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선진당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자유선진당'''
한나라당
국민중심연합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
국민중심연합
국민생각
(개별 합류)

[image]
'''자유선진당'''
'''한자 명칭'''
自由先進黨
'''영문 명칭'''
Liberty Forward Party(LFP)
'''약칭'''
선진당
'''1차 창당일'''
2008년 2월 4일
'''해산 ·
신설 합당'''
2011년 10월 17일[1]
'''당명 변경'''
2012년 5월 29일 (선진통일당)
'''해산일'''
2012년 11월 16일 (새누리당에 흡수합당)[2]
'''이념'''
충청 지역주의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3]
보수자유주의
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4]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23, 3·4층 (여의도동, 용산빌딩)
'''해산 전 대표'''
이인제 (비상대책위원장)
6선 (13,14,16,17,18,19대)
'''해산 전 원내대표'''
성완종
초선(19대)
'''의석 수'''
5석 / 300석 (1.5%) 해산 직전
'''광역단체장'''
2석 / 16석 (12.6%)
'''기초단체장'''
12석 / 228석 (5.3%)
'''당 색'''
파란색 (#00529C)
'''사이트'''

1. 개요
2. 역사
2.1. 자유선진당 창당
2.3. 제18대 국회와 원내교섭단체 구성
2.4. 2010년 지방선거의 참패
2.5. 19대 총선에서의 참패
2.5.1. 총선 패배와 문제점
2.6. 총선 후
3. 역대 당 대표
3.1. 총재
3.2. 대표최고위원
3.3. 원내대표
4. 세력과 이념 분석
4.1. 선진당 구성 세력
4.2. 그에 따른 당의 정책
4.2.1. 자그마한 반론
4.3. 결론
5. 여담
6. 역대 선거 결과
6.1. 국회의원 선거
6.2. 지방선거
6.3. 재보궐선거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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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마지막 충청권 보수정당으로, 이회창 세력이 2008년 2월에 창당했고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 세력인 국민중심당을 흡수하여 충청도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었다.
2008년에 창당하여 당해 4월 18대 총선에서 18석을 획득하였고 문국현창조한국당과 원내 교섭단체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했으나 2009년 9월 교섭단체가 해체되었고[5], 이후 2010년 지방선거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연달아 참패하면서 2012년 5월 당명을 선진통일당으로 교체했으나 6개월 뒤인 2012년 11월 새누리당에 합당되었다.

2. 역사



2.1. 자유선진당 창당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에서는 당명으로 최종안인 '자유신당'과 '자유한국당'(?!) 중 만장일치로 자유신당이 채택되었지만, 2008년 1월 26일에 당명을 자유선진당으로 확정했다. 창당준비위원장은 강삼재신한국당 사무총장[6]으로 내정되었다. 한나라당 친박계 현역의원이었으나 공천에서 배제된 곽성문 의원과 이용휘 박근혜 선대위 사이버후보위원장이 입당했다.[7] 이후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박상돈 의원과 유재건 前 비상대책위원장, 김혁규 前 의원[8], 이용희 국회부의장, 이상민 의원이 입당[9]했으며, 국민중심당(심대평, 김낙성, 권선택, 류근찬) 세력과 통합을 이루었다. 조순형 前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을 탈당하고 한동안 무소속 의원으로 있다가 2008년 초에 상임고문으로 입당했다. 그리고 이상돈 교수와 전원책 변호사, 조영환 같은 재야인사들과 입당했다.

2.2. 제18대 총선


창당 이후 처음 치러진 총선인 18대 총선에서 지역구 14석, 비례대표 4석(비례 득표율 6.8%)으로 총 18석을 획득, 20석이 기준인 원내교섭단체 지위 획득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충남과 대전의 16석 가운데 13석을 확보하는 등 이 정도의 확보도 크게 선전한 것으로 여겨졌다.[10] 다만 충북에서는 8석 중 1석[11]만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어찌되었든 이런 승리를 통해 이회창은 정계에 안정적으로 복귀했다.[12]

