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토막 살인 사건

 


1. 개요
2. 상세
4. 오원춘 체포 후
5. 재판
6. 기타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개요


[image]
이 사건의 범인 오원춘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

MBC 백분토론[1]

중에서 전원책 변호사가 범인에 대해서 한 말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오는 소리)

신고자: 잘못했어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접수자: 여보세요. '''주소 다시 한 번만 알려주세요.'''

신고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접수자: 여보세요. 여보세요.

신고자: 악- 악- 악- 악- 잘못했어요. 악- 악- 악- 악-

접수자: 여보세요. '''주소가 어떻게 되죠?''' (반복)

신고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접수자: 여보세요. 여보세요.

(중략) 

다른 근무자: 아는 사람인데...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

'''오후 10시 58분 34초 전화 끊김'''

경찰이 최초에 은폐했던 녹취록 후반부

[image]
얼굴 공개전 초기 보도 영상에서의 모습
요약하자면 전과자였던 조선족 오원춘[2]이 A씨를 납치해 성폭행하려다가 저항하자 잔인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심하게 훼손[3]하다가 붙잡힌 사건. 범행의 잔인성 이외에도 A씨가 구체적인 범행 장소까지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미흡한 초동대처를 해 결국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져 여론의 뭇매를 맞은 사건.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평소에도 좋지 않았던 중국 조선족의 인식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각종 미디어나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 대부분의 중국 조선족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충분히 살릴 수도 있었던 사람을 사실상 방치해 피해자를 죽게 만든 경찰에 대한 신뢰도 함께 떨어졌다. 덕분에 경찰 조직의 숙원인 수사권 독립도 십년 가까이 물 건너갔으며,[4] 조현오 경찰청장은 사건 발생 9일만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2. 상세



