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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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당.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정치성향은 중도 개혁이었다. 대한민국 정당들을 좌우로 분류하면 딱 중간에 끼어버리는 정당을 지향했다.
요약하면 통일국민당-국민통합21의 뒤를 잇는 실패한 제3지대 정당. 시작은 제법 대단했지만, 끝은 '''너무나 참담했다.'''
2. 역사
2.1. 의석을 확보하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문국현의 깨끗하고 성실한 이미지가 장점이었지만, 사실상 문국현의 1인 정당이고 한국의 지역감정 정치 구도상 특정한 지역 기반이 없기 때문에 기반이 약했다. 대선이 임박하여 급조되었기 때문에 민주국민당(2000년) 수준으로 조직력도 좋지 못한 편이었다. 창당 직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정범구 전 의원과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김영춘 의원이 입당하였으나[4] , 문국현의 독선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면서 18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국현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거부하고 4위 5.8%(137만 5,498표)의 지지율을 얻은 후 득표력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문국현 후보 자녀들의 재산문제에 관해서 내로남불식의 태도를 보이면서 이미지가 상당히 실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국현 항목 참조.
대선 직후 치뤄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은평구(을) 지역구에서 친이계의 대표 주자 중 하나인 이재오를 상대로 문국현 대표가 승리를 거두면서 기사회생했다.[5] 게다가 3.8%의 정당득표를 하여 비례대표 의석도 2석 얻으면서 총 3석으로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유지했다. 이는 인터넷 상의 높은 지지에 비해 3% 달성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하며 원외정당이 된 진보신당과 비교되었다. 물론 그 외 11명의 지역구 출마자는 많아야 5%를 얻으며 낙선함으로서 문국현 1인에 의존한다는 점과, 전국적인 지지세와 인재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국내 최초로 이주민 국회의원[6] 이 '''나올 뻔'''한 당인데, 이럴려고 했다가 이렇게 되었다.[7] [8]
2.2. 교섭단체 선진과 창조의 모임과 문국현의 의원 상실
대선 직후 창조한국당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시할 수 없는 제3세력의 탄생 정도였으나,[9] 2008년 8월 명분 없는 자유선진당과의 연합으로 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교섭단체를 출범시킨 후, 이 당에 대한 평가는 자유선진당 주니어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혹자는 문국현의 정치적 자살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 국민일보 만평에서는 유한킴벌리의 광고 문구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빗대 '''"내 몸뚱이 푸르게~ 푸르게~"'''라면서 문국현을 카멜레온으로 그려 비꼰바 있다. # 후에도 소수정당인 정의당이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를 출범했지만 두 당은 세세히 들여다보면 달라도, 범진보라는 이념 기치 하의 공동교섭단체였으며 정의당이 상대적으로 세가 적었음에도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양경규 등의 영향과 진보정당 중 제일 큰 정당으로서 국회에서의 목소리와 국민적 지지도가 평화당보다 강했기 때문에 정의당 주도의 인식이 생겨 6석이었던 정의당이 14석 민주평화당으로 힘을 얻은 구도였다. 반면 선진과 창조의 모임은 국회에서의 목소리도, 의석수도, 국민적 지지도도 상대적으로 낮았던 창조한국당이 뭐 하나 얻는 것 없이 이념도 다른 보수정당 자유선진당에게 힘을 줘버리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이 당의 비례대표 1번 이용경 의원은 과거 참여정부시절 KT 사장으로 재직하며 인터넷 종량제 도입을 시도한 적이 있다. 비례대표 2번인 이한정 의원은 당내에서 당선 무효 소송을 건 상황이라[10] 참여하지 않았고, 그가 당선 무효 된 후 비례 3번 유원일 의원[11] 이 의원직을 승계해서 활동했으나 그 역시 교섭단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유원일 의원이 2012년 연초 자진 탈당하면서 선경식 당 대표가 비례대표를 승계하였다.
앞서 말했듯 자유선진당과의 연합으로 교섭단체 자격을 얻어,[12] 짝수년은 자유선진당 의원(권선택 의원 4개월)이, 홀수년은 창조한국당 의원(문국현 의원 7개월)이 교섭단체 대표로 활동할 예정이었다. 가까스로 20석으로 유지되다가 2009년 8월 심대평 의원의 자유선진당 탈당으로 교섭단체 요건을 상실했다.