2.3. 제18대 국회와 원내교섭단체 구성


자유선진당은 2008년 촛불집회에서는 여당을 비판하는 등, 제3지대 위주로 "보수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세우려고 했다.
2008년 8월 6일, 당시 3석의 문국현의 창조한국당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었다. 이때 선진을 교섭단체명의 앞으로 하는 대신 1년씩 교대를 하는 원내대표는 4개월만 권선택 의원이 하고, 문국현 의원이 2009년 1년짜리 원내대표를 맡기로 하였다. 다만 창조한국당의 이한정 의원(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과 이를 승계한 시민세력 출신 유원일 의원은 여기에 불참하였다. 그리고 이 선택은 문국현 의원의 정치생명에 결과적으로 큰 악수가 되었다.[13] 자유선진당이 교섭단체를 자치하면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보건복지부를 감사)의 위원장은 자유선진당에게 넘어갔고 이는 자유선진당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했음에도[14] 18대 국회 내내 이어겼다. 당시 각 분과 위원장은 한나라당 11명, 민주당 6명, 자유선진당 1명이었다.
창당 초기에 있던 강삼재, 김혁규, 이상돈, 전원책 등의 인사는 이회창 총재와 노선 차이[15]로 인해서 탈당했다. 특히 전원책 변호사는 단 4일만에 대변인직을 사퇴했다.
2009년 8월 30일 갑작스러운 심대평의 탈당 선언[16]으로 19석이 되면서 창조한국당과 합쳐도 20석이 안되어 교섭단체 해체 위기에 처했다. 부족한 1석을 급히 채우기 위해 소속만 창조한국당일 뿐 사실상 독자 행보를 보이고 있던 유원일 의원과 접촉했으나 거절당했고, 무소속 이인제 의원에게 입당을 제의했지만 무산되었다. 거기에다가 창조한국당의 문국현마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는 바람에 결국 9월 1일 원내교섭단체는 해체되었다.
이후 이회창은 스스로 비판받던 '제왕적 총재'직에서 물러나, '총재'를 '대표최고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게 2010년 3월,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두고의 일이었다. 이 와중에 탈당한 심대평은 잠깐 자신의 정당인 국민중심연합을 차려 자유선진당에서 일부 인사를 뺏어가 자유선진당을 상대로 경쟁했다.
이후 정부의 세종특별자치시 건설계획 수정안(즉, 행정기관 이전 취소)에 반발해 소속 의원들의 전원 사퇴서를 결의했으나 이회창 대표의 측근인 이영애 의원(비례대표)이 수정안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퇴서를 찢어버리는 해프닝을 빚는다.

2.4. 2010년 지방선거의 참패


충청북도에서 도지사 후보 공천을 하지 못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충청도의 자존심'을 슬로건으로 2010년 지방선거를 치른다.
그리고 결과는 참패. 서울특별시, 충청남도, 대전광역시 세 곳에 광역단체장 후보를 냈지만, 대전의 염홍철 후보만이 당선되었고[17][18] 충남은 당 원내대표를 지낸 박상돈 후보가 민주당의 풍운아 안희정 후보에게 역전패당하면서 대전 자민련 인증을 확실히 했다. 그나마 염홍철 후보[19]가, 민선 3대 전직 시장으로서 2006년 지방선거에서 '아깝게' 패배할 정도로, 나름 기반이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서울에서 히든카드로 출마한 지상욱 후보[20]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보다 득표율이 낮았다.[21]
앞서 말했듯이 충북지사는 후보도 못내는 안습한 꼴을 겪었다. 거기에 충남에서도 기초단체장 절반을 다른 정당에 내주기까지 했다(선진 7, 한나라 4, 민주 3)[22]. 충북에서 3곳의 지역구(보은군수·옥천군수·영동군수)를 확보했으나 이것은 이용희 의원의 남부 3군 세력권이었으므로 의미가 크지 않다.[23]
이런 참패 속에 이회창이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나는 듯 했지만 1주일 만에 도로 복귀했고, 박상돈 전 원내대표의 도지사 출마로 치뤄진 2010년 7월의 천안을 보궐선거에서는 14%의 지지율로 3위에 그치는 등 (선거는 한나라당이 승리)[24] 같은 선거에서 역시 참패한 은평구창조한국당[25] 함께 공멸할 징조를 보인다. 한편 당의 생명을 걸었던 세종시 문제는 결국 한나라당 친박의 힘으로 수정안이 부결되었으나, 이것은 ''' 친박계의 승리'''였지 선진당의 승리가 아니었다.
2011년 9월 8일 지방선거 당시 탈당했으나 공주에서만 승리를 거둔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과 다시 합당을 하고, 이름도 '자유선진당' 그대로 가기로 결의했다. 덤으로 무소속인 이인제 의원도 같이 입당하여 어느 정도 세를 불렸다.

2.5. 19대 총선에서의 참패



자유선진당 총선 광고.