방송 내용은 용의자 오원춘의 진술에 따른 것으로, 피해자 신고와는 다소 차이점이 발견된다. 걸러서 듣자.
2012년 4월 1일 밤 10시32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못골놀이터 근처의 집에서 20대 여성 회사원(당시 28세)갑자기 덮쳐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범인인 중국 조선족 오원춘(우위안춘, 당시 만 40세)(얼굴이 공개된 기사)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피해자를 몸을 부딪쳤다고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피해자 언니의 증언으로는 "범인은 동생이 욕을 해 우발적으로 끌고 갔다고 하는데 동생은 욕을 할 줄 모르고 남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다. 범인이 매주 일요일 오후 10시쯤 집 앞을 걸어가는 동생을 지켜봤다가 계획적으로 범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 주장했다.
범인은 "집 앞에서 어깨가 부딪혀 시비 끝에 집으로 데려가 살해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 관계자는 "여자가 한밤중에 인적 없는 곳에서 낯선 남자에게 시비를 건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피의자의 주장은 변명일 뿐" 이라고 말했다. 결국 CCTV를 확인한 결과 걸어가던 피해자 앞에 갑자기 오원춘이 나타나 피해자를 밀치면서 살짝 넘어졌고, 다시 피해자를 끌고 들어가는 순간이 촬영됐다. 결국 의도된 범죄라는 게 드러났다. 이 CCTV 확인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게 영상을 사건 초기에 입수해놓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확인해 발표했다. 오원춘에 따르면 피해자에게 돈을 줄 테니 성매매를 하자며 제의했고, 완강히 거부하자 살려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스패너로 머리를 쳐서 기절시키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한다.
[image]
현장 검증 사진.
논란 문서에 따로 서술하였지만, 납치 18분 뒤인 2012년 4월 1일 오후 10시 50분, 피해자인 A(28) 씨는 경기지방경찰청의 112센터에 강간을 당하는 중이라고 신고를 하였다. 10시54분, 신고한 지 4분만에 순찰차 5대와 형사기동대 1개 팀 등 모두 16명이 최초 수색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담당 수사관과 경찰관은 전화를 끊고 다음 날 아침에 그 동네를 헤매기만 하고 범인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신고를 접수했으나 A씨가 알려준 위치가 아니고 A씨의 휴대전화 위치추적이 된 기지국 근처 500m 내외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불이 꺼진 집엔 아예 탐문수사를 하지도 않았으며,[5] 주민의 수면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사이렌을 울리지도 않았다. 미국의 여성 프로파일러 팻 브라운은 이후 한 언론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나라면 사이렌을 크게 울리고 주변 가택수색부터 샅샅이 했을 것이다. 주민 불편도 있지만 (112 신고 상황이라면) 피해자 생명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피해자는 무참히 살해당했다. 오원춘의 말에 의하면 피해자는 전화가 끊긴 후에도 6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주장하는 대로 새벽 1시에 죽었다고 해도 최소 3시간은 살아있었던 셈이다. 부검 결과 국과수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은 것으로 추정했다. 국과수는 "오후 8시쯤 식사를 하고 2시 반 뒤인 10시 30분쯤 납치가 됐는데, 오의 말대로 이튿날 오전 5시에 살해됐다면 위가 비어 있어야 정상" 이라며, "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가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고로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범인은 체포 당시 피해자의 시신을 해체하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칼 가는 숫돌까지 있었다.''' 그 짓을 하는 동안 칼날이 무뎌지면 날을 갈아서 그 짓을 반복했다는 얘기.
