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어
연변TV의 예능 프로그램인 이밤은 즐거워(2014년 8월 23일자) 영상. 얼핏 보면 한국에서 초창기 tvN을 보는 것처럼 조악하게 제작된 프로그램으로 보이나, '''엄연히 중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이다.'''
1. 개요
중국의 재중동포와 한국계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국어의 방언. 북한의 문화어와 문법이 비슷한데, 이는 당시 중국과 대한민국 간 교류가 없어서 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가 중국 조선어의 표준을 문화어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출신지가 다양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사투리가 섞여있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과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에서는 동북 방언이 사용되는데 이는 해당 지역이 함경도와 가깝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랴오닝성에서는 평안도의 서북 방언이 많이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마을 단위로 올라온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에 의해 충청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도 사용된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말투가 다른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중국과 한국의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이 많아지고 또 중국에서 한국으로 진출 혹은 이주하는 재중동포들이 늘어나면서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했다. 일부 재중동포가 사용하는 말이 한국 표준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고, 한국어와 중국 조선어를 2개국어처럼 사용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단파라디오가 있다면 오후에 주파수 5975, 9785kHz로 맞추면 중앙인민방송 조선어 방송이 나오는데, 그 방송의 억양이 딱 연변 억양이다.
2.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지린성에 옌볜 조선족 자치주가 설치되었고, 저우언라이의 "중국의 조선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문화어를 표준어로 한다"는 조치로 북한의 문화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자체적인 어문기관이 없는 것은 아니고 한국의 국립국어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조선어 사정 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맞춤법을 규정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실생활에서 잘 안 지켜진다.(...) 지역별로도 말투가 다르거니와 지상파 방송에서 나오는 말과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이 다른데, 문화어와 남한어를 적당히 섞은 것 같은 게 지상파 특징이라면, 생활에서는 슴다체를 많이 쓴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문헌자료들과 문화유산들이 사라졌는데 연변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서 주덕해 연변자치주 주장이 실각되어[1] 후베이성으로 끌려갔던 판이라 당연히 많은 조선어 서적과 사진, 문화자료들도 대거 소실되거나 사라졌다. 당시 조선어로 된 책들 중 마오주의와 관련이 없거나, 한복 사진이 나오거나, 한글로 적은 편지가 나오기만 해도 조선 특무(간첩), 남조선 특무, 지방민족주의자로 몰려서 처벌받거나 조리돌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2]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는 이전에 사라졌던 책들이 다시 발간되는 등 조선어 서적의 발행량이 크게 늘기도 했다. 한편으로 북한의 경제가 막장이 되어 가고,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남한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3. 문법과 어휘
기본 정서법 및 맞춤법은 문화어에 기반을 두었다. 두음법칙과 사이시옷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띄어쓰기도 문화어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사뭇 다르다. 중국 내 조선어 교과서나 출판물은 아직 문화어를 지키고 있으나, 한국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일부 조선족 사이에서는 두음법칙을 사용하고 한국식 띄어쓰기로 하거나 한다(카카오톡 대화 등에서 잘 드러난다). 말과 글이 서로 다른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구두에서는 중국어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전화를 걸다'를 중국어 打电话에서 유래된 '전화를 치다'하는 형태로 쓴다. 또한 조선족자치주라고 해도 한족의 비율이 높고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어를 모르면 안 되기에 평소 언어 사용에 상당량의 중국어를 섞어 사용한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Anyway, 지난번에 XXX......" "오늘 정말 Nice to meet you입니다" 하는 식으로 외래어가 아닌 아예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사용하는 것처럼 연변 조선어도 "我(워, 나) 昨天(쭤톈, 어제) 밥먹었어." 나 "너 오늘 언제 上班(상빤, 출근) 하니?" 이런 식으로 섞어 사용한다. 특히 전화번호를 말해줄 때에는 절대 138-04XX-XXXX를 '일삼팔 공사XX XXXX'라고 말하지 않고 무조건 중국어로 幺三八 零四XX XXXX 이런 식으로 말한다. 긴 시간 동안 동화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3] 연변에 간 한국인들이 연변 말을 알아듣기 힘든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어를 섞어 사용하는 부분만 아니라면 억양이 다르긴 해도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고 문어에서는 중국어 일반 명사를 한국 한자음으로 옮긴 단어가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준어에서 '출처'라는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래원'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건 '출처'를 뜻하는 중국어 단어 来源을 한국 한자음으로 옮긴 단어이다.
