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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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래 이 당은 '''서류상으로는''' 제17대 대통령 선거(2007년 12월 실시)에서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인사인 김선미 의원이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을 대선 후보로[2] 밀었던 군소 정당 '''참주인연합'''(참主人聯合)이었다. 대선에서 정근모가 낙선한 후로는 거의 개점 휴업 상태였다.
그러다가 18대 총선(2008년 4월)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공천에서 떨어진 소위 '친박 세력'들이 독자 창당할 시간이 없자 여기에 집단으로 입당해 당명을 잠정적으로 '''미래한국당'''(未來韓國黨)[3] 으로 바꾸는 것을 거쳐, 박근혜와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년 3월 21일 단 8일 만에 노골적으로 '''친박연대'''(親朴連帶, Pro-Park Alliance) 으로 바꾸었다. 2010년에 당명을 '''미래희망연대'''(未來希望連帶, Future Hope Alliance)로 변경했다가, 이후 2012년 한나라당(이후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미래한국당'으로의 역사만 따지면 대한민국 최단명 정당인 제3신당과 맞먹는 셈이다.
친박 세력이라지만, 박근혜 본인은 이 당이 생길 때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으므로 친박연대에 소속된 적이 없다.[4] 물론 입당만 안 해서 그렇지, 한나라당 소속임에도 친박연대 인사들에게 "살아서 돌아오시라"라는 격려를 한 것은 덤이다. 박근혜 지지자 팬클럽인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랑 기자회견 문제로 싸웠다고 한다.박대박
친박연대는 그 당명 때문에 짧은 기간 내에 인지도를 높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너무 노골적으로 특정 정치인('''박근혜''')을 거론하는 바람에 욕을 많이 먹었다. 사실 오늘 날도 정계에서 당연하다는듯이 계파를 인물에 따라 나누는데, (예: 친박계, 친노계-친문계, 안철수계) 그 인물 중심의 계파만 있는 정당들은 있어왔지만 그런 정당이 특정정치인의 이름을 당명에 기입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친박연대'라는 이름은 서청원 의원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원래 생각했던 당명은 '미래친박연대'였는데 선관위가 '미래'를 빼는 게 좋겠다고 해 친박연대로 당명이 정해졌다고 한다.
2. 역사
2.1. 시초
2007년 9월 28일,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에서 탈당한 김선미 의원이 '참주인연합'을 만들어 대선에 기호 7번으로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5] 을 내보냈다. 정근모 후보는 대선 하루 전에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으나 후보 사퇴는 하지 않고 0.1%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2.2. 점령
한나라당 후보 공천 과정[6] 에서 탈락한 서청원, 홍사덕 같은 친박계 의원들은 원래 당을 하나 새로 만들 작정이었지만, 총선을 앞두고 신당을 만들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판단 하에 참주인연합에 대거 입당하여 미래한국당으로 바꿔치기하여 먹어버렸다.(…)
서류상으로는 참주인연합이 다시 당명을 미래한국당→친박연대로 바꾼 것이지만 사실상 참주인연합 시절과 미래한국당→친박연대→미래희망연대 시절은 완전히 다른 정당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7]
이에 예전부터 참주인연합의 당직자들은 친박계와 연합하여 당의 부채를 상환하고, 공천에도 관여하려 했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서청원, 이규택 등에게 휘둘려 빚만 갚고 공천엔 관여하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대선 후보였던 정근모 전 장관과 이 당을 애초에 만들었던 김선미 의원은 대선에서 패하고서 얼마 못가서 탈당했으며, 김선미 전 의원은 다시 민주당으로 복당했다.
2.3. 18대 총선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지역과 부산광역시 연제구 등 몇 군데에서 당선되었으며 심지어 수도권에서도 '''한 곳'''을 얻었다!
여담으로 지역구 당선자수보다 비례대표 당선자수가 더 많았다.[8] 박근혜라는 네임 밸류만으로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 명실상부 선거의 여왕.[9]
한편 이 시기에는 역대급 흑역사가 일어났는데, 경주에서 당선된 김일윤 의원은 불법적으로 돈을 뿌린 것이 걸려서 4월 21일에 제명되었다. 또한 선거법을 위반한 홍장표 의원 역시 의원직을 잃었다.