더구나 문국현 대표 역시 공천헌금 사건으로 처벌받으면서 의원직을 상실하여 창조한국당은 사실상 사망 단계에 들어갔다. 야5당[13] 으로 뭉뚱그려져 취급받게 된 정도. [14]
2.3. 2010년의 대 몰락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고양시 일산서구에서 2등으로 당선된 고은정 씨를 제외한 '''모든 후보가 낙선'''했다. 다만 야권 단일 후보인 이태곤 후보가 부산광역시 영도구 구청장 선거에서 36%, 광역의원에서 정연규 후보가 대구광역시 달서구 갑에서 17% 표를 받은 것은 선전으로 쳐 주는 분위기. 여하간 낙선했으니 의미가 없다(...)
2010년 재보궐선거(7월)에서도 공성경이 문국현 전 대표의 지역구였던 은평 을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3당에게 단일화 제의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1% 초반 대의 득표율로 낙선. 물론 단일화한 장상 후보 측도 광탈했다.
이 와중에도 내분으로 자중지란에 빠져 있었으니 더 안습한 노릇(...) 문국현 의원직 상실 이후 힘을 잃었던 공성경 대표 당선자 등의 친문국현계의 당권파는 전당대회 전까지 비상대책위원장(대표)이었던 송영오와 최고위원이었던 김서진[15] 등 비 문국현 세력들을 대량 제명 조치했고, 이에 유원일 의원이 항의하며 사실상 무소속 독자행보를 벌였다. #
결국 당의 존립까지도 위태로워지면서 2011년 이후에는 아예 공기가 되 버린 상황이 되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무소속 박원순 후보를 중심으로 야권 연대가 이루어졌는데, 공성경 전 대표도 영상에 나온다. 큰 키로 센터에 섰지만 나왔다는 거고 결국 듣보잡... [16]
이렇게 되자 이용경, 유원일 의원 등은 2011년 말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등이 주축이 된 야권 중통합 정당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2월 17일에 통합 전당대회를 치룰 예정이라 창조한국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질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통합되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 반발한 탈당파는 민주통합당에 합류했다. 이것은 11월 전당대회가 이뤄지지 않고 친문국현 성향의 한면희 대표 체제가 이어졌기 때문으로, 이번엔 이용경 의원이 지도부 전원 사퇴를 주장했다. 이렇게 안드로메다... #
이 두 차례의 (사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내분은 창조한국당이 드디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문국현의 측근 사당으로 전락했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었다. 소속된 두 의원은 사실상 창조한국당과 관계가 없는 무소속 의원에 가까운 행보를 벌였고, 당권파 측은 사실상 국회의석 하나 없는 정당을 장악했다고 희희낙락했다. (물론 의원 수에 비례하여 정당 보조금은 나오지만...) 위처럼 야권 연대에 실속 없는 이름을 올리며 정치놀이나 하는 처지가 되었다(...) 2012년 초 유원일이 혁신과 통합(시민통합당)에 참여하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여, 선경식이 이를 승계하고 당 대표가 된 뒤 공성경 등의 일부 남은 인원과 함께 선거를 치렀다.
2.4. 정당 등록 취소
2012년 4월 1일, '''만우절'''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는 편지를 낭독하며, 해체 전 마지막으로 투혼을 불태우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똥을 묻히고 장렬히 산화한다(...) 일단 의석을 갖고 있긴 했기 때문에 100분 토론 등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사실상 병풍이나 다름없었다.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3명, 비례대표 4명의 후보를 등록하는 데 그쳤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모두 1명도 당선시키지 못하고 0.43%의 비례대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정당법에 의해 자동으로 해산 확정.
등록취소된 뒤 얼마되지 않은 4월 27일 선경식 전 대표가 뇌출혈로 급서했으며(향년 63세) 장례는 '''국회장'''으로 치러졌다.[17]
당의 아이덴티티였던 문국현이 정계를 은퇴해서인지 이후 다른 등록취소 된 당들과는 달리 재창당활동조차도 하지 않았다.[18] 다만 "안녕 창조한국당!" 정도로 홈페이지 끝마무리는 확실하게 했으며, 대다수의 당직자와 당원은 이후 민주통합당에 합류했다.