심대평, 이인제, 변웅전이 요리사로 출연한 자유선진당 총선 광고.
그런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안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심대평이회창이 내분까지 일으키는 최악의 상황에서 선거를 치렀다. 이회창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했고, 이에 반발해 탈당하라는 발언까지 나오는 등 사실상 심대평의 독자 세력 선거였다. 여기에 이상민, 이용희 등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다시 선진당을 나가, 민주당으로 되돌아 가버려서 사실상의 사망선고를 받았다.[26]
이런 상황에서 자유선진당은 50석 이상을 얻겠다는 허황된 꿈에만 빠져 있었다. #
한마디로 15대 총선 당시 자민련이 얻었던 의석을 재현하겠다는 뜻인데 그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건지는 뻔할 뻔자. 과거 자민련이 50석이 되는 데 일조했던 대구는 이미 철저한 새누리당 지지세로 돌아섰고[27], 수도권은 택도 없고, 그나마 비벼볼 언덕인 충청권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의 공천 신청자는 겨우 32명이었다.
그 결과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원래 연기군 출신 의원이던 심대평 대표가 민주통합당 이해찬 前 총리에게 큰 차로 밀려 '''떨어졌고''', 달랑 '''5석''' 건졌다. 17대 총선 당시 자민련의 4석보다 1석 많기는 한데, 그때 자민련은 비례대표 3% 득표에 실패, 즉 4석이 다 지역구였다. 반면 2012년 자유선진당은 지역구는 3석으로 줄고, 비례대표 선거에서 간신히 3.2%를 차지해서 2석을 추가했다.
※ 당선 의원
  • 지역구: 이인제 - 논산/계룡/금산, 성완종 - 서산/태안, 이명수 - 아산
  • 비례대표: 문정림, [28]황인자 (승계)
충북에서는 역시나 이용희 의원이 민주통합당으로 가버리면서 힘을 못쓰고 전멸했고[29], 정당 득표율에서는 '''통합진보당에도 밀리는[30]''' (심지어 통합진보당이 충북에서 지지율이 높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안습한 꼴을 겪었다.[31] 4년 전 5석을 쓸어담은 대전광역시는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에게 '''모조리 뺏겼으며''', 당의 존립 기반이라는 충남에서도 천안과 공주 등 도시권을 민주당에, 농촌권을 새누리당에 다 뺏기고 말았다.

2.5.1. 총선 패배와 문제점


이 총선 패배는 스스로 '''자멸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애초에 텃밭이라는 충청남도에서도 30%대 후반의 허약한 지지도가 2010년 지방선거 이래 계속되어 왔고, 그 이후 2년 간 자유선진당은 충청권의 자존심 운운 이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한 게 없었다.
'''회심의 수가 딱 하나 있었다.''' 친이와의 연대. 심대평은 공천 탈락 된 김무성을 끌여들여 실제로 40여석의 3번 정당으로 선거를 치루려고 했었다. 그러나 김무성이 거절하면서 불발. # 비밀 해제 MB 5년
그 밖에도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의 예를 보듯이 자유선진당도 비슷한 성향의 정당인 새누리당과의 연대로 충청권에서 자유선진당 단일 후보를 내고, 그 이외 지역은 새누리당에게 양보하던가, 아니면 반대로 수도권에서 일정 지역구를 양보받는 대신 자유선진당도 충청권 일부를 양보해주던가 하는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책이라던지 대북 이슈를 선점해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새누리당에서 지속적으로 제의했지만 자유선진당은 모두 거절했고, 후자의 경우는 박선영 前 의원이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로 단식 투쟁을 벌이는 등 대북 이슈 자체는 먼저 선점했지만 자유선진당은 여기에 거의 관심도 주지 않았고, 그마저도 후반 가서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여기에 대거 동참하는 바람에 결국 이 이슈조차도 뺏기고 말았다. 실제 자유선진당 인사들 중 여기에 그나마 관심을 보인 것은 이회창[32]이었고 그 이외에 관심을 보였거나 지원해준 것은 전부 한나라당이었다.
하지만 이는 원칙을 지키는 보수 야당과 제3의 선택이라는 스탠스 하에 새누리당 정권(이명박/박근혜)정권에 계속 반대하는 스탠스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선진당은 민주당/제3지대 의원도 여럿 섞여 있는 등 은근히 성향도 불분명했으니 새누리당과는 입장에 차이가 있어 새누리당과의 연대는 무리였을 수도 있다.
재보궐 선거에서도 자유선진당은 2008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연기군수와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태안군수만 승리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산시장에서 0.6% 차로 패했다. 그나마 당황스러운 것은 연기군은 심대평의 오랜 텃밭이고, 태안-서산 지역구는 19대 총선에서 선진당이 승리한 3곳 가운데 하나다. 재보궐이 터지는 원인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공천 과정도 엉망이었다.
  • 우선 현역으로 있던 의원 대부분을 공천했다. 불출마한 사람이래봤자, 이회창이나 조순형 정도였고[33], 공천 탈락한 사람이래봤자 부여군-청양군의 이진삼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진삼의 경우는 민정계 출신으로 이미 75세나 되어 어디에서라도 쳐냈어야 할 인물이었다. 또한 하나회 출신이기도 했고, '천안함 사태에 관련된 청문회'에서 '군번줄, 경례' 같은 정신나간 소리나 하고 있으니 잘리지 않는게 이상한 인물이다...[34]
  • 가장 황당한 경우는 대전 유성구에 공천되었던 송석찬 후보의 경우였다. 그는 아주 화려한 정치 경력으로 유명한데, 18대 총선에는 통합민주당에서 나온 사람이었다.[36] 한편 민주통합당의 후보는 자유선진당으로 승리했다가 막판 탈당해 경선에서 승리한 이상민이었다. 즉 후보는 같은데 당이 바뀐 상황이었다. 송석찬은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하자 자유선진당으로 왔고 자유선진당은 어차피 후보가 없으니까 옳타꾸나 하고 받은 것. 결국 이상민 의원이 다시 승리.
  • 한편 이회창 의원의 원 지역구였던 홍성군-예산군에는 이회창의 측근이었던 서상목(...) 前 장관을 공천했는데.... 세풍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이력이 있어 한나라당에서도 퇴출된 인물이라 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새누리당 홍문표 후보에게 참패하고 낙선.
심대평 前 대표 역시 총선 패배에 한몫했다. 애초에 역량이 없는 정치인으로서 지역주의 읍소 밖에 남은 카드가 없었는 데다가, 선거대책본부를 자신이 출마한 세종시로 옮겨버린다. 이건 누가 봐도 자신의 정치 생명 더 늘리기 위한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37] 총선을 전력으로 도와도 모자란데 자신의 원 지역구였던 연기군(세종시)로 출마했다. 당장 상대 후보는 그래도 명색이 텃밭 관악구 을[38][39]을 버리고 온 이해찬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이 패배로 심대평은 대표직에서 사퇴했고, 최다선 의원인 이인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2.6. 총선 후