압권은 비례대표 상위순번을 '''공천헌금을 받고 팔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돈을 준 양정례 의원(비례 1번/ 17억), 김노식 의원(비례 3번/15억 1000만원)과 공천헌금을 받은 서청원 대표(비례 2번)이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 때 공직선거법 제200조 2항의 비례대표 승계 제한 규정 때문에 3석이 공석으로 처리되었으나 2009년 10월 29일 선거범죄로 인한 당선무효시 비례대표 승계를 제한하는 규정이 위헌으로 판결되면서 곧바로 3석이 승계되었다.
2008년,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탈당 인사들의 복당을 불허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와의 회동을 거쳐 복당 불허 방침을 철회했다. 그 결과 지역구 의원 5명을 포함한 인사들이 모두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10]
2.4. 합당과 소멸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른 당에 있는 특정 개인의 이름을 딴 정당"이란 엽기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11] 새 당명을 시민공모하기로 했는데 이름들이 참 근사하당(...)[12] 오랜 논의 끝에 새로운 당명을 '미래희망연대'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미래희망연대로 개명 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단독후보를 꽤 많이 냈다. 하지만 정작 공식 선거전에 미래희망연대 소속 후보는 한 명도 없었다.[13]
2010년 서청원 당시 공동대표[14] 는 한나라당과의 조건 없는 합당을 제안하였다. 이에 지방선거를 준비하던 미래희망연대 의원들은 반발하였고 이규택 공동대표는 자유선진당에서 갈라져나온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러나 하루만에 일이 어찌저찌 잘 풀려서(…),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의결하였다. 2012년 2월 2일에 최종적으로 합당 절차가 마무리되었다.[15]
3. 평가
'''한국 정치의 보스 정치적 측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책과 이념으로 뭉친 정당이 아닌 유명 정치가가 이끄는 명망가 정당(名望家政黨, Honoratiorenpartei)의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선거를 앞두고 정당 명칭을 '친박연대'로 붙이며 노골적으로 '박근혜의 정치 친위대'임을 자처했다. 물론 박근혜는 이 정당에는 입당하지 않고 한나라당에 그대로 있었으나, 간접적으로 지지 의사를 일부 표명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3김[16] 이 세운 각 정당들처럼 암묵적으로 명망가 정치집단을 구성한 적은 있었어도 이처럼 대놓고 특정인의 이름을 붙이고 특정인의 사적 정치집단임을 자처한 정당은 없었다.
4. 역대 지도부
4.1. 당 대표
당의 명칭이 친박연대가 된 이후의 당 대표만 아래에 기재한다.
4.2. 원내지도부
4.2.1. 원내대표
- 노철래 (2008~2012)
5. 역대 선거 결과
6. 유사 당명
- 국가재건친박연합(약칭 친박연합):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추종을 표방했던 군소정당이며, 실제로 박정희의 조카인 박준홍이 대표로 있었다. 나중에 비리로 물러나면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지만. 원래는 고건 전 총리를 모시는 차원에서 한국의미래를준비하는당으로 창당했다가, 이후 선진한국당을 거쳐서 바꾼 것이다.
- 친반통일당: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을 지지한다며 창당된 군소정당. 반기문 본인은 연관성을 부인했다. 반기문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에는 국민희망당을 거쳐 경제애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가 이후 한국경제당으로 바뀌었다. 유사 정당으로 친반평화통일당[18] , 친반국민대통합[19] 등이 있었다.
- 개혁친허연대: 허경영을 지지하여 창당을 준비했던 조직. 공화당과 합당을 선언하며 소멸되었다가, 이후 국가혁명당으로 분리된다.
- 친박연대(2017년): 다만 이 정당은 상술한 친박연합에 더 가까운 정당이다. 실제로 위의 친박연합에 몸담았던 이용휘를 중심으로 창당하였다.
- 친박신당: 우리공화당 공동대표[20] 였던 홍문종이 내부 갈등으로 탈당한 뒤 창당한 정당.
