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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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8년 4월 9일에 치러진 18대 총선으로 출범한 대한민국 국회.◯ 사무총장 김태랑: '''국회사무총장 김태랑입니다. 제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신 의원님들의 성공적인 의정활동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
제276회 국회(임시회) 제1차 국회본회의 회의록 첫 구절
1.1. 상세
1.1.1. 2008년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은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수치로 상대 후보를 누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 기세를 몰아 2008년 총선에서 여당인 한나라당은 153석을 차지하며 과반을 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한나라당 뿐 아니라 다른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 친박연대의 의석까지 다 합치면 185석, 범여권 무소속 의원의 숫자까지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뛰어넘는 202석으로 보수진영은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둔다. 반면 중도정당들을 이리저리 통합해 만든 민주진영의 통합민주당은 두 자리 수의 의석수를 기록하며 참패했고, 17대 대선후보 선출과정 등으로 진보진영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당되면서 결국 18대 총선에서 지지율이 분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진보진영 의석 수가 크게 줄어들며 세가 위축된다.
한편으로는 제3의 세력이 화제가 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보수진영의 또다른 주자로 정계로 복귀한 이회창의 자유선진당, 한나라당을 탈당한 친박들이 만든 친박연대, 기업인 문국현이 만든 중도진영의 새로운 주자 창조한국당의 등장 등 제3세력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허나 친박연대는 대부분의 인사들이 도로 한나라당으로 복귀했고, 창조한국당은 2009년에 문국현이 처벌을 받음에 따라 급격하게 몰락하면서[3] 잠깐 화제를 모았던 제3세력들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4]
1.1.2. 18대 국회 전반기
한편 총선에서 패했던 민주당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정세균 대표 체제에서 한미 FTA 졸속협상과 미디어법 반대, 세종시 수정안 반대 같은 의제를 선점하며 反 한나라당 흐름을 주도했다. 여기에 검찰의 과잉수사로 인해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기간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얼마 못 가서 김대중 전 대통령도 병세가 악화되어 서거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비극적인 일이긴 했지만 이는 한나라당에 실망했던 많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민주당으로 돌리게 했고, 민주당 지지율 회복과 세력규합으로 나타나게 된다.
원외정당인 진보신당도 이런 反MB 흐름에 동참했고, 이는 진보신당이 다시 원내로 돌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5]
한나라당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했지만 의석수가 압도적이었던 탓에 잘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성적표를 보면 2009년 한 해에만 4석을 잃으면서 이겼다고 보기엔 부족했지만, 그래도 친이계 중진인 박희태가 복귀했으니 그리 졌다고 보기엔 애매했다.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은 상황이 매우 나빴는데, 친박연대는 희대의 공천헌금 사건에 연루되어 서청원 대표와 양정례, 김노식 의원이 비례대표 의원직을 상실하는 사건이 터졌고, 창조한국당은 당 펀드 사건이 원인이 되어 문국현 대표가 의원직을 상실해서 식물정당이 되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창조한국당과 연대해서 원내교섭단체를 꾸린 자유선진당도 심대평 탈당과 문국현 의원직 상실이 겹치면서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잃었다.[6]
그렇게, 지지율이 떨어진 집권여당과 기세등등한 제1야당의 정면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방선거가 다가왔는데...
1.1.3. 2010년 지방선거
지방선거를 앞두고서 민주당 내의 유시민 의원과 친노세력 일부가 국민참여당 창당을 선언하며 탈당했고, 한화갑 前 대표와 구민주계 일부가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언하며 탈당했다.
당초 MB에 대한 심판론이 강하게 작용하기는 했지만 이명박의 지지율이 최악의 국면을 지나가며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던데다가 주요 지자체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었고 천안함 사건까지 터지며 지방선거는 보나마나 한나라당이 다시 이기겠지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선거막판에 견제론이 부상하면서[7]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당선자 수가 2006년 대비 절반 광역의원에서도 민주당에게 1당을 내준데다가 무엇보다도 창당이래로 한번도 내준적이 없던 경남지사와 강원지사를 민주당에게 내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민주당은 2006년 지선대비 광역단체장을 3명에서 7명으로 늘렸고,서울시장에서 패배했지만 구청장과 서울시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여소야대로 만든데다가 경남도지사에서도 김두관[8] , 강원도지사에서 이광재가 승리했고, 광역의원과 기초단제장도 두배 이상 늘리며 한나라당을 앞서는 선전을 거두었기 때문에 내실을 챙겼다는 평을 들었다. 민주노동당도 울산시장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일부 기초단체장과 상당수 지방의원을 야권연대로 가져가며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과 기초의원과 22명의 기초의원만을 건지는데 그쳐 별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고 국민참여당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하고 지방의원 선거에서도 5명의 광역의원과 24명의 기초의원만을 건지는데 그치며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유선진당은 대전시장은 이겼고,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의 수도 늘리기는 했지만 충남지사 선거에서 안희정에게 간발의 차이로 패배하면서 큰 내상을 입었다. 사실 그 늘렸다는것도 2006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중심당이 광역단체장 1명을 내지 못할 정도로 망하는 바람에 그런것이고 충청권을 석권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충격이 클수밖에 없다.