5월 20일, 말 그대로 올 것이 왔다. 이회창 前 대표가 탈당을 선언했다. 당내 두 축 중 하나인 이회창 前 대표의 탈당으로 자유선진당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았으며, 미미하게나마 남아있던 非충청권의 세도 완전히 상실되었다. 심대평 대표야 총선에서 참패를 했으니 재기 불능.
이런 상황에서 껍데기만 남은 당을 이인제가 접수했다. 자유선진당은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게 되어 자유선진당이란 이름은 19대 국회 시작을 앞둔 5월 29일로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영문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선진통일당은 대선 과정에서 일종의 역할론을 펼쳐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이회창 前 대표와 함께 새누리당에 앞다퉈 손을 잡고, 그 해 11월 새누리당과 합당하여 소멸된다. 합당에 반발한 일부 인사들은 민주통합당으로 들어갔다. 현재는 국민의힘(심대평, 이인제, 이명수, 지상욱, 한현택 등), 더불어민주당(권선택, 이상민, 이용희 등), 민생당[40](임영호, 송석찬[41] 등), 친박신당(곽성문 등) 등으로 인사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만큼 인사 구성이 다양했다는 소리이다.

3. 역대 당 대표




3.1. 총재




3.2. 대표최고위원


  • 심대평 대표 (2008.2.12~2009.8.30)[42]
  • 이회창 대표 (2010.3.17~2011.5.9)
  • 변웅전 대표 (2011.5.9~2011.10.09)
  • 심대평 대표 (2011.10.10~2012.4.12)
  • 이인제 대표[43](2012.4.16~2012.11.16)

3.3. 원내대표




4. 세력과 이념 분석



선진당은 초기부터 끝까지 충청도의 자존심을 내세웠지만, 창당 당시의 실상은 김종필의 정계 은퇴 이후 세가 줄어든 구 자유민주연합 출신 중 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 인물들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충남 연고를 주장했던 전국구급 인물인 이회창을 중심으로 뭉친 것에 가까웠다.
대전/충남만 거론되는 이유도 있다. 충청북도 지역은 애초부터 자민련의 1995년~1998년의 전성기를 제외하고는 자민련의 텃밭이 아니고 앞마당 정도였으며[44], 자민련의 몰락 후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엎치락뒤치락[45]하는 곳이었다. 자유선진당은 창당 직후인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북지역 8개 선거구 중 6개 선거구에만 후보를 냈으나 1개 지역구 승리에 그쳤다. 더군다나 그 1개 지역구도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보은군, 영동군, 옥천군 남부 3군의 지지가 확고한 이용희 의원이 당선된 것. 당시 충북은 민주당이 총 8석 중 6석이라는 17대 총선에 이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4.1. 선진당 구성 세력