- 그밖에 친박연대가 생겼을 당시 김무성[21] 을 비롯한 친박을 자처했던 인물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하였지만 친박연대에 가맹하지 않고 무소속 상태로 총선에 출마한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22]
7. 둘러보기
[1] 공고[2] 실제로 17대 대선에서 기호 7번으로 나왔다.[3] 2020년에 창당한 미래한국당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4] 다만 박근혜는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전에 잠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이라는 독자적인 당을 창당했다가 실패하면서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다시 한나라당에 복귀한 적이 있다. 이후 미래라는 이름이 이 당과 여기서 갈라진 미래연합, 그리고 박근혜 정부 당시 출범한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5] 2018년에 기록이 갱신될 때까지 무려 대한민국 최연소 박사(만 23세 5개월)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6] 대선에서 친이계가 승리하자 공천권도 친이계가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김덕룡, 서청원, 김무성 같은 YS 계열의 다선 의원들이 줄줄이 공천에서 잘렸다. 김덕룡은 결과를 승복했지만, 김무성과 서청원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7] 물론 완벽하게 관련이 없진 않았다. 대선후보 정근모는 문민정부 시기 과학장관이었고,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대선 직전에 이회창을 지지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물론 이 경우 자유선진당 이회창계와 더 유사해 보이지만.[8] 비례 대표 지지가 무려 13%. 자유선진당보다 많은 '''제3당'''이다. 지역구 6명 + 비례대표 8명. 이회창과 충청 민심을 마케팅 전략으로 삼은 자유선진당의 두 배의 비례대표가 나왔다. 비록 지역구 의원 숫자에서 자유선진당에 적지만.[9] 19대 총선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국민생각, 정통민주당 등 공천에 떨어진 인사들이 설립한 정당들은 의석수 배출은커녕 비례대표 득표율 2%도 달성하지 못하여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그나마 선전한 것으로 평가받는 통합진보당의 의석수가 13석인데, 민주당과의 연대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의 결과 또한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지역 기반이 있는 자유선진당도 겨우 5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친박연대의 의석수는 14석.[10] 나머지는 비례대표는 탈당하면 의원직이 상실되는 특성상 계속 잔류하였고, 미래희망연대가 한나라당과 통합하면서 들어온다.[11] 친박연대라는 이름은 총선을 앞두고 인지도를 일거에 높이는 극약 처방으로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욕은 많이 먹었지만... 그 후 친박연대라는 이름은 이미 그 역할을 충분히 했으니 해괴한 당명을 더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당명으로 변경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12] 또 새 당명 중에 자유공화당도 있는데 실제로 자유공화당이라는 당명으로 창당하였다.[13] 그래서인지 이 당과 이름이 비슷한 친박연합과 여기서 갈라진 미래연합이 반사 이익을 봤다. 물론 이 둘은 새누리당과 합당한 후 열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몰락했지만...[14] 참고로 당시 국회의원직은 상실한 상태였다.[15] 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을 발표하였다.[16] 김영삼: 통일민주당(단, 통일민주당 자체는 김대중, 김영삼이 함께 창당한 정당이나 후에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으로 따로 살림을 차려서 김영삼 파벌만 남은 것이긴 하다.), 김대중: 평화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자유민주연합[17] 1인 2표제가 도입된 후 20대 총선에서의 국민의당 등장 이전까지 거대 양당을 제외한 당 중 최대 득표율이었다.[18] 김호일 전 의원이 중심이 된 정당인데, 이쪽은 이전에도 신미래당과 국민의 힘(정당)으로 있었다가 총선에 득표율 미달로 해산된 바 있다.[19] 본래 이름은 국민행복당이었으며, 총선 이후 환원되었다가 국가부패척결당을 거쳐서 통일민주당으로 변경하였다.[20] 참고로 또다른 공동대표인 조원진은 친박연대에 소속으로 처음 당선되었다.[21] 나중에는 '탈박(脫朴)'하여 비박이 되고 결국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까지 참여하게 된다.[22] 실제로 여기에 해당되는 후보들이 벽보와 공보물 등에 이 문구를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