오원춘은 사체를 무려 280조각으로 해체해서 17개의 비닐 봉지에 나눠 담았다고 한다. 통상적인 살인 사건의 경우 2~3명의 부검의가 부검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사건의 경우 사체 훼손 정도가 매우 심해 14명이 부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폭행 흔적 검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훼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결국 오원춘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 "봉지 하나당 20여 점씩 살점 덩어리가 '''총 280여 점이 담겨 있었다"라는 국과수 관계자의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 범행 현장을 목격한 익명의 응급구조사는 "뼈가 드러나 보일 만큼 살을 있는 대로 다 발라낸 상태"였다고 말했으며, 이 일의 여파로 이틀간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온갖 잔혹한 상황을 접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반응할 정도면 얼마나 잔혹했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사체가 워낙 잔혹하고 엽기적으로 훼손된 데다, 조사에 임하는 범인 오원춘의 태도가 엽기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기 힘들 만큼 담담했다. 유치장에 구속 되었을 땐 오는 끼니 때마다 밥도 잘 비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사로 흘러나온 말에 따르면 범인은 체포되면 굉장히 많이 맞을 줄 알았는데, 한국 경찰은 때리질 않아서 그나마 맞아죽지는 않을 거라고 안심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은 검거 당시부터 시작해 조사 과정에서도 엄청난 구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그가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으나, 그를 면담한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감은 그가 사이코패스는 아니라고 언급했다. 사이코패스 여부를 진단하는 PCRL 검사에선 22점이 나왔다. 35점 만점에 25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다. 참고로 유영철은 28점이 나왔고 이영학은 25점, 강호순은 27점, 조두순은 29점이다. 다만 유년 시절에 대한 조사는 하지 못해 누락되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추가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행인을 거리낌 없이 납치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토막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데서, 우발적인 살인범은 아닌 것이 확실하며 숨겨진 범죄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범인이 체류 기간 중 전전한 지역들의 미귀가자 신고 접수 내역과 미제 사건을 확인하며 여죄를 캐는 데 집중하고 있다. 거제, 부산, 대전, 용인, 제주도, 수원 등. 해당 지역들의 미제 사건 피해 여성이나 실종 여성은 총합 135명. 상식적으로 저 많은 지역의 여성들을 오원춘이 몽땅 살해했을 리는 없겠지만, 일부 잘못된 여론몰이로 인해 실제 피해자가 이 정도나 되는 것처럼 뻥튀기되기도 했다. 물론 사건의 흉악성을 볼 때 중점적으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일로 미제 사건의 제1용의자가 되었다.
그런데 4월 말, 그의 집 소각로에서 타다 남은 뼛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문제의 뼈는 경찰이 수거해갔으며,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데 큰 것은 정형외과 등 전문가의 소견으로는 사람 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작은 것은 불분명한 상태라 경찰에서 수거 후 국과수에서 수사했으나, DNA 감정 결과 동물 뼈로 밝혀졌다고. #
몇몇 언론사에서 범인의 실명을 공개했으며, 동아일보 홈페이지에는 범인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기사로 나온 것은 아니고 동아 블로그가 메인에 링크된 것. 이미 현장 검증 시에 얼굴이 보이기도 했으며, 조선일보에서 얼굴 전면이 공개된 기사를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오원춘에게 2012년 6월 15일 1심 법원에서 '''인육 제공설 등을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 정확한 선고 내용은 사형과 더불어 10년간 신상정보 고지, 30년간 위치추적장치 부착이라고 한다. #
오원춘은 항소했고, 2012년 10월 18일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당연히 사형일 거라 생각했는데 인정할 수 없다며 "이 나라가 너무 싫다", "다시 트라우마가 찾아왔다"고절망했다.