우선, 이회창, 심대평 등 주요 정치인이 아닌 대부분의 당원을 놓고 따져봤을 때, 진정한 보수/보수 야당이라 내걸며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듯 하나, 그 안에는 민주당/한나라당 출신서부터 비박, 친박, 극우세력[46]까지 정말 스펙트럼이 다양해서 의원별로 색이 다를 정도였다. 이러한 스펙트럼 탓에 당이 해산된 후, 현재는 정당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당 역사에서 보듯 크게 이회창, 심대평, 이인제 세력이 이합집산을 계속했다. 자유선진당이 이런 복잡한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것은 자유선진당의 탄생 배경 자체에 있다. 실질적으로 한나라당과 이념상의 큰 차이는 없지만 충청권 정당으로 오래 딴 살림을 차려왔던 사람들과 여러 사정으로 인해 한나라당(혹은 민주당)과 한 배를 타기엔 무리가 있어 독자적 세력화를 꾀하려는 사람들이 뭉쳤던 것.
전자의 경우 근원격인 신민주공화당 이후 지역감정 구도 아래에서 전통적으로 충청도를 차지해왔기에 당의 인물들 상당수가 충청도 지역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나마 자민련에서도 쓸만했던 사람들은 다 거대 양당으로 빠졌기 때문에 남은 인물 중 네임드 인물이 적었다.
자유선진당 인물난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심대평 대표의 경력을 보아도 심히 빈약한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문 행정공무원 출신인 심대평은 17대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처음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는 민선 충남도지사를 3번 역임했다. 지방자치제 이전에는 관료로 임명직 관선 지사를 한 경력도 있으며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한 적도 있다. 이런 경력의 그를 충남지역에서는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행정가라고 해줄 수는 있겠지만, 철저하게 중앙정치에서 벗어난 '''지방 토호'''일 뿐이다.
당 출범 이후부터 중심인물격인 심대평이회창이 계속해서 충돌하는 것도 이 배경을 감안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이른바 '충청의 맹주' 로서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과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심대평과 보다 큰 그림, 즉 전국 정당화를 꿈꾸었던 이회창은 지향이 다르다. 이회창의 인지도와 장악력, 독단적이란 평을 들을 수준의 행보에 따라 당은 의도대로 움직이는 편이었지만, 이에 반감을 가진 심대평의 세력 등이 이탈을 하게 되면서 이회창의 리더십도 점차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47]
이외의 국회의원 명단을 살펴봐도 (정치에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이상) 알 만한 인물은 이회창, 이인제, 박선영, 조순형, 변웅전, 류근찬 의원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중에서도 변웅전은 전 MBC 아나운서, 류근찬은 전 KBS 뉴스 9 앵커 출신으로 친숙한 얼굴이었고, 박선영은 동국대 헌법학 교수 출신으로 탈북자 관련 행보와 자유선진당의 붙박이 대변인으로서 알려진 것 뿐이다. 즉,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정치적 거물이라 할 사람들은 이인제와 이회창, 조순형 의원 뿐이다. 그나마 조순형은 18대 국회의원 중 최다선(7선)의원이었지만 원래의 지역구 및 정치적 기반이 서울이고, '미스터 쓴소리'라는 기존 별명과 다르게 대통령 탄핵에 앞장섰다가 민주당을 망친 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민주당에서 내쫓기듯이 나와서[48] 그동안의 정치적 행보와 상반된 정당[49]에 입당한데다 그나마 지역구도 아니고 비례대표제로 얻은 의석이라 당내에서의 발언권이 그리 크지 않았다.[50]
염홍철 시장이나 권선택, 이상민 의원 등 열린우리당 출신 충청권 거물들도 많이 합류했던 건 사실이다. 조순형 의원과 함께 이들의 성향은 크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막판에 이회창 총재의 권력이 줄어들면서 의원들의 개개인의 활동 폭이 넓어져 정치성향에서 (중도 성향의) 의외성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51] 대표적인 경우가 앞서 말한 촛불 시위 정국에서의 여당 비판을 들 수 있고, 또 하나의 큰 사례는 2011년 한미자유무역협정 통과 반대와 재협상를 당론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때로는 의료민영화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런 자유선진당의 변화에서도 이회창 의원은 유일하게 여당에 동조해 찬성표를 행사했고, 결국 탈당 행보의 시작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4.2. 그에 따른 당의 정책


이런 복잡한 사정은 당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반의 자유선진당은 정치적 노선을 보수주의로 하되 보수주의이지만 자민련마냥 한나라당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으며, 창조한국당과의 교섭을 통해 1년 반 동안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물론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은 원내교섭단체라는 한 배를 타고 있었지만, 사실 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를 들어 2008년박왕자 씨 피살사건 때 창조한국당은 청와대의 대북 강경책을 비판하는 논평을 내놓았지만, 자유선진당은 이 기회에 북한의 해상에 쳐들어가야 한다고 논평을 내놓았을 정도였다.
이회창이 2선으로 물러나게 된 이후 자유선진당이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거나 정책을 내놓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뭐 애초에 원내 3당으로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신민주공화당 이래의 전략이었으나, 이렇게 이미지가 줄어들면서 그보다 의석이 적은 민주노동당은 물론 원외정당인 진보신당, 국민참여당보다도 의제를 점하는 일이 없어[52] 정치적 비중이 창조한국당이나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과 동급이라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53]
정당의 정의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 이고 그 목적이 지지층을 대변하고 정권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유선진당은 원내 3당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기반한' 지지층은 있되 이념적인 지지층은 희박했고, 심지어 의원별로 색이 달랐다.[54] 한마디로 구시대적인 지역 분할 구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19대 총선 당시 변웅전 전 대표가 한 발언이었던 "경상도에는 당이 하나밖에 없는데, 충청도에는 당이 여러 개 있다"는 발언도 자세히 곱씹어 보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병맛이 충만한 발언이다. 지금이나 당시나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면 당장 전국단위로 욕을 먹었을 것인데[55] 자유선진당은 인지도가 낮아서 그냥 넘어갔다.(...)

