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국회

 


'''대한민국
제17대 국회
第17代 國會
'''
'''2004년 5월 30일 ~ 2008년 5월 29일'''
<rowcolor=#000000> '''이전'''
'''이후'''
'''제16대 국회'''
'''제18대 국회'''
'''의원정수'''
299석[1]
'''의장'''
'''전반기''': 김원기 (2004.6.5.~2006.5.29.)
'''후반기''': 임채정 (2006.6.19.~2008.5.29.)
'''부의장'''
'''전반기''': 김덕규, 박희태
'''후반기''': 이용희, 이상득
'''제1당'''
'''열린우리당''' (2004.5.30.~2007.4.25.)
'''한나라당''' (2007.4.25.~2007.8.20.)
'''대통합민주신당''' (2007.8.20.~2008.2.17.)
'''통합민주당''' (2008.2.17.~2008.5.29.)
'''정부'''
참여정부 (2004.5.30~2008.2.24.)
이명박 정부 (2008.2.25~2008.5.29.)
'''원내정당[2]'''
'''[ 의석수 보기 ]'''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친박연대, 창조한국당
1. 개요
1.1. 상세
3. 원구성
4. 주요 활동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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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사무총장 강용식 '''국회사무총장 康容植입니다. 제17대 국회의원님들의 등원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제247회 국회(임시회) 집회에 관하여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제247회 국회(임시회) 제1차 국회본회의 회의록 첫 구절

2004년 4월 15일에 치러진 총선을 통해 동년 5월 30일에 출범하여 4년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국회.

1.1. 상세


'''탈당국회'''
출범 배경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이 가장 큰 몫을 했는데, 민주당계 정당열린우리당이 단독으로 과반(152석) 의석을 차지하여 1960년 이후 '''44년''' 만에, 그리고 1987년 헌정 이후 최초로 원내 1당(그것도 과반)인 상태에서 개막하여 국민들의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내의 계파 갈등[3] 과, 리더십 부족[4] 등으로 국민들의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한나라당이 이를 노려 온갖 반대로만 일관했다.[5] 결국 열린우리당은 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계속 패배하면서 2005년 10월 26일부로 과반을 상실했고, 그 이후부터는 사실상 한나라당이 여당이었다고 봐도 무관한 신세가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끝내 계파 갈등을 이기지 못한 탈당 러시로 한때 2당으로까지 떨어졌다가 이런저런 합당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으로 다시 1당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결국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게 완패했다.
지금까지는 3개 이상의 정당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명백한 다당제였지만, 이번에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실질적인 양당제를 구축하면서 이를 계기로 한국 정치가 양당제에 더욱 더 가까워졌다. 이는 2015년까지 약 11년간 존속했으나, 결국 중도 및 보수진영의 분열로 다시 다당제로 돌아간 상태였다가 2020년 21대 총선으로 양당제로 회귀한다.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이 선거에서 10석을 차지하면서, 약 14여년만에 진보진영이 입성한 국회이기도 하다. 비록 온갖 파행과 누가 진짜 여당일지도 모르는 혼란의 국회라는 오명을 샀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와 정치개혁을 예고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16대 국회 때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민련 제법 남아있던 민정계, 공화계, 민주계의 원로 정치인들이 대거 은퇴, 낙선, 공천 탈락을 함으로써 정치변화의 시대가 왔다.
이때 당시 남아있던 민정계와 공화계는 박성범, 김형오, 김병호, 정형근, 허태열, 강재섭, 안택수, 박종근, 이해봉, 이경재, 정몽준, 고흥길, 전재희, 이재창, 최연희, 이상득, 이상배, 김태환, 김광원, 김용갑, 김기춘, 박희태, 이강두, 김학원, 황진하, 권경석, 김정부 등 26명에 불과했다. 총 299석 중에 26명만 과거 민정계와 공화계에 속했던 정치인들이고 나머지는 신진정치인으로 많이 채워졌다는 것이 16대 국회와의 큰 차이점이다.
민주계 역시 대부분의 노령 정치인들이 은퇴했는데 이인제, 김무성, 이방호 등을 빼면 거의 많이 없어졌다.
[image]
한편 제17대 국회 때 위 짤방이 나오기도 했다. 이계진 당시 의원이 그린 것.

2. 국회의원




3. 원구성




3.1. 의장단





3.2. 상임위원회 / 상설특별위원회



3.3. 교섭단체



4. 주요 활동


아래에 열거한 법률은 †로 표시한 것 외에는 이 문서 최종수정일 현재에도 시행 중인 법률(후에 개정된 것 포함, 폐지제정된 것 제외)이다.
  • 2005년
    • 1월 5일: 종합부동산세법 제정.
    • 1월 27일: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 ), 국어기본법,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대덕연구개발특구등의육성에관한특별법[6], 위치정보의 보호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위치정보법) 제정.
    • 5월 18일: 저출산ㆍ고령사회기본법 제정.
    • 7월 29일: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 제정.
    • 8월 4일: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공유재산법),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지방계약법 제정.
    • 12월 23일: 긴급복지지원법, 범죄피해자 보호법 제정.
    • 12월 30일: 국가연구개발사업 등의 성과평가 및 성과관리에 관한 법률(연구성과평가법) 제정.
  • 2006년
    • 2월 21일: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제주특별법) 제정.
    • 3월 24일:「정부업무평가기본법」,「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채무자회생법)」제정.
    • 5월 24일: 재건축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제정.
    • 10월 4일: 국가재정법 제정.
    • 12월 21일:「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제정.
  • 2007년
    • 1월 19일: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해양환경관리법 제정.
    •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어린이놀이시설법) 제정.
    • 3월 29일: 이자제한법 제정.
    • 4월 27일: 특정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7] 제정.
    • 5월 17일: 행정조사기본법,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정.
    • 5월 25일: 개성공업지구 지원에 관한 법률(개성공업지구법) 제정.
    • 8월 3일:「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제정.
    • 10월 17일: 국가회계법 제정.
    • 12월 21일: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질서위반행위규제법 제정.

5. 관련 문서



[1] 지역구 243석, 비례대표 56석[2] 임기 종료시 기준[3] 김한길, 정동영, 관료출신 인사(홍재형, 강봉균, 이시종) 등은 당내 중도~보수 세력으로 활동했고, 반면 김근태(민평련)와 386세대(우상호 등)이 대체적으로 진보성향을 띠었다. 정세균계나 이해찬, 문희상 같은 중진의원들은 대체로 친노 내지는 중도적인 노선을 걸었다. 이 당시에는 당 내에서 서로 같은 의제를 두고서 다른 목소리를 내며 볼썽사나운 모습만 보였다. 강봉균 '''정책위의장'''이 김근태 '''당 의장'''을 두고 친북좌파라고 비난한 것은 열린우리당의 막장성을 보여주는 부분.[4] 여러 개의 계파가 난립하면서 서로 자기들끼리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있었다. 지방선거나 보궐선거에서 지면 상대계파가 들고 일어나서 사퇴요구를 했고, 당 의장이나 지도부가 사퇴하는 것은 연례행사가 되다시피 했다. [5]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박근혜였는데, 박근혜는 전투야당으로 한나라당의 포지션을 잡고, 여당과는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6] 현 연구개발특구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연구개발특구법).[7] 현 특정 범죄자에 대한 보호관찰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전자장치부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