"국가가 얼마나 더 잔인하게 사람이 죽어야지만 사형을 내리는 건지... 그게 얼마나 더 끔찍하게 죽여야지만 사형이 선고가 되는 건지 알고 싶어요. 이런 사건조차 무기징역이 나는데 범죄자들이 얼마나 활개치고 다니겠어요."

무기징역이 된 이유는 사형 판결의 원인이 된 '인육제공설' 이 항소심에선 판결에 증거 불충분으로 인정되었기 때문. 항소심 측에서는 오원춘이 시신을 수백 조각으로 나눠 해체하긴 했으나 그냥 봉지에 담은 점 등으로 보건대 인육 제공이 목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6],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인육설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폭력 결합 살해 및 사체 훼손이므로 무기징역이 적절하며, 사형 선고는 합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건 여파가 크다 보니 무기징역 판결 하루 뒤 열린 국정감사에선 여야가 한 목소리로 '형량이 너무 가볍다'며 판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2013년 1월에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앞서 2심의 인육제공설 기각이 감형 확정의 주된 이유라고 한다.

3. 논란


이 사건처럼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반응과 파장을 일으킨 사건은 매우 드물다. 경찰에 이처럼 큰 전 국민적인 분노와 비난이 쏟아진 적은, 기자가 기억하기로는 민주화 이후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경기지방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이 연이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사의를 표명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언론보도 이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정치권이나 고위공직자가 연결된 권력형 게이트나 대형 금융비리도 아니고, 수십 명이 살해된 연쇄살인사건도 아니었다. 한 여성이 흉악범에 의해 살해된, 어쩌면 자주 있는 단순한 살인사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피해여성이 현장에서 범행을 당하며 112센터와 주고받은 7분 36초의 절박하고 소름끼치는 통화내용과 이를 숨기려는 대한민국 경찰의 거짓말과 사건 축소 은폐 행태가 있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일선에서 지켜야 할 경찰이 사건 축소은폐에만 급급해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명예와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다.''' 한국기자협회 칼럼



4. 오원춘 체포 후


  • 오원춘은 체포된 이후 한국 경찰중국 공안과 비슷할 거라고 예상하여 심한 구타를 당할까봐 잔뜩 쫄았으나, 구타 없이 취조만 진행되자 놀랐다고 한다.
  • 2012년 6월 22일 오원춘이 추가조사를 받기 위해 대형버스를 타고 수원지방법원으로 호송되고 있었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던 마약사범 이모 씨와 몸싸움을 벌였다. 오원춘이 다리를 떨며 창 밖으로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히죽거리는 모습을 본 이씨가 "너 오원춘 맞냐? 다리 흔들지 말고 반성하고 있어!"라면서 발로 툭 쳤고, 이에 격분한 오원춘이 달려들어 싸움으로 번진 것. 물론 교도관들의 제지로 싸움은 바로 중단되었다. 이씨는 "나도 죄인이지만, 여성 행인을 보면서 피식 웃고 왼쪽 다리를 건들건들 흔드는 모습에 화가 나 그랬다."면서 분개했다고. #
  • 경찰의 안일함에 분노한 피해자의 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3억6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법원은 경찰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 유가족에게 최종적으로 약 1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냈다(2012가합70628). 가족들은 돈의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심어린 사과를 원한다고. 피해자 남동생은 "사건이 마무리되고 우리 가족들이 숨이라도 돌렸을 때 사건처리와 관련이 있는 경찰관들이 직접 찾아와 사과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결국 문제의 경찰들이 사과했다는 소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경찰이 잘못을 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 "신고 접수 경찰관이 초기 대응과정에서 피해 여성에 대한 긴급하고도 중대한 위해상황을 현장 출동 경찰관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고, 현장 경찰관들 역시 단순한 순찰을 넘어 집중적인 탐문수색 또는 CCTV 확보를 통한 현장 확인 등의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도 하지 않은 것은 현저하게 불합리하므로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위법행위로 인정된다."