4.2.1. 자그마한 반론


물론 애초에 해외를 포함해서 정당이 이념적인 지향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초창기엔 정당은 지역이나 인맥 중심의 '당파'에 가깝다가 점차 이념적으로 헤쳐모이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념이 생긴 뒤에도 지역적인 지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즉, 단순히 특정 지역에서 표를 몰아준다고 무조건 잘못은 아니다.

4.3. 결론


이렇게 지역 중심으로 모인 정당인 자유선진당은 한국의 정치체제가 진보-보수로 모일 때 특별한 개성도 없이 흩어진 경우에 가깝다. 제 3당 지위까지 올라갔던 자민련이 '원조 보수'론과 내각제를 지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한국당의 개혁 행보[56]와 이에 따른 자민련의 충분한 입지 확보로, 내각제 개헌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변한 정치환경에서 이회창이 선택할 수 있었던 스탠스는 '(원칙은 세우는) 보수 야당'이었다. 이것은 여당 내 소수파였던 친박계와 정확히 겹쳤다. 더구나 200석에 가까운 압도적인 여당의 의석 수 앞에서, 캐스팅보트의 지위는 애시당초 상실했으며, 그렇다고 자유선진당이 민주당과 강력하게 결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또한 이회창 총재가 17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내세웠던 지방 세력의 확보를 위한 '강소국 연방제 개헌(연방제 통일안이 아님)' 역시 같은 최후를 맞았는데, 여당 친이계의 개헌 계획이 다음 대선의 후보로 이미 확고했던 친박계의 반발과 함께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회창 총재의 의원 장악력도 '제왕적 총재'라는 비판과는 별개로 상당히 떨어졌다. 결국 여러모로 자유선진당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5. 여담


  • 자유선진당 당사인 용산빌딩의 뒤에는 한나라당 당사인 한양빌딩이 있었다. 애초에 국회 근처 오피스빌딩에 당사를 꾸리다니 생긴 해프닝.
  • 같은 충청 기반의 정치집단으로서 부여에서 넘어온 이주민 출신의 왕족과 마한 시대부터 이어져온 토착 귀족들로 이루어진 백제와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6. 역대 선거 결과



6.1.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2008년
18대
14 / 245 (5.7%)
4 / 54 (6.8%)
18 / 299 (6.0%)
원내 3당
2012년
19대
3 / 246 (64.4%)
2 / 54
5 / 300 (1.5%)
원내 4당

6.2. 지방선거


'''연도'''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2010년
1 / 16 (6.3%)
13 / 228 (5.7%)
41 / 762 (5.4%)
117 / 2,888 (4.1%)

