 개막전 후반에 투입되었고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경기가 끝난 후 통증을 느끼고 당시 감독인 정병탁에게 부탁해 대구광역시에 있는 스포츠 센터로 가서 재활[2]을 했다.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전남 드래곤즈에 새로운 감독이 부임한다. 이 부임한 감독이 바로 허카우터. 허정무는 수비수였던 김도근을 설득해 측면 공격수로 활약하게 만들었다.
1999년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고 최용수 같이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낚시였다(...) 김도근의 말에 따르면 영국으로 가서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1주일 정도 훈련을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시즌 중이라 1군 선수들은 경기를 뛰러 가고 나머지 잔류군과 같이 훈련을 했었다.
그렇게 10골을 집어넣고, 아디다스 컵에선 중반기까지 득점 1위를 하는 등 맹활약했는데, 한양대 후배인 이원식과 함께 대한화재 컵 득점왕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최문식과의 콤비 플레이가 빛을 발하던 때였다.
김봉길노상래와의 호흡이 굉장한 시너지를 만들어 내었고, 대한화재컵은 부천 SK에 내주며 준우승을, 골은 5골을 기록했지만, 이원식에게 득점왕을 내주며 2등을 기록했다.

2.2. 일본


전남 드래곤즈에서의 활약을 보던 베르디 가와사키[3]에서 이적 문의를 해 왔다. 사실 베르디 가와사키 말고 세레소 오사카와 이미 이적 논의가 되어있는데, 무슨 일인지 바로 오사카로 가기 힘들어서 베르디로 이적했다.
당시, 베르디에는 재일교포인 이국수 총감독과 장외룡 감독, 김현석이 있어서 적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스타일도 다르고 선수들과의 호흡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주전으로서 활약했다. 김현석이 공격을 주도하고, 김도근이 가운데에서 공격을 막으면서 볼을 배급해주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 량규사베르디 가와사키에서 데뷔했다. 2000년 후반기에 베르디로 가서 6개월을 뛰고 당초에 가려고 했던 세레소 오사카로 갔다.
세레소 오사카 시절 한솥밥을 먹은 선수들이 윤정환노정윤이다. 2001년 전반기를 소화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세레소 오사카 감독이 외국인 선수를 교체해달라고 요청[4]을 했었고 2001년 7월, 노정윤김도근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구단이 정함에 따라 전남 드래곤즈로 돌아오게 된다.

2.3. 전남 드래곤즈 2기


일본으로 이적한 당시 완전 이적으로 갔었던 터라 아무 팀이든 마음대로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부산 아이콘스의 사령탑이던 김호곤 감독을 비롯해 몇몇 구단에서 제의가 왔었고 전남 드래곤즈 보다 더 높은 연봉을 제시했지만, 김도근은 당시 전남 감독이던 이회택 감독과의 인연과 전남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결국 몇 천 만원 손해 보더라도 전남으로 갔다.
하지만, 시즌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북 현대 전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1년여에 걸쳐 재활을 해서 2005년에 다시 복귀했다.
당시 김도근은 2002년에 3년 재계약을 했으니 2005년에 끝나는 계약을 했고, 김도근은 2년 정도 전남에서 더 뛰다가 은퇴할 계획이었다. 창단멤버로서 끝까지 뛴 다음에 은퇴하고 그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전남 프론트의 생각은 달랐고 마침 수원 삼성차범근이 김도근에게 이적 제안을 하면서 현역 연장을 원하던 김도근은 이적하게 되었다.

2.4. 수원 삼성 블루윙즈


클럽 월드컵을 노린 수원이 영입한 2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차범근 감독과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미 감독과 선수로 만난 적이 있던 점이 작용한 듯.
하지만 당시 수원은 여러 선수들 손정탁, 송종국, 마토, 김남일 등 다양한 선수들을 영입해 조직력이 약해져 있었고,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다보니 팀워크가 약했다. 결국 수원은 10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 된다. 김도근은 수원에서 그런 선수들을 잡아주는 리더십을 발휘하길 원했던 것 같지만, 김도근 역시 수원에선 이적생이라서 큰 힘을 발휘할 순 없었다.

2.5. 경남 FC


한편 경남 FC가 창단하면서 박항서 감독은 팀을 이끌 수 있는 경험 많은 선수를 원했다. 경남으로 이적한 김도근은 창단 첫 해에 주장을 하면서 경험 많은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선수들 실업에서 온 선수들, 프로 경험이 없는 선수들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박항서는 주문했고 김도근은 묵묵히 수행했다.
경남에서도 김도근은 여러 포지션에서 경기를 수행했다. 본인은 나이를 들면서 경기를 보는 눈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렇게, 김도근은 K리그에서 통산 241경기에 출장해 34골-24도움을 남기고 그렇게, 현역에서 은퇴했다.