5. 재판


함께 오원춘이 살인을 저지른 목적이 '''인육 조달이나 장기매매를 위한 장기 적출이라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검찰 역시 인육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나, 재판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3년 1월 16일 대법원무기징역을 확정했다. 물론 이에 대해 강호순 등 다른 흉악범은 사형을 선고했으면서 오원춘은 왜 무기냐며 비판 여론이 많지만, 법원에 따르면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라고는 하지만 피살자가 한 명이라는 점, 그리고 인육 가능성이 결국 입증되지 않아[7] 사형까지 선고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밝혔다.
이후 2013년 1월 19일 인터넷에서는 오원춘이 천안외국인교도소에 수감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어났다. 세금으로 흉악한 살인마에게 꼬박꼬박 밥을 먹이는 것도 몹시 분노할 일인데, 그가 수감될 천안외국인교도소는 쓸데없을 정도로 호화 시설[8]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천안외국인교도소는 주로 모범수가 수감되기에 애시당초 오원춘 같은 흉악범이 거기로 갈 가능성은 없었고, 얼마 후 흉악범이 들어가는 경북북부제2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강제 작업은 거부했으며, 하루에 1시간 운동하는 거 빼고는 독방에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6. 기타


  • 범인 오원춘은 키 178cm 몸무게 83kg의 거구이다.
  • 피해자는 1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휴일이어서 마을버스가 일찍 끊긴 데다, 2천원이 조금 넘는 택시비라도 아끼기 위해서 버스와 도보를 이용했다. 아버지는 일용직 근로자,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는 등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졸업 후 고졸로 취직해 2년간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경리로 일했다. 이 때문에 늦은 나이에 대학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렇게 번 돈으로 군산의 한 전문대에 진학했다.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을 벌어가며 혼자 힘으로 졸업했지만 지방 전문대라는 이유로 학력차별의 벽에 부딪혀 취업이 쉽지 않았다. 결국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짬짬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공부와 일을 병행하자니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학원비 부담까지 겹쳐 3년 만에 꿈을 포기했다. 곽씨가 고향인 전북 군산을 떠나 언니가 사는 수원으로 올라온 것은 사고가 있기 고작 8개월 전. 경기도 오산에 있는 휴대전화 하청업체 부품 공장에 다니다가 사건 두 달 전인 2012년 2월 집 근처 공장으로 옮겨 일을 하고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일을(그것도 밤까지 야근을) 하고, 그렇게 주말까지 나가 일을 해도 비정규직이라 한달에 170~180만원밖에 받지 못하는[9] 등 정말 힘들게 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절약해가며 대부분 부모님에게 드리는 등 가족 생활비를 대고, 회사에서 1달에 10만원이 조금 넘는 밥값을 아껴서 조카에게 용돈을 챙겨주기도 한, 함께 사는 조카들은 엄마보다 이모를 더 따를 정도로 자상했던,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피해자 남동생 인터뷰 이런 사람이 잔인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더욱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 유가족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부모, 언니, 남동생 할 것 없이 수면제 없이는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이 선고되면서 또다시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고통이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OO아! 사랑하는 내 동생 OO아! 너를 보낸 지 1년이 지났구나. 시간이 갈수록 너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 힘이 든다. 1년 전 그날. 얼마나 무서웠니? 끔찍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만 나와.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단 한 번만이라도 너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공포에 질린 끔찍한 장면만 떠올라. 살고 싶다는 생각에 경찰을 찾았을 텐데, 내 동생이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져. 그런데도 이 나라는 변한 게 없구나. 너의 억울함만은 꼭 풀어주고 싶었는데… 너무 미안해.
>
>엄마·아빠는 엽기적인 살인마를 평생 먹여 살려주는 나라에서 너를 낳은 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셔. 조카들은 아직도 자장가 불러주던 이모를 찾는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를 가슴에 묻은 우리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 가지만 이젠 힘을 내보려고 해. 그러니 그곳에서는 나쁜 기억 모두 잊고 편히 쉬어. 사랑하는 내 동생 OO아! 28년 동안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줘서 고마워. 가슴 찢어지도록 보고 싶다. 그리고 미안하다.”
>
>피해자 언니가 1주기 때 쓴 편지#
  • 당시 사체 훼손의 특이한 점은 다른 토막살인과 달리 절단된 부위는 무릎 이하만이고 온전하게 남은 얼굴 이하부분은 내장을 적출하고 살을 발골하듯 잔혹하게 제거해냈다고 한다.
  • 후에 인육캡슐이 다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이 사건이 다시 언급되었다. #