1.1.4. 18대 국회 후반기
이어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의 압승을 토대로 의석을 대폭 늘릴것이라고 기대되고 있었으나 장상 공천논란으로 예상보다 투표율이 낮게 나오면서 한나라당은 '''이재오''' 前 의원이 원내로 되돌아온 것을 비롯하여 민주당 지역구 여러 곳을 빼앗아오며 승리했고,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사퇴하고 만다.
자유선진당은 박상돈 前 의원 지역구인 천안시 을도 빼앗기면서 폭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재보궐선거에서 창조한국당도 문국현 전 대표의 지역구를 사수하지 못하며 같이 망했다.
재보궐선거 이후에도 민주당은 손학규 체제에서 대여투쟁을 하는 한편 4.27 재보선에서 강원도지사와 분당을 선거구에서 승리했고, 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투표에서 패배하고 박원순이 무난히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기대감을 높였지만 막상 의석수가 한참 모자라서 그렇게도 반대하던 미디어법과 한미 FTA가 모두 통과되었고, 여기에 고질적인 계파갈등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후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이 각각 2012년 4월과 2012년 12월에 열리게 되자, 민주당은 한국노총 + 시민통합당 + 자유선진당 복당파와의 통합을 이루면서 민주통합당으로 재편되었고,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이루면서 통합진보당으로 재편되었다.
한편 한나라당도 미디어법과 한미FTA를 날치기로 통과시키긴 했지만, 다수당의 횡포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상황이 나쁜 것은 똑같아서 2011년부터 재보궐선거는 줄줄이 패했다. 게다가 안상수 대표의 '보온병 포탄' 실언이나 차명진 의원의 '황제의 식사' 같은 말실수들이 터지면서 민심을 잃었다.
2011년말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투표 무산을 이유 자진사퇴하는 일이 터졌는데다가 설상가상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패했다. 게다가 2008년 전당대회에서의 돈봉투 논란과 최구식 비서관의 선관위 디도스 사건 등이 터졌고, 결국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등판하면서 새누리당으로 재편되었다. 동시에 친박연대를 완전히 흡수했다.
이후 민주통합당은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이뤘지만 통합진보당에서 사건사고가 터졌고, 게다가 노원구 갑에 출마한 김용민 후보가 위안부 폄하 발언을 한 것이 드러났으며, 게다가 공천탈락자들이 무소속으로 나오거나 정통민주당을 창당해서 출마하는 바람에 손해를 보게 되었다.
새누리당도 이윤성, 유정현, 진성호, 강승규 등의 친이계들이 공천탈락에 반발해서 무소속으로 나왔고, 박계동, 전여옥은 아예 국민생각이라는 신당을 차려서 나오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
양당구도가 더욱 고착화된데다가 자유선진당은 내분과 공천참사로 인해 자멸하면서 5석에 그쳤으며, 창조한국당은 해산되는 수순을 밟았다. 결과적으로 19대 총선은 가까스로 여당(새누리당)이 과반을 차지했고, 19대 국회로 넘어가게 된다.
2. 국회의원
3. 원구성
3.1. 의장단
3.2. 상임위원회 / 상설특별위원회
3.3. 교섭단체
4. 주요 활동
아래에 열거한 법률은 †로 표시한 것 외에는 이 문서 최종수정일 현재에도 시행 중인 법률(후에 개정된 것 포함, 폐지제정된 것 제외)이다.
- 2008년
- 6월 5일: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경력단절여성법) 제정.
- 12월 31일: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행정기관위원회법) 제정.
- 2009년
- 6월 9일: 산림보호법 제정.
- 2010년
- 3월 31일: 지방세 기본법, 지방세특례제한법 제정.
- 4월 15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역세권의 개발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제정.
- 6월 10일: 동산ㆍ채권 등의 담보에 관한 법률(동산채권담보법)제정.
- 2011년
- 1월 4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국제과학벨트법) 제정.
- 3월 8일: 119구조ㆍ구급에 관한 법률(119법) 제정.
- 11월 17일: 예술인 복지법 제정.
5. 관련 문서
[1] 지역구 245석, 비례대표 54석[2] 임기 종료시 기준[3] 웃긴 것은 비례대표 의석 2개밖에 없었던 이 정당을 가지고 당 내에서는 친문계와 비문계(당연하지만 문재인의 친문이 아닌 문국현의 친문이다.)가 서로 싸우기만 했다는 것. 결국 그나마 남은 비례대표 의원들은 모두 민주통합당으로 들어갔다.[4] 그나마 제3세력중에서 자유선진당이 오래 버티긴 했지만,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연달아 패하는 지경에 왔고, 충청권 세력(심대평)과 이회창 세력이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고, 민주당 출신 세력들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결국 다음 19대 총선에서 망하고 만다.[5] 2009년에 조승수 前 의원이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원내정당이 되었다.[6] 그래도 후반기 상임위 배정에서 여야합의를 거치면서 보건복지위를 할당받기는 했다.[7] 실제 선거 막판에 이러한 여론조사가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정치권에서 야권이 한나라당과 접전을 벌이는 여론조사가 많이 나돌았다고 한다.[8] 다만 김두관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