6.3.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8년 6월

0 / 9
2 / 29
2 / 14
2008년 10월

1 / 2
0 / 3
2 / 9
2009년 4월
0 / 5

0 / 1
0 / 3
0 / 5
2009년 10월
0 / 5

2010년 7월
0 / 8

2010년 10월

0 / 2
0 / 1
0 / 3
2011년 4월
0 / 3
0 / 1
1 / 6
0 / 5
3 / 23
2011년 10월

0 / 1
0 / 11
0 / 11
1 / 19
2012년 4월

1 / 1
0 / 5
0 / 37
0 / 19

7. 둘러보기







[1] 국민중심연합과 자유선진당이라는 이름으로 신설 합당을 했기 때문에, 2008년 창당한 자유선진당과 신설 합당하여 생긴 자유선진당은 엄밀히 말하면 다른 정당이다.[2] 공고[3] 신민주공화당이나 자유민주연합 시절과 다르게 보수적인 색채는 약했다.[4] 주류는 보수주의 색채를 가졌으나 비주류인 민주당계 출신 정치인들은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운 색채를 띄고 있었다.[5]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의원직 상실과 심대평 대표의 탈당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2석을 잃었다.[6] 초대 최고위원이었고,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서울 양천구 갑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7] 대다수의 친박계가 백의종군하거나 친박연대로 간 것과는 대조적이다. 친박 주류인 서청원, 최경환과의 연관성도 적고, 인지도도 없어서 그런지 박근혜 정부에서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을 맡은 것이 전부.[8]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경남지사직을 사퇴하고 2004년에 열린우리당으로 가서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 이후 탈당으로 의원직 상실.[9] 이용희, 이상민 의원은 당시 통합민주당 소속이었으나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하여 당적을 옮긴 것으로 다른 민주당계 탈당자들에 비해 합류가 늦은 편이다. 이를 두고 이삭줍기라는 비판이 있자 이회창이 이삭줍기가 아닌 보석줍기라고 대응한 건 유명한 일화. 이 두 명은 후일 자유선진당이 몰락할 즈음에 다시 민주당으로 복귀한다.[10] 당시 충남에서 자유선진당이 아닌 지역구로는 민주당의 1석(천안시 갑), 그리고 당시 무소속의 '''이인제(논산ᆞ계룡ᆞ금산)'''였다. 대전에서는 민주당이 1석을 차지했다.[11] 보은-옥천-영동의 이용희(1931). 그나마도 애초에 민주당 계열에 오래 몸 담은 열린우리당 탈당파 출신이다.[12] 사실 생각해 보면 여기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제3정당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원내교섭단체 기준인 20석을 차지했어야 하지만 간발의 차로 실패했다. (비주류 보수표가 친박연대로 갈린 것이 컸다) 한편으로 나름대로 유력 인사들을 모아 총선을 치렀지만 충청권 외의 모든 지역구에서 낙선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지역정당 이미지가 완전히 굳어져버렸다. 자민련이나 국민의당 등이 지역정당이라며 비아냥을 받긴 하지만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자민련은 충청 외에도 의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고, 국민의당은 나름 비례대표 표는 전국적으로 고르게 받았다는 점에서 자유선진당보다는 사정이 많이 나았다.[13] 당시 언론에선 '''문국현의 정치적 자살'''이라 평하기도 했다.[14] 한나라당은 의석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자신들 몫으로 보건복지위를 가져올 것을 주장했으나 야당들이 반대했고 결국 민주당과 합의를 거쳐 후반기에도 보건복지위를 선진당 몫으로 주기로 했다.[15] 강삼재는 2012년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이상돈은 국민의당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16] 세종시 수정안, 충청권 총리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이회창 대표와 불화가 있었다.[17] 이쪽은 염홍철 전 시장과 박성효 현 시장의 리벤지 매치였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 염홍철 시장(열린우리당) 밑에 있던 박성효 정무부시장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 지방선거에 나오면서 사이가 험악해졌다. 그 상황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과 "대전은요" 발언을 통해서 박성효가 이겼다.[18] 다만 박성효가 대전시장을 4년간 하면서 각종 사업들을 호구마냥 털려서 이미지가 나빴던 것 덕분에 염홍철의 복귀가 먹힌 점도 있다.[19] 2002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전시장 당선되나, 2004년에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했고, 2006년에 열린우리당 디버프를 제대로 받아서 낙선하고, 2008년에 권선택, 이상민 등과 비스무리한 시기에 자유선진당 입당[20] 배우 심은하의 남편. 대표적인 이회창 라인으로 뽑힌다. 이후 합당과정에서 새누리당에 합류하며 20대 총선에서 서울 중-성동 을에 공천을 받아서 당선되지만, 이회창 전 총재가 바른정당으로 당적을 옮길 때에 동행한다.[21] 이후 지상욱은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다가,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중구-성동구 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원내에 입성했다. 이후 바른정당에 입당하고 현재는 바른미래당 소속이다.[22]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이 공주에서 1곳 승리.[23] 이 지역들의 별명이 '''이용희 나라'''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용희 의원과 같은 당이면 사실상 당선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옛날 이야기지만.[24] 이 때 당선된 후보는 빙그레 회장 김호연. 18대 총선 당시에는 패했지만 이번에는 승리했다.[25] 은평구 을 지역구 의원이 문국현인데, 문국현의 의원직 상실로 치뤄진 보궐선거에서 은평 을에서 내리 3선을 했던 '''한나라당 후보'''이자 친이계 실세인 이재오 특임장관이 당선되었다.[26]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서 이회창 지지를 선언한 자민련 의원들이 줄줄이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을 생각하면 비슷하다.[27] 당시에 TK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인 박근혜였으니 말 다했다.