  • 문제는 조선족들 본인의 대응이었다. 당시 조선족 커뮤니티인 모이자 게시판에서는 범인인 오원춘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오죽하면 그랬겠나 하는 식으로 피해사망자를 모욕하는 글과 댓글이 계속 올라왔고 많은 한국인들도 이를 확인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었다. 이들은 과거 논란이 된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에서도 한국인이 문제라 죄가 없다는 식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강력하게 비판했다면 '개인의 일탈'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제 식구 감싸기 때문에 '쟤네는 다 저렇다.'는 식의 특정 집단 전체에 대한 혐오로 번지는 일은 흔하고, 불행히도 이 사건 역시 그런 전철을 고스란히 밟게 된 셈이다. 게다가 이 사건 이후로도 조선족이 흉악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계속 터지는 통에...
  • 시사인 기사에 따르면 한 조선족이 일으킨 특수 사건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한다. 이 사건의 원인은 지역 슬럼화라는 것이다. 슬럼화된 지대는 치안ㆍ보안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사건이 발생한 지동 일대는 전형적인 구도심 지역인데, 한때는 동네가 번성한 적도 있었고 지동과 가까운 수원역팔달문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택지개발 바람이 불면서 '영통지구' 등이 생겼고 지동을 비롯한 고등동 등 도심 지역은 방치되기 시작했다. 1997년, 지동과 인접한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고 '문화재 보존' 등을 이유로 개발 기피가 심해지면서 구도심의 슬럼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2007년 이 동네를 포함한 20여 구역에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지역 사정이 더 나빠졌다는 게 동네 사람들 설명이다. 부동산업을 하는 임 아무개씨는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동네 관리가 아예 안 된다. 사정이 나아진 사람들은 생활 여건이 좋은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라고 말했다. 철거가 예정된 빈집은 자연스레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지동주민센터 관계자는 "전입ㆍ전출이 많아 유동성이 심하다. 노인들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인근 초등학교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자녀가 전교생의 절반에 가까울 만큼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곳으로 전입한 외국인 노동자도 많아졌다. 사건이 벌어진 2012년 기준으로 지동에 거주하는 외국인 1347명 가운데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이 1227명으로 절대다수. 지동초등학교의 다문화가정 자녀 수는 3,4명에서 9명으로 더블링되었다. 아버지가 한국인이라 한국 국적이고 스스로 밝히지 않은 경우까지 합치면 더 많을 것이다.
원래 소외된 지역, 특히 철거가 예정된 구역은 보안의 사각지대가 되기 쉽다. 7300가구 1만6000여 명이 사는 동네에 방범용 CCTV는 단 7대였다. 집들이 낮은 담장 사이로 오밀조밀하게 얽혀 있어 마음만 먹으면 담을 넘기도 쉬운데도 평소 경찰이 순찰을 도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기막히게도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나자 열흘도 되지 않아 매일 밤 8시만 되면 경찰차가 동네를 순찰하고, CCTV도 추가로 2대 더 설치됐으며 이후에는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수천 대를 늘렸다. 5월에는 시내 뒷골목 등을 24시간 CCTV로 감시하는 첨단 'U-City 통합센터'(범죄징후를 포착하는 즉시 순찰차에 영상을 보내 경찰과 공조하는 시스템)를 개설했다.
  • 사건이 발생한 동네도 큰 충격과 타격을 받았다. 끔찍한 사건 이후 집주인들은 집을 내놓는 경우가 많아졌고, 전세기간이 남은 세입자들도 이사를 갔다. 거주민들 외의 유동인구가 줄면서 집값은 더 떨어지고,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안 됐다. 부동산중개업소는 다른 동네에서 지동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영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1년 만에 인적 없는 유령마을로 전락했다고. 애초에 지역이 슬럼화된 것이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었는데, 더 심해진 셈이다. 이에 2015년, 경찰청 국민디자인단은 이곳을 대상으로 '범죄예방디자인을 통한 행복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지동 주민들과 주민센터, 경찰청, 수원시청 관계자들이 함께 아이디어를 내 CCTV에서 경찰관의 목소리가 녹음된 음성을 재생해 주민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부분을 완화시켰고 주민들간의 신뢰 회복을 위해 동네 목욕탕을 커뮤니티 센터로 탈바꿈시키는 등의 노력을 했다.
  • 이 사건 관련해 잘못된 대처를 한 일선 경찰과 112신고센터 직원 등 11명이 징계를 받았고 그만두거나 대부분 다른 곳으로 보직 이동했다. 당시 신고 전화를 "에이 끊어버리자"라고 한 문제의 직원이 누군지 조사 중이라는 뉴스가 있었으나, 별달리 처벌을 받았다는 기사가 없는 걸로 보아 가벼운 징계조차 없었다고 보여진다. 내부 징계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경찰서 출입 기자들에게 그 소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징계 중에 가장 가벼운 감봉 징계를 내리려고 해도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그 결과가 경찰서 내에 전파되는데 징계위원회가 열린 기록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부 징계 처분이 아닌 엄연한 직무태만 관련으로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있었지만 경찰에 무시당했다. 그리고 실제로 징계가 아닌 단순 경고만을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
  • 2012년 6월에도 오원춘 사건 현장 700m 거리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경찰의 미숙한 신고 전화 대처가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정확한 위치와 함께 폭행 신고가 접수된 현장으로 뒤늦게 출동하던 경찰이 굳이 전화를 걸어 사건 발생을 재확인했고, 이를 가해자가 받아 오인 신고라고 하자 출동 없이 복귀하며 신고도 취소 처리한 것. #