2.5. 번외 - 독립지역당이었던 제주창조당
창조한국당의 흥미로운 점은 2011년 한 해 짧게나마 제주도당 조직을 독립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이다.
창조한국당 제주도당은 중앙당 창당 직후인 2007년 11월 이규배 교수, 황석규 박사가 공동위원장을 맡아 탄생했다. 제주도당은 시작부터 다른 시도당보다 지지가 높았다. 문국현 후보는 17대 대선에서 제주도에서 득표율 7.78%를 확보했는데, 이는 16개 광역단체 중 가장 높고 전국 5.82%보다 2% 높은 득표였다. (18대 총선에서도 광역단체 최고인 비례 5.06% 득표.) 하지만 창조한국당 제주도당은 2008년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조차 내지 못했으며,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일절 후보를 내지 못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19]
그러나 그렇게 창조한국당 중앙당의 존재조차 희미해진 2011년 3월, 제주 정치의 3대 맹주인 신구범 전 지사가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반대를 위해 문국현 전 대표의 러브콜에 응해 창조한국당에 입당하며 상황이 뒤집힌다. "창조한국당 제주도당을 중앙당으로부터 독립된 사실상의 제주지역당으로 재창당한다는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제주창조당이라는 별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던 것. 국내 선거법상 최소 5개 지역당이 필요하여 개별 지역정당의 창당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작은 조직력이라도 필요했던 창조한국당 지도부와 간판으로 내걸 중앙정당이 필요했던 신구범 지사가 이해가 일치했던 것이다.
제주창조당은 2011년 한 해 동안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중단을 (온건하게) 촉구하는 걸 중심으로 당시 현직 우근민 지사 비판과 세계 7대 자연경관 투표의 허구성을 논박하는 등 신구범 전 지사의 여론 운동에 적극 나섰으나, 선거상의 유의미한 성과는 전혀 없었다.
애당초 신구범 전 지사가 2012년 총선에서 불출마를 다짐해왔을 뿐더러, 2011년 연말 송창권 도당위원장, 오운길 대의원대회 의장과 사무처장을 지낸 송용진 중앙위원 등이 탈당 후 혁신과 통합에 참여하여 당시 민주당 강창일 의원과 빅텐트 정당, 즉 다음 해의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맞붙는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물론 경선은 강창일 의원의 낙승.) 신구범 지사는 또 본인 나름 창조한국당 중앙당이 제주창조당을 위한 당헌·당규 개정을 미루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2011년 연말 당시 제주창조당 인원 자체가 1,300명으로, 최소 1,000명을 확보해야하는 시도당 인원을 간신히 넘긴 상태였다.
애초부터 답이 안 나왔다는 게 정평. 비록 창조한국당 제주도당이 중앙당의 지리멸렬 가운데서도 비교적 응집력이 있었지만, 애당초 신구범 지사 조직이 합세하지 않았다면 이미 도당 자체가 2011년 초에 존립이 어려웠을 상황이었다. 결국 제주창조당은 2012년 넘어가는 연말연시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2012년 총선에서 창조한국당의 제주도 비례대표 득표율은 전국 평균 0.43%와 크게 다르지 않은 0.48%, 1,130표였다. 즉, 제주창조당 명부에도 못 미친 숫자였다. (게다가 0.51%의 경기도에 밀려 광역단체 최다도 아니었다!)
그렇게 제주창조당 실험은 막을 내렸다.
한편, 신구범 지사는 이후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에 입당 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추대되어 원희룡에 맞서 낙선하더니,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며 자유한국당에 입당한 것을 거쳐 우리공화당으로 갔다. 애당초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서라면 도지사 집권당의 반대세력에 결합하는 불사조 저리가는(...) 정치노선을 보인 것이 이분의 진면목. 결국 제주창조당의 개혁적인 논평이나 지역 정당 추구의 대의조차 이분의 훗날 행보에 따라 재평가조차 어렵게 되었다.