2.6. 국가대표 경력


연령별 대표팀은 거치지 않았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에 뽑힌 것이 처음이었다. 이 당시 정용환을 보고 그의 몸관리 비법[5]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뽑혔을 당시에 막내 라인[6]이었다.
모로코, 파라과이, 스웨덴과 한 조였는데, 당시 국내 여론은 해 볼만하다였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고, 결국 3무로 탈락하게 되었다.
1993년도엔 김호 감독의 부름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캐나다로 갔다. 이 당시 센터백으로 뽑혔다. 하지만 경기를 뛰지 못했다.
이후 한동안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하다가 차범근 감독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차출했다. 대전에서 열렸던 홍콩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이색적인 기록이 있는데 1997년 당시 카나리아 군단을 상대로 골을 넣은 적이 있다.
[image]
그리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고,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하석주의 퇴장을 커버했다.네덜란드와의 경기에도 출전했는데, 중앙에서 김도근과 마주한 선수가 바로 에드가 다비즈였다. 그리고 경기는 0:5로 처참하게 패배했다.
벨기에에 와의 경기에도 출전해서 팀은 1:1 비겼고, 김도근은 98년 월드컵 3경기에 모두 출전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2년 CONCACAF 골드컵 골드컵에도 출전 경험이 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끌고 있었는데 2002 한일 월드컵의 시험 같은 대회였고, 4강에 진출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김도근은 당시에 경기에 내보내지를 않기에 히딩크에게 면담 요청을 했었다. 그랬더니 히딩크가 혼쾌히 받아들이면서 한국 선수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줄 알았다며 고맙다는 말도 했었다. 그래서 김도근은 "게임을 뛰고 싶은데 왜 기용을 안해주느냐?”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고 히딩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다음 소집명단에서부터 김도근은 제외되었고, 결국 월드컵 출전도 무산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다가 코엘류 감독 시절에 잠시 대표팀에 뽑혔고 이후로는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데뷔 당시엔 센터백이지만, 공격을 풀어나갈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정용환홍명보가 이름을 올리고 있는 국가대표팀에 김호가 불러들였다.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면서 측면 공격수로 전향했는데, 허정무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면서 수비수 뿐만 아니라, 미드필더, 인사이드 포워드를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점이 평가절하 당하기도 했다. 학창시절부터 프로에서까지 포지션 이곳 저곳을 누비던 김도근은 그저 땜빵용 선수라던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김도근은 좋은 의미의 멀티 플레이어로 인정받은 것이라며 웃어넘겼다.
결론을 보면 유상철과 비슷한 의미의 멀티 플레이어지만, 유상철이 어떤 포지션에도 평균 이상, 완숙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뽑혔다면, 김도근은 K리그에서 먹힐 수 있는 수준급 멀티 플레이어였다는 의미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직후 한양대학교에서 코치를 시작했다. 대학 선수들에게 프로 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위주로 코칭했다고 한다. 한양대 코치를 하면서 AFC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전남 드래곤즈에서 유소년 부터 프로까지 차근차근 코치 경험을 쌓았다가, 2015년 상주 상무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5년 12월, 김종부 감독의 부름으로 경남 FC의 코치로 부임했다.
2016년 중국 4부리그 신생팀인 허페이 크라운 FC 감독으로서 억대 연봉을 받고 부임하나, 승격에 실패하고 감독자리에서 물러난다. [7]
2017년 중국 유소년 축구단인 '''하이먼 코디안''' 감독으로 부임하며 중국 풀뿌리 축구에 기여하고 있다. 이후 이 클럽은 '''장쑤 중난 코디안 FC'''으로 구단 명칭을 변경하였고, 2019년 성인팀도 창단하며 현재 4부리그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 # 중난 코디안 FC의 연령별, 성인팀에 소속된 선수는 300여명에 이르며 왠만한 프로산하 유스보다 많다.
[image]
https://imgcdn.yzwb.net/video1592988258681877903.mp4
https://youtu.be/visBWuIy1oY
http://www.mycodion.com/News.aspx?acid=112

5. 기타


은퇴 이후 KFA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도근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총 2편이니 관심이 있다면 보러 가자.
①지도자 도전 나선 김도근, 전남의 전설이었던 만능 살림꾼
②지도자 도전 나선 김도근; 전남의 전설이었던 만능 살림꾼
슬하에 세명의 자녀가 있다.
아내가 순천에서 미모로 상당히 유명했다는 소문이 있다. 진위여부는 불분명.
무릎 부상을 고질적으로 앓고 있었다.
전남 드래곤즈경남 FC의 창단 멤버이다.
처음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때, 룸메이트가 무려 정용환이었다고 한다. 너무 많은 나이 차이에 김도근이 정용환을 부른 호칭은 삼촌이었다.
한일 축구 레전드 교류전에 선수로 뽑히기도 하였다. 이때 같이 뽑힌 선수들은 서정원, 이천수등 내로라 하던 선수들과 함께였다.
은퇴 후 광양제철고 코치로 부임했는데, 전남 드래곤즈 사무실로 김도근의 출전이 언제인지 묻는 전화가 여럿 왔다고 한다. 이래저래 전남의 레전드로 남은 듯.
권위의식 없이, 현장에서 뛰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1] 메인 포지션은 미드필더지만 선수시절 유상철 다음으로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뛰었었다.[2] 당시 재활과정은 선수는 물론 구단에서도 잘 인지하지 못한 방법이기 때문에 구단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3] 그리고 조선적 선수인 량규사와 한솥밥을 먹는다.[4] 일본은 성적이 나쁘면 감독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를 먼저 교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김도근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다.[5]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 않고, 쉬는 시간엔 다음 경기를 위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6] 이 당시 멤버가 노정윤, 서정원, 신태용 등이 있었고 막내에는 김도근과 곽경근이 있었다. 가장 막내가 바로 이운재.[7] 구단은 17시즌 준우승으로 을급리그(3부)로 승격하나 재정문제로 2018년 해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