일본어도 예외가 아니라서 곳곳에서 일본어의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주를 했다고 했지만 얼마 안 지나 일본이 만주를 침공했고 똑같이 일본어만 사용할 것을 명했기 때문. 몇 가지 예를 들자면
- 컵→コップ 또는 カップ→고뿌
- 접시→皿(さら)→사라
- 물통, 버킷→バケツ→바게쓰
하지만 1990년대부터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특히 연변 쪽 조선어 TV와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의 발음과 표현이 상당히 한국화됐다. 중국 조선족들도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된데다가 한국에 많이 취업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 표준어를 접하게 되어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조선문 책의 발행량도 수익성 문제로 적어지는 바람에 한국서적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족들이 중국의 대도시나 한국, 일본, 미국 등지로도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도 한국 방송을 접하다 보니 점차적으로 한국식 발음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한국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다. 음악은 중국음악보다 한국음악을 더 많이 듣고, TV로도 중국 채널이 아니라 위성방송을 통해 한국 채널을 시청하고, 서적도 이젠 거의 한국 서적만 이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근처의 만화책, 소설책을 대여해주는 가게에 가보면 온통 한국만화와 소설들로 꽉 차있다.[5] 중국어로 된 서적은 그냥 무협소설 조금 정도가 전부다.
한국과 교류가 잦아진 것은 조선족들의 의식 변화도 한몫한다. 사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연변에서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이 한국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욕을 많이 해댔다. 왜 조선어를 놔두고 한국어를 쓰냐고. 하지만 이젠 조선족들이 상당수가 중국 대도시와 외국으로 빠져나가거나, 현지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한국 TV나 서적의 영향을 받아 한국어를 점점 많이 사용하는 추세이다. 다만 한국어 구사에 대한 배척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예전과는 다르게 한국어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중국에 돌아갔음에도 한국어 말투를 고치지 않을 경우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저렇게 핀잔을 주는 사람도 정작 문자를 하면 한국식 문법을 사용할 때가 있는데, 이는 현재 한국 표준어가 조선어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북한도 마찬가지라서 몰래몰래 한국 TV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말투에 은연중 남한식 표현이 묻어나온다.
중국조선어에서 지명, 인명 등 고유명사의 표기는 동북3성조선어문협의영도소조판공실 산하 중국조선어문사정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중국조선어의 표기에 대한 모든 것을 관장하는데, 전반적으로 한자 기반의 인명이나 지명은 한국 한자음으로 읽지만(호금도, 습근평, 북경, 연길 등) 한자 이외의 언어가 기반인 경우에는 해당 언어의 음을 살리는 편이다. 이 때문에 만주어 단어에서 나온 훈춘은 한자음대로 혼춘이라 하지 않고 훈춘이라고 하며, 하얼빈은 할빈, 내몽골의 우란하오터는 울란호트, 연길시내를 흐르는 부얼하퉁강은 부르하통강이라고 한다. 이게 극단적으로 크로스오버된 사례가 용정시의 개산툰진으로, 조선식 지명인 개산+만주어로 섬을 뜻하는 tun이 합쳐져 한만혼성의 기묘한 지명이 탄생했다.
4. 한국 표준어와의 비교
5. 관련 문서
[1] 1930년대부터 공산당원이었고 연변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이 공적들이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다 소용이 없었다. 주덕해 주장은 후베이성에서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다가 폐암에 걸려서 1972년 우한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2] 출처: 연변 문화대혁명, 10년의 약속.[3] 참고로 중국어로 1은 보통 一(yī)로 알려져 있지만 숫자를 셀 때에 幺(yāo)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한다. 사실 이는 군사 용어로, 중국인 사이에서도 방언이 너무 심해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들 지경이라 오해가 생기지 않게 1, 2, 7, 9, 0만은 고쳐 발음한다(1 yāo, 2 liǎng, 7 guǎi, 9 gōu, 0 dòng). 다만 전화번호 외의 숫자는 그냥 조선식으로 말한다. 대신 문화어의 영향으로 세자리수 이상의 경우 중간에 있는 0을 그대로 읽어버린다. 예를 들면 501을 한국식 표준에서는 '오백일'이라 읽지만 여기서는 문화어와 같이 '오백공일'로 읽는다.[4]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지만, 정화운동을 강력하게 펼친 결과 중장년층 이하로는 거의 사라졌다. [5] 심지어 발매일조차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나온 신간 만화책이 약 3~5일 정도면 연변의 만화책방에 다 깔린다.