[28]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29] 다만 이용희 의원의 아들인 민주당 이재한은 낙선했는데, 당시에는 '''세습'''에 따른 비판이 더 컸기 때문에 새누리당 박덕흠이 당선됐다. 또한 옥천군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모친인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지라 새누리당이 표를 더 얻은 것도 있다. 이 구도는 지금도 굳어져서 20대 총선에서도 또 이재한 후보가 박덕흠 의원에게 졌고 이재한은 21대 총선에서는 아예 공천을 받지 못했다. 박덕흠이 3선 중진이 된 것은 덤.[30] 물론 진보세력과 참여계가 통합하면서 지지율이 쏠린 것과 선진당의 민주당 출신 의원들과 이회창계가 이탈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31]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썰린 자유민주연합을 생각하면 쉽다.[32] 이 말인 즉슨 자유선진당에서 '''이회창을 빼면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33] 변웅전은 비례대표 4번으로 공천[34] 그나마도 이진삼 의원은 공천 탈락에 반발해 무소속 출마를 했다. 그러나 선진당 홍표근 후보와 아예 한 자리수의 득표율을 득표한 이진삼 의원의 표를 합쳐도 새누리당 김근태 당선자보다 한참 밀렸다.[35] 19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역임[36] 송석찬 前 의원은 원래는 오랜 동교동계였다. 16대 총선 전후로 새천년민주당 소속. 당시 자유민주연합은 참패하여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했다. 민주-자민련, 즉 DJP 연합은 일단은 한번 깨진 상태였으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견제하기 위해 '공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송석찬 후보와 충청권 2명의 의원을 탈당시켜 자민련에 입당시키는 '의원 꿔주기'를 시전한다. 이때 송석찬이 남긴 불후의 유행어가 '한마리 연어 되어 (민주당으로) 돌아가겠다'(...) 나중에 자민련의 강창희 의원[35]이 이에 반발해 출당되면서 한명 더 보내야 했다. 송석찬은 나름 충정으로 맡은 고육지책이었으나 결국 이로서 철새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구기고 줄도 끊어져, 이리저리 원외 신세를 돌고 고깃집을 운영하다가 이상민 의원이 나간 뒤에야 간신히 민주당에 복당한 상황이었다.[37] 17대 총선에서 '''전국구 1번'''을 고수한 김종필 수준이었다.[38] 이해찬 전 총리는 관악구 을에서 13~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39] 이해찬 이후 김희철관악구청장이 18대 의원을 지냈고,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대표인 이정희가 단일 후보로 나가나 싶었지만, 여론 조작 논란에 사퇴하고 이상규를 내보내서 이상규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상규는 통진당 해산에 따라서 의원직을 잃고,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정태호와 '''이해찬의 적인 정동영'''을 꺾고, '''새누리당 후보'''인 오신환이 당선되어 27년만에 보수계 정당 의원이 관악구 을 국회의원직에 앉게 되었다.[40] 자유선진당 세력을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정확히 말해서는 새누리-선진 합당 후 선진계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대거 공천 배제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이동한 것. 실제로 이 당시에 모든 충청권 광자단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승리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때 비노계의 일원으로서 국민의당으로 이동했고, 그 후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을 통해 대부분의 인사가 다시 바른미래당으로 이동했다.[41] 원조 동교동계로써 새천년민주당이 자민련에 꿔준 인물.[42] 이회창 총재가 총재직을 대표최고위원으로 바꾸기 전 까지는 대표최고위원직이 없었다.[43] 비대위원장 포함[44] 이는 전신인 신민주공화당 시절에도 그랬다.[45] 민주당이 소폭 우세했다.[46] 홍관희, 조영환, 최우원 등[47] 이회창이 '축출'되었다는 견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회창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대표적 사례로, 19대 총선에서 이회창 전 대표의 오랜 측근이었다가 심대평 대표와 손을 잡고 이회창의 정계 은퇴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논란이 불거지자 심대평 자신이 무시하고 이회창을 칭찬하며 무마해버렸다.[48] 정확히 말하면, 중간에 신계륜의 의원직 상실로 벌어진 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어서 구 민주계의 주주로 부활하나 싶었지만, 17대 대선 경선레이스에서 민주당(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결정된 이인제와의 갈등으로 탈당해서 선진당으로 들어갔다. 이후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되어 7선에 성공했다.[49] 애초에 조순형은 민주당계 의원이다.[50] 19대 총선에 서울 중구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새누리당 정진석(정석모 국회부의장 아들)과 민주통합당 정호준(정대철 전 의원 아들), 선진당 조순형(조병옥 전 대선후보 아들)의 대결로 인해서 생긴 '2세 정치인의 대결'이란 말에 스스로 사퇴, 양보하고 의원직 임기를 종료한 후 정계를 은퇴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조순형 의원은 이인제와도 악연이 있다. 민주당(2007년) 항목 참조.[51] 다만 충남 지사로 출마했던 박상돈 의원의 경우 열린우리당 소속이었으나 당시부터 가장 보수적인 의원으로 손꼽혔고, 그래서 특별한 돌발 행보를 보이진 않았다. 2010년 지방선거로 정계를 떠나기 까지 의원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박상돈은 합당과정에서 당적을 옮기지 않았고 2020년 재보궐선거에서 미래통합당(舊 새누리당) 소속으로 천안시장직에 당선되며 정계로 복귀한다.[52] 그나마 참여당은 유시민의 존재감이 컸으며, 진보신당도 노심조, 야권통합으로 자주 언급되었다.[53] 창조한국당은 문국현의 의원직 상실 이후로 문국현계(공성경 등)와 비주류(이용경 등)가 내분을 일으켜서 사실상 잊혀져갔고, 친박연대도 구성원들의 연이은 한나라당 복귀와 서청원의 구속, 한나라당의 유승민을 위시로 한 친박계 부활로 인해서 잊혀져가던 상황이었다.[54] 이용희, 권선택, 이상민 같은 민주당 계열과 이회창, 이인제 같은 보수성향이 한 당에 있었다.[55] 당장 16대 총선 당시 노무현에 대해 공세를 한 허태열만 봐도...[56] 아이러니 하게도 그 개혁행보를 펼치던 신한국당의 중심에는 이회창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