3. 지도부
3.1. 당 대표
4. 둘러보기
[1] '사람 중심'이란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태극을 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했으며 '태양에서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습이자 씨앗을 상징하는 모습'의 시안이었다. # 로고 시안(카페 가입 필요)[2] 정당색은 C30 M100 Y100. 단, 개표방송 한정으로 분홍색을 쓰기도 하였다.[3] 해산 이후 문국현 전 대표가 참여하고 있는 '문지방 너머 삶의 경제 포럼' 홈페이지로 연결되었으나, 현재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4] 이 외에도 이계안 당시 의원이나 도종환 시인(현 문체부 장관)도 지지인사였다. 이후 김영춘과 도종환은 민주통합당에 입당하였다.[5]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서울의 대표적인 야권 성향 강북 서부권에서 (탄핵 등을 이겨내고) 지속적으로 재선한 이재오를 (뉴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무려 52.0%의 득표로 격침시킨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참패한 재보궐은 물론이고 19대 총선에서도 통합진보당 천호선 후보 (전 정의당 대표)가 아슬아슬하게 낙선하면서 문국현 후보 개인의 브랜드 파워는 역사에 남게 되었다(...)[6] 필리핀 출신의 결혼 이주여성이다.[7] 결국 최초의 이주민 국회의원은 4년 후 차기 총선에서 새누리당 소속의 이자스민이 당선되면서 나왔다.[8] 비슷한 예로 개혁국민정당 출신의 의원이 비례 순번이 5번이었으나 선경식 대표(의원)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잔여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정당 해산으로 승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9] 거대 양당과 경북이나 충청의 지역기반 일부 정당을 빼면 대선에서 출마 선언 4개월 만에 (사퇴 없이) 지지율 5%를 얻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노동당만 봐도...[10] 이한정의 선거 등록과정에서 전과가 누락되는 사태가 있었고 당시에는 비리로 형을 받아 퇴직하면 비례대표 승계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허위 경력 기재, 공천헌금 등의 혐의로 당선되자마자 구속기소된 상태였다.[11] 2015년 현재 이 양반은 론스타에서 녹봉을 받아 쳐잡수신 장화식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대표를 위해 '해고노동자 장화식을 위한 모임'을 결성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듯 하다(...) [12] 교섭단체 자격은 국회의원 20명을 넘겨야 주어진다. 자유선진당 18명+창조한국당 2명.[13] 의석 순서로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14] 사회당이 야6당으로 거론 된 경우도 있다. 대구의 경우가 대표적. 다만 후보는 내지 않았다. #[1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 18대 총선 당시 강북구에서 5%를 조금 넘는 득표로 문국현을 제외한 그나마 창조한국당 출마자 가운데는 관심을 받은 인물이다![16] 참고로 분당 직후 진보신당 비대위원장을 맡은 (전 민주노동당 대표) 김혜경 당시 대표도 작은 키에 한복을 입고 나오고, 노회찬, 심상정, 박영선, 이계안 등 각자 사연있는 분들이 다 나온다(...) 지금 다시보면 그야말로 갈라선 집안사람들끼리 선거 상황 상 웃으면서 노래 부르는 나름 섬뜩한 광고다. [17] 어쨌거나 사망 당시 현직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회의원으로 있었던 기간은 3개월 정도였고,(2012년 1월 26일~2012년 4월 27일) 그나마도 4월 17일에 쓰러진 데다,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19대 총선에 돌입했으므로, 실질적으로 국회의원 임기를 수행한 것은 한달 정도였다.[18] 같은 시기에 해산된 몇몇 등록취소된 당(녹색당, 진보신당, 청년당)들은 "국회의원 선거 득표일 2% 미만 해산"은 위헌이라고 청구하였고, 그 결과 2014년 초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그 결과 다음 총선부터 이런 일은 없게 되었다.[19] 이게 얼마나 눈물나는 일이냐면, 제주도의회 29개 선거구는 물론 비례 후보까지 단 1명도 내지 못했다는 거다. 또 제주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광역인 제주특별자치도 의회만 있을 뿐 기초의회가 없었다![20] 2012년 4월 12일 정당법에 의해 당이 해산되었고 당이 해산된 이후에는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남았으나, 당이 해산되고 15일 후인 2012년 4월 27일에 뇌출혈로 작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