여기에 오원춘 사건까지 터지자 2014년 경찰의 신고 대응 시스템이 전격 개편되었다. 신고 접수부터 경찰관 배치까지 모든 시스템이 대폭 변경되었고, 112 인력을 170명이나 늘리고 부적격자를 솎아낸다며 전국의 신고접수 요원 2154명 가운데 235명을 교체했다. 112 상황실 근무를 3조 2교대에서 4조 2교대로 바꾸고 인사혜택을 줘 유능한 인재를 끌어모으고 있다. 신고가 들어오면 무엇을 어떻게 물어봐야 되는지 매뉴얼을 만들어 교육도 시킨다. 그러나 결국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개편하느냐는 비판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한 경찰 고위 간부는 “오원춘 사건이 없었다면 112 개선 작업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2017년 부산 여중생 집단 폭행 사건에서 경찰은 폭행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그냥 지나치는 5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며 또 다시 논란에 올랐다.
  • 한 프로그램에서 중국 현지에서 오원춘의 지인에게 인터뷰를 한 결과, 중국에 있을 당시 중국 공안의 오토바이를 절도한 사실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 당시 촬영되었던 CCTV에 한 여성이 망을 보는 듯한 장면이 촬영된 바 있어서 공범이 또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증거는 없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한겨레21 칼럼에서 사건 당시 경찰의 무능 대처 핵심 원인을 '시국치안 편중'이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 경찰청은 2008년 촛불집회2009년 쌍용차 파업 진압 등에 막대한 장비와 경력을 동원하는 등 시위/집회 단속만 강경했지, 일산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 당시 대처 등에서 보듯 민생 치안엔 무능했다는 것이다.
  • 최초 통화된 경찰의 대응을 나쁜 녀석들 3화에서 인용한 듯 하다.[10]
  • 2015년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의 축제 중에 오원춘을 소재로 학생이 연 주점이 있어 논란이 된 적이 있어 축제가 하루진행 후 취소되었던 적이 있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외국인 지문날인 폐지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금기시되는 주제가 되고 말았다. 인터넷 여론은 당연히 좋지 않으며, 이제는 이슬람 테러단체까지 생겨나는 바람에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외국인 지문날인을 폐지하자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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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년 1월 22일 방영했다. 토론 주제는 사형제 찬반을 둘러싸고 "사형(死刑), 그 끊이지 않는 논란"이라는 주제였다.[2] 중국어우위엔춘, 우위안춘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두 단어로 들어와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3] 사실 이는 순화한 표현이다. 해체, 즉 '''몸을 아예 뜯어버린 거다.'''[4] 2020년 말, 실질적으로는 2021년 초가 되어서야 검경 수사권 조정은 실현된다.[5] 경찰관직무집행법상 위급 상황시 가택 출입과 조사에 대한 규정이 불분명해, 강제로 집안에 진입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서였다. 이후 지침이 개정되어, 범죄로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상당한 위험이 발생했다고 판단되면 집주인이 거부하더라도 경찰이 강제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현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범죄의 흔적이 발견되면 영장없이 압수수색 등 강제조사도 할 수 있게 됐다. #[6] 시신을 철저하게 은폐하려는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7] 실제로 대법원 상고 당시 검찰은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했을 뿐 인육 관련 사안은 끝내 입증하지 못했다.[8] 사실 이는 천안개방교도소와 혼동하여 생긴 오해이다. 둘 다 이름에서 특수교도소처럼 인식되고 또 같은 지역에다 서로 근처에 있다 보니 기자들이 제대로 확인도 없이 기사화하는 바람에 네티즌들의 여론이 들끓게 된 것이다. 천안외국인교도소의 정식 명칭은 그냥 '천안교도소'인데, 호화로운 시설을 갖춘 곳은 천안교도소가 아니라 '천안개방교도소'로서, 장기간 복역한 모범수들을 선발하여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하여 바깥세상과 비슷한 환경을 그럭저럭 만들어놓고 사회 적응 교육을 시키는 곳으로, 이 둘은 위치도 다르고 전혀 별개이다. 반면 천안교도소는 외국인 재소자를 수용한다는 것과 언어와 문화에 따라 방이 배정되고 식사가 문화, 종교, 관습에 따라서 한식, 양식, 이슬람식 3가지로 구분되어 나오는 거 빼고는 이외에 일반 교도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외국인 수감자는 이곳 말고도 대전교도소 외국인 사동에 수감된다. 이 외에도 천안교도소는 과거 소년교도소 시절부터 주한미군을 비롯한 한미행정협정 관련 범죄자들을 수감했는데, 위 논란과는 별개로 이들이 수용되는 SOFA 사동은 시설이 좋다고 한다.[9] 주말근무에 야근까지 한 결과라는 걸 감안하면 그다지 큰돈을 받은 것이 아니다.[10] 극중 남구현 서울지방경찰청장(강신일 분)이 휘하 경찰서장에게 네 시간! 니 관할서 아 들이 어리버리 깐 그 네 시간 사이에 범인이 피해자를 죽이고 도망갔다고! 하며 대노하는 장면.[11] 애초에 대한민국은 성인이 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의 열 손가락을 지문 채취하는 나라이다. 자국민한테도 그러는 나라에서 외국인 지문채취만 폐지하자는 이야기가 호응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